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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미얀마와 중국/ 혐오의 시대/ 재보선 이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4. 28.

전지윤

 

 

● 중국은 미얀마 군부에 대한 지원과 학살에 대한 방조를 중단하라

 

지난주에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 모임’은 미얀마 군부 테러 집단의 우두머리인 흘라잉의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각국 대사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여기엔 가지 못하고 그날 점심 시간에 중국대사관 릴레이 1인시위에 동참했다.

 

사실 미얀마 쿠데타와 중국의 구실은 단순하지는 않다. 중국이 쿠데타를 사주했고 군부를 조종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중국도 쿠데타가 반갑진 않고, 군부와 관계도 좋지만은 않다. 반면 미국과 서방이 군부와 쿠데타의 일관된 반대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둘 사이엔 관계 개선 시도가 있어왔고 특히 서방 대기업들은 군부와 긴밀한 비즈니스 관계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쿠데타 규탄과 군부 제재 시도에 앞장서 어깃장을 놓고 있는 게 명백하다. 반면 미국과 서방은 어쨌든 쿠데타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며 군부에 대한 제재를 찬성하고 있다.

 

이 차이는 중국과 미국의 이해와 필요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세워 중국을 압박하고 봉쇄하면서 이 지역에서 패권과 동맹을 강화하려 한다. 반면 중국은 그것에 대응하면서 미얀마와 연결된 전략적 요충지와 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지키고자 한다.

 

미국이 전통적인 세계적 패권국가이고 강력한 하드파워를 가진 국가로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대의와 명분에도 많은 신경을 기울이는 반면, 그것을 위협하며 부상하는 경쟁 패권국가로서 중국은 소프트파워에 신경쓸 여력이 별로 없이 노골적 행동하고 있다.

 

이것이 말과 행동 모두에서 미얀마 군부와 쿠데타를 방조하는 중국과, 말로는 반대하지만 행동으로는 별로 하는 것이 없는 미국의 차이를 낳고 있다. 그러나 그런 차이를 벗겨보면, 둘 다 이 지역에서 패권을 강화하고 동맹을 늘리는 데 무엇이 유리한가라는 냉혹한 이해타산에 따르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장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와 학살에 진간접적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명백히 인접한 신흥 패권국가인 중국이라는 것이다. 미얀마 민중이 중국에 그토록 분노하는 것은 이 때문이고, 그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학살을 저지를 때 미국이 그것을 지원, 방조하면서 유엔에서 규탄결의안과 제재를 가로막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이럴 때 학살을 반대하고 민중의 저항을 지지하던 모든 사람들은 미국을 규탄했듯이, 이제는 중국이 그 대상이 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따라서 '그동안 미국이 남미와 제3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침공과 학살을 저질렀고, 지금도 코로나 백신을 독점하고 특허권을 고수하면서 얼마나 수많은 저소득 국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왜 중국만 규탄하냐'고 묻는 것은 번지수가 틀린 것이다.

 

그것을 비판하고 규탄하는 것과 지금 미얀마에서 군부와 학살을 방조하는 중국을 규탄하는 것은 전혀 대립될 수 없다. 중국은 당장 미얀마 군부에 대한 지원과 학살에 대한 방조를 중단해야 한다.

 

#SaveMyanmar #save_myanmarpeople #StandwithMyanmar

#StopCoup #RejectMilitary

 

 

● 혐오의 시대와 백신 제국주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혐오의 시대’이다.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비난하고 증오를 부추기는 일이 하나의 문화가 돼버렸다. 이것은 학교나 직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벌어지지만, 전사회적으로도 벌어진다. 특히,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대개 주류언론이다.

