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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반일 감정이 유지되는 이유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6. 22.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이런 질문을, 제 학생들에게 비교적 자주 받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일제의 식민지배 기간도 예컨대 영국의 인도 지배보다 약 7배나 짧고, 해방 시기도 세계사적으로 보면 비교적 이르고 (아프리카의 많은 식민지들은 1960년대에 접어들어 해방됐습니다), 해방의 방식도 원한을 크게 남기는 독립전쟁이 아닌 제3자들의 '개입'이었는데, 한국의 반일 감정들이 왜 인도나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그 어느 옛 식민지의 옛 식민 모국에 대한 감정보다 더 나쁘냐는 질문입니다.

 

비슷한 일제 식민지 경험을 가진 대만 학생들은 특히 이와 같은 질문을 자주 던지고, 영국의 식민지를 경험한 싱가포르 학생들에게도 이 부분은 궁금증을 많이 유발시키는 것 같습니다. 이런 질문을 자꾸 받아보니 제가 '옛 식민모국에 대한 옛 식민지의 부정적인 집단정서"의 유발 요인들을 한 번 정리해봤습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대체로는:

 

1. 1) 과거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리', 그리고 식민지 시대 토착 엘리트의 '교체'가 잘 이루어질수록

 

   2) 옛 식민모국에서 옛 식민지 출신에 대한 사회 통합이 잘 될수록

 

   3) 옛 식민지 시절에 식민모국이 차별을 완화시켜 사회통합 정책을 많이 진행할수록

 

   4) 식민 지배 종식 이후 또 어떤 다른 외부 집단의 폭력을 많이 체험할수록

 

식민지 시절에 대한 기억의 지형은 비교적 '덜 나쁜' 쪽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도나 인도네시아, 베트남의 경우에는 결국 식민지 시절의 토착민 관료들이 아닌 독립운동가들이 정권을 잡았는가 하면 (1),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인도 출신들이 이민 와서 한 때에 비교적 쉽게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영국은 향항[홍콩]의 주민들에게도 이민 와서 영주권,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민권 획득으로의 길을 제시하기도 하지요

 

(2). 우즈베키스탄 같은 구쏘련 후계 사회로 가면 구쏘련에 대한 감정들이 비교적 좋은 편인데, 역시 구쏘련 시절에 러시아인과의 '차별'을 적어도 '정책' 차원에서 느낄 필요가 없었으며 복지 정책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 크게 작용된 것 같습니다 (3). 그리고 대만 같은 경우에는 일제 식민 시절의 끝난 뒤에 후퇴하는 국민당의 당군에 사실상 점령을 당하고, 그 후로는 대륙 출신의 '외성인'들의 "2 식민지배"를 받아온 탓에 일제 식민 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상대화된 부분은 있습니다

 

(4). 그러나 이 네 가지 항목 중에서는 대한민국에 적용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탈식민화 이후 제1공화국의 대부분의 장관과 제3공화국의 대통령까지 다 식민지 토착 관료 출신들이었으며,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들이 사회통합이 아닌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됐습니다. 식민지 시절에는 조선인에 대한 노골적인 임금차별 등이 끝까지 계속 자행됐으며, 식민 지배 종식 이후 남한에 들어온 미국은 적어도 직접 지배 아닌 간접 지배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일본'에 대한 기억의 지형은 대체로 부정 일변도로 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2 1) 피식민자들에게 애당초에 식민지배세력에 의해 '망국'을 폭력적으로 당한 근대형 국가가 있었다면

 

  2) 계속해서 피식민자들의 독립 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해야 했다면

 

보통 탈식민 이후의 기억의 지형은 부정적으로 형성되게 돼 있습니다. 예컨대 싱가포르의 경우에는 영국에 의한 식민화 이전에는 말라까의 술탄을 정점으로 하는 왕조 국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식민지와 그 후 주민들의 대부분을 구성한 화교들은 그 국가와 무관했습니다. 그리고 싱가포르를 기지로 하여 무역 등에 종사했던 화교 신흥 부르주아 집단은, '항영 투쟁'한다기보다는 식민 권력과의 일종의 블럭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좌파적 화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의 주된 저항 형태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후원금 송금이었고요....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대한제국은 비록 절대왕권 국가이었지만, 분명히 '근대 국가'를 지향했으며, 이미 1900년대에 근대적 민족주의를 배태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에 대한 민심이 하도 좋지 않아 '명분'의 차원에서라도 온건부르주아 세력마저도 현실적으로 가능했을 때에 적어도 항일 투쟁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1920년대의 좌파가 <동아일보>를 타협적 민족주의로 분류했는데, <동아일보>가 가장 크게 선전하는 '영웅' ('성웅')은 김성수와 한 번 편지 교환까지 한 인도의 간디이었습니다.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본심이야 어떻든간에 '운동'을 떠나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데가 바로 그 당시 조선사회이었습니다. 그 운동에 대한 탄압이 어땠는지 굳이 다시금 이야기할 필요도 없지요. 일제 때에 익힌 고문의 기술을 한국 보안 경찰들이 그나마 접은 것은 김대중 정권 때쯤의 일입니다. 1990년대 초반 사노맹 사건까지만 해도, 일제 시절과 비슷한 방식의 고문이 자행됐죠. 그러니 기억의 지형은 어떻게 됐겠어요?

 

사실상 뉴라이트와 엇비슷한 입장에 서 있는 세종대 박유하 교수 등은 일찍이 2000년대에 '대일 화해' 담론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덮어놓고 "없던 일로 하자. 화해!"라고, 피해 당사자들의 편에 서지도 않은 고급 '지식인'은 외쳐봐야 화해가 이루어질 리가 만무합니다. 사실 진정한 의미의 화해를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한 데는 금일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는 정대협/정의연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일본 내의 진보적 시민사회와 협조해왔기 때문이죠. 한국인들의 대중 의식 속에서 '일제''일본'이 각각 다른 층위를 차지하게 하자면, '일제'와 질적으로 다른 사고를 지니며 '일제'의 유산을 청산하고자하는 "또 하나의 일본", "색다른 일본"의 존재가 더 가시화돼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컨대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의 사회적 담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은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호사카 교수는 아무래도 온건 자유주의자인 것 같습니다), 그의 가시적 존재가 진정한 의미의 '한일 화해'에 뉴라이트들의 궤변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된다고, 나름 고맙게 생각합니다. 일본의 극우적 지배자들과 다른 편에 서는 일본 출신들의 존재는 '화해'로 가는 길을 터주는 역할을 크게 하지요. 저는 지금도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의 칼럼을 다 챙겨도 꼼꼼히 읽고 있지만, 앞으로도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기고를 한국 신문에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대단히 좋겠습니다. 이런 교류야말로 탈식민 '치유'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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