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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이준석/ 미얀마/ 마녀사냥/ 한강 대학생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6. 13.

전지윤

 

● 이준석 당선 - 축하할게 아니라 성찰할 일

 

‘축하’의 사전적 정의는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뜻으로 인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준석의 당대표 당선을 우리는 축하해야 하는가? 그의 앞날을 지켜보고 잘해줄 것을 촉구할 일인가? 어쨌든 정치권의 ‘관행’이나 ‘예의’가 그러니까? 그런 것 따지지 않고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기준은 왜 또 이럴 때만 실종되는가?

 

젊은 사람이 나이들고 노회한 정치선배 앞에서 눈치보지 않고 직설적이고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모습은 평가할만 하지 않냐고? 2012년 대선 때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정말 놀라울 정도로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었다.

 

티비토론을 보다가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결과는 모두 아는 바대로다.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그 당은 없어졌고, 정치 생명은 끝장났다. 왜 젊은 남성의 거침없음과 직설적 화법은 ‘당당함과 용기’이고 젊은 여성의 그것은 ‘싸가지없음과 왕재수’가 되는가? 더구나 당시 이정희 후보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고, 지금 이준석의 말은 덕지덕지 혐오가 묻어나는데? 

 

이준석이 당선 소감에서 ‘공존과 변화’를 말했다고? 기존의 우파적 가치와 자신이 제기한 새로운 우파적 가치의, 주호영과 나경원와 이준석의 ‘공존’을 말하는 것이고, 기득권 우파가 다시 권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자’고 했다.

 

전체 맥락을 보면 명백하고 내가 색안경을 쓰고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다. ‘잘못된 페미니즘을 강요하지 말라’는. ‘흡수통일은 북한 체제를 지우는 것’이라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자유롭고 공정하다’던 그의 입장은 그대로다.

 

박근혜 탄핵을 긍정하지 않았냐고? 기득권 우파와 특권카르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지배와 권력이 유지되는 것이고, 거기에 도움이 안 되면 언제든지 잘라낼 수 있다. 2016년에 가장 먼저 박근혜에 등을 돌렸던 세력 중 하나는 바로 <조선일보>였다.

 

어제 벌어진 일은 우파의 전진이고 백래시의 전진이고 한국사회의 후퇴이다. 지금 누가 기뻐하고 있는가? 문정부가 사회주의이고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사람들이, 남성들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광광거리던 사람들이, 이대로 가면 중국이 한국을 먹어버릴 거라던 사람들이, 소수자들이 할당제로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난리치던 사람들이 기뻐하고 있다.

 

반면 이것은 차별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 혐오에 시달리던 소수자들에게, 돈없고 빽없고 소위 '능력과 실력'과 학벌이 부족해 서럽던 사람들에게 반가울 수 없는 소식이다. 기성정치권의 문맥을 벗어난 정치신인이 일으키는 돌풍은 상반된 감정을 일으키는데, 버니 샌더스나 제레미 코빈이 일으킨 감정이 기대와 희망이었다면, 트럼프나 보리스 존슨이 일으킨 감정은 우려와 공포였다.

 

전자가 기성체제가 외면해 온 계급적 분노를 연대로 연결시켰다면, 후자는 그것을 혐오로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왜 한국사회에서는 전자가 나타나지 않고 후자가 나타나고 있는가. 지금 필요한 것은 축하가 아니라 이에 대한 성찰이다. 이 현상은 우리가 대중의 계급적 분노와 절망을 급진적 희망의 해법으로 연결해내지 못한다면 계속될 것이고 더 악화할 것이다. 

 

● 이준석 돌풍이 보여주는 것

 

계급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독점한 채 다수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소위 ‘1:99’, 또는 ‘20:80 사회’라는 말은 이것을 비유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순수하게 작동한다면 99 또는 80이 힘을 모아서 소수의 지배자들을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억압과 지배를 당하고 있는 80은 정치, 이념, 세대, 지역, 젠더 등에 따라서 분열돼 있다. 99또는 80을 대변한다는 진보좌파 정당이 오히려 소수의 지지만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재보선 이후에 민주당이 부동산, 세금, 검찰과 언론개혁 등에서 계속 후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뜻보면 ‘상위 5%도 안 되는 집부자들을 위해서 부동산 정책을 후퇴시키는 것은 다음 선거를 위해서도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재보선 결과 자체가 ‘노골적으로 상위 5%의 이익을 옹호’하는 국힘당의 승리였다.