 

연예인이나, ‘공인’과 그 가족들이 그것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뭔가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거나 왠지 모르게 미운털이 박히게 된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된다. 표적이 정해지면 그 사람의 문제점과 실수, 잘못에 대한 기사와 '고발'들이 쏟아진다. 표적이 된 사람의 영혼은 만신창이가 된다. 그러나 그 고통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물론 좌표를 찍고, 왜곡과 과장된 기사와 ‘고발’을 통해서 누군가를 몰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클릭수를 높이거나 사회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는 소수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것에 동조해서 뒤틀린 감정과 충동을 표출하거나 그것을 묵인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의 동료 시민들이기도 하다.

 

여성혐오의 문화와 결합돼서 여성들이 더 자주 표적이 되기 쉽다. 남성이 표적이 되더라도 그 부인과 딸도 같이 불려나오기 쉽다. 이휘재 씨가 비난 당할 때 같이 불려나온 부인처럼 말이다. 그래도 만만한 것은 여성 연예인이다. ‘인성 논란’이 불거졌던 아이린 씨가 그랬다.

 

최근에는 서예지 씨가 그런 몰이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항상 그렇듯이 남들이 간섭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개인의 성격, 사생활, 연애 관계까지 전국민적 평가와 판단의 대상으로 올려지고 있다. 전 남성 애인들은 대개 비겁한 방조와 침묵으로 몰이에 동참한다.(여성연예인에게 '안전이별'이란 가능한가?)

 

조선일보는 이런 (여성)연예인 몰아가기와 마녀사냥에도 항상 누구보다 열심이지만, 물론 주특기는 자신들의 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계속 순번대로 좌표찍고 괴롭히는 것이다. 최근에 표적이 된 것은 청와대 방역기획관이 된 기모란 씨다. 기모란 씨가 현 정부의 방역과 백신 정책을 적극 지원해 왔으니 말이다.

 

기모란 씨에 대한 <조선일보>의 ‘죽을 때까지 찌르기’와 ‘만신창이 만들기’, ‘영혼까지 털어내기’는 '가족까지 끌어들여서 두들기기'를 넘어서, 역시나 색깔론까지 결합시키기 시작했다. ‘통일혁명당은 무장 봉기와 정부 전복을 노리던 주체사상 신봉자들이었고, 문재인은 통혁당의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했다. 기모란의 아버지는 통혁당 사건으로 복역했던 기세춘이고, 이 정부 곳곳에 통혁당 인맥의 흔적이 보인다. 문재인은 왜 기모란을 발탁했을까?’

 

나도 궁금하다. 촛불이 있었고 5년이 지나서 왜 조선일보같은 세력이 다시 이슈와 담론을 주도하면서, 정말 필요한 이야기들은 작게 묻혀지고 저런 이야기들만 크게 들리는 세상이 됐을까. 이제는 조선일보를 뒤따라가는 언론과 눈치보는 정치인만 보이고, 왜 조선일보와 맞장뜨겠다는 치기어린 정치인조차 나오지 않을까.

 

기모란 씨의 일거수일투족, 사적 정보, 가족 관계 등이 샅샅이 털어지고 있다. ‘코로나가 중국 탓이 아니라고 말했다’, ‘백신 확보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비난받고 있다. 그러나 기모란 씨가 어떤 흠결이 있든 코로나 상황에서 조선일보같은 주류언론들보다 백배는 더 우리 사회의 방역과 안전에 큰 도움과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백신에 대한 기모란 씨의 의견에도 대부분 동의하고 조선일보 등의 논리에 절대 반대한다. ‘화이자 백신을 빨리 구입하고 확보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웃돈을 줘서라도 다른 나라보다 먼저 챙겼어야 한다’? 말도 안 된다. 지금 백신의 문제는 바로 그런 ‘다른 나라들이 어찌되든 우리 나라부터 살고보자’는 ‘백신 민족주의’에서 비롯됐다.

