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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권위주의 만연의 뿌리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11. 13.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제 정치관이나 세계관 등이 형성된 시기는 1987~91년간 쏘련의 체제전환의 풍랑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저나 제 주변 인물들의 존재 코드는 한 마디로 민주주의이었습니다. 우리는 쏘련의 복지체제 등을 그저 당연한 기존사실로 받아들이고, 공짜 학교나 공짜 병원, 대학에서 다달이 받는 국가 장학금 등을 당연시하면서도, 쏘련의 권위주의적 측면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고 사는 시대에야말로 민주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전파될 거라고 믿고, 스스로를 민주주의 세대라고 자칭하곤 했죠. 한국의 민주화는 일대 희소식이었고, 남미나 중미에서의 자유선거 등도 눈여겨 보는 소식이었습니다. 발틱 삼국이 분리 독립되면 거기에서 거주하는 비현지인들 (주로 러시아인들)이 미아 신세가 될거라는 비관적 예측들도 있었지만, 저나 제 주변의 제 동년배들의 대부분은 국민투표로 분리 독립이 결정되면 발틱 삼국의 독립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민투표를 통한 민족자결권의 행사가 당연한 민주적 권리라고 생각했던 거죠. 솔직히 저는 그 때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인 내용에 대한 고민들을 전혀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민주화만 되면 당연히 다수가 원하는 좋은 쪽, 즉 복지국가 쪽으로 가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8964일에 학생들의 의거를 유혈 탄압한 중국 당국들이 죽도록 미웠다는 건 기억납니다. 중국인에 대한 민주화를 위한 연대롤 하고 싶었던 셈이죠. 사실 어떻게 보면 1968년의 프라하에서 전차에 짓밟혀 미처 이루어지지 못한 민주적인 사회주의같은 꿈을, 우리가 20년 늦게 실현하려 했던 셈이죠.

 

인제 다시 30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한 가지가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1987~91년의 전세계적 민주화 운동이, 결국 형식적인 민주주의와 함께 신자유주의를 세계적으로 착근시키는 데에 일조했다는 사실이 어딜 봐도 정확히 포착됩니다. 동구권의 경우에는, 몰락 직후, 1992년부터 공업의 민주화 (노동자들의 경영참여 등) 아닌 사유화가 시작됐고, 일본도 버블경제의 몰락과 함께 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 신자유주의로 전환했죠.

 

새로이 민주화된 아르헨티나에서 신자유주의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이 1989년에 집권하자마자 대폭적 기업 사유화에 착수하여, 과거에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국영부문을 거의 완전하게 국내외 재벌들에게 처분해버렸습니다. 아직 고속성장의 여열이 남아 있었던 한국은 그나마 오래 버텨왔는데, 1997년부터 IMF는 한국에도 브라질이나 멕시코를 괴롭혀온 극약”(사유화, 국고 지출의 감축 등등)을 처방했죠.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백인 독재로 벗어난 민주화된 남아공에서 살인률이 1994년에 10만 명당 67명에 달해 거의 세계최악에 근접했습니다. 민주화와 함께 이식된 신자유주의는 흑인 대부분의 극빈 상태의 악화를 의미했을 뿐이니까요.

 

그런데 신자유주의 피크20, 1988~2008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참 재밌는 부분 하나가 밝혀졌습니다. 민주화된 동구권보다는 형식적 다당제가 도입되지 않은 중국에서야말로 신자유주의가 훨씬 덜 파괴적으로 작동됐다는 것이죠. 자본의 억압, 착취, 빈부격차 등은 나머지 신자유주의 세계와 별 차이 없었지만 그래도 당-국가는 첨단부문에의 집중투자를 통해 나름의 생산력 향상을 성공적으로 도모하고, 나아가서 복지확충도 실시했습니다.

 

20년 전에 방직물 수출국이었던 중국은, 지금 小米(샤오미)华为(화웨이)의 국가잖아요. 전지전능한 당-국가 없이는 이와 같은 생산력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은 지배적 세론이 되고, 러시아 같은 데에서는 “20년 전에 중국의 길로 가지 않았던 것이 일대 후회와 같은 감정은 일반화됐습니다. “강한 국가”, 즉 권위주의 정권이 신자유주의 폐단을 어느 정도 견제하는 필요악이라는 의견은, 기성세대보다 더 민주 지향적이어야 했을 젊은이들에게마저도 받아들여진 셈이 됐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합니다.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생각하는 국가는 한국에서는 없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그저 대기업 마피아의 고민 해결 사무소정도입니다. 박근혜와 같은 권위주의 지향의 인물이 국가를 장악해봐야 삼성의 돈을 더 과감하게 받고 삼성을 위해 더 많이 봉사할 뿐이지, 삼성을 견제할 가능성은 0,0%입니다. 민주 지향적인 문재인이 돼도 삼성을 제대로 견제할 리는 없지만, 적어도 “4대강 죽이기와 같은 건설자본을 위한 환경파괴적 돈뿌리기 잔치도 안할 사람이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비판적 젊은이라면 심상정을 찍지 않는 이상 문재인을 찍을 거라는 점이야 당연하고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대기업이 거의 국정운영을 담당하다 싶은 영미의 경우에도 신자유주의에 지친 많은 젊은이들은 (어차피 대자본을 위해줄) “강한 국가보다 빅딜과 같은 종류의 사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며 코빈이나 샌더스를 지지합니다. 한데 국가가 자본 위에 서서 小米华为 같은 공익에 유익한첨단기술에 기반하는 자본을 키워줄 수도, 또 동시에 자본의 지대추구적 행각을 바로 막을 수도 있는 옛 적색 개발주의”(현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많은 경우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혐오는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 그리고 푸틴이나 習近平(시진핑)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386 세대와 심성이 좀 비슷합니다. 사회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최고 가치로 먼저 받아들인 만큼, 푸틴이나 習近平에 대한 많은 러시아, 중국 젊은이들의 지지를 보면 너무나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習近平의 신강 위구르족에 대한 민족탄압, 동화책만 봐도 일제말기의 내선일체, 민족말살책동들부터 먼저 떠올라 한국의 진보도 분명히 비판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민주화를 외치자면 이 민주주의내용이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으리라는 보장부터 확실히 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들의 눈에는 민주주의를 실격시킨 건 바로 신자유주의적 현실이었고, 1980년대말 이후의 민주화의 흐름을 오늘날과 같은 권위주의의 세계적 잔치로 만든 것도 결국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입니다. 다시 민주화를 부르짖자면 그 내용이 사회주의적, 사민주의적이라는 것부터 확실히 해야 중-러에서의 대중적인 민주주의에의 호소가 가능합니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이상 그로부터의 보호막으로서의 강한 국가의 인기는 여전할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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