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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사회적 재생산에 섹슈얼리티를 위치 짓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3. 5.

앨런 시어스(Alan Sears)

번역: 두견 

 

 

근본적인 성적 해방을 위해서는 반자본주의 이론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에 뿌리를 둔 불평등이 성정치의 지형을 형성하기에 사회적 재생산의 틀 속에서 섹슈얼리티를 위치지어야 한다고 분석하는 글이다. 이 글의 필자인 앨런 시어스(Alan Sears)는 퀴어 운동가, 작가, 사회학 교수이며 성소수자이다. <매끄러운 세상 속의 퀴어 Queer in a Lean World>, <퀴어 반자본주의: 레즈비언과 게이 해방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다음의 새로운 좌파: 미래의 역사The Next New Left: A History of the Future> 등의 많은 책과 글을 쓴 저자이며, ‘뉴 소셜리스트New Socialist’ 등의 다양한 좌파 단체에서 활동해 왔다.

 

출처: https://brill.com/view/journals/hima/24/2/article-p138_7.xml

 

 

 

MI5[영국에서 일종의 안기부 같은 구실을 하는 정보기구]가 영국의 2016년 ‘스톤월(Stonewall) 리스트’에서 게이 친화적 고용주 1위를 차지했다는 발표는 오늘날 글로벌 북반구의 상당부분에서 퀴어 성정치의 모순을 잘 요약하고 있다. 한편으로, 1991년까지는 정보기관이 레즈비언과 게이들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한때 냉전 시대에는 안보 위협으로 여겨졌던 레즈비언과 게이들은 소위 '테러와의 전쟁'의 내부자가 되었다. 지구 북반구의 많은 지역과 지구 남반구의 일부 지역에서, 레즈비언과 게이들은 중요한 권리를 얻었고 1960년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문화적 가시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폭넓은 성적 해방의 비전에 훨씬 못 미친다.

 

이 성적 권리 체제의 영향은 매우 고르지 못하고, 지구 북반구의 대도시 중심부에 있는 남성들과 인구의 더 나은 계층들에게 불균형적으로 혜택을 주고 있다. 한편 많은 여성들, 트랜스젠더들, 유색인종들, 젊은 사람들, 이주민들, 수입이 한정된 사람들, 그리고 토착민들은 계속해서 성적 폭력, 성폭행, 주변화 그리고 성적인 침묵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성적 자유주의와 평등권을 넘어서는 성적인 자유의 이론과 실천을 중심으로 한 변혁적 투쟁의 현재의 정치적 지평은 거의 없다.

 

1960년대 이후 몇 년 동안 자본주의는 한때 혁명적으로 보였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투쟁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사실, 자본주의는 반대자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왕성한 성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평등의 지점을 넘어서는 성적 해방에 대한 비전을 새롭게 하는 데 반자본주의 이론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특히, 이 글에서는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에 뿌리를 둔 불평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정치의 지형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보여주는 사회적 재생산의 틀 속에서 섹슈얼리티를 위치짖는 이론적 접근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섹슈얼리티의 규정적인 조건은 예를 들어 주인에게 속박되었던 노예들, 또는 영주들과 그들의 사유지에 얽매인 농부들과는 대조적으로,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몸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여된 자유는 자본가들이 자연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 생산자원을 소유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제한적이다.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은 그 가족 구성원들이 오로지 임금을 받는 대가로 일할 능력을 팔면서 자본주의적 착취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통해서만 삶의 필수품에 접근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는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력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중의 의미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썼다. 이러한 형태의 종속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섹슈얼리티의 틀을 짜서 자유와 강박으로 두드러진 체화(體化)의 경험을 만들어 낸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은 젠더, 인종 및 성별화된 계급형성 과정과 관련하여 이러한 모순된 자유와 강박을 보여준다.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이중적 의미의 자유'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별화된 강탈 과정을 중심으로 조직된 지배적인 노동분업 내에서 자신의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의 자율성과 강압에 직면한다.

 

여성들은 임금노동에 고용되든 아니든, 가사노동과 양육에 대해 불균형적인 책임을 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체화된 자율성과 큰 관련이 있다. 유색인종들은 인종차별적 비하의 반영으로 유급과 무급 노동의 위계적 분리에 끼워넣어져 자유와 억압의 매우 다른 프레임을 제공받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징적으로 체화(體化)된 모순적 자유와 강압의 핵심에 도달하지도 않고, 차별화된 강탈에 의해 만들어진 계급서열에도 도전하지 않는 성적 권리를 위한 투쟁은 결국 현존하는 불평등에 바탕을 둔 제한된 버전의 성적 권리를 건설하게 된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성적 권리를 위한 투쟁은 계약상의 동의를 통해 운영되는 공식적으로 동등한 자율적 개인 행위자에 기반을 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해 안에서 점점 더 많이 포착되어 왔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은 지난 50년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섹슈얼리티 영역에서 불평등과 부자유의 지속을 조명한다. 공식적인 평등으로서, 자본주의 사회 내의 개인적 자율성과 계약적 관계는 차별화된 강탈과 노동의 위계적 분열의 과정을 통한 종속에 기초한다.

 

동성애의 사회적 재생산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은 섹슈얼리티 분야에서 분석 도구로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 사회적 재생산 프레임은 주로 고용에서 유급 노동과 가계를 지탱하기 위한 무급 노동 모두로 이해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노동의 특별한 특징을 검토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최근의 논문들이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이제 생산과 재생산의 위계적 분업과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에 기반한 불평등의 역학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사회적 재생산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역사유물론이 '생산과 재생산의 특정한 방식의 맥락에서 젠더와 친족의 기본적 매트릭스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면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사회적 재생산 프레임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섹슈얼리티는 구현, 직접적 삶 에너지, 그리고 자유와 인간 잠재력에 대한 전망과 경험을 형성하는 생산과 재생산의 순환에 내포되어 있다. 사회적 재생산 프레임은 유급 및 무급 노동에서의 노동 분업과 섹슈얼리티의 조직화와 성적 자유의 이해에 기여하는 차별화된 강탈 과정의 방식에 대한 강력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사회재생산 페미니즘은 인간의 삶이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변화시키기 위한 협력적인 노동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마르크스의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자연과의 상호교류 속에 역사를 통해 엄청나게 변화하는 사회조직은 인간의 생명 활동의 틀을 짜게 된다.

