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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불타는 지구를 막기 위한 생태혁명의 시간은 남아 있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2. 14.

 

 

우리는 세계적 생산과 소비를 재구성하기 위한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캠페인에 동원할 수 있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여기서 인터뷰한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는 오리건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서 미국의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의 편집자이다. 그는 여러 권의 정치경제학, 제국주의 이론과 관련한 책의 저자이며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에 관한 이론적 기여와 저술로 유명하다. 한국에도 <마르크스의 생태학>,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 <생태혁명> 등이 번역돼 있다.(번역: 두견)

 

출처: https://climateandcapitalism.com/2018/08/25/foster-there-is-still-time/

 

 

* 최근의 기록적인 고온은 기후 재앙을 향한 발전이 과학자들과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가 예측한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미 훨씬 더 발전했음을 암시할 수 있다. 이미 사태를 수습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다. 당신의 평가는 무엇인가?

 

나는 '카본 브리프'에서 나온 201710월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IPCC와 기후 과학자들의 예측이 지금까지 상당히 정확했다고 생각한다. 모형이 정확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곳에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온난화 자체와 관련된 예측은 그리 많지 않다. 그보다 모형의 문제는 극심한 기상 현상의 심각성을 예측할 수 없고 긍정적인 피드백의 발달을 측정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날씨 때문에 끊임없이 충격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바깥에서 모든 문제를 가속화할 수 있다고 위협하는 주요한 기후 피드백의 위험에 대해 그 시간 내내 새로운 정보에 직면해 있다. 북극해 얼음의 해빙, 서남극 빙하의 붕괴, 보온성 순환의 단절, 아마존 열대 우림의 건조 등과 같은 의심할 여지없는 피드백들이다.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현재의 배출 속도라면 18년 안에 탄소 예산을 깰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1조 미터 톤의 탄소를 배출하지 않기 위해,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450ppm을 배출하지 않으면서 지구 평균 온도를 2ºC만큼 상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2050년까지 우리가 대기 중 이산화탄소 수준을 안정화하려면 필요한 순 이산화탄소 배출 제로에 도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2020년부터 시작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전세계적으로 연간 6% 정도 줄이는 한편, 개선된 임업과 농경 관행을 통해 대기에서 150 기가톤의 탄소를 또 빨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배출량 감축이 더 실현 가능한 부유한 국가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매년 두 자릿수 수준으로 감소해야 할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메탄과 아산화질소와 같은 다른 온실가스 배출도 억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환경을 보호하면서 배출량을 그렇게 줄일 수 있는 충분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평소와 같은 사업에서 급격한 이탈 없이는 달성할 수 없으며, 이는 자본의 논리와 특히 화석연료 복합체를 거스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태적, 사회적 혁명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미 "너무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따라서 이 시점에서 확실하게 그 변화가 인간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실현 가능한 것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으로서 지배적인 자본의 논리와 수반되는 정치구조에 적응하고 있다. 이것은 체제에 의해 강요된 일종의 패배주의다. 라이트 밀스(C. Wright Mills)는 이것을 정신나간 리얼리즘’(crackpot realism)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행성의 위기를 일으킨 바로 그 세력들이 인류 전체에게 불가피한 재앙적 결과를 가지고 그 위기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결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트럼프 행정부가 도입한 기후변화에 대한 입장은 지구온난화를 부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구 탄소 예산에 부합할 수 있는 어떤 남은 희망도 차단함으로써 문제 완화로 가는 길을 파괴하려는 강경한 시도이다. 그것은 체제의 관점에서 당신의 계획 뒤에 있는 배들을 불태우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필요와 일치한다. 월스트리트의 주가는 새로운 고점을 찍었다.

