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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안희정 판결/ 장애인 이동권/ 난민과 교차성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8. 30.

전지윤

미투를 정면 거부한 안희정 무죄 판결

 

미투? 위드유? 웃기고 있네. 엿이나 먹어라.’ 안희정 판결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김지은 씨가 만약 미투 고발을 안하고 법적 해결에 기대했다면 어쩔뻔했나 오싹하다. “내가 바로 증거이고 내 기억이 증거라고 했던 김지은 씨 첫방송이 기억나는데, 법원은 그걸 다 뭉개고 통조림 속의 음식처럼 갇혀 죽어있는 기분”(김지은 최후진술)을 강요했다. 법적 판결이 성폭력의 최고기준인 것처럼 여기는 분들도 좀 돌아보면 좋겠다


여전한 가해자중심의 사회와 2차피해의 홍수 속에서 피해자 관점은 너무나 부족하다. 위력이 작동 안했다고? 젠더 위계라는 기본 위력, 유력정치인과 수행비서라는 계급 위력까지 겹쳐졌는데 뭔 소리인가. 같은 혜화역 집회 다녀와 비슷한 말을 해도 정현백이 김부겸보다 수십배 더 까이는 걸 보고도 젠더 위계를 부정할텐가.


이 기울어진 가부장 사회에서 위력은 예외가 아니라 기본이다. ‘그루밍에 빠져 해리 증세를 보이는 자신감낮은 아동, 장애, 저학벌, 우울증여성만이 갑작스런 성적접근에 공황 상태에서 거절, 저항 못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보통 여성들이, 상대 남성이 상사나 선배가 아니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일제 식민통치라는 사회적 위력이 있었기에 개별 위안부 모집동원에 총칼이 굳이 필요치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

더구나 상대방에 대한 신뢰, 존경, 호감이 있었다면 더더욱 아노미에 빠진다. ‘4번이나 다 억지이겠냐? 미국에서 조사 결과 피해자의 절반 가량은 가해자와 다시 성관계를 가졌다. 수많은 피해자가 성폭력 이후에도 가해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곤 한다.


조병구 판사는 권리가 개인의 능력과 선택에 따라온다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이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약하고 불쌍하고 만만한 피해자'보호'해주겠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순두부 한번 사주면 나하고 자고 싶은건가헛물켜는 한남 선배같은 의식 수준도 적나라하다.


물론 이것은 남성중심적인 한국 사회와 공동체가 무엇을 허용하고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여자들은 다 나와 자고 싶어한다고 믿는 확신범 안희정도, 그런 한남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재판부도 공동체의 규범과 문화가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 폭행, 협박, 저항, 거부, 물증도 없는데 무슨 성폭력이냐란 이 판결이 작년에 나왔다면 역시나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투의 거대한 파도가 한국사회를 들썩이게 만든 후에 판결이 나왔기에 더 놀라고 열받게 된다.


이젠 일일드라마에서도 남자주인공이 키스해도 될까요라고 먼저 물어보는데, 동의는 없었지만 성폭력이 아니라고? ‘분위기 깨지게 어떻게 일일이 동의를 확인하냐. 여자들도 그런 남자 안 좋아한다는 한남들의 변호사인줄.


당연히 동의가 핵심이고, 동의를 구했다는 입증 책임도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피해자의 진술을 신뢰하고 증거로 인정해야 한다. 피해자의 과거, 평판, 행실, 신상을 퍼나르며 2차피해를 주지못하게 막아야 한다. 나아가 동의마저, ‘충분한 판단 능력을 가진 상태에서 압력이나 속임수없이 명확하게 이뤄졌고 철회된 적이 없는지확인돼야 한다.


