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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전쟁과 국가/ ‘좌파 의식’의 두 종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5. 24.

[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 온 박노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시작된 전쟁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망하는 글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전쟁과 국가: 러시아의 과거와 미래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고, 전쟁은 국가를 만들어 나갑니다. 아마도 이 두 작용은,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결정짓고 계급 투쟁이 사회 진보를 이끌어나가는 만큼으로 인류 역사의 "철칙"일 것입니다. 한반도 역사부터 보시지요. 6.25는 한반도의 주민들에게는 대대로 기억될 "대재앙"이었지만, 사실 남북 양쪽 국가에 어떤 면에서는 "축복"이었습니다. 이남은 미국이 그 예산과 무기의 대부분을 지원하는 "60만 대군", 6.25의 결과로 얻었습니다.

머지않아 그 군대 장교들은 집권을 하고, 장기 군사 독재와 징병제 등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한국을 병영형 개발 국가로 만든 것이죠. 이북도 이북대로 미군의 잔인하 폭격 등을 이용하여 대미 적대심과 함께 새로운 체제와 그 "수령"에 대한 충성을 고취시키고 퇴역 병사와 전몰 군인 유가족 등을 이 체제의 핵심 계층으로 삼은 것입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야 군수공업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한국보다 훨씬 더 먼저 군수 공업을 건설하기도 하고요. 한편, 한국의 "부자 나라 만들기"의 또 하나의 핵심적 이정표가 바로 월남 파병과 "월남 특수"이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되죠.

그러니 "전쟁"을 빼고 한반도 현대사를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미국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겠습니까? 제가 익히 아는 미국의 한국학을 포함한 지역학만 해도,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과정에서 국가와 군부, 첩보 기관들의 집중 투자로 육성된 것이고, 미국의 윗세대 한국학 전문가들의 상당수 (고 짐 팔레 교수, 존 던컨 교수 등)가 미군에서 복무한 경험도 있는데요... "군사 부문"을 빼고 미국 현대사도 미국 아카데미 역사도 이야기할 수 없지요.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고 전쟁은 국가를 만들어 나간다"는 등식은 인류 계급 사회 역사의 "보편"이지만, 특히 러시아사에 특별히 잘 적용될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구미권과 달리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엄청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통" 자본은 없습니다. 현재 러시아의 최대 재벌인 가즈프롬이나 스베르방크 등의 대주주는 국가며, 그들은 30여년 전만 해도 소비에트 국가 관료 구조의 "부서" 내지 "공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정 러시아에서 자본가들이 돈 있어도 정치력이 거의 없었는가 하면 현재 러시아에도 재벌들은 "몰락"을 원하지 않으면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절대 순종하지요. 국가가 자본을 압도하는, 추격형 발전을 하는 주변부 사회인만큼 국가가 벌이는 전쟁 역시 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지난 200년 동안 러시아사를 염두에 두고 총정리하자면 이 영향을 다음과 같은 등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몇년 고전해도 압승만을 거두면 그 다음에 그 압승을 거둔 체제는 약 40년 정도 더 갑니다. 부분적 패배는 보통 근대화 지향의 개혁으로 이어집니다. 한데 완패의 결과는 혁명입니다. 혁명의 과정에서 생긴 새 정권은, 힘만 키우면 나중에 설욕전을 또 벌이는 거죠.