 

나는 <취약한 행성>(1994)을 쓴 이래 약 25년 동안 논쟁을 벌여왔는데, 자본 축적 체계는 기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고, 시간이 빠르게 소진하는 동안 어떤 설득력 있는 반대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현재의 축적 체제에서 벗어나서 반드시 그 안에서 발생해야 하는 또 다른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윌 스테판(Will Steffan) 등의 연구원이 발표한 '인류세에서의 지구 시스템의 궤적'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이번 달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에 실렸다. 그들은 몇몇 선도적인 지구 시스템 과학자들(행성 경계 개념과 인류세 작업 그룹과 관련된 몇몇 과학자들을 포함한)을 대표하여 2ºC 경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가 난간에 도착하면 불가역적인 상태에 도달하거나 넘어설 것이라고 예상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더 이상 홀로세(Holocene)에 근접한 어떤 조건(예컨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 350ppm)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에 우리는 기후 피드백으로 인해 기후가 "온실 지구"의 경로로 밀려날 수 있는 폭포수같은 티핑 포인트에 직면할 것이며, 이는 금세기 지구 평균 기온의 3~4ºC 변경 불가능한 상승으로 이어지며 그 이후에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기후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최상의 조건하에서도 우리는 금세기 들어 지난 80만 년 동안의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행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국립학술원의 온실 지구에 대한 기사의 저자들은 기후를 안정시키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지만 세계적인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지구공학적 옵션은 고려되지만 대부분 너무 위험하다고 무시되기에 궁극적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복잡하게 만든다. 대신에 그들은 "현재의 사회경제적 시스템에 대한 점진적인 선형적 변화는 지구 시스템을 안정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 문턱을 넘어서 온실 지구 경로에 잠기는 위험을 줄일 수 있으려면 광범위한, 신속하고, 그리고 근본적인 변환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 석유, 가스, 석탄 등 화석연료 산업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한다. 화석연료에서 벗어나도록 세계의 정부들을 설득하거나 압박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우리는 1960년대 초에 가속화되는 지구 온난화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최초의 경고는 소련의 기후학자들로부터 나왔다). 이 문제에 대한 대통령 위원회는 1960년대 중반 린든 존슨 대통령 휘하의 워싱턴에서 시작되었다. 제임스 한센(James Hansen)의 의회 증언과 1980년대 말 기후변화에 관한 유엔 정부간 패널의 구성으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교토 의정서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2015년 파리협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완화하기 위한 어떤 실질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탄소배출량의 실질적인 감소를 보지 못했고, 반대로 탄소배출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화석연료의 주요 배출국인 세계 어느 나라도 필요한 수준에 가깝게 탄소배출을 줄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자본주의의 논리와 본질에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치 권력은 자본가 계급이며, 거대 독점 기업을 통한 자본주의의 축적 방식, 그리고 금융시장 등이 모두 사적 부문에 존재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국가가 자본가 계급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 특히 체제의 중심에 있는 국가는 대부분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제약된다.

 

반세기 이상 전에 폴 바란과 폴 스위지(Paul Baran and Paul Sweezy)가 주장했듯이 독점 자본주의 체제하의 국가는 "형식적으로는 민주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금권정치"이다. 기후 변화에 직면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한두 가지 입장을 채택했다.

 

(1) 전적으로 부인하거나(트럼프의 워싱턴처럼), 또는 (2) 이산화탄소 배출 감소와 대안에너지의 개발을 지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매우 제한적이고 비효율적인 메커니즘을 도입(시장을 건들지 않으면서)하는 것이다. 탄소 시장, 대안에너지 보조금 등을 포함한 이러한 조치들은 기껏해야 약간의 시간을 벌면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항상 불충분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때때로 상당히 중요한 개혁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 축적 과정 자체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재빨리 중단된다. 이 모든 것은 현재 구성돼 있는 세계의 정부들이 화석 연료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말하는 다소 장황한 방법이다. 물론 자본의 논리가 사회 전반에 걸쳐 도전받고, 상당히 근본적인 방식으로 국가와 지배적 권력이 위협받지 않는 한 말이다.

 

중국이 자본주의적 규범 밖에서 상당히 급진적인 버전의 생태적 현대화를 위해 무언가를 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우선순위 역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높은 경제 성장이다. 따라서 중국의 화석연료 사용은 생산량 단위당 탄소배출량을 줄이고 석탄 의존도를 낮추려는 완강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 확대되고 있다.