이런 새로운 표준의 규범화를 경찰이, 사법부가, 정치권이, 정부가 가로막고 있다. 인권과 정의를 말하는 저들의 진술 신빙성 없음과 진술과 행동의 불일치는 매우 심각하다. 이들 때문에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공소시효도 지나서 법에 호소할 기회조차 없고, 가해자가 유명인도 아니어서 주변의 관심과 지지도 얻지 못하는... 이들이 더 이상 침묵을 거부하며 둑이 터져나왔던 것이고, 그것은 조병구 손으로 막을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아니다. 이들은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지난해 스페인에서는 피해자가 성관계에 순응했고, 직후에 웃으면서 사진도 찍었다며 성폭행이 아니란 판결이 나왔다.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왔고, 올해 국제여성의날에는 노동, 소비, 돌봄을 거부하는 500만 총파업까지 벌어졌다. 결국 정부가 나서서 예스가 없었으면 강간법안을 만들었다. ‘미투 이후는 이런 것이다.

 

#사법부가_유죄 #경찰은_편파수사

#안희정_감옥으로 #위력에_의한_성폭력 #피해자는_일상으로

 

 

음란물 유포를 이유로 여초사이트를 공격한 경찰

 

솔직히 유좆무죄, 무좆유죄처럼 생생하며 핵심을 잘 포착한, 귀에 쏙 들어오는 단순명료한 구호는 참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경찰이 앞장서 그 구호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니 좀 어리둥절하다. ‘음란물 유포자들을 수수방관하던 음란물 방조경찰이 음란물을 내세워 워마드를 공격하는 기괴한 상황. 모두 느끼듯 지금의 공격은 단지 워마드 운영자가 아니라, 땡볕 아래 성차별 성폭력에 항의했던 수많은 여성들을 겨누고 있다.

 

하지만 저들은 거리로 나섰던 7만 뒤에는, 수십 수백만의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놓쳤다. 집회 갔다온 동지에게 들으니, 계속 벅차오르고, 왠지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나고, 여기저기서 우는 이들이 보이는, 더위를 느낄 틈도 없던 집회라 했다.

 

사진을 보니 옳게도 우리는 혁명가들이다, 국제적 혁명의 일부다등의 팻말들이 보였다. 물론 성별이분법에 따라 집회 참가의 자격을 나눈 점은 큰 아쉬움이다. 우리 모두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 아래 살고있는 당사자인데 말이다.

 

하지만 노동자 투쟁 등 대부분의 투쟁들이 처음부터 명료한 인식과 방향을 갖추고 출발하지 않으니 여기서만 엄격할 생각은 없다.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결국 길을 찾아낼 것이라 믿는다. 워마드 등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을 것도 그들 스스로이지, 경찰 오빠들도, 남초사이트 애용 오빠들일 수도 없다.

 

성폭력 피해자와 그 주변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 <아주 특별한 용기>를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폭력과 차별에 고통받던 생존자들이 정당한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고, 그것은 거대한 치유 과정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말을 믿지 않고, 듣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공격하기 바쁘던 사람들은 똑바로 봐야 한다. 지금 거리로 나서 소리치고 싸우는 여성들은 더 이상 주저앉아 울고있던 희생자들이 아니다. 가부장 사회와 국가에 대한 강력한 위협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여성들을 잃었다... 우리는 더 이상 잃을 수 없다. 우리는 당신을 잃을 수 없다. 당신은 살 가치가 충분히 있다... 죽고싶을 만큼 기분이 나쁜 것은 당신 내부에 그만한 분노가 있다는 말이다. 그 분노는 당신에게 그토록 극심한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에게 향하도록 재조정되었어야 했다...

 

분노는 강력하면서도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힘이다... 분노는 침해받은 것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며 강렬한 치유의 에너지다. 분노의 시위를 당신에게 가해했던 자들에게로 정확하고 적절하게 겨눈다면 분노는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혼자서 짊어지고 왔던 고통을 나누고 고립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중요한 일부이다.”(<아주 특별한 용기 -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영혼의 치유>)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지하철 타기

 

814일 서울장차연이 진행한 지하철 타기에 함께하면서 안희정 재판 결과에 구겨지고 꺼져가던 용기와 희망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지하철과 대중교통을 멈추게 한 장애인 동지들의 '파업', 그것도 3차 파업이었다. 이제 지하철노조도 여론과 비난이 부담스러워 쉽게 하지 못하는 파업이 장애인 동지들의 힘으로 부활한 셈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지하철 안에서 수십대의 휄체어가 행진하는 과정에서 좌석에 앉아있던 한 할머니가 한명한명 장애인 동지들과 눈을 맞추며 수고많으세요라고 인사하던 장면이다. 물론 여전히 화내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덧붙이기를 당신들이 어렵고 힘든 건 나도 알지만, 이런 방식은 틀렸고 당신들에게 도움이 안된다.’ 소수자가 약한 모습으로 도움을 호소할 때 동정을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소수자가 투사로 일어서 거친 목소리를 내며 기존 질서와 일상에 도전할 때 사람들은 불편함을 드러낸다.

