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윤미향 의원 재판 참관기 – 검찰과 언론이 짜놓은 모독과 능욕
어제(6월 10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윤미향 의원에 대한 재판에 갔다 왔다. 검찰이 준사기 등의 혐의로 걸어서 벌써 1년 동안 진행되고 있는 재판이다.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어떻게 검찰의 무리한 기소가 실패하고 진실이 드러나고 있는지 소식만 전해 듣다가 어제는 직접 참관을 갔다. 그래서 평생 처음으로 윤미향 의원도 직접 만나보게 됐다. 그동안 멀리서 응원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했지 윤의원을 직접 만나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어제 재판은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거의 저녁 8시에 가서야 끝났다. 정말 힘들고 지치는 경험이었고, 이런 재판을 1년 동안이나 해온 윤미향 의원과 변호사 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재판에 참관 가서 정치검사들의 위험한 재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검사들이 짜놓은 프레임은 4중의 의미로 잔인하고 모독적이었다.
첫째, ‘위안부’ 피해자들과 연대해 온 지난 수십 년간의 활동을 ‘할머니들을 이용하고 학대하며 사욕을 챙기며 비리를 저질러 온’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 활동가들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었다.
둘째,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시 성범죄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요구해온 역사적인 저항을 ‘치매에 걸린 제정신이 아닌 할머니들이 윤미향과 정의연에 속아온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었다.
셋째, 모든 것을 바쳐서 고령과 노환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돌봐온 헌신을 ‘할머니들을 속여서 돈을 빼돌리고 돈세탁을 해 온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고인(정의연 마포쉼터 고 손영미 소장)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넷째, 수십 년간 반전평화와 여성인권를 위해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투쟁해 온 두 동지(윤미향과 길원옥)들의 인간적 관계를 갈라놓고 서로 대립하게 만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용서할 수 없는 비인간적 시도였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어제 이 정치검사들은 길원옥 선생님의 양아들인 목사와 그 부인을 증인으로 불렀다. 2020년에야 양아들로 등록하긴 했지만, 지난 수십 년간 실제로 길원옥 선생님과 같이 살거나 보호와 돌봄을 제공한 적은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검찰의 심문, 변호사의 반대심문, 검찰의 보충심문, 재판장의 심문에 하루 종일이 걸렸다.
일단 두 사람은 고 손영미 소장님이 수십 년간 얼마나 헌신적으로 길원옥 선생님을 돌봤는지 결코 부정하지 못했다. ‘정말 가족과 같은 분이었고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셨고, 우리는 항상 감사했고 그 선생님 앞에서 항상 미안한 죄인이었다’고 했다.
또 두 사람은 길원옥 선생님이 윤미향, 정의연과 함께 한 활동이 얼마나 의미있는 것이었는지, 또 길원옥 선생님이 그 활동에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못했다.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며 평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에 열심이셨고 행복해하셨다’고 했다.
또 두 사람은 매주 한번 씩 길원옥 선생님을 찾아와서 만나고, 수시로 통화하면서 길원옥 선생님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 어떤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정신력이 대단하신 분이었고, 같이 민화투를 치며 시간을 보낼 때도 짝을 잘 맞추셨고 저를 많이 이기셨다.’(양아들)
증언을 들으면서 몇 가지 자연스러운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양아들 목사는 길원옥 선생님에게 매주 찾아와서 계속 돈을 받아갔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거액의 돈을 받았다. 다 큰 자식이 부모에게 돈을 주기보단 받아간 것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목사는 ‘나는 목회자이기에 돈에 관심이 없고, 어머니가 주시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양아들과 그 부인은 결국 정치검사들의 목적과 주문대로 이런 취지의 진술을 했다. ‘알고보니 어머니는 2014년부터 치매였다. 따라서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정의연과 윤미향에게 이용 당해 온 것이다. 윤미향과 손영미가 길원옥에게 지급된 정부지원금을 빼돌린 것 같다. 매달 300씩 나온 돈이 다 어디로 갔는가. 스스로 돈 관리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 북한동포와 재일조선학교 등에 기부금을 낸 것도 정의연에 물들어서 그런 것이다.’
정치검사들은 자신들이 압수해 간 수많은 자료와 윤미향-손영미 간의 사적인 문자 대화 등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것을 뒷받침하려고 했다.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 독점, 금융과 통신 자료들에 대한 광범한 압수수색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길원옥 선생님이 직접 자기 생각을 밝히며 활동하고 있는, 변호사가 제시한 각종 동영상들의 가치를 부정했다. ‘옆에서 누가 시킨 것을 아무 생각없이 읽은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런데 정치검사들의 이러한 프레임과 두 사람의 진술은 스스로 지독한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증언이 맞다면, 길원옥 선생님이 양아들 가족에게 준 거액의 돈, 2020년에 양아들을 정식 가족관계로 등록한 것, 2021년에 양아들 부부와 함께 ‘윤미향에게 속았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도 모두 ‘치매에 걸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치매 증상이 더욱 심해진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정치검사들과 두 사람은 ‘치매 증상이 있다고 해서 항상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이 모순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즉 ‘선택적 치매 효과’라는 것이다. 길원옥 선생님이 반전평화와 인권을 위해 한 활동은 전부 ‘치매에 걸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일’이고, 양아들 부부에게 돈을 주거나 정치검사들의 프레임에 맞게 한 행동은 전부 ‘가끔 제정신이 돌아오면 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설득력이 없어 재판부도 계속 의문을 던졌다. 차라리 양아들 목사의 말처럼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게 더 그럴듯해 보였다.
그 외에도 두 사람의 진술에는 많은 모순이 있었다. 양아들 목사는 ‘나는 돈에 관심이 없어서 모든 것은 부인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이 어머니에게 매번 돈을 받아오는지 나는 잘 몰랐다’고 했다. 또 부인은 ‘어머니의 활동을 지지하고 대부분의 기사들을 찾아봤다’고 했다. 그러나 길원옥 선생님이 사회운동 단체들에 기부금을 낸 기사들만은 이상하게 다 못 봤고 몰랐다고 했다.