 

그 후 정세와 의제 설정의 주도권은 더욱 우파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다. 국힘당 지도부 선거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이준석 돌풍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세대교체와 변화를 상징하고, 색깔론과 지역감정 선동에 의존하던 구우파와 다르다는 이준석의 장점만 부각되고 있다.

 

장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그의 문제점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차별의 대상을 ‘변화’시키고 혐오선동의 주제를 ‘혁신’할 뿐이라는 점, 더욱 강경한 신자유주의적 경쟁지상주의라는 점, 철저한 엘리트주의일뿐 아니라 ‘아빠찬스’를 이용한 불공정의 장본인이라는 점들 말이다.

 

오히려 그의 하버드 학벌은 가장 좋은 무기가 되고 있다. 왜냐면 한국사회와 주류언론 자체가 엘리트적 학벌주의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치밴드의 예술적 성취를 높이 평가할때마저도 따라붙는 게 ‘서울대 출신들’이라는 후렴구이다.

 

지난해 <조선일보>가 정의당 김종철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빼놓지 않고 언급했던 것도 ‘당신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인데...’라는 것이었다. 주류언론들이 정의당 장혜영 의원을 인터뷰하거나 보도하며 항상 은근히 강조하는 것은 ‘명문대를 중퇴’했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대학을 거부하고 중퇴를 해도 그것이 명문대일 때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누군가 시험성적이 우수했고 학벌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한국사회의 주류적 질서와 가치관, 규범들을 잘 학습하고 수용했다는 의미이기 쉽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학교와 교육제도가 가르치는 것은 기존의 질서, 권위, 가치, 규범에 대한 복종이고 학생들은 이것을 얼마나 잘 내면화했는지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특히 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명문학교일수록 문제는 더 심각한다. 그런 학교는 목표 자체가 기존체제의 지배계급 엘리트들을 육성하고 배출하는 것에 두게 된다. 예컨대 대표적 명문고인 민족사관고의 올해 학습 주제 중에는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결정문의 이해’가 포함돼 있었다.

 

영국에서 최고위 관료들을 배출하는 귀족학교인 이튼스쿨의 2011년 입학시험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중동 석유 위기로 휘발유가 고갈 된 후 런던 거리에서 일어난 폭동을 군대가 진압하면서 시위대 25명이 사망했다. 당신이 총리라면 이 결정이 불가피한 도덕적 선택이었던 이유를 설명하라.’

 

박근혜 키즈로 한나라당 비대위원이 된 이준석이 2011년 당시에 전국철거민연합의 집회에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진짜 미친놈들”이라고 비난했던 것은 이런 교육과 가치관 수용의 결과였을 것이다. 물론 이준석과 이준석 돌풍은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 촛불과 탄핵 이후에 구우파가 빠져들던 위기와 분열을 벗어나려고 하면서 만들어진 현상이다. 강경하고 단단했지만 확장성의 한계가 뚜렷했던 구우파는 신우파들로 얼굴, 간판, 세력을 교체하면서 외연 확장과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 신우파의 대표주자가 이준석이고 그들의 특징과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2019년 ‘검찰대란’ 국면의 개천절에 대학로에서 열린 청년학생 집회였다. 참석자는 압도다수가 청년남성이었고, 중간에 여성들의 응원 춤공연이 있었다. 발언자는 전부 명문대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능 고득점과 학벌을 과시하며 ‘조국 딸은 대가리로 대학간 것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이준석은 이 집회의 기획에 깊숙이 관여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준석은 그 후 ‘문재인 정부가 친중국 사대를 하고 있고 중국몽을 꾼다’며 혐중 선동을 하는데서도 두드러졌다.

 

그런 이준석이 이번에 극우파들에게 ‘아버지가 화교 아니냐’라는 공격을 당한 것은 참 역설적이다.(그같은 혐중 선동을 주도한 극우유튜버들이 아니라 그것을 비꼰 개그맨 강성범이 더 집중적 비난을 당하고 즉시 사과한 것은 기막힌 부조리지만, 조중동이 지배하는 언론시장에서는 항상 반복되는 일상이다.)

