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서민을 위해’ 기업 금고와 부자 지갑을 채우자는 윤석열 정부
고유가, 고물가, 식량가격 급등 속에서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로의 흐름이 뚜렷하다. 특히 가난한 남반구 국가들과 어느 나라에서든 노동자들, 가난한 서민들이 더 직격탄을 맞고 있다. 스리랑카는 국가 부도가 났고, 아르헨티나와 페루 등은 상황이 심각하다. 시장에 가보면 급격한 물가 인상에 겁이 날 정도다.
물론, 자본주의에서 언제나 그렇듯 경제 위기가 온다고 모두가 힘들지는 않다. 예컨대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거대석유기업 엑슨모빌이 지난해 ‘하느님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고금리 속에서 거대은행들과, 고유가 속에서 에너지기업들이 놀라운 폭리를 벌어들이고 있다.
전세계적 주요 국가 지배자들의 대응은 일단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금리 인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왜냐하면 지금의 위기가 유동성 과잉 때문에 생긴 수요측면 인플레이기 보다는 코로나19 팬데믹와 중국의 봉쇄, 우크라이나 전쟁과 식량난 등 생산 및 공급망 차질과 교란에 의한 '공급측면' 인플레의 결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더욱 심각해진 국제적 부채 문제가 존재한다. 계속 쌓여온 소비자, 기업, 국가의 부채가 현재 300조 달러에 이르고 세계 총생산(GDP)의 400%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급격한 금리 인상은 거품 붕괴와 금융 위기의 방아쇠가 되면서, 지금의 위기를 더욱 증폭시킬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런데도 미국 연방준비은행 등이 금리 인상에 집착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구조조정과 실업을 유도해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를 막고 교섭력을 약화시키는데 주요 목적이 있다는 지적들이 있다.
실제로 1970년대 미국 연준 의장 폴 볼커의 급격한 ‘금리인상 쿠데타’는 바로 그런 방식을 통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남반구 국가들의 연쇄적인 부채 위기와 국가 부도로도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 방향은 이런 국제적 흐름 속에서 보더라도, 더욱 심하고 노골적인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다.
몇 주 전에 발표한 ‘새경제정책 방향’에 담겨진 이 내용들이 기업과 부자 감세, 규제 완화, 노동유연화, 빛내서 집사라, 최저임금 동결과 중대재해처벌법 완화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완전히 허구적인 ‘낙수이론’(아래 그림이 진정한 현실이다)이 그 바탕에 있다. 그래서 이런 정책들이 ‘서민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발표되고 있다.
더구나 윤석열 정부는 한미일 동맹 강화에 대한 신봉과 ‘멸공’에 대한 집착 속에서 경제를 안보, 이념과 종속시키며 스스로 선택의 폭을 좁히고 미국의 압박과 중국의 반발에 더 쉽게 흔들리도록 한국경제를 몰아가고 있다.
이것은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무식한 삼류바보들”이 “이 나라를 사회주의로 끌고 가려”던 것이라고 비판했던 윤석열의 ‘소신’ 때문만은 나일 것이다. 더불어, 서로 끈끈히 연결된 전직 검사, 판사, 기재부 관료, 김앤장과 족벌언론 출신자들로 권력의 핵심부들을 구성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기득권 카르텔의 최상층 구성원들은 비슷한 이데올로기적 집념을 공유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국가 전체의 이해관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족벌언론들은 지금, “원전 수출을 통해 일자리 10만개를 창출하겠다”며 나토 회의에 가서 ‘원전 세일즈’를 한 윤석열의 황당한 뻘소리와 뻘짓을 옹호하면서, 김건희 팬클럽 관계자와 접촉해 ‘단독과 특종’을 뽑아내는 데 몰두하고 있다.