또 두 사람은, 길원옥 선생님에게 현재 얼마의 정부지원금이 나오고 얼마나 지출하냐고 묻자 ‘매달 600 정도가 나오지만 노환 때문에 간병비 등이 많이 나가서 남는 돈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의연을 향해서는 ‘어머니에게 매달 나온 정부지원금이 다 어디갔냐’고 하는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냐’는 질문에 양아들 목사가 ‘맨날 담배 피우고 방에 들어가면 담배 냄새가 가득했던 할머니’라고 한 것도 듣기가 불편했다. ‘어머니와 정의연의 활동을 지지했다’는 사람이 김복동 선생님이 했던 활동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재판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이 모든 게 정치검사들과 주류언론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의 재확인이었다. 양아들 부부는 자신들이 윤미향, 손영미, 정의연을 불신하고 의심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용수 할머니 기자회견 때만 해도 그냥 설마하고 넘어갔는데 그 이후에 언론이 자꾸 매일같이 떠들고 검찰이 압수수색하고’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들은 불안, 불심, 의심에 가득찬 눈으로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을 바라보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자신들이 고 손영미 소장님과 통화할 때마다 몰래 녹음을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또 손영미 소장님을 노골적으로 의심하고 압박하면서 ‘그동안의 모든 통장과 거래내역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고 했다.
그리고 양아들 부부는 사망 직전에 손영미 소장님이 ‘언론 보도와 검찰 수사 때문에 매우 힘들고 너무 머리가 아프고 잠도 못 자며 매일 약을 먹고 있다고 했고, 그래서 횡설수설하면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결국 검언 합작의 엄청난 마녀사냥 속에 주변인들의 돌팔매까지 날아오자 손영미 소장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양아들 부부는 당황했을 것이고, 정의연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당황하고 책임을 돌리기 위해 ‘손소장은 돈을 빼돌려서 돈세탁을 하다가 죽었고, 그 뒷배는 윤미향이다’는 식의 댓글을 온라인에 올리게 됐을 것이다. 정치검사들과 주류언론들은 그것을 또 이용하며 양쪽의 갈등과 대립, 불신을 더욱 부채질했다. 결국 두 사람도 검찰과 언론이 짜놓은 프레임 속에서 윤미향과 정의연을 불신하기 시작했고, 그 정치적 효과 속에서 움직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명하며, 울며, 정의연을 비난하며' 증언하는 두 사람도 그저 안쓰럽게 보였고,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정치검사들과 족벌, 주류 언론들에 더욱 분노하게 됐다. 그리고 같이 돌을 던지거나 침묵했던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자부심과 보람이 좌절감과 고통으로 바뀌고, 꿈과 희망이 악몽과 절망으로 바뀌면서 끈을 놓았을 손영미 소장님의 마음이 다시 아프게 떠올려졌다.
일본정부가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한국정부가 소홀한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고령과 노환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가 낳은 상처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각종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보여 온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의연은 길원옥 선생님의 단기 기억 상실과 치매 증상을 숨긴 적이 없었다.
이미 2019년에 나온 영화 <김복동>의 마지막 장면은 길원옥 선생님이 김복동 선생님을 기억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거기서 길원옥 선생님은 김복동 선생님과의 추억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괴로워한다. “요즘에 갈수록 기억이 안나요. 잊어버리는 약을 먹었나, 까맣게 몰라.”
어제 재판에서 양아들 부부는 ‘어머니가 손영미 소장님이 죽은 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게 차라리 나은 일일지 모른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그렇게 서로 사랑했던 이의 비극적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그러나 더 끔찍한 것은 길원옥 선생님이 정치검사들과 주류언론들이 짜놓은 프레임 속에서 ‘내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동지라고 믿었던 윤미향에게 이용당했다’는 ‘기억’을 갖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다가 결국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과 침묵과 방관을 뚫고 나서야 한다.
● 그때 같이 돌을 던졌던 ‘그대’가 더욱 봐야 할 <그대가 조국>
원래부터 극장에 잘 안 가게 되고 있었지만, 코로나 시대가 오면서 극장을 더욱 안 가게 됐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시시해진다. 엄청난 대중적 흥행을 하는 영화들은 그래도 뭔가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고 보려 하지만, 보고나서 실망한 경우만 늘었다. 요즘도 <범죄도시2>, <닥터스트레인지>, <쥬라기월드>같은 영화들은 영 땡기지가 않았다.
그래도 <그대가 조국>은 꼭 극장에 가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와 얼마 전 보고 왔다. 사실 3~4년 전만 해도 조국 교수에게 별로 우호적인 편은 아니었다. 정치적 입장도 차이가 있었지만 명문대 출신에, 교수에, 인기있는 지식인이라는 것도 왠지 거리감이 들게 했다. 그래서 그의 책도 주로 그 차이를 확인하고 반박하기 위한 경직된 태도로 찾아보던 기억이 난다.
노동자 투쟁 지지, 소수자 연대, 인권 보호 등 운동사회에서 요청하는 각종 연서명과 후원 요청에 조국 교수가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것을 반기면서도 꼭 좋은 감정으로만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솔직히 돌아보면 ‘이 사회에서는 지지와 연대도 사회적 위치가 있는 유명한 사람이 해야지 주목받는 구나’하는 속 좁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촛불 이후에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고 그가 민정수석에 이어서 법무장관에 지명될 때까지도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개혁적 학자의 요직 임명이 더 나은 일이라고 보면서도, 촛불의 성과가 왜 더 급진적 세력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는지에 대해 더 관심과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장관 임명 이후에 검찰과 주류언론의 협공 속에 벌어진 엄청난 정치적 쓰나미를 보면서 놀랐고 완전히 태도가 바뀌게 됐다.
검찰의 전방위적 압수수색과 언론의 폭포수같은 어그로 기사들의 거대한 물결 속에 한 사람과 그 가족들이 침몰해 가는 것을 목격했다. 부부간의 카톡 대화가 유출됐고, 동생의 이혼한 전처까지 끌려 나왔고 사망한 부모님의 묘비까지 기사가 됐다. 딸의 학생생활기록부가 공개됐고, 어린 시절 일기장이 압수됐다.