 

특히 이것을 ‘백신 제국주의’로 발전시킨 것이 미국 등의 강대국들이다. 이들은 백신을 사재기하고 해외 반출을 막고있고, 냉혈한 시장 논리에 따라서 다국적 제약회사의 특허권을 철저히 지켜주고 있다. 그래서 백신 전체 물량의 90% 가까이를 독점한 미국과 유럽 등의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몇 번씩 백신을 맞으면서 백신이 남아돈다는 상황에서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백신을 구경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최근 <윤석열의 진심>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수호자’ 윤석열이 그토록 지지하고 찬양하며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고 말하는 밀턴 프리드만의 <선택할 자유>가 퍼트려온 신자유주의와 시장근본주의가 낳은 적나라한 현실이다. 약육강식의 시장 논리가 낳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당장 끝내야 한다.

 

강대국들의 백신 사재기와 독점을 중단시켜야 하고, 다국적 제약회사의 특허권은 부정돼야 한다. 어느 나라든 제한없이 저렴한 비용이나 무상으로 백신 복제약을 생산하고 자국 국민에게 접종할 수 있도록 허용돼야 한다. 족벌언론들의 혐오할 자유와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돈벌 자유 속에 우리 모두를 위한 ‘선택할 자유’는 사라지고 있다.

 

● 우파 정치의 재구성과 부활

 

재보선 이후에 그 결과가 낳은 후폭풍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평가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좀 공감하기 힘든 것이 ‘이번 선거 결과는 민주당에 대한 심판이지 사회의 보수화가 아니다’라는 평가이다. 이런 평가는 그 합리적 핵심과 취지를 이해한다고 해도 ‘정신승리’의 요소가 크다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물론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그것이 강경한 우파 정당과 후보에 대한 지지와 투표로 나타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중도개혁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진보좌파 정당과 후보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그 반대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청년 남성) 유권자들이 국힘당의 성격과 역사를 잘 모른 채 민주당에 대한 심판을 위해 투표했다? 나말고 다른 사람들은 별 생각과 고민없이 행동한다고 보는 것처럼 큰 착각은 없다.

 

이것은 오바마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트럼프 당선으로 나타난 결과와 비교될 수 있다. 그때도 오바마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만하고 정당했다.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민주당에서도 비주류였던 오바마의 당선이 엄청난 기대와 희망을 낳았기에 그것은 더욱 쓰라린 것이었다. 그러나 트럼프의 당선을 단지 오바마 실패의 반사이익일뿐이며 보수화가 아니라고 평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신자유주의가 낳은 불만이 인종주의라는 우파적 대안으로 표출된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결과를 가지고 일부 좌파들이 ‘신자유주의와 긴축에 대한 분노가 드러난 노동계급의 승리’라고 환영했던 것처럼 모래 속에 머리를 묻는 태도일 것이다. 영국에서 브렉시트 투표 결과는 몇 년 후에 강경우파인 보리스 존슨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에 대한 좌파적 대안 건설에 실패한 이유가 크겠지만, 이번 선거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우파적 대안에 이끌린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좌파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희망을 현실로 포장하지 않으면서 냉정하게 현실을 분석해야 한다. 2016년 촛불 이후 위기와 분열로 빠져가던 우파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다시 힘을 강화하며 부활하고 있다.

 

물론 우파가 새로운 무기를 채택하면서 재구성됐기에 전통적 우파의 기준으로 보면 설명이 안 되는 면이 있다. 예컨대 유럽에서도 신우파 중에 일부는 낙태나 동성결혼을 찬성하면서 그것을 혐오정치 재구성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한국사회에서도 우파는 새로운 가치들로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있고, 전통적 우파 가치보다 그것이 덜 위험하다고 볼 근거는 별로 없다.

 

우파의 새로운 가치는 첫째 ‘공정’이다. 이것의 방향은 평창동계올림픽 단일팀 구성 문제에서 드러났고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분출됐다. 당시에 정규직 직원들과 공무원 취준생들이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부동산, 주식 등에서 재개발과 대출을 허용해서 우리도 ‘공정’하게 재산 증식 기회를 보장하라는 논리가 득세했다.