물론, <조선일보>는 ‘무법천지 노조공화국’ 특집 연재를 시작하면서, 검찰-경찰-국정원 수직계열화와 전투적 재구성을 통한 ‘신공안정국’을 준비 중인 윤석열 정부에 발을 맞추고 있다. 민주당을 조지고 노조를 때려잡으면서 우파를 결집해 국정 동력을 만들고, 기업의 금고와 부자들의 지갑을 채워서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구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좌파는 고통을 전가하고 위기만 심화시킬 그런 방향을 막아내면서, 생필품과 공공서비스에 대한 가격 통제, 횡재세 등을 통한 이윤 회수, 에너지와 식량 기업들의 국공유화와 사회적 통제, 공공 투자를 통한 생산과 일자리 확대 등을 고물가 위기에 대한 대안적 방향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런 방향을 ‘대대적 사정과 신공안 정국’ 조성 시도에 대한 저항과 연결시켜야 한다. 이런 방향을 중심으로 진영과 정파를 넘어서는 광범한 연대를 건설해야 한다. 최근 민주노총의 대규모 노동자대회는 그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움직임보다는, 마치 시계가 멈춘 듯이 아직도 문재인 시대에 머무르며 선거에서 민주당과 대결이라는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보인다. 투쟁을 위한 연대보다 선거를 위한 경쟁이라는 선거공학의 협소한 관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문재인과 민주당을 증오하고 공격하는 것만이 진보좌파의 최우선 과제인 듯이 목소리를 높이던 한 ‘마르크스주의’ 활동가가 대선 때 윤석열을 지지한 것을 넘어서, <한국경제> 신문에 윤석열 정부에게 조언을 하며 화물연대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글을 실은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자본주의와 기득권 구조에 대한 분석의 실종과 정치적 혼란이 낳은 비극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버니 샌더스는 바이든보다 자신이 진정한 반트럼프의 대안임을 입증하려고 했고, 영국에서 제레미 코빈은 기존의 노동당 주류보다 자신이 보리스 존슨의 진정한 적수임을 입증하려 했다. 진보좌파는 기득권 카르텔의 핵심이자 이제는 집권한 ‘살아있는 권력’이기도 한 윤석열 세력(검피아-모피아-족벌언론 연합정권)에 가장 앞장서 맞서고 투쟁하는 대안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야 한다.
● 윤석열 정부의 역주행을 앞장서 막고 있는 장애인들의 투쟁
6월 30일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도 용산역 광장에서 하루 종일 <2022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 전동행진> 투쟁 대회와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추모제’가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장애인 동지들은 서울역에서 노숙 농성까지 하고 다음날 오전까지 1박2일 투쟁을 전개했다.
발언, 노래, 공연, 시낭송 모두 하나하나 가슴을 울리는 시간이었다. 특히 ‘이제는 끝장을 봐야 한다’는 배재현 동지의 발언, 박경석 대표님이 새로 발표한 노래의 가슴 아픈 가사말이 기억에 남는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 고물가, 고유가, 고금리 속에서 벼랑 끝으로 몰리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 ‘서민을 위해서’라면서 재벌과 부자들을 위한 온갖 특혜와 선물을 쏟아내는 것을 보자니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진다.
기획재정부는 또 어떤가. 재벌과 부자들을 위해서는 돈을 물 쓰듯이 하면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겠다는 태도가 너무나 노골적이다. 그리고 국민의힘 당대표 이준석은 혐오선동을 통해서 장애인들을 괴롭혀 왔다.
이 자가 최근에 당내 권력투쟁 속에서 반대파를 향해서 ‘내가 흑화하지 않도록 도와달라. 그러면 당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협박을 하던데, 정말 웃긴다. 이준석은 새로 ‘흑화’할 것이 없다. 그는 이미 오래동안 흑화한 상태였다. 그래서 여성을, 소수자를, 장애인을 괴롭히고 모욕해 왔다.