 

'사람들이 일상과 미래의 필요를 제공받기 위해 협력하는 방식은, 그들이 처분하는 기술과 자원과 결합되어, 모든 인간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틀을 확립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협력적 노동에 대한 분석을 일반적으로 사회적 생산의 영역과 임노동의 관계로만 배타적으로 축소시킨 마르크스주의의 지배적인 흐름에 대응하여,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 재생산의 틀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일방적인 관점은 가정에서 여성들이 주로 수행하는, 노동계급을 유지하고 갱신하는데 중요한 무급 노동 과정을 놓쳤다. 조안나 브레너(Johanna Brenner)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거의 전적으로 상품의 생산에만 관심을 쏟았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사람에 대한 보살핌과 돌봄을 위해 필요한 노동을 포함해서 이러한 개념을 넓혔고,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브레너는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용어를, 자녀 양육을 포함해서 생애주기를 통해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을 유지하는 세대적 재생산의 특정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사회적 재생산은 또한 생산과 재생산의 순환을 통한 계급 형성의 전체적 과정의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리즈 보겔(Lise Vogel)은 세대적 재생산을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으로 내세웠다. '노동력의 담지자로서 인간 개개인의 지속적인 개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어떤 과정은, 따라서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이며, 활동적 노동에서 죽거나 퇴장하는 노동자들을 대체하는 어떤 과정이다.' 사회적 재생산은 계급 형성의 전체적 순환 과정과 사회적 생산 과정에서 소모된 생명 에너지가 복원되는 그 과정의 특정한 순간을 가리킨다.

 

섹슈얼리티는 사회적 재생산과 관련 속에서 형성된다. 정체성으로서 동성애의 출현은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 변화가 섹슈얼리티 영역을 변화시키는 방법의 강력한 사례를 제공한다. 동성간의 성적 실천과 젠더 질서 거부는 인간 사회의 범위에 걸쳐 많은 형태를 취해왔다. 사람들이 욕망의 전문화(동성애 또는 이성애)에 기초한 성적 정체성의 관점에서 분류된 것은 독특하게 자본주의 아래 에서였다. 게일 루빈(Gayle Rubin)은 '누군가가 동성애적 유형의 사람이라는 생각은 19세기의 산물이다'라고 썼다. 그 후에야, 동성애 정체성의 이러한 딱지 붙이기에 대응하여, '이성애'는 '정상'으로 추정되는 다른 성적 형성의 이름을 붙이도록 개발되었다.

 

섹슈얼리티는 '사회가 생물학적 섹슈얼리티를 인간 활동의 산물로 전환하고 이러한 변형된 성적 욕구가 충족되는 일련의 배열'이라는 섹스/젠더 시스템을 통해 사회적으로 조직된다. 섹스/젠더 체계는 사회적이고 역동적이다. '섹스/젠더 체계는 인간 정신의 초역사적 소산은 아니다. 그것들은 역사적인 인간 활동의 산물이다.' 사회적 재생산의 프레임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섹스/젠더시스템을 생산하는 '역사적 인간 활동'을 검토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를 제공한다.

 

존 데밀리오(John D’Emilio)는 사회적 재생산의 관점에서 게이와 레즈비언의 존재를 분석하는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했으며, 사생활(가정에서 무급 노동을 통한 재생산)과 공적인(사회적 생산의 영역에서 임금노동) 것의 구별이 동성애가 삶의 한 방법으로 등장할 가능성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친족 관계에 바탕을 둔 동성애 관행이 인간 사회의 스펙트럼에 걸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반면, 자본주의의 특정한 관계는 친족과 사회적 생산의 분리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전문화된 레즈비언과 게이 정체성을 가능하게 했다.

 

“개인들이 상호의존적인 가족 단위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임금 노동을 통해 그들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에만, 동성애적인 욕망이 개인 정체성으로 통합되는 것이 가능해졌다 - 이성애적 가족 밖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능력과 자기 자신의 성에 대한 매력에 바탕을 둔 개인적 삶을 구성하는 능력에 바탕을 둔 정체성 말이다.”

 

동성애는 사회적 생산의 공간과 구별되는 사적인 영역에서 나타났다. 1969년 스톤월(Stonewall) 봉기에서 시작된 동성애자 해방 운동은 새로운 방식으로 공적 공간을 차지하였다. 이 '공공'과 '사적'의 분명한 표현은 사회적 재생산의 특성에서 파생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과정은, 사회적 생산은 '공공'으로 가정 재생산은 '사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중심을 특정한 성격이 만들어진다.

 

공식적으로 자유로운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살아있게 하고 다음 세대를 양육해야 하는 개인적 책임이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은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이것을 자기 보존과 번식을 향한 노동자들의 욕구에 맡겨도 무방하다'고 썼다. 노동계급 가정은 여성의 책임으로 불균형적으로 부과되는 다양한 가사노동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임금(또는 사회적 지원과 같은 임금 대체물 또는 '노점, 성매매를 비롯한 독립적 가내 생산'과 같은 기타 수익 활동)을 사용한다.

 

실제로, 고용주와 국가 정책 입안자들은 단순히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책임을 민영화해서는 여전히 그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노동계급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국가 정책 입안자들은 서민 가구를 자신들의 장치에 맡기는 것이 건강하지 않고, 부도덕하며, 궁극적으로 임금 노동 체제에 저항하는 지역공동체를 만든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재생산 권리를 위해 투쟁함에 따라, 부분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주도되어, 국가들은 공중 보건에서 의무 교육, 실업 보험에서 공공 주택에 이르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는 것과 함께 사회 정책을 통해 사회적 재생산을 부분적으로 국유화했다.

