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나는 인간입니다. 고로 나는 질투합니다. 질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아마도 성인군자 급이 될 것인데, 참,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입니다. 왜냐하면, 질투란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능인 생존본능에 직결돼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죠. 누군가가 나보다 '잘난' 꼴을 보는 순간 "그가 생존에 성공하면 내가 실패하게 되는게 아닌가?"라는 무의식적인 공포감이 생깁니다. 그가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고 내가 생존이나 번식에 실패해 도태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 저의식 속의 공포는 결국 질투의 힘입니다.
공포라는 막강한 감정적 기반을 가진 만큼 질투는 예컨대 친밀성에 대한 욕구나 인정 욕구만큼 인간의 뇌 작동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가끔 '질투'를 합니다. '돈'보다는 아마도 예컨대 '책'에 대한 부분이 더 크겠죠. 옛날에 임마뉴엘 월러스타인의 몇 권짜리 <세계체제론>을 처음 봤을 때에 그 업적의 위대함에 눌려 '내가 과연 이 정도의 책을 죽기 전에 내고 죽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걸 기억합니다. <자본론>을 쓴 맑스야 이미 영생하는 '고전의 작가'가 되어서 세인이 자신과 '비교'할 수 있는 급이 아니지만, 그 때만 해도 아직 살아 있었던 월러스타인은 그런 감정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질투의 힘이 크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체제도 그걸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1937~38년 스탈린 대숙청에 총살형을 받은 사람들은 약 70만 명 정도 됩니다 (그 중에서는 약 4천 명은 고려인들, 주로 혁명가 출신이나 간부 출신들이었습니다). 보통 사형 언도를 받자면 피의자에 대해서는 적어도 하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몇 장의 고발장이 보위부에 접수돼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발장을 쓰고 보낸 사람들의 총수는 아마도 적어도 2~3백만 명 정도 되겠죠? 무죄한 사람들을 '일제 간첩' 등등으로 모함하여 보위부의 숙청 계획 들러리가 된 이들은 과연 다 보위부가 고용하는 '프락치'들이었나요? 꼭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동료들끼리 서로를 '간첩'으로 고발하고, 보위부는 양쪽 고발장을 다 접수해 양쪽을 같이 형장으로 보내기도 했었죠. 예컨대 화요계의 거목이자 조선공산당의 지도자급인 그 유명한 김단야를 '일제 간첩'으로 고발한 사람은 제주도 출신의 혁명가인 이성태이었습니다. 한 때에 상해 <독립신문>의 기자 생활하고, <신생활> 필자로서, 물산장려운동 반대자로서 조선 사회에서 꽤나 이름을 떨친 논객인 이성태가, 동료 망명자 김단야를 쏘련 보위부에 고발한 이유는 오로지 이성태가 소속한 서울파의 화요계에 대한 불 같은 증오심이었을까요?
그것도 있었지만, 조선 공산당 운동의 서열에서는 이성태는 나이가 비슷한 김단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고, 김단야에 대해 상당한 '질투'를 느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김단야는 코민테른과 동방노력자대학의 간부이었는데, 이성태는 그 만큼의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김단야도, 이성태도 같은 "코무나르카" 총살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의 공포 통치 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인간의 질투심을 더 폭넓게 이용하는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 아닌가, 싶습니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총노동이 '비정규직' 고용을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윤'과 '투쟁 방지' 차원입니다. 정규직 월급이 100%라면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약 54%에 불과해, 그 사이의 격차는 가면 갈수록 더 커져갑니다. 거기에다가 비정규직의 노조가입률은 5%도 안 돼 조직적으로 사용자에게 '반발'해서 '투쟁'할 확률이 더 낮은 것이죠. 말하자면 비정규직 뽑아 쥐어짜는 게 '남은 장사'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정규직 양산'이 사회 문제가 되어서 여론을 의식한 정부가 적어도 정부의 직접적 영향력이 미치는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실 정규직화도 아니고 기존 비정규직에 대한 경쟁 채용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하려 한다면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중동은 과연 어떻게 나갑니까? 맞습니다. 비정규직에 대한 착취로 발생되는 '이윤'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고 바로 독자들의 질투심에 호소합니다. 어렵게 채용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을 예로 들어 "정규직화로 무임승차를 하는" 기존 비정규직들에 대한 질투의 분위기를 북돋우는 것입니다.
실제 취준생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과연 반대하고 있는가는 또 별도의 문제입니다. 정규직화 경향으로 전체 노동시장에서는 정규직 비율이 높아지고 '계절 노동이나 임시적 노동아 아니면 정규직으로 뽑아야 한다"는 당위 의식이 퍼지면 사실 노동 시장 진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리하면 유리한 것이죠. 그러나 '취준생의 분노'를 가장하는 극우언론의 기사들은 사회에서 '질시'에 잘 호소하여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일각의 여론을 형성케 하는 데에 성공하기도 하지요.
질시에의 호소의 메카니즘은 무엇입니까? 신자유주의 언론들이 상상하는 세계는 "만인과 만인의 무한, 영구적 경쟁'의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정규직들도, 비정규직들도, 취준생들도 다 무한한 '경주'를 서로 하고 있는 거고, 그 '경주'에서 일군의 비정규직이 약간이라도 더 빨리 앞으로 뛰어나갔다면 이건 다른 경쟁자들에겐 바로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만인과 만인의 경쟁"에서는 물론 '정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밑으로부터의 연대와 상부상조, 상생의 정의가 아니고 위로부터의 '선발 절차'의 정의입니다. 관리자가 정한 '시험 절차'를 통과해서 앞으로 나아갔다면 '정의'가 되지만, 아무리 수년간 그 자리에서 저임금 착취를 당하면서 업무를 다 배웠다 해도, '위로부터 정한 시험의 절차' 아닌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갔다면 '부정의"입니다.
관리자들이 운영하는 시험 절차는 "신의 정의"인가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결국 비정규직 양산 그 자체를 억제해 모든 피고용자들의 삶과 노동의 조건 개선에 기여하려 하는 게 아닌가요?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자면 "모두"들이 어떤 긍정적인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같이 연대할 수 있으며 연대해야 한다는 사고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중동 등의 극우언론에 그런 사고는 없고, 그들이 호소하는 것도 오로지 '누군가가 잘 되면 내 배가 아프다'는 수준의 질시나 '시험'을 절대시하는 계급 사회의 (가짜) "능력주의"이데올로기 정도입니다.
공동주택에서의 "잘나가는' 이웃을 '독일 간첩'으로 모함해 고발하면 그의 방마저도 차지해 자신의 주거 조건을 개선하고, 실력이 있어 보이는 동료를 '일제 간첩'으로 고발하면 그 자리를 빼앗아 차지할 수 있는 사회를 운영했던 스탈린은 지금도 여론조사마다 러시아인들에게 "최고 인기의 정치인"으로 나옵니다. 질시, 질투심, 아주 생리적인 이기심에 이토록 잘 호소하는 오늘날 사회의 모델은, 어쩌면 생각보다 오래 갈 수도 있습니다.
이 모델 영향권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이 모델의 논리가 어릴 때부터 익혀지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과연 우리가 연대가 불가능한 이런 모래알 사회에서 정말 살고 싶을까요? 이런 사회에서는 예컨대 기후 정의나 난민에 대한 자비를 외치기가 쉬울까요? 이런 정글에서는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기가 가능할까요? '질시의 사회'를 벗어나지 않으면 '사회다운 사회'는 결국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사 등록 20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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