이 자들이 지난 한 달간 검찰, 경찰, 국정원을 자기들 중심으로 수직계열화하면서 책임자도 전부 충성맨들로 교체하는 작업을 거의 마무리짓고 있다. 최근 화물연대 파업 때 윤석열이 그나마 한발 물러선 것은 이런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 임명된 서울경찰청장이 ‘지구 끝까지 쫓아가 전장연을 처벌하겠다’는 발언도 나왔다. 이명박근혜 때 이런 식의 국가폭력기구의 수직계열화 이후에 나타났던 일들이 용산참사였고, 백남기 농민 살해였으니 결코 허투로 들리는 협박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 노동운동 활동가들 속에서는 ‘주요 노조의 활동에서 일부 문제를 꼬투리잡아서 비리로 프레임을 잡고 언론과 손잡고 여론몰이를 하면서 강경 탄압을 하는 식으로 시작하고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취약한 비정규직 노동자나, 소수자나, 장애인들을 무조건 폭력 탄압하면 역풍이 불 수 있으니 검찰 등의 통신과 금융에 대한 수사, 정보, 사찰 능력을 활용해서 건수를 만들어내고 프레임을 잡아서 갈라치고 고립시키는 자신들의 특기를 활용할 것이라는 말이다.
윤석열 정부의 이런 공격은 결국 고물가와 고유가로 벼랑 끝에 몰리는 서민들, 1미터 감옥에 스스로 용접하고 들어가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더 이상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참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장애인들을 더욱 끔찍한 상황으로 내몰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 동지들은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배재현 동지와 뒤풀이를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이준석의 발언 때문에 지난 몇 개월간 너무 힘들고 괴로웠지만, 사실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보수적이어서 내가 활동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고, 뭐하러 그러고 다니냐고 했던 부모님들의 태도가 정반대로 변했다. 이제는 새벽에 내가 지하철 투쟁하러 나갈 때 챙겨주시고 고생한다고 응원해 주신다.’
듣고 보니, 얼마 전 지방선거 때 집에 온 선거공보물들을 보다가 이상하게도 국민의힘 시구의원들의 홍보물에서 장애인 권리 보장에 대한 약속들이 빠짐없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뜻밖이었던 것도 기억났다.
전장연과 장애인 동지들의 포기하지 않는 투쟁이 저들의 갈라치기 시도가 잘 먹히지 못하게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 권리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가지도록 만든 것이다. 장애인 동지들은 윤석열 정부의 역주행을 막는데 언제나 그 선봉에 서 있을 것이다.
● 한동훈 칭찬과 찬양 좀 그만 보고 싶다
나는 며칠전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신종북몰이에 대해서 쓴 바 있다.(https://bit.ly/3QVoDfM) 덧붙여서 관련된 쟁점으로 최근 한동훈 법무부가 인혁당 피해자에 대한 9억 이자 면제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다. 이 문제도 종북몰이 체제와 연관된 것이면서 물타기에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결정은 꽤나 화제가 됐고, 한동훈은 쿨한 척하면서 "억울함 해소엔 진영논리 없다"고 온갖 생색을 다 냈다. 역시 적시에 딱 맞는 이슈를 던지는 언론 플레이에 능해서 별명이 ‘편집자’라던 한동훈다웠다. 그러자, 안 그래도 한동훈을 찬양하거나 편들기 바쁘던 언론과 지식인들은 좌우를 떠나서 칭찬을 늘어놓았다.
물론, 이번에 검찰(윤석열-한동훈)이 이 문제에서 어깃장을 놓던 태도를 바꾼 것을 그나마 만시지탄의 다행이라고 일정부분 인정할 수 있다. 또 이렇게 한동훈이 쇼를 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책임이 있는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한계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만 이번 일에 대한 많은 이들의 평가는 너무나도 일면적이고 과장돼 있다.
첫째, 인혁당 피해자들을 반세기 동안 괴롭힌 것이 누구인가? 그들을 간첩으로 조작, 고문, 사형, 종북몰이한 것이 지금의 우파-언론-사법부-검찰 세력이다. 이들은 아직도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둘째, 피해자들에게 사과는커녕 9억 이자라는 빚고문을 당하게 만든 책임자가 누구인가? 바로 2011년 이명박 정부 때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피해자들에게 강제집행과 소송을 시작한 게 2017년 박근혜 정부였다.