 

복지국가는 주로 가정에서 무급 재생산 노동을 수행하는 돌봄전담자로 여성을 채용하는 성별 분업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복지 국가 혜택과 서비스에 대한 여성의 접근은 주로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성적 규제는 성매매와 남성 동성애를 불법으로 만드는 법을 통해 사회 정책의 일환으로 발전되었다. 사회정책과 성적 규제는 공식적으로 가정의 사적인 영역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아래 성적 자유를 위한 운동은 역사적으로 그들의 요구에 '사생활의 권리'을 포함시켜 왔다.

 

예를 들어, '프라이버시 권리 위원회'는 토론토에서 1982년 게이 목욕탕에 대한 경찰의 급습과 게이 남성들의 대량 체포 이후, 그 전투적 동원의 핵심 조정 기관이었다. 사회적 재생산의 자본주의적 관계에 기반을 둔 공공과 사적인 것의 배열은 성적 정체성과 자유를 둘러싼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커밍 아웃'이라는 아이디어는 사적인 영역에서 그것이 발전한 공적인 공간으로 동성애를 끌어내기 위한 헌신 그 자체이다.

 

사회적 재생산, 섹슈얼리티 및 자본주의적 구조 조정

 

동성애의 구성은 사회적 생산의 공적 영역과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 사이의 구별을 포함한 자본주의의 부상에 의해 야기된 사회적 재생산의 변화에 의해 가능해졌다. 동성애의 후속 역사는 자본주의적 구조조정의 과정을 통한 생산과 재생산의 매트릭스 변화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왔다. 나는 여기서 상세한 역사를 말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적 구조조정과 성적 형성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사용하고 있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일련의 축적 체제를 통해 성적 형성이 변화하는 방식을 지도로 그리면서, 자본주의적 구조조정이 섹슈얼리티 분야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었다. 드러커는 고전적 제국주의(1870년대~1930년대), 포드주의(1930년대~1980년대), 신자유주의(1980년대부터)의 세 가지 축적 체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각의 축적 체제는 국가와 기업의 수준에서 일련의 계급지배 전략, 억압과 착취당하는 이들 간의 동원의 목록, 제국주의 관계의 특정한 조직화, 가정이나 가족 또는 기타 구조를 통해 삶을 유지하는 구체적 방법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각각의 축적 체제와 관련된 독특한 '동성(same-sex) 형성'이 있었다.

 

동성애와 이성애적 정체성에 대한 개념은 고전적 제국주의 시대에 처음 전개되었는데, '특히 이성애적 가족 구조와 이성애적 로맨스의 개념은 사회적 재생산과 소비의 중심이 되었다.' 이 직장과 가정의 조직화는 산업화의 강화, 세계 제국주의 프로젝트의 통합, 도시화의 증가와 함께 발전했다. 더불어, 이러한 변화들은 동성애 정체성이 대부분 젠더 질서 거부자들에게만 국한되는 '역전된 지배' 체제를 만들어 남성적 여성과 여성적 남성이 동성애 공동체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반면 남성적 남성과 여성적 여성은 이성애 결혼과 동성 교제를 결합할 수도 있었다. 동성애 관계는 부치(남성역) 레즈비언과 팸(여성역) 레즈비언 사이에서 성별, 인종 및/또는 계급에 따라 양극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동성애 관계의 젠더적 양극화는 또한 이성애자 가정을 형성한 더 넓은 패턴의 일부였다. 스테파니 쿤츠(Stephanie Coontz)는 이 시기에 '가족 내에서 주입되고 유지된 노동의 성적인 분열이 노동의 사회적 분열을 조직하기 위해 그 이상으로 확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여성과 남성은 비록 인종, 계급, 식민지 지위에 따라 다양했지만, 사회적 생산이든 재생산이든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복지 국가의 부흥과 민족독립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로 특징지어진 포드주의 체제(1930~1980년대)는 동성 관계에서 '게이 우세적' 조직화를 만들어냈다. 이 모드 속에서 레즈비언/게이 정체성은 주로 젠더화된 정체성보다는 욕망의 지향에 의해 정의되었고, 관계는 젠더 구분에 따라 양극화될 가능성이 적었다. 이러한 동성 형성의 변화는 보다 적게 젠더적으로 양극화가 되었지만 여성의 불균형적인 가정 재생산 책임에 따라 구축된 이성애규범성(heteronormativity)의 새로운 패턴과 관련된 보다 일반적인 젠더적 탈양극화의 일부였다.

 

1980대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의 부상은 '동성애규범적-지배'(homonormative-dominant) 구조와 관련이 있다. 이 구조 안에서는 어떤 곳에서는 특정한 동성 관계가 공식적으로 승인되어 이러한 권리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예컨대 결혼한 레즈비언/게이 커플)과 그렇지 않은 다른 퀴어들(queers) 사이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더 많은 여성들이 노동의 재조직화와 임금의 정체 또는 감소 상황에 의해 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보게 됐다. 그러나 여성들은 가사노동에 대한 주된 책임을 계속 지고 있었다. 그 결과는 특히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의 격렬한 조합에 직면한 엄마들에게 있어 특별히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역주 - 성행위나 관계 형성의 특정한 이성애적 관행이 모든 에로틱하고 친밀한 표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널리 퍼져있는 사회적 가정이 ‘이성애규범성’이라면, 이러한 지배적인 이성애 모델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단순한 변형을 동성간의 관계에 적용하는 것은 ‘동성애규범성’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공식적인 성 평등, 레즈비언/게이 권리와 주로 무급 노동의 분업에 근거를 둔 실질적인 불평등이라는 모순적인 조합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또한 불평등한 임금과 여성의 공적 생활에 대한 완전한 참여를 가로막는 장벽을 포함했다. 노동 분업이 비교적 공평한 이성애 가정에서도, 아이가 생기면 성별화된 노동 분업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다. 보니 폭스(Bonnie Fox)는 '너무 많은 요인들이 이성애 커플들에게 그들의 일과 책임을 나누도록 강요해서 성별에 따른 분업이 불가피해 보인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아이들이 가정에 나타나면서 성별에 따른 분업을 일으키는 광범위한 문화적, 물질적 요인을 논의한다.