그러자, 조국 교수와 친분을 과시하던 이들, 가까이 지내고 아쉬울 때는 손을 내밀고 하던 이들까지 대부분 거리를 두고 등을 돌리며 급속히 손절하고 입을 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족의 인생 전체가 마치 CCTV로 사찰되고 엑스레이로 하나하나 검증되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와 부인과 딸과 아들이 모두 목에 칼을 차고 광장에 끌려 나와서 기둥에 매달리고 사방에서 돌팔매가 날아가는 장면을 하루하루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검찰, 언론, 방송만이 아니라 유튜브와 SNS로도 진행된 디지털 시대의 인간사냥이었다. 인권과 사생활 침해, 인격살해, 낙인찍기, 혐오선동, 집단적 괴롭힘과 스토킹이었다. 물론 한국에서 공인, 정치인, 연예인에 대한 시선에는 기본적으로 그런 관행과 요소가 섞여있다. 심지어 촛불 이후에 ‘적폐청산’ 과정에서도 그런 요소가 일부 섞여 있었다고 생각한다.(특히 검찰과 족벌언론은 문제의 사회구조적 본질을 가리며 그런 방향을 부추겼다.)
그러나 2019년에 벌어진 일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그야말로 ‘사태’라고 불릴만한 거대한 쓰나미였다. 그 파장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끝나지 않았다. 그 ‘사태’를 교육의 불평등과 학벌의 재생산 구조에 대한 정당한 대중적 분노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정말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현상은 다른 정치인이나 고위인사들의 자녀들이 그보다 더 심한 교육의 불평등과 학벌세습의 형태를 보일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 조국 가족에게 그렇게 돌을 던지던 이 사회는 그후 그 불평등과 세습의 구조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번 교육감 선거 결과는 교육의 불평등과 학벌주의를 더욱 강화하자는 세력이 오히려 힘을 더 키운 결과를 보여준다.
검찰과 언론, 그들이 주도한 조국몰이를 지지한 사람들은 조국 가족이 실제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후 3년 동안 수사, 기소, 재판 과정에서 결국 단국대 논문은 기소조차 하지 못했고, 사모펀드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고, 웅동학원은 문제삼을 게 없자 동생의 개인 비리를 별건기소한 것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조국 부인을 소환도 없이 기소한 핵심근거였던 강사휴게실 PC와 거기서 나온 디지털 증거들이 정당한 절차없이 수집됐고 심지어 조작된 것이라는 강력한 근거들이 제시돼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다 같이 돌을 던지고 나서는 막상, 지난 3년 동안 꾸준히 이 재판 과정을 추적하며 사실관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가족을 위해서라도 조국이 장관되는 것 막아야 했다’, ‘진정한 검찰개혁도 아니었는데 괜히 검찰과 대립한 것이 문제’... 이런 말들을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일종의 ‘조국 원죄론’이다. ‘대법원도 인정했는데 우기는 조국’, ‘조국 사태에 반성하지 않고 검수완박 추진하다가 지방선거도 참패’...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사냥할 때는 다같이 대서특필을 하지만, 클릭장사할 장사거리가 사라지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들이 보도한 것과 다른 사실이 드러나도 모른 척하는 패턴은 항상 반복된다. <조국의 시간> 같은 책이 유례없이 수십만 권이 팔리고. <그대가 조국>같은 영화가 다큐영화 역사상 기록적인 흥행을 해도 언론들은 대개 외면한다.
그러나 앞장서서 소리 높여 비난하고 같이 돌을 던졌던 사람들일수록, 눈치보고 침묵하다가 슬며시 같이 돌을 던지던 사람들일수록, 그런 책과 영화를 더 봐야 한다. 더 열심히 이 사건을 복기하고 추적해야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려면 그만큼 더 철저하고 자세하게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잘 알아보지도 않고, 쉽게 남에게 돌을 던지는 것처럼 무책임하고 위험한 행동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남들을 따라서, 언론 보도를 그대로 믿고, 분위기에 휩쓸려 쉽게 돌을 던졌다가, 다시 그것을 돌아보고 자신의 가벼운 행동과 판단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보다 자신을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언제나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옳았다는 만족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지난 3년 동안 이런 용기를 보여 준 사람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어떤 언론인이나 지식인도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조국 교수 딸의 친구였던 사람만이 거의 유일했다. “저의 증오심과 적개심, 인터넷으로 세뇌된 삐뚤어진 마음, 즉 우리 가족이 너희를 도왔는데 오히려 너희들 때문에 내 가족이 피해를 봤다는 생각이 그날 보복적이고 경솔한 진술을 하게 한 것 같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런 용기를 내기 어렵다면 적어도 이런 영화라도 보고, 다시 고민해 봐야 한다. 조국 교수가 왜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고 채칼로 살갗을 벗겨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고 말하는지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고통을 비인격화, 타자화해선 안 된다. 왜 검찰개혁(언론개혁)을 주장한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이 이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인지 직시해야 한다. 영화 <그대가 조국>은 그것을 위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눈치를 보면서 더 적극적으로 입을 열지 못하던 3년전의 내 비겁함을 돌아보면서 영화를 봤다. 영화는 갑갑할 정도로 드라이하게 만들어졌다. 지난 3년간의 상황과 문제점 중에서 왜 더 많은 것을 담아내지 못했는지 불만족스러울 정도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가 ‘편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편향돼 있었고, 어느 일방의 주장과 관점만을 압도적으로 받아들여 왔는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검찰과 주류언론의 반대 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 조금만 목소리를 내도 ‘편향적’이라고 느끼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 물론 이 영화는 검찰과 주류언론과 그들의 공격을 당하고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중립적으로 공평하게’ 카메라와 마이크를 대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결코 ‘중립’도 ‘공평’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난 3년간의 정치적 쓰나미가 남긴 압력이 여전히 너무나 강력하고, 알게 모르게 여전히 우리 모두를 옥죄고 있어서 이 영화가 더 많은 진실을 담아내고, 더 많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있다. 다만 이 영화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영화가 단지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운동으로서 만들어지고 상영되는 현상도 참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다.
작가의 정치적 관점을 떠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총체적으로 보려고 노력할 때 ‘리얼리즘의 승리’가 일어난다고 엥겔스는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을 계기로 지난 3년간의 정치적 쓰나미가 어떤 구조 속에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벌어지고 결국 지금과 같은 정치지형을 낳게 됐는지 더욱 총체적이고 더욱 깊이있게 보여주는 더 많은 시도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 누가 어떻게 윤석열의 ‘검찰공화국과 혐오의 시대’를 막을 것인가
오늘날의 사회에서 두드러진 정치적 특징 중의 하나는 정치혐오와 냉소다. 많은 이들이 정치와 정치인을 혐오한다. 기성정치인들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인 것처럼 타자화된다.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정치인을 혐오하고 조롱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된다.