셋째, 촛불과 정권교체 이후에 정부의 해결 노력에 법무부와 결국 국정원까지 태도를 바꾸었지만 계속 어깃장을 놓은 것은 윤석열 검찰이었다. 그러면서 ‘검찰의 반대를 거슬러 이자 면제를 하면 배임으로 기소할 수 있다’는 걸림돌이 등장했다.
현실적 위협이긴 했지만, 흔히 기득권과의 정면 대결을 겁내는 청와대와 법무부는 쉽게 포기했다. 넷째, 그 난관 속에서 민주당은 이것을 회피하려고 특별법을 추진했는데 그것을 가로막은 것은 이제 국민의힘의 비협조와 사보타주였다. 민주당은 과반의석을 가지고도 또 쉽게 포기했다.
다섯째,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싸운 것은 바로 이창복 씨 등 피해자들이고, 그들을 대변하며 도와 온 김형태 변호사와 함세웅 신부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함께해 온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이 오랜 반세기의 투쟁이 결국 결실을 맺어 저들을 물러서 게 만든 것이 이번 결정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받아야 할 것은 바로 이들이다.
한동훈은 감사와 찬양을 받을 게 아니라 고문, 조작, 투옥, 마녀사냥, 소송과 빚고문으로 이 피해자들을 반세기 동안 괴롭힌 가해자들과 그들 세력의 일부로서 책임을 묻고 비판을 받아햘 사람 중에 하나일 뿐이다. 한동훈의 이자탕감 결정으로 ‘빚고문’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다. 이창복 씨는 아직도 남은 원금 5억을 납부해야 한다. 그런데 왜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런 태도를 보일까?
특히 (‘양승태의 책임은 없고, 한동훈이 잘했고, 나도 도왔다’며) 이 문제의 본질과 책임을 흐리고 한동훈을 띄우면서 자기도 슬쩍 공을 차지하려는 ‘생색내기의 달인’ 금태섭의 태도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여기에는 ‘위로부터’의 관점도 크게 작용한다. 이들에게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위로부터 정치인이나 정부이다.
예컨대, 전두환-노태우 구속은 87년 이후에도 계속된 아래로부터 투쟁의 성과가 아니라 ‘김영삼의 결단’이라는 식으로 본다. 이런 식이면 최근 검찰의 군대 내 동성 성관계 무죄 구형도 성소수자 운동의 성과가 아니라 검찰의 훌륭한 ‘결단’이 된다. 그동안 그토록 군대 내 성소수자들을 괴롭힌 게 검찰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한동훈과 검찰은 왜 태도를 바꾸었을까? ‘종북몰이’ 체제를 벗어나려는 것인가? 그보다는 50년 동안 고통받아온 80세가 넘은 피해자들을 더 잡아둘 이득이 줄어든 것이다. 이렇게 생색을 내면서 다른 악재들은 가리고, 오래된 종북몰이 피해자들은 그만 놓아주면서 새로운 종북몰이 피해자들을 찾아나서는 게 더 남는 장사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한동훈 세력은 지금 간첩조작 검사 이시원(이 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하면 최근 <PD수첩>을 보라. 눈물과 욕설이 동시에 터져나올 것이다)을 청와대 비서관으로 임명하고, 국정원의 기능을 과거로 돌리면서, 서해안 피격 사건을 이용한 ‘신종북몰이’에 열심이다. 그러니 한동훈 좀 그만 칭찬했으면 좋겠다. 한동훈 비판할 일이 넘쳐날 때는 침묵하다가 이럴 때만 나서는 이들도 참 안쓰럽다.