 

역설은 그것만이 아니다. 신우파로 변신중인 진중권이 이준석과 페미니즘 논쟁을 벌이고, 나경원이 반차별의 논리로, 주호영이 반신자유주의의 논리로 이준석을 비판하는 웃픈 풍경이 펼쳐졌다. 이준석을 지지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우파들 내부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울타리 내부로 가둬지고 있는 셈이다. 왜 이 지경이 됐는지에 대한 뼈저린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관련기사: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60415374073655

 

● 미얀마 민중항쟁은 끝나지 않았고 결코 패배할 수 없다

 

6월 10일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은 포스코센터 앞에서 ‘미얀마 연대의 밤’을 진행했다. 여러모로 의미있는 행사였는데 특히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의 활동가가 미얀마 현지에서 보내온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이 있었다. 4개월 넘게 피의 학살과 희생이 벌어지는 속에서 힘겨운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미얀마의 활동가는 그 편지에서 ‘혁명가는 죽일 수 있어도 혁명은 죽일 수 없다’고 했다.

 

미얀마 '봄의 혁명'은 지금 쉽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반세기 넘게 유지되 온 군대와 국가가 일체화된 미얀마 정치체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고 있고, 중국은 군부를 돕고 있고, 서방의 강대국들도 미얀마의 민주주의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게 드러나고 있다. 국민통합정부(NUG)가 연방연합군을 결성한다고 해도 병력 규모나 무기 등에서 비교가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투쟁은 물리력으로만 승부가 나는 게 아니다. 역사적 대의와 정당한 명분으로 무장한 민중은 총칼로도 짓밟을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미얀마 군대 내부에서 탈영 소식에 주목하고 이런 균열이 더 확대되길 희망하고 기대한다.

 

아웅산 수찌, NLD, 국민통합정부(NUG)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들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쿠데타 군부 테러집단에 맞서서 그들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당연히 많은 문제점과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 미얀마에서 투쟁에 함께하고 있는 평범한 민중들 속에서도 찾아보면 많은 한계와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은 처음부터 완전하고 무결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온갖 편견과 한계와 인간적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들고 일어나 세상을 바꾸고 자기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다.

 

이미 많은 역사적 전진들이 나타나고 있다. 국민통합정부(NUG)는 군부독재를 뒷받침해 온 기형적인 2008년 헌법 폐기를 선언했고, 모든 소수민족의 자치를 보장하는 민주연방제를 약속했고, 최근에는 로힝야에 대한 시민권 부여도 발표했다. 이 모든 것은 미얀마 민중의 투쟁이 낳은 역사적 변화와 성과이다.

 

미얀마 민중의 목소리와 혁명의 과제를 대변하는 한 국민통합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각국의 기업들이 미얀마 군부에 대한 투자와 지원, 협력을 중단할 것을 계속 요구하고, 각국의 정부에게 군부가 아니라 국민통합정부를 인정하고 지지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군부에 맞서서 민족과 부문, 경계를 넘어서 더 큰 연대와 투쟁이 필요하지만, 제국주의가 뿌려놓은 분열의 씨앗, 군부가 계속 조장해온 분열, 수찌 정부가 보여온 한계와 그것이 낳은 불신, 중국과 미국 등 강대국들의 문제, 소수민족 일부 지도자들의 잘못된 태도들이 결합돼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결국 미얀마 민중은 길을 찾을 것이라고 믿고 끝까지 응원한다.

 

#610미얀마연대의밤 #SaveMyanmar #save_myanmarpeople #StandwithMyanmar #StopCoup #RejectMilitary 

 

 

● 끝날줄 모르는 윤미향 의원에 대한 마녀사냥

 

마녀사냥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다. 한번 주홍글씨가 박히고 낙인이 찍힌 희생양은 끝없이 소환된다는 것이다. 잠시도 숨을 돌릴 틈이 없다. 기회만 있으면, 빌미만 생기면 끝없이 광장으로 불러내서 ‘여기 이 마녀에게 돌을 던져라’고 선동한다.

 

또 희생양에게는 자기 스스로를 변호하고 항변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녀’는 입이 있어도 열 수가 없고, 말을 해도 들어주지도 않는다. 오로지 ‘저 사람도 마녀’라고 고발하며 마녀사냥에 동참할 때만 그에게 마이크와 연단이 주어진다.

 

자, 또다시 윤미향 의원이 화형대에 올려졌다. 광장의 십자가에 매달렸다. 또 여기저기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너가 던지니, 나도 던지고, 다같이 우르르 던진다. 누구도 윤미향 의원의 항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실어주는 언론도 없다. 윤미향 의원의 페북에는 또 온갖 증오와 저주의 댓글들이 달리고 있다.