이것은 물론 정치적 스펙트럼을 넘어서 대부분의 정당과 정치인이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굴복하고 대중의 삶을 후퇴시키는 데 가담한 것에 대한 정당한 반발이 섞여있다. 그러나 오늘날 더 두드러지는 것은 자유(부르주아)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의 쇠퇴와 기술관료적 통치로의 후퇴라는 맥락이다.
대중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치인에 대한 혐오를 이용해서 선출, 통제되지 않는 기술관료들에게 더 큰 권력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그것은 정치검사들과 기재부 관료들로 대표된다. ‘시민단체나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이 아니라 이 ‘똑똑한 엘리트들’이 더 실력있고 믿을만하다는 담론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또 국제적으로 오늘날 기성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혐오는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급성장하게 된 주요 무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이 두 가지가 섞여 있다. 정치혐오는 이미 87년 민주화 이후 기득권 우파와 족벌언론의 주요 무기였다. 대표적으로 일베 등에서 노무현에 대한 혐오와 조롱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된 하나의 놀이로 정착돼 있다.
따라서 윤석열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술관료적 후퇴를 상징할 뿐 아니라, 기성정치인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며 대중적 지지를 모으는 극우 포푤리즘적 요소도 같이 보여 주고 있다. 지난 5년간 매주 광화문에서 청와대로 행진하던 태극기부대와 그 지지자들은 이제 ‘구중궁궐 청와대를 시민에게 돌려준 윤석열’을 고마워하며 해방감을 느끼고 있다.
반면 고향으로 내려간 문재인은 온갖 욕설, 막말, 저주, 혐오발화 속에 내몰린 ‘독안에 든 쥐’처럼 보인다. 극우유튜버들은 ‘최악의 공산주의 악마 문재인’을 혐오하는 콘텐츠들을 쏟아내며 슈퍼챗을 벌고 있다. 이것은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볼 수 있었다. 국민의힘 핵심 지지자들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 결과를 보고 민주당에 대한 심판이지 윤석열과 그가 가려는 방향에 대한 지지가 아니었다고 본다면 그것은 정직한 현실 직시가 아니다. 정말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기분이 이토록 우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정치적 주장과 정책 방향을 보고 판단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면 큰 착각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기업과 시장에 더 많은 자유를 주고, 규제완화와 감세와 노동유연화로 재벌들에게 투자할 기회를 주고,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해 북한을 더 압박하고, 탈원전에서 벗어나 핵발전을 강화하고, 검찰에게 더 큰 힘을 줘 검찰개혁을 되돌리고, 여가부를 해체해 ‘남성역차별’을 바로잡고, 교육에서 능력에 따른 경쟁을 더 강화하자는 입장의 전진이다.
그런 정치적 방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아졌고, 결집했고, 주변을 늘리면서 자신감을 얻고 있다. 그래서 이제 윤석열 정부가 그러한 방향으로 더 가속도를 높이고, 각 지역에서 인권조례나 학생인권조례 등이 공격받고, 신남성연대같은 극우청년 조직들이 여가부 해체와 차별금지법 반대 등을 내걸고 거리로 나설 것이라는 걱정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미 윤석열 정부는 ‘소통령’ 한동훈을 중심으로 검찰과 법무부와 대통령실을 일체화하며 모든 정보들을 집중하는 직할체제를 수립해서 그 방향으로 진격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구도와 세력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검찰과 족벌언론들이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 돈을 주고 논문을 대필하고 나아가 대필논문을 국제학술지에 개제한 한동훈 일가의 가장 악질적 수준의 입시사기는 ‘내로남불과 위선’의 프레임을 쉽게 벗어났다. 김건희의 주가조작 등이야말로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언론의 감시’가 가장 필요한 영역이라는 이야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족벌언론과 종편들을 뒤덮은 것은 한동훈과 김건희의 패션과 외모에 대한 온갖 신변잡기적 어그로 기사들이다. 그러면서 족벌언론들이 끝없이 반복 제기하는 논리는 ‘내로남불과 위선에 찌든 586운동권이 주도하는 민주당이 광기어린 팬덤들에 이끌려 자기들의 비리를 덮고 비판을 막으려고 검찰개혁과 언론개혁 등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지 기득권 우파와 족벌언론, 종편과 포털만이 아니라 중도개혁적 기성언론들과 대부분의 주류 지식인들, 심지어 민주당 상층부의 일부와 많은 진보좌파들까지 공감하고 지지하는 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것을 거스르는 목소리를 듣기가 어려운 헤게모니적 주류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지난 대선 말기에 나타난 ‘박지현과 개딸 현상’의 중요성은 여기에 파열구를 냈다는 데 있다. 청년여성들을 중심으로 그토록 강력하던 주류적 프레임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던 것이다. (이재명 악마화 등을 포함한) 그 프레임이 가장 강력했던 공간들 중의 하나에서 말이다.
이것은 집권 5년 내내 기득권 우파에 타협하고 굴복하던 민주당이 대선 패배 직후에 오히려 검찰개혁을 고리로 기득권 우파와 대결전선을 형성하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당시 검찰개혁 입법의 동력은 민주당 상층이 아니라 분명히 기층 지지자들 속에서 나왔다.
청년여성들을 중심으로 20만의 새로운 당원이 가입했고, 민주당 당사 앞에서는 ‘민주당은 할 수 있다’며 개혁입법을 촉구하는 집회와 행진이 계속 열렸다. 그 압력은 다수당으로서 민주당의 위치와 결합돼 국민의힘 지도부도 일부 후퇴하도록 만들었고 진보정당들도 막판에 검찰개혁 입법을 지지하게 됐다.
