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장애인 노동권과 사회적 재생산

전지윤

 

[아래 글은 지난 1113일에 전장연 노동권위원회가 주최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란 무엇인가?> 토론회에서 필자가 제출한 토론문이다. 그날 토론회는 먼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의미와 전망’(정창조. 전장연 노동권위원회 간사),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정동은. 서울형권리중심공공일자리협력단 사무국장)의 발제가 있었고 이어서 토론자 3명의 의견 제시와 토론으로 이어졌다. 이 날 토론회의 모든 발제문과 토론문들은 노들장애학궁리소홈페이지에 올라 있다.(http://goongree.net/disability_related_data/89679) 의미있고 유익한 토론 자리를 마련하고 기회를 제안해주신 전장연 노동권위원회에 감사드린다]


 



정창조, 정동은 두 분의 발제를 매우 인상적이고 유익하게 보았다. 새로운 내용과 사실을 많이 배우게 됐고, 많은 내용에 공감하고 동의한다.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누구를 생산적이라고 보느냐는 비판은 타당하다.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일부 기자들, 의료인력 확충에 반대하는 일부 의사들, 사건조작하는 일부 검사들이 고소득 특권전문직으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더욱 울림있는 물음이다. 미국에서도 경찰의 흑인 살해를 규탄하며 경찰예산을 삭감하고 복지와 교육에 쓰자는 요구가 커져 왔다. 정말 불필요한 일들에 사회적 비용이 낭비되고 있다.

 

재활정상화’, ‘생산성의 논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직업재활법 6조의 장애인 자립 노력조항에 그런 논리가 바탕에 있다는 비판도, 이런 논리가 시혜성 일자리의 양산과 장애인 최저임금 적용 제외로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도 타당하다. 그래서 서울시가 시범사업으로 시행해 온 중증장애인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의미와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업에 참가한 중중장애인들이 수행하는 노동에 대한 평가가 그동안의 재활, 정상화, 생산성의 논리와는 평가지표부터도 다르고, 이런 활동이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보다 더 자본에게 유용하지 않은데도 노동으로 인정받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이 상품 생산과 무관하고, 노동력 재생산까지 넘어서는 노동으로서 일종의 권리생산 노동이며 “‘권리생산하며 사회의 공공적 가치사회 변혁을 생산한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특히 이 사업에 참가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서 일해 본 장애인들의 소감을 담은 발언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소감 발언들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은 자신감”, “성취감”, “의욕”, “당당함”, “행복”, “즐거움”, “보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등이었다. 어느 부문, 어떤 일자리, 어떤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흔히 접하기 힘든 감정과 표현들이다. 장애인 노동자들에게 이런 충만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있다. 당사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면서 이런 만족감을 주고, 요구와 수요가 존재한다면 이런 사업은 인정받고 확대되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일각에서 나온다는 결국은 이것도 상품화이고 자본주의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는 비판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상품화 논리와 생산성의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논리와 관점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디딤돌로 봐야 한다. 자본주의적 이윤지상주의와 경쟁력의 논리에서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사회전체에 해악적이더라도 개별기업에게 단기적인 이윤을 가져오는 것이 가장 생산적인 것으로 취급받아 왔다. 마르크스주의 등 좌파적 관점은 이런 관점에 도전해 왔지만, 상품 생산 과정 밖에서 무급으로 이뤄지는 재생산 노동에 대해서는 간과한 면이 있다. 그 점에서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좀 더 확장하고 발전시킨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력 재생산을 필요로 하는데, 자본주의는 그 생산과정을 자연화시켜서 대체로 여성들에게 떠넘기고 아무 댓가도 지급하지 않고 그 가치를 강탈해 왔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시초축적은 인클로져, 생산수단과 직접생산자의 분리, ‘자유로운 임노동자의 등장뿐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을 여성 등에게 떠넘기는 과정과 마녀사냥을 수반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시초축적과 착취뿐 아니라 강탈을 통한 축적은 자본주의 등장 초기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축적에서 일반적이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개별 자본가에게 즉각적인 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봤던 부르주아 경제학적 관점을 거부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전체에 장기적으로는 낭비적이거나 심지어 파괴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아가 개별 자본가에게는 부담이더라도 전체로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에 도움이 된다면 생산적이라고 보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의 부족함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가사노동, 돌봄노동이 비생산적인 것으로 구분돼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을 떠나서 사회공동체와 사회구성원들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모든 활동을 생산적이라고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것을 인류학적 가치이론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많은 중요한 활동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왔다. 예컨대 2018년 연말에 통계청은 유엔의 권고에 따라 한국사회에서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를 측정해서, 연간 3607천억 원이며 GDP24.3%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음식, 청소, 돌봄 등의 노동이 저평가받고 저임금인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수치마저 매우 과소평가된 것임이 분명하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4047630) 이러한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임금노동, 시장에서의 교환가치,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 공동체에서의 사용가치, 삶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개별적 필요노동시간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장애인 노동권의 문제에도 적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핀켈스타인이 지적하듯이 전자본주의적 농업노동과 가내수공업에서는 장애인 대다수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산과정에 참여하거나 기여했다. 장애인이라는 범주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과정의 속도가 빠르지 않고 유연했으며 어느 정도의 자기 통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시간, 속도, 규율, 시간 기준이 요구되는 자본주의적 공장 노동이 일반화하면서 정상적인 임노동자에서 배제, 분리된 사람들은 장애인이 됐다. 직접생산자들은 생산수단과 분리됐고, 남성들은 임노동자로 훈육됐고, 여성들은 노동력 재생산에 종속됐고, 임노동에 부적합한 장애인들은 구빈원과 시설로 격리됐다. 생산과정 외부에서 생산적노동자가 아닌 사람들, 즉 노약자, 장애인, 부랑자의 삶을 유지하고 돌보는 일은 비생산적이고 무가치한 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노동과 인간을 기계적으로 분리해서 인간을 노동력 상품으로만 취급하고 그 생산성을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순수 시장주의적 관점과 논리는 거부돼야만 한다. 시장에서 평균적인 속도와 숙련으로 상품을 생산하는데 기여해서 자본가에게 이윤을 가져다주고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에 도움이 되는 것만이 생산적이고 가치있다는 전제는 잘못된 것이다. 시장 밖에서 직접 상품 생산에 기여하지 않더라도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내면서 사회구성원의 육체와 영혼을 보듬고 사회공동체를 유지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은 생산적이고 가치있는 것이다.