 

욕망, 젠더, 그리고 노동의 분업

 

각각의 규범적 배열을 가진 특정한 성적인 체제는 자본주의 구조조정의 역사에서 주어진 순간에 사회적 재생산의 조직이라는 맥락에서 발전해 왔다. 젠더 관계는 단순하게 노동의 분업 이전부터 존재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노동의 지배적인 분업을 부여한 차별화된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도로시 스미스(Dorothy Smith)는 여성들이 특정한 형태의 체화(體化)된 돌봄 노동에 집중하는 것이 특정한 근거의 인식과 존재 방법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남성들은 부양 관행으로부터 상대적 자유로움에 기초하여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추상적인 행동 방식에 완전히 참여하려면 구체적이고 특정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자유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내재화된 업무 경험은 세상을 아는 방법의 일부가 되고, 노동의 분업화는 인식과 행동의 다른 목록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노동의 분업을 통한 젠더의 구성은 특정한 노동의 형태와 관련된 다른 형태의 규범성을 만든다.

 

핼버스트람(Halberstram)은 노동을 통해 여성의 남성다움이 형성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어떤 시골 여성들은 도시 기준에 의해 남성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고, 그들의 남성다움은 단순히 그들이 다른 여성들보다 더 많은 육체노동에 종사하거나 매우 다른 성별 기준을 가진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여성의 남성다움에 대한 레퍼토리는 ‘그녀가 원하는 만큼 그녀가 한 노동의 결과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성적 비순응성과 성적 지향 사이에는 단순한 관계가 없다. 그러나 젠더, 섹슈얼리티, 욕구 사이의 관계는 너무 자연화되어 있어서 우리는 심지어 급진적 분석에서도 흔히 그것을 문제로 만들지 못한다. 탐신 윌턴(Tamsin Wilton)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사이의 자연화된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성적 행위의 압도적 다수는 전혀 재생산(번식)의 의도가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배우자의 성별을 전제로 한 강한 에로틱한 선호는 설명이 필요하다.' 성적 활동과 재생산의 분리는 자본주의 발전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러한 분리를 고려할 때, 젠더 이분법의 나침반을 중심으로 에로틱한 욕망이 지향되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지 않다. “생물학에서처럼 흐릿하고 부정확한 이 이분법은 사회 문화적 흔적의 중요성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개인이 에로틱하게 즐겁고 자극적이거나 불쾌하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남자에게서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여자에게서 찾을 수 있는지 확실히 식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 영역에서 젠더 이분법의 지속적 우선성은 설명이 필요하다. 사회적 재생산의 프레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구 구축에서 젠더 이분법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중요한 측면을 기여하며,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구성하는데 있어 차별화된 노동의 역할과 강탈의 위계가 강조된다. 노동의 특정한 분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젠더 관계의 특성은 섹슈얼리티의 윤곽을 형성하는 데 특히 중요했다.

 

젠더 규범성은 시간을 넘어서 모든 사회에 적용되는 단일한 기준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적 조건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앤 베일리(Anne Balay)는 인디애나에 있는 철강 공장에서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풍부한 연구에서 여성들이 지배적인 남성적 규범에 동화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직장에서 적응하려면 남성적이어야 하고,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며, 징징거리지 않고 혹독하고 위험한 노동조건을 견뎌야 한다.'

 

이들 철강 공장 내의 노동의 리듬과 성별에 따른 패턴은, 남성다움 문화에서 노출의 위험성과 직장 밖에서의 삶에 대한 대화에 대한 스트레스 사이에 끼인 어려운 노동 환경 속에서 동료애를 만들면서 일이 더딘 순간에 시간을 채워가는 많은 LGBTQ 노동자들에게 특별한 형태의 벽장을 만들어 주었다. '기본 제철 공정에서 험담, 잡담, 그리고 협력의 작업 전통은 퀴어들을 보이지 않게 하고 종종 소외되고 고립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종료의 성별화되고 성애화된 직장 문화는 단순히 지배적인 젠더 규범의 결과물이 아니라, 때로는 경영 전략의 특징으로 의도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레첵(Lewchuk)은 대량생산 체제가 확립되고 있을 때 특별히 남성적인 노동력에 대한 포드 자동차 회사 경영진의 의도적인 투자를 조사했다.

 

그 회사는 남성다움에 대한 자부심을 고통, 소음, 더러움, 단조로움을 견딜 수 있는 능력과 결부시키기 위한 캠페인을 개발했다. 대량생산 이전에 남성다움은 종종 대량생산 과정에서는 작은 역할을 하는 특정한 수공예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관련이 있었다. 대량생산으로의 전환은 부양가족을 돌보고 불만 없이 참을 수 없는 노동 조건을 견뎌내는 능력과 관련된 새로운 형태의 남성다움을 발전시키는 데 경영진이 주력하도록 만들었다.

 

나날의 노동 관행은 젠더적 자아뿐만 아니라 섹슈얼한 자아를 형성하는데 중요하다. 캐롤린 스티드먼(Carolyn Steedman)은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경험이 그녀의 성애적 형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그 세월 동안 내 몸은 죽었고, 내 손을 잡은 작은 손가락들, 내게 기대어 그녀의 책을 배우고 읽는 아이의 따뜻함이 어떻게든 다른 모든 몸들과의 만남을 막았다.’ 특정 형태의 돌봄 노동과 관련된 친밀성과 많은 산업적 노동과 관련된 구획화된 딱딱함 사이의 대조는 젠더적이고 섹슈얼한 형상화 측면에서 매우 양극화된 감성을 초래할 수 있다.

 

윌튼(Wilton)은 그녀가 인터뷰한 이성애자 여성들은 흔히 ‘남성, 이성애자, 결혼에 대한 기대치를 극도로 낮게 표현했다고 보도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남자가 폭력적이거나 술에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와 결혼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여기에는 제한된 성애적 기대치가 포함된다. “남성의 성관계 숙련도에 대한 기대도 많은 여성들에게 낮았고 남성의 육체적 존재 - 즉 그들의 신체, 위생, 개인적 습관 - 가 즐거움의 원천이 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위생과 개인적 습관의 기준 등 특정한 육체적 존재를 만들어 내는 젠더화된 코드는 남성다움의 영원한 특징이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 프레임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노동·생활 방식에 기반을 둔 구체적 패턴이다. 그리고 이성애규범성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 강탈의 위계를 중심으로 조직된 노동의 특정 부문 내에서 자신의 위치에 의존하는 육체적인 관행에 기초한다.