그러면서 대통령 당선자의 지지율은 기록적 최저치를 나타냈다. 만약 그 투쟁의 승리가 더 큰 자신감을 낳으며 더 많은 개혁입법(예컨대 차별금지법) 드라이브들로 연결되고, 그것이 반우파 세력의 결집과 연대, 지지기반의 확대로 연결된다면 기득권 우파에게는 달갑지 않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제 기득권 우파의 시급한 과제는 명백했다. 어떻게든 검찰개혁 입법을 누더기로 만들고, 검찰개혁과 다른 개혁들을 분리시키고, 검찰개혁 지지자들과 다른 개혁의 지지자들을 대립시키며, ‘박지현 현상’을 파괴하거나 민주당 내분의 요소로 그 물줄기를 돌리는 것이었다. 두 달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기득권 우파의 대응은 대체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개혁은 알맹이가 빠진 채 아쉽게 마무리가 됐고, 윤석열과 한동훈은 그것마저 짓밟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차별금지법 지지자들은 검찰개혁 지지자들을 불신하고 냉소하고 있다. 서로 다른 개혁의 지지자들이 서로의 요구를 지지하며 더 크게 연대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초기에 박지현에게 곱지 않은 시선으로 온갖 부정적 소식을 보도하던 <조선일보>는 이제 오히려 박지현을 ‘민주당의 구세주’로 찬양하며 이간질의 성과와 효과를 즐기고 있다.
그러면서 족벌, 주류언론들은 민주당을 향해 ‘윤석열 정부 견제와 개혁 추진보다는 내부 쇄신부터 해야 한다’는 허구적 대립을 주문하고 있다. 또 ‘스스로 혁신하지 않고 윤석열과 대결하려고 하고 개혁입법 독주를 하니까 지지층이 대거 선거에 불참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진실은 윤석열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중요한 것은 혁신의 방향이라는 것이다. ‘혁신하지 않는 민주당에 실망'이냐, ‘개혁을 추진하지 않는 민주당에 실망’이냐가 아니라 둘 다라는 것이다. 둘 모두가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도 섞여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한동훈을 막지도 못했고, 한덕수 임명을 동의해 줬고, 이번 지방선거에서 오세훈과 잘 구분돼지 않는 공약을 내세운 게 민주당 송영길이고, 개혁입법 독주가 아니라 국민의힘 핑계대며 차별금지법같은 개혁입법을 5년 내내 미뤄온 것이 민주당이라는 것이다.
박지현은 이런 민주당의 문제를 일부 비판하면서 ‘차별금지법 제정과 정치개혁 입법 등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민주당’을 주장하는 점에서 분명히 옳다. 박지현은 검찰개혁도 반대하지 않았고 대체로 여러 개혁들을 서로 대립시키기보다는 연결시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무엇보다 윤석열 시대의 ‘검찰공화국 현상과 혐오와 차별의 공세’에 맞서야 한다는 박지현의 위기의식과 주장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넷플릭스 <N번방을 무너뜨려라>를 보면 박지현이 한국사회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한 사람인지 잘 알 수 있다.(다만 이 다큐는 너무 스릴러적이고 N번방을 낳은 사회구조와 규범을 잘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박지현의 단편적 언급이나 실수, 그것에 대한 족벌언론들의 선택적 주목과 이간질에 휘말려 과도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박지현을 ‘경험이 부족한 어린 여성’이라고 무시하면서 막말과 욕설의 댓글과 문자를 보내는 사람들은 ‘폭력적 팬덤’이라고 불려도 변명하기 어렵다. 정치권의 성차별적, 성폭력적 문화에 대한 박지현의 지적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청년여성의 눈으로 보면 사각지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박지현의 입장도 당연히 비판과 토론의 대상이다. 첫째, 세대론이 과연 정치혁신의 핵심일지는 의문이다. 신진욱 교수는 모든 것을 세대로 해석하고 해법을 찾는 것을 ‘586편집증’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지금 정치권에서 물러나야 할 것은 누구보다 개혁적인 586 권인숙이 아니라 청년세대인 이준석일 것이다.
민주당에서 물러나야 할 것은 ‘586 운동권 출신’이냐 아니나갸 아니라 '개혁 추진과 그것을 위한 혁신'을 반대하는 세력이어야 한다. 또 세대론은 지금 윤석열이 그것을 고리로 민주당과 진보정당까지도 ‘협치’로 끌어들여 연금개악을 하려는 핵심무기다.
둘째, 성폭력 사건에 대한 단호한 조치는 옳고 아무리 개혁적 정치인이라도 잘못은 구분해서 봐야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진상규명과 사실의 근거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또 성폭력 사건은 무관용 원칙(꼬리 자르기)보다 공동체의 구조적 변화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윤석열의 ‘검찰공화국과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 맞설 수 있는 희망은 결국 청년여성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정치적 가능성이 어떻게 확장하고 발전할 수 있느냐에 많은 부분 달려있을 것이다. 그래서 박지현 현상과 민주당 내부 논쟁에 주목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이것이 왜 민주당 왼쪽의 진보정당들에서 시작되지 못했는가는 매우 아쉬운 일이지만 동시에 진보진영의 자기 성찰이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다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그토록 오랜 시행착오와 실패 끝에 진보정당들(정의당, 진보당, 녹색당, 노동당)의 선거 연대와 후보 단일화가 시작된 것은 매우 의미있고 평가할 일이다. 이제 정치적 앙금과 차이를 넘어서 공존하며 투쟁과 선거에서 연대하는 새로운 전통이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진보정치는 풀뿌리 기반이 아주 깊고 강력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렇게 서로 힘을 합치고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거나 사퇴한 곳에서 그나마 의미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를 모색해야 한다.
얼마 전 프랑스 대선에서 마크롱과 르펜의 양자대결 구도에 밀려 3위를 차지했던 멜랑숑이 녹색당, 공산당과 급진좌파, 그리고 심지어 사회당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좌파 선거연합(생태사회적 신민중연합)을 결성해 6월 총선의 대약진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은 시사적이다.
사회당은 공화당과 번갈아 집권해 온 주류정당인데 이번 선거연합을 둘러싸고 좌우로 쪼개질 상황이라고 한다. 이처럼 진보좌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중도세력까지 분열시키며 반우파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상황은 부러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도 어떤 가능성도 열어놓고 기득권 우파의 득세와 주도권을 막아낼 정치적 도전을 계속해야 한다.