1812-5년 사이의,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러시아로서는 "고전"이었죠. 한 때에 모스크바까지 불에 탔지만, 전쟁은 러 군의 파리 입성으로 끝난 만큼 결국 초보적 국회나 국헌도 없는 러시아식 전제정권은 크림 전쟁 (1853-6)까지 약 40년 동안 그냥 그대로 건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1941-45 소독 전쟁에서는 소련은 27백만 명의 천문학적 인명 손실을 감수하고 국토의 상당 부분은 완전하게 초토화됐지만, "베를린 입성"으로 끝난 만큼 스탈린 체제와 그 후계 정권은 40년 동안, 1985년에 시작된 고르바쵸브의 개혁 시기까지 건재할 수 있었습니다. 한데 러시아의 흑해 해군 보유를 금지해도 큰 영토 손실을 안기지 않는 크림 전쟁에서의 부분적 패배는 결국 1861년 이후 농노 해방 등 근대화 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영토 손실은 없어도 전쟁 목표 달성에 실패한 아프간 침공 (1979-1989)도 결국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이름의 일종의 근대화 개혁으로 이어진 겁니다. 한데 일본에의 완패라고 할 러일전쟁은 1905-7년 러시아 1차 혁명을 촉발시키고 러시아로서 패배로 가고 있었던 제1차 세계 대전은 1917년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겁니다. 러시아가 '전쟁에 국운을 거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크림 전쟁이나 아프간 침공의 "부분적 패배"에 한 번 주의를 기울여보지요. 양쪽의 경우에는 전쟁의 본래 당사자는 러시아에 인접한, 그리고 러시아보다 더 취약한 정치체들이었습니다. 러시아와 같은 전제 정권인 터키는 1853년 이전까지는 러시아에 거의 두 세기동안 연패해 왔고, 아프간의 모자헤딘 (빨치산)들은 통일되지 않는 종교 보수주의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에 부분적 패배를 안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핵심부 세력 (크림 전쟁의 영국과 프랑스, 아프간 침공의 미국 등)이 그 전쟁에 직접 (크림 전쟁) 내지 간접 (아프간 전쟁) 개입을 했기 때문입니다. , 이제 오늘날 상황의 역사적 맥락은 조금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핵심부 세력 (미국과 유럽연합)이 이제 매우 적극적 간접 개입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 간접 개입은 뭘 의미할까요? 전술핵 사용 등 "극단적" 시나리오를 일단 제외하면, 우크라이나의 완패와 러시아의 완승은 아마도 비현실적일 겁니다. 러시아의 완승이 바로 앞으로의 "40년 동안 푸틴 (후속) 체제"를 의미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핵심부 세력들이 만약 "무제한 재정/무기 지원"을 계속하면 그 완승을 예방할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 푸틴이 지도상에서 지우고자 하는 우크라이나라는 (친서방) 독립 국가의 "유지" 정도를 보장 받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러시아에 완패를 안길 수 있을 것인가요? 지금으로서 예측하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여태까지의 경과로 봐서는 그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을 듯합니다. 러시아의 집중 관심 지역 (돈바스)에서는 대단히 더디긴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 장악이 일단 계속 전개되어 가는 것으로 봐서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 확실한 예측은 불가능하지만, 아마도 이 전쟁의 가장 유력시될 수 있는 결말은 (우크라이나 영토 상당 부분의 초토화와 엄청난 규모의 살상 등 대량 파괴 이외에는) 러시아의 일부 우크라이나 영토 (크림, 돈바스, 아마도 헤르손 지역 등) 장악의 공고/영구화일 듯합니다. 본래 목적이 우크라이나 국토 전체의 장악 내지 속국화이었던 만큼 이런 결말 역시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부분적 패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스텝은 아마도 - 역사적 전례로 봐서는 - 근대화 지향의 어떤 새로운 움직임들일 겁니다. 오늘날 세계 체제에서의 근대화의 모범 사례가 중국인만큼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에서의 근대화의 방식은 아마도 "중국적"일 것이라고 예측됩니다. , 수출 주도의 중국의 경제적 궤도와 달리 러시아는 아마도 수입 대체와 일부 전략 공업 부문의 집중 육성 등에 초점을 맞출 듯합니다.

한데 우크라이나 침략이 "대중 동원"의 필요성을 보여준 만큼 아마도 이미 망한 소비에트 당국가의 동원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동원 시스템의 구축도 모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관건은, 이런 위로부터의 동원에 맞서 대중들의 밑으로부터의 동원, 즉 반권위주의적 민중 운동이 어느 정도 탄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겁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빈곤화 속에서는 민중 세력들이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해보기도 하죠....

"좌파 의식"의 두 종류

북한에서는 상당히 잘 알려져 있는 혁명 시인 마야코브스키에게는 이런 유명한 시구 하나가 있습니다:

무산 계급은 공산주의로

밑으로부터 다가온다.

광산, 공장, 논밭의 밑으로부터 온단 말이다.