그런 칭찬은 이들이 진정으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모든 종북몰이를 중단하고, ‘멸공 챌린지’도 반성하고, 국가보안법 폐지 등 이런 구조를 청산하려고 할 때 해도 충분하다. 흔히 오독하듯이 윤석열-한동훈 세력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들을 악마라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비판하는 것이다. 만약 윤석열-한동훈 세력이 그런 결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긴다면, 누가 말리더라도 나부터 기꺼이 앞장서 이들을 동네방네 칭찬하고 다닐 준비가 돼 있다.
● 서해 공무원의 비극과 종북몰이 시즌2
최근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이 다시 뜨거운 쟁점으로 부활한 상황은, 새로운 증거나 사실의 발견을 통한 진상규명의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종북몰이의 더 교묘한 진화와 업그레이드를 보여준다. 오늘날 이 나라 냉전우파의 종북몰이는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 논리까지 차용해서 상대방을 단지 ‘종북’만이 아니라 ‘인권과 생명을 무시하는 파렴치한 위선자’로 몰아가는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이런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느끼는 ‘비겁한 자기검열’의 더러운 기분을 감수하면서도, 내가 북한 체제와 정권을 지지하기는커녕, 그 체제와 관료지배 집단의 근본적 변혁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오랫동안 주장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밝힐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한국사회의 ‘내면화된 종북몰이 체제’에서는 내가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색안경을 쓰고 볼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년 전 서해에서 북한 정권이 해수부 공무원을 피격 살해한 것은 반인도적 범죄이자 만행이었고 어떤 식으로도 용서받을 수도 정당화될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 2년 전으로 돌아가 복기해보면, 사건 발생 직후 당시 남한(이것도 북한에 대비하는 용어 선택일뿐 어떤 의도도 없다ㅠ)의 정치권과 언론은 자연스럽게도 북한을 강력 규탄하며 분노했다. 고인의 비극에 대한 슬픔과 유가족에 대한 공감 속에서 나온 반응이었다고 믿고 싶다.
그런데, 이것은 곧 ‘응징과 보복’을 위해 북한과 군사적 충돌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호전적 목소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 이런 대응을 분명히 하지 않는 당시 정부와 여당에 대한 종북몰이로 발전해 갔다. ‘북한 공산정권과 관계를 위해서 국민의 생명도 나몰라라 하는 정체가 의심스러운 정부’라는 논리였다.
당연히 국민의힘과 보수적 족벌언론과 종편 등이 이런 여론을 주도했다. 국민의힘에서는 "문재인이라는 줄기를 따라가면 김정은이라고 하는 악의 뿌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던 신원식같은 군장성 출신의 인사들이 앞장섰다. 또 하태경같은 뉴라이트들도 적극적이었다.(우파로 전향한 좌파 출신은 마녀사냥에 더 적극적인 경향이 있다. 진중권도 비슷하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당신 눈에는 왜 핏발이 안 서 있냐? 혹시 종북아니냐?’고 다그치던 그들의 태도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런 공세는 어느 순간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공식 사과를 해 왔고, 무엇보다 ‘사망한 공무원이 월북을 시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군당국의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에서 나온 소위 군특수정보(SI)가 그런 보고의 바탕이었다.
그렇다고, 당시 문재인 정부가 ‘이 사람은 월북하려던 사람이니 더 이상 가슴 아파하며 북한을 규탄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북한을 규탄하며 사과를 요구하고 결국 받아냈다. 이런 비극을 낳은 구조적 배경에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과 대화 채널의 마비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개선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것은 대체로 타당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당시는 ‘하노이 결렬’ 이후로 남북미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긴장고조와 대결로 나아가던 국면이었다. 코로나가 소통 단절을 더욱 악화시켰다. 당시 국민의힘은 ‘이 지경에도 평화와 대화 타령을 하고 있다’고 정부와 여당을 비판했지만, 냉전우파의 이런 ‘총에는 총, 핵에는 핵’ 논리는 결코 지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결과 긴장의 구조가 낳은 비극의 해법을 그것의 해소에서 찾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문제는 오히려 평화와 화해에 대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비일관성과 불철저성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평화를 말하면서 군비증강을 하고, 미국의 허락 없이는 평화를 위한 실질적 조치를 향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소심함을 보였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을 ‘종북’으로 몰던 냉전우파의 공세는 ‘월북 시도 중 사망’이라는 정보가 나오자 자체적 모순 속에서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북한’을 악마화하던 우파들로서는 ‘월북’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의 발표가 이런 효과를 기대한 정보 조작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당시 국회에서 그 SI 정보를 직접 확인한 게 국민의힘 의원들이었고, 지금도 그 SI 정보 공개를 막고 있는 게 윤석열 정부이기 때문이다.