● 꼭 봐야 할 ‘시사기획 창’의 <언론과 진실> 2부작
지난 2주간 ‘시사기획 창’에서 제작 방영한 2부작 <언론과 진실> 1부 ‘조작의 역사’와 2부 ‘놈놈놈’은 정말 반드시 모두 사람들이 봐야할 탐사보도물이다. 2주전에 방영한 1부를 보고나서, 2부가 이토록 궁금하고 기다려진 적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만들어진 탐사보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작품 중에 하나라고 단언하고 싶다.
공안기관과 사법부와 언론이 공모한 국가범죄인 간첩조작의 한복판에서 산산조각난 피해자들의 삶을 지켜보는 것은 분노와 울분과 슬픔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경험이 될 것이다. 섬마을(개여도)과 시골마을(김녕마을) 등에서 삶을 이어가던 무고한 사람들이 갑자기 공안기관(중앙정보부, 보안사)에 끌려가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고문과 조작을 통해서 그들은 ‘간첩’의 굴레를 쓰고, 그 낙인의 효과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가까운 이웃과 친인척들이 모두 관계와 왕래를 끊어버린다. 애를 업고 탄원하던 부인은 이웃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한다. 부부는 이혼하고 자식은 부모와 절연한다. 절망한 부모가 자살하고 자식이 자살한다. 피해자는 간첩 낙인을 안고 고향에 가지 못하고 외로이 죽는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조작의 공범으로서 언론의 구실이다. 이것은 크게 ‘간첩조작 시기’와 ‘진상규명 시기’로 나누어진다. ‘간첩조작 시기’의 특징은 한마디로 ‘대서특필’이다. 첫뉴스와 1면으로 대문짝만하게 보도하고, 단독과 특종으로 자세히 다루고, 사설과 칼럼과 논평으로 확인사살한다.(오늘날 ‘종북몰이’와 ‘조국몰이’에서 나타난 양상의 원형이다.)
간첩이라고 지목된 사람의 실명, 얼굴, 주소, 근무지까지도 모두 자세히 보도가 된다. 취재원은 당연히 보안사, 중앙정보부, 검찰이다. 언론은 그들이 불러주는 데로 받아쓴다. 반면 몇 십년 후 조작의 진실이 드러나는 ‘진상규명 시기’가 되면 모든 게 180도로 달라진다. 그것은 한마디로 ‘축소와 외면’이다.
보도량은 ‘간첩조작 시기’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저 구석에 조그맣게 보도한다. 직접 찾아보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런 보도가 나온지도 모른다. 그것도 법원의 판결이 나오면 보도가 될 뿐, 피해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받아쓰’려는 노력은 찾기 어렵다. 무엇보다 사과와 정정 보도는 0건이었다.
더구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상규명을 반대하고 가로막는다. ‘세금 낭비다, 과거는 덮자, 음모론이다, 가해자를 사면하자, 억울한 가해자가 있다...’ <언론과 진실>은 이런 잘못을 저지른 언론과 방송이 어디인지 명확히 짚는다. KBS, MBC, SBS, YTN,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 서울신문... 이 중에서 물론 족벌언론들이 좀 더 심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은 조선일보였다.
40여년 전 지옥같은 고통 속의 피해자들은 절박했다. 공안기관에 끌려가 간첩으로 조작된 다음에 처음으로 만난 기자들에게 ‘고문받았다, 다 조작이다’ 호소했다. 기자는 그 사실을 공안수사관에게 고자질했고 다시 고문이 시작됐다. 검사들에게 호소했다. 검사는 다시 피해자를 폭행하고 고문했다. 판사들에게 호소했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언론과 진실>은 그런 짓을 저지른 역사의 범죄자들 중에 하나가 전 MBC 사장 김재철이고, 전 국무총리 김황식이고, 전 대법원장 양승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다. 방송에서 강종헌 씨 부분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강종헌 씨는 조작이 밝혀지고 나중에 2012년 통합진보당의 비례후보가 됐다.
종북몰이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한 당시에 우파와 족벌언론들은 이석기 의원을 ‘종북’으로 몰면서 의원직 사퇴를 압박했다. 동시에 ‘이석기가 사퇴하면 비례승계하는 것은 고정간첩 원조주사파 강종헌’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또 공격했다. 강종헌 씨는 ‘나는 법적으로 무죄지만 사회적으로 유죄였다,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돌아본다.
검찰과 경찰, 주류언론이 공모해서 진실을 조작하고 누군가를 낙인찍고 사냥하면서 파렴치한 범죄자로 몰아가고 전사회적 혐오를 부추기는 일이 지금도 툭하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이다. 과거의 구조가 청산돼지 않았고, 잘못이 단죄받지 않았으니 오늘도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가 다른 방식으로 반복된다.
노무현 정부 때 진실화해위원회가 만들어져 이런 진실이 일부 드러났다. 이명박근혜 시대에 중단됐던 진실화해위는 그나마 문재인 말기 때 다시 만들어졌지만, 이제 윤석열 정부가 방해하고 없애려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모두가 침묵하고 외면하는 속에서 가해자의 일부였던 KBS 내부에서 이런 목소리를 낸 ‘시사기획 창’의 용기는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방송에서 피해자들은 ‘가해자들과 검찰과 언론에게 사과받고 싶다, 너무 억울하다, 사과받으면 원이 없겠다’고 말한다. 한 피해자는 ‘잘못한 것 하나 하나에 대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적으로 옳다. 당장 사과해야 한다. 두루뭉술한 사과도 안 된다. ‘먼 옛날에 우리 선배들이 한 일이지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넘어가서도 안 된다.
공안기관과 검찰과 사법부와 언론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구체적 잘못 하나 하나에 대해서, 피해자 한명 한명에게 모두 직접 구체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비슷한 잘못들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 분노와 한이 풀릴 수가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살아있는 기자, 검사, 판사라면 반드시 이것을 보며 그 아픔에 공감하고, 자신이 속한 조직과 그 선배들이 어떤 역사적 범죄를 저질렀는지 반성해야 마땅하다. 낙인찍히고 버림받아서 다시는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평생 한을 품고 살다 벌써 사망한 피해자 서창덕 씨가 방송에서 개를 안고서 장난치며 환히 웃던 얼굴이 계속 떠오른다.