 

암호화폐 투기붐에서도 이 현상은 이어지고 있다. 우파는, ‘연공서열을 거부하고 능력과 노력에 따른 성과를 요구하는 청년들이 민주노총을 거부하고 분리된 독자노조로 가고 있다’며 이런 흐름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코로나 위기 속에 더욱 심해진 삶의 고통과 불안정을 한국 신우파는 일종의 ‘러스트벨트’처럼 이용하고 있다.

 

둘째는, ‘반페미니즘’이다. 반이민 선동이 본격화하지 않은 한국에서 인종혐오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은 여성혐오이고, 이것은 남초 사이트와 커뮤니티를 꾸준히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부정하기 어렵다. ‘양평원과 잠재적 가해자’ 논란이 그토록 쉽게 불이 붙고, 맥락과 앞뒤가 잘린 채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간 것도 그런 기반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반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을 일부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정서와 갈등을 더욱 부추기며 그것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그래서, 이미 지난 대선 때 유승민이 내걸었던 불길한 공약인 ‘여가부 폐지’는 이번 대선에서 더 강력한 형태로 등장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셋째는 ‘반중국 정서와 혐중’이다. 역사적, 지리적, 사회적 요인들 때문에 한국에서는 인종주의가 아직 우파의 주된 무기가 아니고, 더불어 이슬람포비아 등이 그렇게 주된 것도 아니다. 중국인, 조선족 혐오가 더 주되고, 거기에는 한미동맹의 유산, 중국의 급부상이 낳은 모순된 반응, 반공주의, 코로나, 노동시장에서 경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국가가 실제 홍콩과 미얀마 등에서 보이는 권위주의적 태도에 대한 반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일부 언론은 아직도 ‘우한코로나’라는 용어를 고집하고 있고, 그런 언론들의 왜곡과 부추김 속에서 ‘강원도 차이나 타운’ 반대 청원은 순식간에 거대한 규모로 불어났다.

 

물론 신우파의 등장과 우파 가치의 재구성은 아직 진행중이고 여러 모순을 품고 있다. 먼저 여전히 강력한 기반과 권위를 가진 전통적 우파와 새롭게 부상하는 신우파 사이의 화학적 융합이 어려울 수 있다. 이준석은 “[국힘당의] 지역구 당원 모임에서 대학생과 6070세대가 만나서 얘기하면 서로를 외계인처럼 생각한다”며 이런 어려움을 지적했다.

 

더구나 신우파 중의 일부는 좌파적 출신배경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네오콘이 트로츠키주의 좌파 출신이었고, 한국에서도 좌파 출신들이 뉴라이트가 됐듯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현상이다. 진중권, 서민, 권경애 등에 대해서 <조선일보> 김대중은 “이것은 전향이 아니라 진정한 좌파들의 원대 복귀”라고 찬양하지만, 갈등 요소는 남아있다.

 

신우파들 사이에서도 서로 강조점이 다르다. 당장 ‘반페미니즘’을 둘러싸고 이준석과 진중권, 서민은 서로 심각한 이견과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서민의 변신과 ‘2차가해’ 개념을 뒤틀어 민주당 공격의 무기로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해 온 조선일보와 오세훈의 갈피를 못잡는 듯한 태도는 이 문제를 둘러싼 모순과 난점을 보여 준다.

 

‘586엘리트의 위선’을 질타하며 포퓰리즘적 선동을 해 온 신우파들이 내세우거나 영입하려는 인물들이 가장 대표적인 부유한 엘리트들(이준석, 윤석열, 금태섭)이라는 것도 또 다른 난점과 모순이 될 수 있다. 이 명문대 출신의 부유한 엘리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힘겨운 처지에 있는 청년들의 삶을 구원할 진정한 친구인양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순들이 우파의 재구성과 부활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와 국가, 언론의 구조와 성격은 우파정치와 논리가 먹혀드는데 더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 그것이 가져다 주는 강점은 아무리 정당성이 취약하고 논리의 모순을 가지고 있더라도 극복하게 돕는다. 우스운 광대같던 백만장자 트럼프가 희망이 사라진 가난한 백인 남성들의 우상이 된 것도 그래서였다.