한데 나는 시문학의 높이에서 공산주의로 내려온다

나에겐 공산주의 없이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천재적 시인답게, 마야코브스키는 아주 중요하고 복잡한 현상을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잘 정리했습니다. 사실, 그가 볼 수 있었던 제정 러시아만 해도 좌파 투쟁의 세계로 나가게 되는 사람들은 대개 두 종류이었습니다. 하나는 어떤 이상주의적 동기를 갖고 혁명에 입문하게 되는 레닌이나 트로츠키와 같은 유산층의 고학력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현 체제 아래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출세"할 수 있었지만, 민중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압제에 대한 증오, 지식인으로서의 의무감 등등의 이유로 "지하 운동"의 세계에 투신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로 노동자 출신의 혁명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민중'이었기에 "부채 의식" 따위 있었다기보다는 본인들이 속하는 계층을 위해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종류 "사이"에 또 하나의 종류가 있었습니다. 스탈린 (신학대학 중퇴생)이나 몰로토브 (최하급 사무원의 아들)처럼 어느 정도 "공부"를 한 민중 출신이나 중하층 출신으로서 혁명의 파도 속에서도 결국 일종의 "출세"의 길을 찾게 되는 신분상승 지향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결국 현실적으로 혁명이라는 대사건을 "이용"하게 된 것이죠.

저는 러시아의 혁명적 전망에 대해 당분간 좀 비관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아무리 찾아봐도 현재의 러시아에서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부 개인들이야 있지만, 사회적 "부류"로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죠. 러시아의 신흥 중상층 자녀들의 상당수가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갖기에는, 이 중산층 자체가 아직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최근의 현상입니다. 역사적 "연령"이 낮은 것이죠.

오늘날 10-20대 중상층 자녀들의 부모 세대만 해도 스스로 소련의 "일반 인민"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부채 의식"을 가지려면 세습적 특권에 대한 문제 의식부터 가져야 하는데, 러시아에서는 그 세습의 시작은 "이제"부터입니다. 아직은 너무나 나이 젊은 시장 자본주의 사회죠.

그런데 민중도.... 자본주의 사회의 피착취층으로 재편된 지 오래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아직도 소련 말기에 무료로 가지게 된 아파트나 별장 등을 갖고 있고, 아직도 소련 시절 이래 계속 존재해온 무료 교육 내지 의료 혜택을 받죠.

그런 걸 바탕으로 하여 각자가 "인간다운 삶"을 알아서 "노오오력"해서 개인적으로 쟁취하면 된다는 식의 의식은 아직도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런 "노오오력"들이 결국 햄스터의 쳇바퀴 돌리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하려면 아마도 한 세대 정도 더 교체돼야 할 듯합니다.

세습의 시작은 "이제"인 러시아와 달리, 한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 계층 이동은 이미 거의 정지된 상태입니다. 사실 1998년 이후의 한국 사회는 크게 봐서는 신분 대물림 사회죠. 그렇다고 강남족 자녀들은, 그들의 비싼 유학 비용을 만들어준 그 부모 세대의 건물 임대료 소득의 원천인 영세민들의 피눈물에 대해 과연 "부채 의식"을 갖고 있을까요? 글쎄, 그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한국 사회는 이미 너무나 원자화된 상태고, 개개인 "노력""성공"의 신화는 너무나 공고합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달리 일단 성공적으로 그 위상이 계속 올라가 급기야 "구미권 선진국"과 같은 신분이 된 국가이기에 그 만큼 "노오오력"의 신화는 위의 계층에서도 밑의 계층에서도 상당히 통하는 것이죠. 현재 그 "선진권"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회가 일본이라면 아마도 바로 그 다음은 한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좀 특이한 것은, 노르웨이 사회에서는 "부채 의식"이 지금 일종의 혁명적 조류의 원천이 다시 되는 것 같긴 한다는 겁니다. 1960-70년대에 그게 제3세계에 대한 "부채 의식"이었다면 현재는 그것보다 더 보편적인 "지구에 대한 부채 의식"이죠. 사실 그 어떤 계급 혁명가보다 노르웨이에서 훨씬 더 급진적으로 행동하고, 심지어 대규모의 시민 불복종 이후에 감옥도 가서 정치범 (?)이 되는 사람들은 바로 기후 활동가들입니다.

저는 그들을 보면 그야말로 120년 전의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연상되죠. 그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기후 변화가 "생명의 위협"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바다 해수면이 올라가도 방글라데시 등과 달리 노르웨이는 거기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자원과 재력은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즐기면서" 살 수도 있는 사람들이 "절멸의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평온한 일상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대단히 숭고해 보입니다.

결국 제1세계 양심 분자, 깨어 있는 시민들의 이런 지구 위기에 대한 "부채 의식",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생계형" 반란들이 어떤 공통의 분모를 찾게 되고 하나의 반자본주의, 생태형 공산 사회 건설을 위한 커다란 범지구적 운동이 되면 그거야말로 세계 혁명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끔 하게 됩니다....

(기사 등록 202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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