 

미투에 나섰던 여성들이 부딪히는 벽도 비슷한 것 같다.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에 의해서, 그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세상을 그대로 둔채 일부 희생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은 가능하다. 약자를 걱정하고 보살피는 정의감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세상 자체를 뒤바꾸는 것은, 그래서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이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과 특권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안될 일이 된다. ‘불편한 용기가 된다. 내가 도와줄 사람을 향하던 상냥하게 웃던 얼굴은, 내가 받아들여온 질서를 위협하는 사람을 향한 성난 얼굴이 돼 버린다.

 

장애인 동지들과 같이 모임을 하고, 뒤풀이를 하고, 귀가를 할때마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이 동지들을 철저히 제외하고 배재한 채 만들어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폭염 속 박원순 시장의 옥탑방 체험을 단지 쇼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옥탑방에 앉아서도 장애인 동지들의 말을 계속 못듣는다면, ‘보다 더한 표현도 끄덕이게 될 거 같다.

 

난민 문제와 페미니즘, 상호교차성

 

지난 84<난민 문제와 페미니즘, 상호교차성> 토론회는 참 유익하고 좋았다. 난민인권센터 김연주 선생님은 한국사회와 난민에 대해 핵심적인 사실들과 생생한 현실을 잘 설명해주셨다. 난민들이 겪고 있는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대우와 기막힌 상황 등을 잘 알 수 있었다. 윤미래 동지도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다수자, 정주 시민권자의 관점이 비가시화하고 배제했던 것이 무엇인지 풍부하게 설명해주었다.

 

마지막에 보여 준 아래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페미니즘이 인종차별과 성소수자 혐오에 맞서고 계급착취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라는 물음이다. 예멘 여성들의 지워진 목소리를 봐야 한다는 지적도 했는데, 이것은 김연주 선생님이 발제 마지막에 인용해주신 아래의 예멘 여성의 글과도 연결됐다.

 

이 나라의 여성들이 지금 거리로 나서 역겨운 관습과 전통에 맞서고 있고, 그것은 지금 역사를 바꾸고 있는 국제적 여성운동의 일부이듯이, 예멘 여성들도 마찬가지이고, 그들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아마 예멘이나 기타 아랍국가의 여성이 열악한 상황에 처한 이유가 모두 이슬람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예멘에서 싸워야 할 적은 이슬람이 아니라, 최근 몇십년 동안 점점 발전해서 영역을 확대해 온 <관습과 전통>이라는 종교입니다. 물론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싸움에서 내가 승리를 거두기 힘들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내게 더 중요한 건 세계가 아니라 나의 눈과 사고방식을 통해 사물을 보도록 요구한 이들의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나의 흔적을 남겼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한 마디 남깁니다. 나를 알려면 우선 눈을 감고 - 내 생각에 - 남성/여성의 구분이 없는 내 영혼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내게도 바라면 됩니다.

 

저들이 아무리 나의 존재를 헐뜯으려고 해도, 나는 앞으로도 고개를 들고 거침없이 세상을 헤쳐 나가도록 가르쳐 주신 어머니의 딸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어떤 관습이나 전통보다도 더 높게 울려 퍼지는 생각을 지닌 이 세상의 모든 여성들로 살아갈 것입니다.”(<인티사르의 자동차 - 현대 예멘 여성의 초상화>) 



 

정신장애인에 대한 낙인과 편견

 

정말 유익한 글이다.

https://www.independent.co.uk/voices/border-personality-disorder-taming-the-beast-within-peter-tyrer-stephen-fry-sexism-mental-health-a8387256.html?amp&__twitter_impression=true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실 기쁨과 행복보다는 고통과 상처, 억압과 차별이 더 넘치는 곳이다. 보통 그것에 무덤덤해지며 적당히 기존 규범과 질서에 순응,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진다. 그것을 하나하나 문제삼고 비명지르고 시끄럽게 따지는 사람은 비정상이 된다. 그들에게는 보통 정신병자관종이니 원래 좀 이상한 사람이니, 가까이 해서는 안될 사람이니 같은 딱지가 주어진다.