 

이성애규범성은 인종화된 노동의 분업과 강탈의 위계질서를 반영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20세기 초 성적 자유의 영역에서 중요한 혁신가였으며, 부분적으로는 노예 해방 투쟁의 역사적 유산 때문이었다. 노예 제도는 일상화된 폭력, 성폭행, 개인적 관계의 파괴에 기초했다. 노예해방은 개인적 영역에서는 일정한 자유를 만들어 냈지만, 인종주의의 지속성 때문에 경제적 또는 문화적 기회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는 '그러므로 섹슈얼리티는 해방이 행해지고 그 의미를 표현하는 첫 번째 영역 중 하나이다'라고 썼다.

 

사회적 재생산의 조직화에서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의 분할에 기초하여 이성애규범성(나중에는, 동성애규범성)이 인종화되었다. 로데릭 퍼거슨(Roderick Ferguson)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느냐에 대한 인종적 차이가 가정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점점 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만들게 되면서, 가족은 그러한 차이점들의 지표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가족 형태는 규범적으로 확립된 특정한 계급 기반의 백인 모델과는 다른 경향이 있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족은 노동의 성격, 이주의 경험, 분리의 형태로 볼 때 비이성애규범적인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은 이성애규범적 기대와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유급 고용에 불균형적으로 종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의 퀴어스러움은 비이성애적 가족 형태와 관련하여 조직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동성애는 이성애적 대립상과 달리 이성애에 대한 거부감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이성애규범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비슷하게, 이주자들은 종종 비이성애규범적 가족에서 살고 있는데, 종종 그들이 부분적으로 송금의 전달로 지탱되는 서로 다른 지리적 위치의 가정에 흩어져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슈 퍼거슨(Sue Ferguson)과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는 우리에게 '노동력 이주가 수억 명의 노동자 계급 가족의 재생산에 중심이 되는 복잡한 패턴, 즉 누군가의 복지가 임금 송금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성애규범성과 동성애규범성의 정치학은 따라서 노동의 분할과 강탈의 위계에 기초한다. 사실, 성적 자유에 대한 바로 그 생각은 즐기기 위해 자유롭게 선택하고, 동의 또는 동의하지 않는 자율적 성 행위자와 연관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젠더화 및 인종화된 노동의 분업과 강탈의 체제 안에 위치한 자율적 개성의 특정 모델에 의존한다.

 

사라 아흐메드(Sarah Ahmed)는 성적인 자유에 대한 이러한 관념을 운동, 즉 얽매이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는 흐름에서 논의한다. '운동의 이상화, 또는 운동의 집착으로의 전환은 이미 같은 방식으로 자유롭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배제에 달려 있다.' 차별화된 강탈의 체제와 노동의 분할은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자율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적 자유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다른 사람들, 퀴어로 읽을 수 없는 애착을 가진 사람들, 또는 실제로 반규범성을 영구적 지향으로 유지하는 "위험"을 뒷받침할 (문화적, 더구나 경제적) 자본이 부족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배제할 수 있다. 자율성과 애착 부족이라는 측면에서 성적 자유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남성다움, 백인성, 부와 깊은 관련이 있다. 남성과 비교했을 때, 여성들은 삶의 많은 부분에서 다른 관행을 요구하는 돌봄의 책임성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얽매여 있다.

 

노동의 지배적 분할은 서로 다른 돌봄의 책임을 가진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을 이동시키고 그들을 유급 고용에 다르게 투입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레즈비언과 게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도시 공간을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밴쿠버에서 레즈비언과 게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로와(Lo)와 힐리(Healy)는 '레즈비언 공간이 게이들의 영역과 다를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숨겨지고 훨씬 덜 특권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구체적 이유가 있었다. 레즈비언들은 남성과 여성의 전반적 소득 차이를 감안해도 소득이 더 낮은 경향이 있고, 그들의 가정에서 아이를 키울 가능성이 더 높으며, 이것은 장소 선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공공 장소에서 폭력과 폭행의 위험에 대한 더 큰 우려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성적 정체성과 성적 관행에 대한 맥락을 설정하는 사회적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라포스키 케네디(Lapovsky Kennedy)와 데이비스(Davis)는 뉴욕 버팔로의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대한 그들의 역사적인 연구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은 ‘흑인 공동체에 확고히 자리잡는 경향이 있었고, 1950년대에 그들의 사회생활은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 주도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흑인 여성들은 레즈비언 술집의 현장에 참가하기보다는, ‘억압에 저항하는 자기 활동의 강한 흑인 전통’에 기반을 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집세마련 파티와 뷔페 식사를 연상시키는 활기찬 하우스 파티’를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폭력, 강탈 그리고 섹슈얼리티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이 그들 자신의 몸을 소유한다는 점에서 계급 사회들 사이에서도 독특하며, 내재된 자율성에 기반을 둔 섹슈얼리티의 개념화와 실천의 기초를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는 즉시 자본가 계급의 구성원들이 전유한 주요 생산 자원의 통제로부터 '자유'라는 강탈과 짝을 이룬다. 사람들은 그들의 몸과 삶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로부터 그들을 소외시키는 강탈의 위계라는 맥락 속에서 성적 정체성과 관행을 발달시킨다.

 

섹슈얼리티는 자유와 강박의 지렛대에서 나타난다. 지난 50년 동안 캐나다와 세계 북반구의 다른 지역에서의 투쟁은 평등권, 성적 이슈에서 문화적 개방성, 비록 불균등하지만 피임 및 낙태에 대한 교육 접근성 향상의 형태로 성적 자유에서 실질적 개선을 보였다. 그러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진정한 경험은 또한 여성과 젠더 비순응주의자들에 대한 폭력, 인종주의, 성폭행, 괴롭힘, 무주택, 시간에 쫓김, 건강 악화, 파트너로부터 강제적 분리(취업, 이주 또는 대량 투옥으로 인한) 그리고 많은 다른 형태의 부자유에 의해 프레임이 형성됐다.