 

지금 우파의 재구성과 부활 속에서 2016년 촛불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2016년 촛불의 연장이었고 기득권 구조와 세력에 타협하려던 민주당을 압박하던 모든 대중행동들(2019년 촛불, 문자항의와 요구들)은 모두 비이성적 ‘대깨문’들의 패악적 난동 쯤으로 격하되어 있다. 검찰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을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은 ‘민생’이나 ‘민심’과 유리된 시대에 뛰덜어진 ‘문빠’적 언행 쯤으로 치부되고 있다.

 

5년전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의 일부를 ‘문빠’, ‘대깨문’같은 혐오성 멸칭으로 부르는 것은 대부분의 언론과 지식인들의 관행이 됐고, 조선일보과 국민의힘과 검찰같은 전통적 기득권 세력과 기관들은 기가 살아나 곳곳에서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이들은 민주당이나 문정부 내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비타협적 개혁을 주장하던 사람들일수록 더 철저하고 집중적으로 공격해 만신창이로 만들고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더구나, 민주당 바깥의 좌파는 정치적으로 주변화하여 잘 보이지 않는 신세가 돼버렸다. 중도개혁 정부의 실패 속에 삶의 고통과 불안정에 시달리던 밀레니얼 세대를 배타적인 혐오와 배제의 논리가 아니라 보편적 권리와 평등의 요구, 급진적 재분배, 나아가 ‘민주적 사회주의’의 가치로까지 연결시키며 좌파적 대안을 선택지로 만들어낸 버니 샌더스같은 시도와 희망은 아직도 잘 나타나거나 보이지 않고 있다.

 

● <어멘드>와 <모리타니안>

 

성폭력 피해자들을 도우며 자신들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나에게 제기한 5천만원 손배소송 재판을 준비하느라 많이 삶의 여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못보고 보더라도 느낌과 감상을 정리하기도 어렵다.(피해자들과 나를 괴롭히는 것이 노동자연대 지도부의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니 그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본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그래도 좋았던 작품에 대해 생각나는데로 적는다.

 

먼저 넷플릭스 다큐 <어멘드>는 재미뿐 아니라 유익하고 정보도 많다. 영화배우 윌 스미스가 진행자로 나서서 수정헌법 14조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차별에 맞선 민중 투쟁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그려낸다. 윌 스미스만이 아니라 얼굴만 보면 익히 알만한 개성있는 수많은 명배우들이 다큐의 흥미롭고 생생한 진행을 돕는다.

 

배우만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안젤라 데이비스같은 오랜 급진좌파 활동가도 나와서 역사를 증언하고, 상호교차성 이론으로 유명한 킴벌리 크렌쇼같은 쟁쟁한 이론가들도 나와서 중요한 해석과 분석들을 들려준다. 다큐 자체도 인종차별, 여성억압, 성소수자 혐오 등을 연결시켜서 함께 설명하는 교차성의 시각을 담고 있다.

 

다큐를 보면 미국에서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끔찍한 테러와 범죄들로 미국 역사를 더렵혔는지 확인하게 된다. 특히 중국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이미 19세기 중반에 대규모로 벌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약간 놀랐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산업혁명에서 대규모 철도공사의 주축은 중국인 노동력이었고, 19세기 후반에 경제위기가 오자 중국인 대학살이 벌어지고 ‘중국인 배제법’도 만들어졌던 것이다. 20세기 대공황 때는 멕시코인들이 희생자들이 됐고.

 

이 다큐의 장점은 이런 차별과 혐오, 학살에 맞서서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도 아니고, 링컨도 아니고, 케네디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오히려 이런 ‘위인’들의 허구와 실체, 그들이 어떻게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져버렸는지에 대한 폭로들이 나온다. 윌 스미스는 몇 번이나 ‘잠깐만요, 정말 그 사람이 그랬다구요?’하면서 놀란다.