 

그러면 책임은 고통과 상처를 준 사회나 집단에게서, 피해자에게로 돌아간다. 피해자를 외면하고 거리두고 등을 돌리는 것은 정당화되기 시작한다. 작년에 본 영화 <로즈>가 생각난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로즈는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대로 사랑을 선택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따르는 질서에서 벗어났고, 로즈를 탐하던 신부는 그녀를 성욕과잉증으로 몰아서 정신병원에 가둔다. 그리고 시간은 무려 50년이 흐른다.

 

나의 내면에는 정신건강 전문가에 의해 길들여지기를 기다리는 야수가 자리 잡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책임하며 고통스럽고, 낙인화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로 진단된 사람들의 75% 여성이다. 이는 감정을 적당하게 표출해야하는 것과 관련된 사회적 규범을 충족시키는데 실패한 여성들(너무 격정적이거나 너무 화가 난 여성들)에게 종종 주어지는 꼬리표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규범은 여성들을 트라우마로부터 보호하지 못했고, 여성들이 그 트라우마에 대해 외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여성들에게 이러한 트라우마는 성적 학대, 가정폭력이다.

내가 받은 진단은 자살시도가 일어났을 때 외면에 대한 구실로서 사용되었다. 위기개입팀의 매니저는 ‘BPD’를 가진 사람들이 서비스에 접근하기 위해 자살시도를 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이는 오래된 모욕인 관심 끌기교묘한 조작의 반복이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이 외치는 것은 그들이 길들여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외침을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길 원한다.”

 

노동자연대는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노동자연대의 괴롭힘 중단,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이 연서명을 지지하고 함께 돕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잡아준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났다. 그 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https://goo.gl/forms/SyBTh7rMfzizX15Z2)

 

또 피해자 동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면서 얼마나 또 큰 용기를 내는지, 지지와 연대에 큰 힘을 얻는지 지켜봤다. 그런 피해자를 위해, 왜 더 힘을 내고 더 치열하지 못했던가 후회도 되고 너무 미안하기도 하다.

 

내 부족함 탓에 더 많은 분들에게 피해자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못하고, 고립감을 없애주지는 못한 듯싶어 더욱 그렇다. 사실, 며칠 전 ‘PD수첩을 보면서 좀 아득했다. 미투가 만들어낸 변화만큼이나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져 솔직히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용기를 냈지만 변한 것은 거의 없고 여전히 무관심과 고립과 절망 속에 공소시효, , 증거의 논리에 허우적대는 피해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먹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귀에 어떤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을지 알 거 같았다.

 

거봐.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아. 너의 말뿐이고, 상대방은 아니라고 하는데, 증거도 남아있지 않은데, 누가 부담까지 나눠지면서 너같은 사람의 손을 잡아주겠어. 괜히 너만 나서서 다친다고 했잖아. 옆에 있던 친구들도 등을 돌리고 멀어지고 있잖아. 그냥 가만 있었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김기덕과 조재현이 괴물처럼 느껴진 것이 사실이지만, 누가 그들의 적반하장과 반격을 가능하게 만든 것일까.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이번에는 꼭 기다리던 답을 해오길 기대하지만, 쉽지 않아보이는 게 사실이다. 지금도 노연에 복수심을 가진 개인들과 노연의 좌파적 입장이 싫었던 세력들의 중상비방이 이 사태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다닌다니... 만약, 이번에도 반성과 사과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에 뼈아플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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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단체와 개인이 연서명해서 성폭력 피해자를 괴롭히지 말고 사과하라는 요구를 전달한 바로 즉시,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그것을 정면 거부하면서 피해자와 지지자들을 거듭 인신공격하는 글을 발표했다. 반성과 사과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이다.(https://workerssolidarity.org/p/23274)