 

강탈은 결정적으로 섹슈얼리티를 위한 지형을 형성한다. 마르크스는 강탈을 그들 자신의 신체들을 제외한 생산적 자원들에 대한 통제에서 노동계급을 분리하는 폭력적 몰수 과정으로 생각했다. “이 새로운 자유인들은 그들이 모든 생산 수단을 빼앗긴 뒤에야 스스로를 판매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몰수인 이 역사는 인류의 연대기에 피와 불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사회적 재생산의 틀 안에서 작업하면서 실비아 페데리치(Sylvia Federici)는 마르크스가 제안한 것보다 더 지속적이고 차별화된 과정으로 강탈에 대한 설명을 개발했다. 강탈에 대한 그녀의 개념은 착취 계급에 의한 생산수단의 몰수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구성원들 자신의 신체에 대한 효과적 통제권을 박탈하기 위한 조치들로 구성되었다. 차별화된 이러한 조치들 속에서 여성들은 특정한 방법으로 그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당했다. 따라서 페데리치는 시초축적의 폭력이 자본주의의 지속적 특징이라기보다는 초기현상이라는 생각에 도전했다.

 

“지금을 포함한 자본주의 세계화의 모든 국면에서 시초축적의 가장 폭력적인 측면의 귀환이 수반되어 왔으며, 이는 토지에서 농민의 계속된 추방, 세계적 규모의 전쟁과 약탈, 여성의 지위하락은 모든 시대에 자본주의 존립의 필요조건이었음을 보여준다.”

 

페데리치는 강탈을 차별화된 폭력의 체제, 탈구, 노동의 분할을 통해 종속의 위계질서를 만드는 지속적 과정으로 규정한다. 그녀는 시초축적이 '여성의 노동과 여성의 재생산 기능을 노동력 재생산에 예속시키는 새로운 성적 분업'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시초축적 과정은 노동의 분할은 넘어서 '여성이 임노동에서 배제되고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에 바탕을 둔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를 만들어냈다. 마지막으로, 이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신체의 기계화와 그것의 전환, 여성의 경우에는 새로운 노동자들을 생산하는 기계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산업적 구현체를 만들어냈다.

 

차별화된 강탈의 메커니즘 중 하나는 천대(abjection), 즉 인간 신체의 특정 범주를 비하하는 것이다. 로즈마리 헤네시(Rosemary Hennessey)는 '일부 신체들을 평가절하할 때, 천대는 가치가 더 적은 객체 즉,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관계에서 그들 스스로 더 많은 것을 박탈하는 객체를 배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천대의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은 재생산적 노동, '즉, 그것이 무급이든 유급이든 임금 노동자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급식, 보육, 노인 돌봄, 가사노동 등의 돌봄 노동'에 대한 분명한 평가절하다. 보살핌에 대한 불균형적 책임은 직접적으로 여성의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에 기여하는데, '어머니의 일과 가사노동은 유급 노동과의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성적 동의는 동등한 자율 행위자들 간의 합의라는 계약상의 용어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차별화된 강탈은 젠더화, 인종화, 식민지화, 성애화 등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는 행위자들의 위계질서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인종화는 여성에 대한 천대의 역사적 그림을 복잡하게 만든다.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의 삶은 가정의 영역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의 일부로서 가차없고 가혹한 노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육하는 어머니, 온화한 동반자, 남편을 위한 가정부로서 여성의 구실이 강조돼 왔다는 19세기 페미니즘의 진화하는 이데올로기로 판단할 때, 흑인 여성들은 사실상 예외였다.'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노동 분업에서 이러한 위치는 비이성애규범적인 가족 구성과 섹슈얼리티 패턴을 낳았다.

 

강탈은 폭력과 강박에 사로잡힌 섹슈얼리티 체계를 낳는다. 아드라 심슨(Audra Simpson)과 앤드류 스미스(Andrea Smith)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젠더 폭력과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제는 정착민-식민주의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구성한다.' 정착민-식민주의의 첫 번째 전제조건은 '토지 원주민의 토지와 자기결정권에 대한 강탈'이었다.

 

콜트하드(Coulthard)는 '현재의 식민지 및 자본주의 사회관계의 재생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강탈의 지속적인 역할'에 주목한다: 젠더적 폭력은 강탈의 위계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강간 문화도 예외는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여성들 그 자신의 소유인 신체에 대한 효과적 통제를 박탈하는 일상화된 폭력에 깊이 자리잡고 있으며, 다른 형태의 종속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정치적 수감자였던 팔레스타인 여성들에 대한 연구에서 나흘라 압도(Nahla Abdo)는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여성들을 통제하고 그들의 정치적 역할을 제한하기 위해 특정한 젠더적 폭력의 제도화된 과정이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그러한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서 여성의 몸을 표적 삼는다. 강간과 강간미수 등 모든 형태의 성적 괴롭힘과 굴욕은 여성의 투쟁 참여를 저지하기 위해 사용된다.’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폭력은 또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을 겨냥한 특정한 형태의 강탈을 형성했다. 흑인 여성들에 대한 제도화된 성적 학대의 패턴이 너무나 강력해서 노예제의 폐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실제로 제도화된 성폭행과 학대는 구체적인 폭력 행위의 순간을 넘어 만연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로리 페니(Laurie Penny)는 강간 문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것은 정확히 공포에 관한 것이고, 여성들이 공공의 삶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에 관한 것이다.' 퀴어 낙인찍기도 공공장소에서 비슷한 폐쇄성을 만들어내서 심지어 커밍아웃한 사람들도 폭력을 가져올 수 있는 가시성을 피하기 위해 자기검열할 수 있다.

 

이러한 폭력 구조는 분류 체계에 반영된다. 히마니 배너지(Himani Bannerji)는 평가절하된 사회적 지위와 관련해 오명을 씌우는 용어들이 '실제로 굳어진 관행과 폭력의 형태 또는 지배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호모새끼(faggot)'이나 '개같은 년(bitch)'와 같은 욕설의 고통은 그 말이 주는 상처뿐만 아니라, 그 언어를 위협과 결부시키는 폭력 행위와의 연관성에 있다.