1부 조작의 역사 https://www.youtube.com/watch?v=mhAKvQTE9Po
2부 놈놈놈 https://www.youtube.com/watch?v=d26fpie-et8
● 우크라이나 전쟁과 ‘혁명적 패전주의’의 신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벌써 100일이 넘었다. 러시아 군대의 야만적인 침략 행위 속에 비극과 참상은 계속되고 있다. 동시에 이 전쟁을 둘러싼 좌파들 내부의 혼란과 논쟁도 계속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기본적으로 러시아의 침공을 반대하면서도 우크라이나를 지지할 수는 없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참으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런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전쟁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앞세운 서방(나토)의 대리전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러시아도 서방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레닌과 볼세비키의 ‘혁명적 패전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또 젤린스키 정부가 얼마나 한계가 많은 친서방 부르주아 정부인지를 강조한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지정학적 갈등과 충돌에는 서로 경쟁하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미얀마 군부의 뒤에는 중국이 있고, 반면 미국과 서방은 대체로 미얀마 저항세력을 편들고 있다. 홍콩의 민주화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서방은 중국 견제를 위해서 홍콩 민주화 세력을 지원한 것이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이 얼마나 진지하고 일관되게 미얀마의 반군부 저항과 홍콩의 민주화를 지지했는지는 핵심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따라서 미양마의 반군부 저항과 홍콩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로 연결될 이유는 없다.
즉, 서로 대립하는 양세력의 뒤에 어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개입하고 있는지 만으로 대리전을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고, 그런 식이면 대리전이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관점에서는 이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민중의 주체적 선택과 판단에 대한 존중과 고려가 실종돼 있다. 더불어 젤린스키 정부의 한계와 본질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안타깝다.
우크라이나에서 NATO와 서방 제국주의의 반동적 역할을 완전히 이해하는 혁명적 운동이 정권을 전복하고 파리코뮌형 정부를 선포해야만 그들을 지지할 수 있다는 식의 이같은 태도는 스스로의 협소함만 입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태도가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도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가짜진보인 민주당과 민주당 정치인을 지지하는 한심한 운동이므로 절대 지지할 수 없다’는 편협함을 낳아왔다.
나아가 ‘혁명적 패전주의’의 신화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싶다.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의 전통을 강조해 온 것으로 유명한 할 드레이퍼는 일찍이 ‘혁명적 패전주의’가 신화에 불과하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실제 볼셰비키가 주장하고 실천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징집된 젊은 병사에게 ‘당신이 시체로 돌아오기 바란다’는 전단지를 배포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며 그런 경직된 전술은 현실에서 작동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애국주의에 맞서려는 혁명적 정신을 구체적 상황을 뛰어넘어 당장의 전술적 요구로 제시하려는 시도는 좌파의 고립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드레이퍼는 1917년에 실제 볼셰비키를 승리로 이끈 것은 ‘혁명적 패전주의’ 슬로건이 아니라 “빵·평화·토지”의 요구였다고 주장했다. ‘혁명적 패전주의’는 오래 동안 사라진 구호였다가 1924년에 볼셰비키 내부의 권력투쟁의 필요로 불러내졌다는 것이다.
‘죽은 것을 버려라. 패전주의의 전통은 1904-5년의 정치적 실수에서 태어났다. 1914년 혼란 속에서 부활했고 1917년 재고없이 보류되었다. 그것은 1924년에 악의와 반작용으로 다시 부활했다. 1930년대에는 공허한 문구로 바뀌었다. 40년대에는 무시되었다. 그리고 이제 50년대에 그것에 기반을 둔 모든 정책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거나 더 나빠질 수 있다.’(할 드레이퍼)
신화를 해체하는 할 드레이퍼의 이런 분석을 보다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초좌파적 스콜라주의는 구체적인 용어가 아니라 공허한 추상으로 생각한다. 생생한 현실을 보지 못하기에 신선한 공기를 차단하는 밀폐된 공식을 추구하며, 그러한 종류의 공식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 없다’던 트로츠키의 지적만은 타당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 임신중지권 - ‘로 대 웨이드’ 뒤집기냐 굳히기냐
임신중지권이 심각하게 후퇴할 위기에 처한 요즘 미국의 상황을 보면 역시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형사사법적 국가기구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검찰이 그렇듯이, 이런 기구들의 특징은 먼저 선출되지 않는 진정한 권력이라는 점이다. 이 기구들은 선출된 의원들이나 대통령이 유권자들을 뜻을 대변해서 추진하는 개혁을 중단시키거나 역전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이 기구들의 특징은 초엘리트주의적 기구라는 점에 있다. 대체로 이런 국가기구의 구성원들은 명문일류 대학을 나오거나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서 자신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우위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특권적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이런 기구들의 특징은 그 구성원들이 가장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에 친화적이고 기득권 질서를 유지하려는 입장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에서 한국의 검찰이나 기획재정부 관료들보다 더 심한 것이 미국의 연방대법원이다. 이 연방대법원은 고령으로 사망하거나 스스로 사임하지 않으면 종신직으로 자격이 유지되는 9명의 대법관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이 미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는 구조이다. 이것은 항상 재산이 많은 백인 남성 가부장들의 이익을 우선해 온 노예제 시대부터 비롯한 미국식 민주주의의 전형을 보여 준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이 연방대법원을 우파적 인물들로 구성해 놓은 결과, 이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대변되는 임신중지권을 조만간 삭제하고 후퇴시킬 것이 확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미 공화당이 장악한 30개에 가까운 주들에서 형식적으로 막혀 있는 임신중지권이 실질적으로 금지되고, 미국 전역에서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임신중지를 선택하려는 여성들과 그들을 돕는 이들은 구속, 처벌될 것이고, 위험한 불법시술에 의존하면서 온갖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사망할 것이다. 자궁에 철제옷걸이 등 위험한 물건을 집어넣거나 스스로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져 임신중지를 하려는 시도도 나타날 것이다.
임신중지를 선택하려는 여성과 돕는 의사에 대한 혐오, 공격, 개별적 테러도 강화될 수 있다. 그러한 방화, 테러, 납치, 살인 사건이 지난 40년간 무려 13000건이나 벌어져 왔다는 통계가 있다. 위험에 처한 것은 임신중지권만이 아니다, 임신중지를 금지하려는 같은 논리와 이데올로기가 이제 피임과 성전환 등 성적 자기결정권 전반에 대한 공격으로 확대될 것이다.