 

<가디언>의 재능 있는 경제 편집자인 래리 엘리엇(Larry Elliott)816'자본주의가 기후변화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썼는데, 실제 문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탄소세의 문제이고, 정확히 '어떤' 기술적 혁신을 찾아내는 것에 관한 문제일 뿐이라며 "자본주의가 모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독점 가격과 이윤을 방어하기 위한 조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소개된 '창조적 파괴' 개념에 근거한, 실체가 결여된 이데올로기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기후 변화와 관련해 엘리엇이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데 있어서 유일한 놀라운 요소는 "관리되고 지시되는 자본주의의 중국식 모델이 앵글로색슨 모델보다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추정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경제 모델이 7년 만에 배출량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바로 그 시점에 기후변화로부터 세계를 구할 것(그리고 자본주의를 위한 정당성도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모순과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 비참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회에서 또 다른 힘이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거리로 나서는, 필연적으로 대부분이 노동계급인 수백만 명이 아니라 수억 명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적극적 불복종으로 전술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는 단지 대중시위만이 아니라 더이상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한 시위로 대표되는 심각한 기후변화 운동이 자본 축적에 위협을 가하는 것을 기업 매체들은 그저 경시한다. 따라서 언론의 관심을 받는 데 초점을 맞추거나 정부에 직접 호소하는데 집중하기보다는 이 운동의 전략적 지향점은 정치-경제적 헤게모니에 대한 불복종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회의 생산과 소비를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큰 파도가 필요한 것이다. 적어도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사회가 되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정도까지 말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그것을 넘어서 나갈 필요가 있다. 억압받는 자들의 국제적 통일성 때문에, 그것은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의미하는 국제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억압의 많은 형태를 포괄하는 것은 그 운동의 핵심 요소이다.

 

* 몇 년 전만 해도 정치 변두리에 고립된 부정론자들을 제외하면 인류가 만들어낸 기후 변화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기후변화 부정론이, 특히 트럼프 임기 전후에 재천명된 것에 대한 평가는 무엇인가? 기후 혼란이 얼마나 더 명백해졌는지를 감안할 때 왜 지금인가?

 

내가 보기에, 기후변화에 대한 서슴없는 부정은 사실 핵심이 아니다. 나오미 클라인이 2014년 저서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우파가 옳다"라는 장에서 주장한 것처럼 말이다. 클라인은 정치적 우파에게는 기후변화와 싸우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며, 그것이 기후변화를 완화하려는 모든 노력에 대한 그들의 반대의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와 지구 사이에서 그들은 전자를 선택한다.

 

기후변화의 현실을 거부하는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지지층을 구성하는 주로 중하위 계급, 백인 인구의 사람들조차 기후 부정 노선을 실제로 얼마나 받아들이는지 확신할 수 없다. 물론 일부는, 특히 근본주의 종교그룹에서는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상징에 가깝다. 서슴없는 기후변화 부정주의의 많은 부분이 정말로 정치적인 수사의 일종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진실에 대한 접근은 프로레슬링이나 리얼리티 텔레비전과 같다. 그것은 거의 반항적인 행동 속에서 모든 반대되는 증거 속에서, 진실처럼 제시되고 대개 채택된다. 그것은 일종의 이성의 파괴를 나타내며, 그 속에 그 악선동적 힘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지하생활자처럼 사람들은 분노가 치밀어 "이성을 게워내고" 싶어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자본에 의해 크게 촉진되고, 엄청난 양의 돈이 이 비합리적인 선전선동을 계속 부양하는데 쓰이고 있다.

 

내 입장에서 볼 때 진정한 문제는 노골적인 기후변화 부정론자들만큼이나 정치적 자유주의자들(또는 소위 진보좌파라고 불리는 이들)의 공개적인 묵인이다. 잘 알려진 래리 엘리어트(Larry Eliotts)처럼 국가의 약간의 도움만 있으면 이 모든 것을 시장과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론의 다른 형태다.