 

강제적인 젠더 체제는 그것의 표준화로 보이지 않게 된 폭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일종의 강탈의 형태로 작동한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은 이 표준화되고 강압적인 체제가 운영되는 방법의 핵심 지표 중 하나이다. '만약 당신이 트랜스젠더일 경우, 당신은 보호시설 격리에서 폭력배 강간, 구타에서 아동 면접권 차단까지 끔찍한 사회적 처벌을 받게 된다.'

 

평등권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러한 폭력적인 젠더 정책의 종료는 트랜스 권리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신시아 아루자(Cinzia Arruzzza)는 '그러므로 젠더를 해체하거나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어떤 집단적 주체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강압적인 이성애 규범과 남/녀 이분법을 뒷받침하는 물질적 기반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별화된 강탈의 과정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영역에서 강압적 규범을 위한 물질적 기반의 결정적 부분이다.

 

섹슈얼리티와 체화(體化: Embodiment)

 

사람들은 구체적인 형태의 유급 또는 무급 노동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자신의 몸에 대한 특정한 감각을 발달시킨다. 체화(體化)는, 강제이주부터 성폭력 또는 삶의 필수요소가 상품화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박탈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사회적 재생산의 프레임(틀)은, 삶이 만들어지는 사이클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 체화를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성욕은 종종 역사를 벗어난 육체적 충동으로 이해된다. 탐신 윌튼(Tamsin Wilton)은 이러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이 매력(attraction)이라는 내재된 성격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동물과 달리, 인간의 물질성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에 의해 급진적으로 조정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욕망을 육체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갖는 것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육체적 경험은 생물학이나 문화적 지식으로 전락할 수 없고, 항상 종합체이다.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접촉의 데이터'를 '보는 언어'로 번역하거나 그 반대로 번역하지 않는다. 나는 내 몸의 한 부분을 하나씩 모아놓지 않는다. 이 번역과 통일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위해 한번 수행된다. 그들은 내 몸이다, 그 자체다. 섹슈얼리티는 이 종합체에서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이 종합체 내에서 성적인 경계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조율된다. '신체의 특정 영역은 어떤 문화에 의해, 혹은 심지어 어떤 문화 안에 있는 몇몇 개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며 성애화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인들의 성적 문화는 지배적 규범에 의해 구성된 섹슈얼리티의 한계에 도전한다.

 

“한편으로, 장애의 낙인은 성관계를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장애인들의 성적 활동은 성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한 규범적인 가정을 반드시 따르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 사실 모두 장애인이 성적 존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장애인을 위한 해방은 규범적으로 구성된 성적 한계에 대한 적극적 도전을 수반한다. 몰로우(Mollow)는 장애인의 섹슈얼리티는 '부족(순결, 무능, 기능장애)'과 '과잉(특이함, 기묘함, 도착)'을 결합한 이중적 모순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규범적으로 잉태된다고 주장했다. 이 이중 모순의 결과는 '장애인 섹슈얼리티의 어떤 표현도 낙인을 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다.

 

성적인 경계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화된 실천과 사회적 투쟁을 통해 역사적으로 구성된다. 조지 챈시(George Chauncey)는 '성적인 것과 비성적인 관계 사이에 확립된 경계는 문화적으로 결정되며, 그 경계선의 구분을 둘러싼 투쟁은 섹슈얼리티 역사의 중심적인 측면이다'라고 썼다.

 

사회적 재생산의 프레임은 역동적인 젠더 관계와 사적, 공적의 특정한 개념과 관련해 섹슈얼리티가 형성되어 온 변화된 방식을 파악한다. 삶의 성애적인 조직화는 다른 생명 활동들에서 자유롭지 않고, 다양한 일상적 관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강탈의 위계와 일치하는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노동 분업은 특정한 종류의 육체적 경험을 생성한다.

 

상품화는 가격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들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시장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자원, 상품, 서비스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하는 자본주의 내부적 강탈의 일종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통한 상품화의 심화된 영향은 체화(體化)의 경험과 섹슈얼리티의 조직화에 근원적 영향을 미쳤다.

 

신자유주의는 상품화를 개인적 삶과 가정 살림의 공식적인 '사생활' 영역으로 훨씬 더 깊이 밀어넣었다. 1960년대 이후의 성 정치는 이러한 강화된 상품화의 영향을 받았다. 퀴어 가시성은 특정 술집에서의 술자리에서부터 의류와 몸치장을 포함한 도발적인 특정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상품의 소비를 중심으로 조직화된다.

 

부유한 레즈비언과 게이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 있어 소비의 역할은 가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눈에 띄지 않게 한다. 실제로 마이클 워너(Michael Warner)는 스톤월 이후의 게이 문화는 상품화에 너무 깊이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가 그것을 이해하거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진전시키는 데 효과적인 지침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상품화는 소외의 한 측면이며, 인간의 생명 활동이 본질적으로 충족되기보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노동력의 상품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의 본질적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임금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에너지를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의 체제에 의해 소비하면서 특정한 형태의 굴욕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는 노동 속에서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불행하며, 자신의 육체적이고 정신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달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굴욕적으로 만들고 마음을 망친다.’ 자본주의 아래의 섹슈얼리티는 굴욕당한 몸과 망가진 마음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섹슈얼리티는 자신의 신체를 소유함으로써 강탈을 통한 종속관계를 맺는 모순된 장소에서 발생한다. 상품화는 이 과정에 기여한다. 상품 물신화를 통해, 주체성은 인간으로부터 유통되는 그들의 상품으로 옮겨지는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는 물신화된 상품들의 명백한 힘을 묘사했다. '거기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사회적 관계는, 그들의 눈에는 사물들 사이의 환상적 관계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상품들은 인간의 삶을 위한 조건을 설정해 주는 활동적 대리자인 듯이 보인다. '노동의 상품화라는 비밀스러운 곱절화 속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독립성, 자율성, "삶"의 일부를 차지하기 위한 희망으로 상품에 공감한다.' 상품처럼 되기를 열망하면서, 사람들은 삶에 대한 무기력한 열망으로 스스로를 굴욕적으로 만든다.