 

이 가족에게 한국사회가 이토록 모질고 잔인할 수 있는가 싶다. 윤미향 의원의 남편은 ‘남매간첩단’으로 조작돼서 고문까지 당했고, 20년 넘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받았다. 윤미향 의원은 평생을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과 연대했던 것이 부정당하고, 갑자기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몰려서 전사회적 조리돌림을 당했다.

 

언론은 총알과 칼날처럼 쏟아져 이 가족의 마음에 수많은 생채기를 남겼고, 검찰은 이 가족과 주변 지인들까지 모두 압수수색하고 계좌추적하면서 초미세 먼지털이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수십년 동안 한번은 ‘간첩’으로, 나중에는 ‘사기꾼과 위선자’로 몰아서 이 가족을 난도질하던 이 사회는 이제 ‘부동산 투기꾼’이라는 멍에를 또 씌우고 있다.

 

오히려 부동산 투기꾼에게 사기를 당해서 서울에서 지방으로 밀려나고, 남편과 사별해서 비바람 막아줄 고작 8500짜리 집에 살고 있는 윤의원 시어머니의 집이 윤의원 남편 명의로 돼 있었던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8500이면 전세 반지하도 얻기 어려운 돈이고, 도대체 누가 경남 함양의 시골에서 집값 상승을 기대하겠냐는 상식도 소용이 없다.

 

그래도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지금 이 상황은 결코 윤미향 의원과 그 가족들의 탓도, 잘못도 아니다. 잘못된 것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기득권자들이다. 장모와 부인이 수십, 수백억의 비리와 투기에 연루된 윤석열은 대선 후보가 돼서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고 있고, 언론은 너도 나도 윤비어천가를 부르고 있다. 일제 식민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등에 칼을 꽂는 반역사적 판결도 이어지고 있다.

 

총선 때 국힘당의 위성정당 꼼수에 대응한다며 사회운동 활동가들을 비례후보로 데려가 득표에 이용해먹던 민주당은 마녀사냥 희생양의 옆에 있다가 돌 맞을까봐 손절하기 바쁘다. 진보좌파 진영도 그 희생자가 민주당 쪽이면 마녀사냥에 방관적 태도를 취한지 오래 됐다. 그럼에도 윤미향 의원과 그 가족분들이 부디 잘 버티고 살아내주길 바랄 뿐이다.

 

●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이 보여준 혼파망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이 거대한 이슈가 되면서 뒤틀려온 과정은 한국사회와 언론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여줬다. 주류(보수)언론들은 이것이 경찰의 늑장 대응, 한강이라는 익숙함과 상징성, 유튜버들의 돈벌이 경쟁, 대중의 심리적 동조화 현상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은 것이다. 바로 주류언론들이 부추기고 만들어낸 현상이라는 것이다. 지금 일부 유튜버들이 보이는 근거없는 의혹제기와 부풀리기, 불신 조장, 낚시성 속보와 제목 장사 등을 통한 클릭수 경쟁은 초기에 주류언론들이 앞장서 불붙였던 것들이다.

 

거기에 막장 유튜버들이 달라붙어서 주류언론들과 서로 주고받으면서 과열되고, 훨씬 더 저열하고 날 것의 형태로 치닫기 시작했다. 비판적인 지적과 우려의 목소리들이 커지자 주류언론들은 뒤로 조금씩 빠지면서(물론 이미 충분히 단물을 빼먹은 시점에) 갑자기 3자적 입장에서 유튜버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조두순 석방 논란 등에서 반복해서 나타났던 항상 비슷한 패턴이다. 주류언론들은 조두순이 석방된다고 'D데이'까지 세면서 불안과 공포를 부추겼다. 석방된 날 조두순 집 앞에 몰려가 난리를 피우며 뒤늦게 푼돈 챙기기에 매달린 것은 일부 유튜버들이었는데, 그러자 주류언론들은 유체이탈하며 그들을 준엄하게 질타했다.

 

이것은 기자들을 혐오성 멸칭(기레기)으로 부르며 비난한다고 설명되거나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한국 언론시장과 산업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필요한 일이다. 언론-재벌-검찰-우파의 카르텔, 족벌언론과 언론사주들의 막강한 힘, 우파 정권에게 얻어낸 종편을 통한 영향력 강화, 광고수익에 대한 압도적 의존, 포털과 언론의 기형적 공생구조, 인터넷 언론사와 유튜버들의 난립, 무한 클릭 경쟁,..