 

여기서 의도적인 망상은 어떤 면에서는 노골적인 기후변화 부정론의 교리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교묘하고 표면적으로 변화의 편에 서서 문제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 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반면, 실제로 취한 조치들은 대단히 불충분했다.

 

클라인이 정말로 자신의 저서에서 표적으로 삼는데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이 바로 이러한 자유주의적인 머리를 모래에 묻는 접근법인데,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 모든 시간을 가진 것처럼 사회를 바꾸지 않고도 점진적으로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끊임없이 미국의 중요한 생태사회주의 운동의 이름인 '기후변화가 아닌 체제변화'의 필요성을 언급해야 한다.

 

* 기후 변화가 결국 경제와 이윤율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생태학적으로 시정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다. 당신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생태 파괴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저널의 창립자이며 생태사회주의자이면서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제임스 오코너(James O'Connor)는 자본주의의 두 번째 모순 이론에서 환경 비용과 관련해 이런 식으로 주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마르크스주의 생태경제학자 폴 버켓과 나 자신과 같은 다른 이들은 이것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생태적 비용을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반응하는 경제적 비용으로 환산하는 자동 피드백 메커니즘은 체제 안에 없다.

 

K. 윌리엄 캡(William Kapp)이 말해왔듯이 자본주의는 "비용 미지급"의 체제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생태학적 비용을 사회와 그들이 그것의 최종가격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지구로 외부화시킨다. 따라서 이 시스템은 주변 환경과 인간 존재의 생태학적 조건을 파괴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이 체제 자체에 문제가 될 때쯤에는 인류를 위한 안전한 장소로서 이 행성을 위한 게임이 끝날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생태학적으로 파괴적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체제의 내부 논리에 내장되어 있다. 우리의 최선의 희망은 단기적으로는 사람과 행성이 이윤보다 우선하는 과도기적 사회를 만들어 내며 이러한 논리에 맞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미 지속 가능한 인간 발전의 새로운 사회로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류세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이다.

 

* 대중적 반자본주의 생태적 의식과 기후 변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자본주의 운동을 구축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1979년에 영국의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E.P. 톰슨(Thompson)은 영국이 당시 핵무기-억지력 증강의 일환으로 순항미사일을 배치하려 한다는 <가디언> 기사를 읽었는데, 이 미사일은 레이건 휘하의 전략 방위 구상('스타워즈'로 더 잘 알려진)으로 빠르게 탈바꿈했다. 톰슨은 지상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 핵군축 운동(CND)의 주역이었다.

 

CND는 신좌파의 산물로 떠올랐지만 결국 노동당과 나토에 동조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새로운 치명적인 핵 확장에 직면한 톰슨은 CND에 머물지 않고 비동맹적이고 자율적인 새로운 운동인 유럽 핵군축’(END)을 만들어 유럽의 운동을 연결하고 동유럽의 유사한 비동맹 운동과 관계를 맺기로 결정했다.

 

그 후, 이것은 유럽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모이는 강력한 풀뿌리 투쟁으로 떠올랐다. 톰슨의 <저항과 생존>(‘먼슬리 리뷰출판사가 미국에서 발행한)으로 특징지어진 END 전략은 미국 인구의 72%의 지지를 받고 정상적인 정치 구조를 벗어난 '핵 동결 운동'의 큰 파도가 등장한 미국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0년대 풀뿌리 반핵 추진력의 강점은 조직화된 압력단체와 로비스트들의 방식으로 단지 정부와 수직선을 세우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 전반을 걸쳐서 수평적 성장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파시즘에 대항한 민중전선에 대한 톰슨의 관점과 그 지향에 있어서 국제주의적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비록 수명이 짧았지만, 그것의 목적에서 보편주의적인 민중권력의 한 종류인, 즉 체제에 대한 위협의 형성을 대표했다.