 

“한때 인간이 영혼, 악령, 신으로 가득 찬 자연 세계를 스스로 닮아서 권력을 추구했던 곳에서, 오늘날은 인지적 과정이 철저하게 기술의 지배, 도구적 이성, 상품 형태에 따르는 무기력한 물질로 구성된 환경을 모방한다.” 상품 물신화는 성애화의 과정, 사물에 대한 섹슈얼리티의 투영, 그리고 육체의 탈성애화를 통해 섹슈얼리티의 영역에서 발현된다.

 

성적인 이미지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반면, 실제 성적 활동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친밀한 파트너들조차 자신의 에로틱한 욕구를 논의하고 이를 어떻게 충족시킬지를 함께 계획하는 능력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 로리 페니(Laurie Penny)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 에로틱한 충동에 대해 깊이 혼란스러워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통치체제의 중심에서 금욕이 설교되는 동안, 그것은 불감증의 살균된 아지랑이로 뒤틀린 꾸며진 모델들과 연예인들의 이미지들로 우리를 폭격한다.‘ 그 결과, '이 개념적으로 너무 성욕 과잉의 세상에서 자란 세대들은 어떻게 섹스를 해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고, 우리는 우리의 부모들보다 더 많이 그것을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관련 속에서 강화된 상품화는 네페르티 타디아르(Neferti Tadiar)가 묘사한 것처럼 ‘젠더화된 섹슈얼리티가 국가 경제의 조직화 원리와 국제 사회에서 그들의 정치적 지위의 상징이 되는 리비도적인 신세계 질서’를 창조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섹슈얼리티의 투영을 밀어냈다.

 

이 새로운 세계 질서는 성별화되고 인종화된 노동 분업만큼이나 강탈의 위계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타디아르는 이 리비도적 질서 속에서 '필리핀은 다국적 자본과 미국 정부와 군대라는 고객의 요구와 욕구에 부응하는 호스티스 국가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섹슈얼리티의 투영이 너무 강렬해서 사람들은 스스로 상품화하기를 열망한다.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작업에 기반해서 주장한다. '너무나 중요한 것은 상품의 에로틱화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은 은밀하게 대중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상품이 되길 원한다.'

 

상품이 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몸을 뒤에 남겨두려고 한다. '모든 선에 걸쳐서, 육체는 잊혀진다.' 육체를 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제로 모든 에로틱한 행동은 그것을 정해진 것에서 면제할 특별한 이유가 정해지지 않는 한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는 성적 부정성의 특정한 형태에 기초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유통되는 상품들을 모방하려고 시도하면서 그들의 몸을 생산물로 만들려고 한다. 사람들은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면도, 향수, 문신, 염색, 다이어트, 보충, 피어싱, 옷으로 자연으로서 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21세기 초에, 육체로부터의 이 이동은 가상화(virtualisation)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리 자신을 유통시키려 한다. 데이비드 맥낼리는 이것을 '삶을 포기하고, 우리의 몸을 생산하고 전시하는 수단으로 만들어, 즉 우리 자신이 실제로 상품이 됨으로써 행복을 약속받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육체를 망각하는 것은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의 몸은 자연의 일부이며 문화의 산물이지만,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오직 세련되고 생산적인 신체만 가치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육제적 부정성은 자연에 투영되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이 처리할 수 있는 파괴적인 생산성의 도구로서 자연을 대했다'고 할 수 있다.

 

육체의 굴욕은 젠더화되고 인종화되고 성애화된 강탈의 체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섹슈얼리티와 대상화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확립한다. 현대 남성성의 한 축은 여성의 대상화이다. '여성에 대한 의례적인 비인간화는 남자아이들이 유대감을 배우는 방법의 일부이며, 그들이 남자라는 것을 서로에게 증명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섹스는 여전히 폭력과 강간을 그 폭력적 논리의 극단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적 충동은 전적으로 남성의 것으로 이해된다. 섹스를 추구하거나 요구하는 여성들은 남성적이고 부자연스럽다’는 사회로 이어진다. 캐나다에서 원주민 여성들에 대한 학대와 살인 규모에 예를 들어서 비추어 볼 때, 인종차별과 식민주의는 이것을 더욱 더 밀어붙인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관련된 육체적 인식과 성애화는 동시에 소외된 노동의 굴욕, 젠더와 계급의 강탈, 인종화와 식민화, 그리고 상품의 물신화를 극복하는 성적 해방 과정을 구상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케빈 플로이드(Kevin Floyd)는 섹슈얼리티의 구체화가 어떻게 해방의 가능성과 연관되어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산업화, 도시화, 사회적 이주 과정과 마찬가지로, 성적 욕망의 구체화는 성적으로 비규범적인 담론들, 관행들, 현장들, 주관성들, 상상력들, 집단적 형성과 집단적 열망들의 복잡하고 가변적인 역사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마무리

 

사회적 재생산 프레임은 변혁적인 성적 해방의 정치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무기를 제공한다. 성적 해방은 단순히 공식적 합법성의 형태로 속박으로부터 형식적 자유로 구성될 수가 없고, 진정한 선택을 위해서는 권력과 자원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성적 해방은 형식적 평등권을 넘어 우리의 몸과 삶에 대한 통제를 훼손하는 차별화된 강탈의 체제에 대한 변혁적 도전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섹슈얼리티는 우리 주변의 세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만드는 작업의 일부이며,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하고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켜 준다. 사회적 재생산 프레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의 형성과 삶을 만드는 일을 조직하는 인종화되고, 젠더화되고, 성애화된 위계질서와 노동의 분할에 대한 풍부한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 자신의 몸들에 대한 바로 그 경험은 이러한 권력 관계와 노동을 조직하는 방법에 기초한다. 그러한 구현과 성적인 자유를 위한 투쟁은 단지 좁게 정의되는 성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 식민주의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집단적 회복의 문제이다.

 

(기사 등록 20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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