 

더구나 장애인은 사회구성원에서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일부가 아니다. 마사 누스바움은 우리 모두가 일반적 장애인이며 그 중에서 일부가 특수한 장애인이라고 주장한다. 또 우리 모두의 삶에는 어느 시기에든 작게라도 타인과 사회에 대한 의존이 필요하기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공공정책은 특수한 장애인과 지속적으로 많은 의존이 필요한 사람을 기준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들을 배제한 채 만들어진 사회가 나중에 그들을 다시 포함시키려하면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 사회에서 생산이나 노동으로 취급받지 못해왔던 여가, 사회 활동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도 부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은 개인들의 그런 여가, 사회 활동들을 디지털화하고 네트워크로 연결시키면서 최고의 이윤을 누리고 있는 회사들이다. 여기서 생산과 소비, 여가와 노동의 경계는 불분명해진다. 물론 플랫폼자본이 데이터를 독점하면서 사람들에게 자기착취를 압박하며 이윤을 강탈해 가지 못하게 하려면 공공플랫폼이나 플랫폼협동조합이 발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장애인들의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신과 동료들을 지원하고 돌보는 활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코로나 이후의 전면적 사회전환의 방향과도 부합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돌봄, 간호, 보육, 요양 등의 재생산 경제’(reproductive economy), ‘돌봄이 경제’(care economy)가 사회의 존재와 지속을 위해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것인지를 보여 줬다. 코로나 확산에 가장 취약했던 요양원과 장애인 시설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취약계층의 안전과 인간다운 삶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쳤다.

 

더불어 오늘날 세계는 그동안의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이 낳은 심각한 기후위기 속에서 온실가스의 과감한 감축을 위한 급격한 대전환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인류와 지구의 생존을 위해서는 성장 일변도에서 벗어나 저성장과 탈성장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를 낳으며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기존의 생산과 노동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과제를 피할 수 없다. 그 점에서도, 사회적 소수자들이 스스로와 동료들을 돌보는 노동과 일자리는 그것에 더욱 부합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증장애인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으로 나타난 성과와 가능성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고민해서 답을 하고 그 문제의식을 더 심화시키고 정교화해야 할 지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단편적으로 살펴 보겠다.

 

* 이것을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과도 차이가 있고 구분되는 권리생산 노동이라고 규정하는 맥락은 이해가 되지만, 굳이 그런 구분과 차이점 부각이 필요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그동안 상품 생산에 비해 간과돼 왔던 노동력 재생산에 주목하고 가사, 돌봄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돌봄에는 타인 돌봄만 아니라 자기 돌봄도 포함된다) 그런데 노동력의 재생산은 인간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것과 구분될 수 없다. 따라서 권리생산 노동도 가사, 돌봄 노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더 가치있게 만드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의 일부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 ‘권리생산 노동의 개념은 무엇을 생산적이고 생산성이 있다고 볼 것인지 그 기준과 의미를 변화시키고 재정립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래서 공공적 가치와 권리를 생산하는 것을 진정으로 생산적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 사회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해 왔다. 하나는 그동안 무시당하던 많은 활동들을 노동과 생산으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방향은 노동이나 생산을 하지 않는 사람도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도록 사회가 보장하라는 것이다. 권리생산 노동은 여기서 전자의 방향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가지 방향 중에서 무엇이 더 타당하거나,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문제인지는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이것도 노동이고 생산이라고 접근하는 방향은 계속 그것을 입증하고 평가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압박을 낳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 발제자들도 인정하듯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이제 막 시범사업을 시작한 상황이고 겨우 260명이 11억의 예산을 받아서 운영된 아주 제한적이고 상징적 수준인 상황이다. 이것마저도 85일간의 점거농성으로 겨우 얻어낸 성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수준을 벗어나 이 성과를 더 확대해야 한다. 그러려면 법제화가 되고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안정적 예산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지금의 불안정 저임금 일자리를 벗어나고, 더 대규모로 전국적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고, 이 모델을 장애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실업자 등 더욱 많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4대보험과 노동3권의 문제를 어떻게 적용시킬지도 정교하게 고민돼야 한다. 해외 유사사례에 대한 조사와 탐구도 필요하고, 만약 그것을 찾기 어렵더라도 이것이야말로 K방역을 넘어선 선도적 사례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 그러한 방향을 설정한다면 그것은 시장화, 상품화, 생산성의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로의 대전환을 위한 거대한 운동과 전략을 필요로 하게 된다. 장애운동을 넘어선 사회운동의 연대도 필요로 한다. 발제자가 말하는 인민의 직접적 권력’, ‘인민의 대의적 권력’, ‘사회운동이 생산 과정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민주적 구조가 이미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과 거리가 먼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목표와 현실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순히 이상적 목표와 대안에 미치지 못한 것을 모두 거부하고 비판한다고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적절한 전술, 과도적 요구, 불가피하고 적절한 타협과 제휴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기사 등록 202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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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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