 

END와 핵동결 운동이 이 기간의 비핵화에 미친 영향이 과장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고르바초프의 부상과 많은 관련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종류의 운동의 일반적 모델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기후 변화가 아닌 체제변화가 훨씬 더 나은 명칭이지만, 기후 변화 동결 운동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후변화는 핵의 벼랑 끝에서 물러나려는 1980년대 운동처럼 단일 이슈로 접근될 수는 없지만, 인구 대중이 스스로를 동원하는 것을 통한 훨씬 더 포괄적인 규모의 행동을 요구한다. 어떤 형태로든, 나는 가장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나쁜 영향을 받고 있는 세계 남반구에서 거대한 투쟁들이 전개될(실제 전개 중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세계 북반구에서의 궁극적인 산사태의 발전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나아가 기후변화는 티핑포인트(tiping point)로 특징지어지며 그 결과가 직선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걱정스러운 것은 그 재앙적인 상황이 충분히 넓은 규모로 느껴질 때쯤, 그리고 사람들이 동원될 때쯤에는, 상황이 헤아릴 수 없이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행동의 필요성을 일깨워 줄 것이고, 행동의 일부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비판적 이해를 넓혀야 한다.

 

* 이곳 아일랜드에서는 '이윤보다 인간' 소속의 의원 브리드 스미스(Brid Smith)가 아일랜드와 아이리시 워터스 지역에서 화석연료의 새로운 추출을 금지하는 의회 법안을 발의하고 있어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러한 소규모의 지역/국가적 이니셔티브가 인식을 높이고 운동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제안할 수 있는 다른 주도력이 있는가?

 

나는 아일랜드의 이러한 발전들을 지켜봐 왔고 전 세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최근에 MR Online(<먼슬리 리뷰>의 웹사이트)에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다. 아일랜드의 주도력은 자본 축적과 화석연료 경제의 논리에 파열구를 내는 분명한 시도와 전 세계에 대한 긴급한 호소를 상징한다. 만약 아일랜드 사람들이 이것을 통해 나아갈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전 세계의 투쟁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고,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촉발시킬 것이다. 이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투쟁 자체는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이와 가장 유사한 소송은 이제 재판이 열리고 있는 '우리들의 어린이 신탁'(Our Children’s Trust lawsuit) 소송이다. [비영리단체인 '우리들의 어린이 신탁'이 몇몇 청소년들을 대리해서,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라는 취지로 미국 연방 정부와 화석 연료 산업계에 소송을 건 사건] 내가 살고 있는 오리건주 유진(Eugene, Oregon)에서 시작되었다. 이 소송에 관련된 주요 인물들 중 일부는 나의 친구나 지인들이다. 제임스 한센은 이 사건에서 호명된 주요 과학 권위자다. 그것은 이제 미국에서 재판을 위해 허가되었다. 그것은 세기의 재판으로 떠오를 수도 있다.

 

'우리들의 어린이 신탁' 사례는 미국 헌법에 대한 해석에 근거한 공공적 신뢰의 공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정부가 기후 변화 완화를 통해서 기후 변화의 폐해로부터 인구, 특히 미래세대를 대표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보호할 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법원이 행동할지 가늠하는 시험이다. 정부와 화석 연료 회사들은 소송의 피고인들이다. 나는 아일랜드의 화석연료 추출에 관한 의회 법안처럼 '우리들의 어린이 신탁' 소송이 희망을 주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근본적인 방법으로 시스템에 도전하는 급진적인 풀뿌리 주도력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또 다른 법적 투쟁은 송유관의 밸브를 끈 다수의 개인이면서, 필수적 방어였다는 근거로 옹호되고 있는 밸브 운전공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심각한 위급 상황과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은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그들 중에 일부는 아이들인, 소수의 용기 있는 사람들이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전략적 행동을 취하는 것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비슷한 방식으로 집단적으로 일어서서, 시스템에 공구를 던지고,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면서, 지역적 차원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더 글로벌해지는 대안을 만들어 낸다면, 적은 수가 아니라 우리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단지 행진하는 것의 문제 그 이상이다. 비록 그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사회적, 생태적, 문화적 혁명을 강제하는 행동을 취하는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투쟁에 다양한 방식으로 관여하고 있다. 불타는 지구를 막기 위해 필요한 우리의 유일한 진짜 대안인 생태혁명을 위한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

 

(기사 등록 202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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