 

이런 구조 속에서 하급 기자들은 취재하고 고민할 시간도 없이 기사 복붙과 어뷰징에 내몰리고 있다. 기자들은 좋은 기사가 아니라 더 많은 클릭수와 더 많은 광고 유치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는다. 이런 방향을 주도하고 데스킹하는 고위직들은 한국사회 최상위 1%인 족벌사주, 보수 정치권, 재벌과 특권층의 관점과 이익을 대변하다가 정치인으로, 기업 홍보이사로 옮겨간다.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불거졌던 평택항 부두 노동자 아들의 산재사망보다 강남 명문 의대생 아들의 사망사건에 더 관심을 가지고 비통해 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고 이선호 씨의 사망은 파고들수록 계급불평등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기업 이윤만 앞세우는 기존 질서에 구조적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광고주들이 좋아할 리도 없었다.

 

주류언론들은 ‘한강에서 의문의 죽음’에 대한 ‘탐정놀이’를 더 선호했고, 곧 단기간에 엄청난 수의 온갖 카더라 기사와 댓글성 기사와 최악의 어뷰징 기사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별다른 근거나 충분한 수사도 없이 벌써 친구 A씨는 살인자로 낙인찍혀갔다. 그 가족까지 전부 신상이 털리며 폐인이 됐고, 앞으로 더 이상 한국에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런 패턴은 이미 연예기사나 연예인들에게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최근 한예슬 씨에 대한 악명높은 막장 유튜버 김용호의 저질스러운 의혹제기는 곧바로 조선일보의 대문으로 올라갔고, 당사자는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이런 보수언론과 저질 유튜버의 ‘막장 공조’와 황색 저널리즘은 사회적 이슈로도 번져왔다.

 

이번 사건 전에도 이미 주류언론들은 구미 아동학대 사건을 ‘족보찾기 놀이’로 변질시키며 선정적이고 관음증적인 클릭수 경쟁을 벌인 바 있다. 또 ‘라면형제’, ‘내복아이’, ‘미라여아’같은 온갖 신조어도 잘만 만들어냈다.

 

돌아보면 2019년 검찰대란 국면에서 주류언론의 역대급 ‘조국 몰이’도 검찰개혁에 대한 검언카르텔의 반격이라는 측면만 아니라, 보수언론과 막장 유튜버들의 ‘막장 공조’와 클릭수 경쟁이 만들어낸 자가발전적 거대한 소용돌이였던 측면을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때도 온갖 가짜뉴스와 근거없는 의혹제기 속에서 여론재판을 통한 ‘가족사기단’ 만들기가 이뤄졌다.

 

이런 해악은 주류언론들과 포털의 악순환적 상승작용 속에서 극대화된다. 조중동은 오늘날 뉴스 플랫폼 시대와 그 알고리즘에 가장 잘 적응해 맞춤형 기사들을 생산하면서 항상 포털의 메인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제목과 기사가 더 많은 노출과 클릭수를 보장할지 치밀하게 연구해 동물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주류언론들과 우익, 막장 유튜버들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덧붙여진다. 족벌언론에 비하면 후발주자이자 벤처기업 수준인 이들 유튜버들은 뉴미디어의 이점을 악용한 더 많은 조작, 왜곡, 가짜뉴스로 슈퍼챗을 챙기고 돈벌이에 매달리고 있다. 이번에 손정민 씨의 죽음을 이용해 ‘신의 한수’같은 유튜브들은 평소보다 열배 가까운 조회수와 돈을 챙겼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와 누군가를 욕하고 증오하는 것에 더 이끌리며 선택적 공감과 적대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청중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더 큰 책임은 그런 구조를 만들고 거기서 이익을 누리는 세력에게 있다. 백신에 대한 불신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책임은 ‘영국에서 백신 맞고 다리가 폭발해서 절단했다더라’는 기사를 퍼트렸던 조선일보에게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얼마 전 조선일보 주필 양상훈의 칼럼에서 아래 대목을 보고 빵터지면서도 기가 막히고 열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족벌 주류언론들과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대결하겠다는 결기있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의 등장을 언제나 학수고대한다.

 

“필자는 37년간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지만 아직도 스스로 ‘언론인’이라고 말하는 게 마음 한편에 걸리고 부끄러운 점이 있다... 기자 생활 37년의 결론은 ‘사실’을 찾아낸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기사 등록 202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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