 

링컨이나 케네디의 배신과 후퇴를 멈추게 만든, 진정한 ‘영웅’들은 프레드릭 더글라스나 마틴루터 킹 같은 흑인 지도자들이었고 투쟁에 나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다큐는 그 중에 일부는 아직도 차별과 편견 속에 삭제돼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킹 목사의 곁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한 바이어드 러스틴은 역사책에서 찾기 힘든데, 그가 흑인이면서 게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이 다큐는 그러한 투사들과 운동이 단지 링컨과 케네디같은 사람들을 비타협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어떻게 적절하고 효과적인 전술, 타협, 동맹을 통해서 의미있는 변화들을 하나씩 만들어나가고 역사적 순간을 만들어내고, 사회를 변화시켜 왔는지도 잘 보여 준다.

 

이 다큐는, 명백히 지난해 조직 플로이드 사망 이후에 미국에서 터져나온 역사적인 반인종차별 투쟁의 여파와 성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한 경찰 데릭 쇼빈에게 지난주에 유죄 평결이 내려졌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동안 미국에서 흑인을 살해한 경찰이 구속되거나 처벌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큐 안과 밖에서 미국 민중의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다.

 

<어멘드> 못지 않게 미국 지배자들이 말하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게 얼마나 많은 부분 허상이고 취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는 <모리타니안>이다. 이 영화를 ‘절차적 정당성은 아무리 악마같은 범죄자에게도 적용돼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헛짚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무고한 사람을 악마로 몰아서 죽도록 괴롭힌 미국 국가, 언론, 정부의 범죄에 대한 고발이다. 조디 포스터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명연기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9.11테러 이후에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벌어진 감금, 고문, 검열 등 온갖 반인권적인 야만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특히 고문 장면은 충격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수사, 기소, 재판도 없이 이렇게 수십년을 갇혀서 비인간적 취급을 당한 사람(대부분 아랍인)이 무려 800여명에 달한다.

 

미국은 중국, 북한, 미얀마를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9.11 이후에 미국을 뒤덮었던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혐오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미국 정부와 언론은 마녀사냥과 여론재판을 하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 슬라히를 14년 동안이나 가두고 고문할 수 있었다.

 

영화는 주인공 슬라히를 사형시킬 증거를 찾아내려는 검사와 그에 대한 인신구속에 근거가 없음을 밝히려는 인권변호사의 대결로 진행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인상적인 것은 슬라히가 변호사에게 ‘사건만 보지 말고 사람을 봐달라’고 하는 장면이다. 법적인 증거를 찾고 입증을 하는 것도 증요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받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 공감하고 인간적인 연대를 보여주는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던 것이다.

 

그 심정이 너무 와 닿았고, 지금 우리 사회에도 권력기관과 주류언론의 마녀사냥과 여론재판 속에 고통받고 고립된 그런 억울하고 한맺힌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슬라히가 법정 진술에서 ‘용서와 자유는 아랍어에서 같은 단어’라고 말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맞다.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고 고통받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은 이유는 그 고통에서 자유롭고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내가 노동자연대 분들의 반성과 사과를 그토록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되지도 않을 것을 왜 자꾸 말하냐고 하지만, 나는 그분들을 용서하고 싶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

 

실화를 그대로 옮겼다는 <모리타니안>에서 검사는 결국 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정부의 명령을 거역한다. 그는 언론과 여론에 의해서 ‘배신자, 반역자’로 몰린다. 한국에도 진실을 선택하고 조직을 거역함으로써 ‘배신자, 반역자’로 몰리고 있는 양심적 검사가 있다. 바로 내가 언제나 그 용기에 감탄하고 존경하는 임은정 검사다. 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상을 받았다니, 이제 다음으로 임은정 검사가 검찰총장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너무 큰 기대일까.

 

(기사 등록 202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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