당시 고인이 왜 북한 수역으로 넘어갔는지를 굳이 밝히지 말고 사건을 처리하는 게 최선이었다고 보지만, 한반도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당시 해경이 지나치게 고인의 사생활을 공개하며 전형적 관료적 보신주의와 책임회피의 태도를 보인 것은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는 그것을 단속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이 점은 국가인권위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관료 기구의 영혼없는 보신주의는 정권이 바뀌면 신속한 태세 전환으로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사실’은 그대로지만 ‘해석’을 달리한 해경의 최근 발표를 낳았다. 그리고 이제 윤석열, 국민의힘, 족벌언론들은 이것을 무기로 종북몰이 시즌2를 시작했다. 이 시즌2가 특히 더 교묘한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의 논리를 왜곡해 종북몰이에 접목하는 ‘창의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더 악질적인 것은 ‘월북자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려면 당신들이 문재인을 더욱 공격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짜서 슬픔에 찬 유족들을 압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가족의 입을 통해서 끄집어낸 “[문재인은] 국민이 아닌 북한 편”이라는 말을 신나게 퍼 나르고 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고인이 어떤 개인적 사정과 의도를 가졌던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서울에서 경기도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고, 사생활과 내면의 생각을 검열 받거나, 그것을 근거로 비난과 처벌받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휴전선의 남북이 되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땅에 벽을 세우고 심지어 하늘과 바다에까지 선을 긋고서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서로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넘어가면 총을 쏘고 처벌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군사적 대치 구조와 신성불가침의 적대적 규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구조 속에서 2013년 박근혜 정부 때 휴전선을 넘어 월북하려던 한국 국민을 사살한 것은 바로 한국군이었다. 당시 우파 정당과 언론들은 그것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절차에 따른 대응’이라고 당연시했다. 적대적 대결체제를 인권이나 생명보다 앞세워 가장 신성시해 온 것이다.
이들은 휴전선에서 사소한 일만 벌어져도 ‘대응 사격과 군사적 응징’을 주문했고, 소극적 대응에 ‘노크 귀순’ 운운하면서 ‘휴전선 뚫렸다’, ‘안보가 무너졌다’고 흥분해 왔다.(물론, 국경의 물신화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경을 넘어오려는 사람을 사살하는 일은 멕시코 국경에서 미국 국경수비대나 흔히 저지르는 짓이기도 하다. 유럽의 지중해에서는 바다를 건너던 난민이 매년 수천 명씩 사망한다.)
북한체제에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면 ‘간첩’, ‘종북’으로 몰아서 투옥, 고문, 처벌해 왔다. 그런 생각이 없는 사람도 수시로 ‘간첩’, ‘종북’으로 조작해서 수많은 이들을 고통받게 했다. 요즘에도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간첩’, ‘종북’이라는 낙인을 찍어서 애먼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하여 괴롭히고 있다.
그러던 장본인들이 지금, 자신들의(또는 미국과 유럽 지배자들의) 거울상과도 같은 북한의 잘못된 비인도적 대응만을 악마화, 타자화하면서 ‘종북’ 낙인의 효과를 이중으로 뒤틀어 ‘신종북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반적으로 다시 들여다 보겠다’며 몰이를 더욱 확대할 것도 분명히 하고 있다.
