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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페미니스트 프리즘 #1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5. 28.

이은진

 

[앞으로 한 달이나 두 달에 한번씩 크든 작든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연재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 첫번째 글이다. 기획과 청탁에 응해서 좋은 글을 보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요즘 온라인 공간을 보고 있자면 세상에는 기성 페미영영 페미(랟펨?)’페미는 아니지만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이퀄리스트?)’만 있는 모양이고 그 속에서 저는 이름을 잃어버렸는데요. 학부 때 학생 사회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이것저것 함께 했던 친구들 중에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기를 멈춘 이들도 있습니다.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이유로는 페미니스트라는 명칭에 따라붙을 낙인이 두려워서, 가 있겠지만 그게 아닌 사람도 많습니다. 그때 페미니스트들을 향해 쏟아진 낙인을 감수했던, 그리고 지금도 다른 많은 사회적 낙인들에 저항하고 있는 이들이니까요. 추측하기로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의사소통법이 아니라고 여긴 것 같습니다. 대학원에서 젠더 법학을 공부하고 있는 처지인지라 빼도 박도 못하게 페미니스트인(?) 저로서도 공감 못할 바가 아닙니다. 92년생 페미니스트가 받게 되는 질문은 그 의도가 응원이든 비판이든 간에 영영 페미를 향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저는 메갈리아의 미러링과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각성한 게 아니라 내가 막차 탔다는 글이 10년째 실리고 있는 잡지가 꽂힌 지저분한 과방에서 페미니즘을 접했는데,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떠들썩할 때는 가장 운동과 접점이 없는 인생경로를 걷고 있었는데, 온라인 공간의 전투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기는커녕 또래보다 대중문화 컨텐츠에 대한 소식이 한참은 늦은 사람인데, ‘불편한 용기시위에는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어쩌죠.

 

사실 그게 제가 살아가는 데에 크게 불편한 일은 아닙니다. 스스로를 뭐라고 부를지가 그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어떤 실천을 할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핀트가 엇나간 듯한 질문에는 적당히 눈팅용 트위터 계정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소재로 던져주고서 그 사람이 하고 싶었던 말을 들어주면 그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위한 서두로 활용하는 듯 하고, 잘 들어주기만 하면 해명 같은 걸 안 해도 제 인상은 좋게 남는 것 같습니다. 오해의 불유쾌함이나 매번 응대해야 하는 귀찮음 정도는 뭐어, 세상살이가 그렇고 사회생활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름 붙지 않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노라면 아무래도 좀 외로울 때는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곳에 외롭다고 징징거리고 다녔던 시절도 있지만, 이제는 뭐어, 원래 인생이 외로운 것이고 다들 이렇게 사는 것이겠거니 합니다.

 

하지만 그런 규정에 안 들어맞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제 여동생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황은 무언가 변화를 만드려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크게 제한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견이 그저 수단의 과격성에 대한 문제제기혹은 세대 차이로만 여겨질 때, 그렇다면 페미니즘의 목표는 그렇게나 명료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일지 의문이 드는데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싸우고 지키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변화가 대안을 새롭게 상상하고 실험하고 만들어나가면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다 함께 힘을 모아 같은 것을 하기보다는 각자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복잡하게 상호작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창조가 획일성 위에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건 동의하기 쉬운 명제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제각기 자신의 차이와 독특성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다양한 페미니스트의 모습조차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을 답답하게 여깁니다.

 

얼마 전에 메갈리아 삼년상에 관한 글들을 읽었습니다. 삼년의 기간을 회고하면서, 뿌듯함과 버거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글들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페미니스트 프리즘이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싣는 코너를 제안받았습니다. 그동안은 내 할 일로도 바빠서, 괜한 꼰대질일까봐, 새로운 목소리에 지면을 주고 싶어서, 사실 좀 귀찮아서, 자신이 없어서,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비껴서 있었는데요. 제가 이상한 진로에서 이상한 일들을 많이 했던 게 누군가에겐 마음 한 켠을 누그러뜨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기회가 주어진 김에 이런저런 소릴 해보려 합니다. 시간 남으면 부담 없이 읽어봐 주세요. 인사말 끝.  



(기사 등록 2019.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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