미국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공화당, 극우파, 극단적 종교집단들의 핵심적 공격 목표가 돼 왔다. 그것이 단지 여성들의 권리일뿐 아니라, 6~70년대 미국을 뒤흔들었던 반전운동, 민권운동, 흑인해방, 여성과 성소수자 해방 운동의 물결 속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성과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러한 변화와 진보를 다시 되돌린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로 대 웨이드’에 대한 우파적 공격은 지난 40년간 끝없이 이어져 왔다. 반면 미국의 민주당, 여성운동과 진보진영의 대응에는 한계와 약점이 있었다는 지적들이 있다. 공공의료를 통해서 임신중지에 필요한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등,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체계적인 법과 제도를 통해 뒷받침하는데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개인의 ‘선택과 자유’만이 강조가 되고, 이것은 80년대의 신자유주의와 의료민영화 속에서 더욱 시장논리에 맡겨지게 됐다. 이것은 백인 중산층들에게는 의미가 있었을지 몰라도, 가난한 백인과 흑인 등 유색인종들 속에서는 ‘선택과 자유’가 저 멀리있는 사치스러운 이야기로 들리도록 만들었다.
젠더, 계급, 인종의 교차성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접근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것은 우파들이 ‘선택이냐 생명이냐’의 이분법을 강요하면서 자신들이 개인주의적 가치보다 공동체적 가치를 우선하는 듯한 프레임을 짤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개인적 선택권을 넘어서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임신중지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낳고 있다.
그것은 민주당 지도부와 연방대법원만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대중행동과 사회변화의 물결을 건설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을 건설하려면 당연히 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과도 함께해야 하고, 민주당 지도부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한계와 결함이 있더라도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이 운동의 일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민주당을 더 강하게 욕하는 것만이 좌파의 핵심 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에 민주당은 연방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법안의 통과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조 만친이 막아서 결국 과반을 넘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조 만친은 민주당 소속이지만 사사건건 바이든 정부의 개혁법안을 막아서면서 우파들에게 ‘여당 내 야당으로서 소신과 용기’를 칭송받고 있다. 마치 한국에서 금태섭과 양향자가 검찰개혁 법안 처리 과정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이제 민주당은 다가오는 중간선거에서 자신들에게 더 많은 투표를 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차별금지법이 보여주듯이 민주당이 더 많은 의석을 가진다고 자동으로 개혁이 전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로 대 웨이드’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지지 여론이 70%가 이른다는 것도 안심할 근거는 아니다. 소수의 기득권 세력이 반대해도 기층의 민중의 다수가 지지하고 원하는 개혁이라면 뭐든 다 이뤄질 수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와 국가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들을 면밀히 파악해서 개혁을 전진시킬 치밀한 전략전술을 짜는 것이다.
넷플릭스 다큐 <로 대 웨이드 뒤집기>를 보면 2013년 텍사스 주의회에서 공화당이 임신중지 금지법안을 통과시키려는 상황에서 홀로 13시간 필리버스터로 맞서는 민주당 웬디 데이비스 상원의원이 나온다. 그 소식을 듣고 웬디 데이비스를 응원하러 몰려온 수많은 시민들의 박수와 응원의 함성이 막판에 공화당이 법안의 강행 처리를 못하도록 막는 장면에 그 상황의 핵심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 ‘대중 필리버스터’라고 불렸다.
중요한 것은 다수의 개혁 지지 여론을 실질적인 대중행동과 연대로 조직해낼 수 있느냐다. 그것이 급진적 개혁을 가로막는 소수의 부자와 권력자들의 방해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눈치를 보면 타협하는 정치인들도 강제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이다. 이런 행동과 힘을 건설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지난한 일이지만, 역사에서 이것을 돌아가는 지름길은 찾기 어렵다.
● 천안문 항쟁의 저항정신을 기억하며 듣는 분노의 랩
중국에 대한 편협하고 일면적인 악마화와 한국의 우파들이 선동하는 '혐중'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를 지지할 생각도 전혀 없다. 코로나 방역에서도 중국의 강력한 국가통제적 방식이 부분적 효과가 있었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식 국가자본주의과 지역패권의 추구, 중국 공산당 지배계급의 폭압적 통치와 민중 억압과 착취를 조금도 지지하거나 방어할 수 없다. 홍콩은 국가보안법 체제 속에서 지금 어떤 반대 목소리와 비판적 의견도 짓밟히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신장의 위구르수용소에서 공안파일이 해킹돼서 ‘중국판 삼청교육대’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번 두 달간의 봉쇄는 ‘코로나 제로 정책’의 억압적 실체와 모순도 드러냈다. 결국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와 공산당 일당독재적 통치의 가장 큰 피해자는 중국의 민중이고, 그것을 뒤엎을 힘도 중국 민중에게서 나올 것이다.
두 달간의 봉쇄가 풀리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진핑 퇴진’의 목소리도 다시 사라지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더 크게 부활할 것이다. 아래 중국의 청년 래퍼 '팡뤼예 아스트로'가 이 봉쇄 기간에 올린 노래 ‘신노예’는 그러한 저항정신을 보여 준다. 분노로 숨이 막히고 터질 듯한 그의 표정이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자유를 금지하는 좀비같은 제복 권력들과 썩은 영혼들, 상부의 명령만 따르며 출세에 매달리는 게 바이러스보다 더 무섭다. 양육강식 속에 양심과 인성은 사라진다. 마천루의 번화함 뒤에 인권은 사라지고 절망이 커진다. 눈을 떠라! 깨어나라!’
엊그제가 33주년이었던 6.4 천안문 항쟁의 정신과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또 오늘날 ‘권위주의적 민주주의’와 검찰공화국으로 후퇴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며 듣는 이 노래의 의미와 그것이 불러오는 감정은 더 각별한 것 같다.
* 참고로 여기 ‘힙합문화연구자 엠씨세이모’가 운영하는 ‘소셜힙합연구소’ 유튜브 페이지에는 힙합의 저항정신이 살아있는 역사적 자료와 관련 노래, 영상들이 꾸준히 많이 올라와서 힙합과 랩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큰 도움과 흥미를 준다. 좋은 노래와 영상의 소개와 자막 작업 등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
https://www.youtube.com/watch?v=kqZNRispimw
(기사 등록 202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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