 

이런 매정하고 잔인한 글을 피해자 지지모임 페이지와 내 페북에 댓글로 계속 올렸다. 아무리 지워도 다른 회원을 시켜 또 달았다. 노연 회원이지만, 피해자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을 거라 기대해 페친 정리않고 지냈던 분들이 본심을 드러내며 댓글을 달았기에 더욱 마음이 쓰렸다. 내 페북을 감시해 왔던 것일까. 어차피 항상 공개된 타임라인인데...

 

계속 지울 수는 없는 일이라, 그냥 내가 올리니 이제 그만해주시길. 이런 글을 올리는 게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보는게 정말 이해 안 간다. 피해 호소를 중상모략이라고 하고, 피해자와 지지자들을 버젓이 인신공격하면서 우리는 2차피해를 준 적이 없다고 하는게 모순임을 모르는가. 어떠한 성찰도 불가능해진 모습을 스스로 확인해주고 싶은가.

 

이번 글도 논리는 똑같다. '복수심을 품은 전지윤이 노연을 공격하기 위해 중상모략하는 것이고, 피해자는 거기에 이용되는 꽃뱀이며, 도와주는 사람들은 문재인 지지 입장 때문에 그런다.' 미투가 정치적 음모라는 김어준과 판박이인데 더 기상천외할 뿐이다. 이런 논리가 피해자와 지지자들에게 얼마나 큰 모욕이고 상처가 되는지 조금도 모르는가.

 

피해자를 직접 공격하기 눈치보이고 부담스러우니, 이제 나에 대한 공격은 거칠 것이 없다. 아예 글 앞부분이 전지윤의 과거와 도덕적 결함이 문제이니 인신공격이 불가피하다고 시작된다. 그러면서 가해지목인 중에 하나가 바로 전지윤 분파의 일원이었다고 공격한다. 그는 노연 회원이었고, 내가 종북몰이에 대한 이견으로 징계받고 논쟁하다 쫓겨날 때 같이 나왔다. 그리고 내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소송을 취하하고 사과하자고 제안하자 우리 모임에서도 나갔던 것이다.

 

전지윤은 피해자를 공격하는 소송을 지지해놓고 180도 태도를 바꿨다고 비난한다. 나는 2013년까지 노연 지도부중에 한명이었고, 노연 지도부가 소송을 적극 지지했으니 나도 그랬다는게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소송 취하를 주장하며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노연에게 같이 사과하자고 제안했다. 그럼 내가 태도를 180도 바꾸지 말고 피해자를 계속 공격하자고 주장했어야 하는가? 태도를 바꾸지 않고 사과를 거부하는 노연 지도부가 옳은 것인가?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2012년 당시에 노연 지도부가 어떻게 피해자를 공격하고 소송을 결정했는지, 당시에 누가 가장 적극적 구실을 했는지, 뭐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정당화했는지, 뒤풀이에서 이건 좀 아닌거 같다고 했다가 누가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질책했는지, 그때 내가 얼마나 비겁하게 입을 닫아버렸는지.

 

더 이상 그럴 순 없다는 결심에 대한 응답이 신상정보를 공개하며 끝없이 인신공격하고 괴롭히는 것인가. 나와 함께 활동하는 동지들까지 심각한 모욕과 비방을 당하고 있다. '비밀분파를 만들어서 사악한 분탕질하다가 나와서는, 오로지 인생의 목적을 노연 비방에 두고 있는 전지윤 1인지배하에 있는 별 의미없는 블로거들.' 나와 같이 활동한다는 이유로 이런 모독까지 감수해야 하는가.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잡은 댓가가 이것이라면 앞으로 누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심한 글들을 각 단체들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다. 이제 그런 글들도 다시 공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과연 내가 살아있고, 그 사건의 진실을 말하며 노연의 사과와 반성을 말하는 이상, 저 사람들이 멈추기는 할까.

 

(기사 등록 2018.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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