중요한 국면마다 거듭 기득권 세력에 굴복해 왔고 ‘종북몰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까지 보이는 민주당은 여기에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혁-진보’ 언론과 지식인들(심지어 극좌파까지)은 침묵하거나 기껏 양비론을 취하고 있다.
이 속에서 ‘북한은 악마이고 우리의 적’, ‘북한을 조금이라도 편드는 사람은 종북’이라는 분단체제의 양대교리는 여전히 신성불가침의 절대 성역으로 남아 있다. 이런 글을 쓰면서도 계속 자기검열을 하고 불안감을 느껴야 한다. 이것이 한국전쟁 72주년의 한반도 현실이다.
● 감동과 고민의 시간을 선물한 몇 편의 고마운 영화들
영화를 볼 시간 여유도, 영화를 보고 감상을 정리할 시간도 계속 줄어드는 것 같은데, 지난 두 달 동안에 간간히 본 영화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편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요즘 가장 시의성 있는 영화는 <레벤느망>이었다. 미국에서 임신중지권을 부정하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있었고, 한국에서도 국민의힘이 미국 공화당이 텍사스에서 만든 것과 똑같은 임신중지권 파괴 법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임신중지가 불법인 상황에서 하룻밤 경험 때문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한 여성 대학생이 겪는 처절한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작가가 꿈이었고 학교에서도 인정받던 주인공은 순식간에 곤두박칠 친다.
의사도, 친구도, 애인도, 부모도, 학교도, 교수도 아무도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다. 오히려 짐만 지운다. 감옥에 가고 인생을 망치거나 꿈을 포기하며 아이를 낳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그 거대한 장벽 앞에 놓인 고립감과 좌절감이 생생하다.
특히 주인공이 스스로 임신을 중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사용하는 갖가지 위험한 방법들을 마치 내가 시도하는 것 같은 느낌 속에 보고 있으면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소름끼친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여성을 집안에 가둬 두는 병’은 지금 미국에서 더 크게 번지고 있다.
두 번째로 감동적인 영화는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영화 <패러렐 마더스>였다. 알모도바르는 이번에도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두 가지 이야기이다. 하나는 병원에서 바뀌어버린 아이에 대한 오늘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스페인 내전에서 학살당한 피해자들에 대한 과거의 이야기이다.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엮어내는 감독의 솜씨는 대단하다. 주인공들은 폭력과 고통을 사랑과 연대, 기억을 통해서 이겨 나간다.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들이 저지른 학살 피해자들의 후손과 그들을 돕는 이들, 동료 남학생들에게 협박과 강간을 당해서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된 여성이 나온다.
서로 다른 욕망과 오해, 엇갈리는 감정들이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편견에서 벗어나 욕망과 감정에 충실하며 자유롭게 사랑하던 주인공과 그 친구들이 마지막에 스페인 내전 학살 피해자들을 기억하며 연대하는 행위는 참 인상적이다. 한국 역사에서도 해결되지 못한 학살과 종북몰이 피해자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세 번째로 좋았던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본 <불도저를 탄 소녀> 였다. 솔직히 제목이나 줄거리를 보고는 별로 땡기지가 않았다. 너무 뻔하고 전형적인 영화는 항상 별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루다가 보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따라가게 됐다. 실제로 영화는 전형적인 면이 많다.
그럼에도 크게 거슬리지 않았던 것은 감독의 뚝심, 악과 깡밖에 남은 게 없는 청년여성을 연기한 배우의 힘, 지금 윤석열 정부가 만들어내고 있는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영화에서 탐욕스럽고 부패한 우파 정치인은 뻔하고 단순한 악당 캐릭터이긴 하다.
그러나, 윤석열 시대에 거꾸로 돌아가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쌓여가던 판에, ‘불도저를 탄 소녀’가 마지막으로 가면서 보여주는 거침없는 질주와 분노의 폭발은 큰 카타르시스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선악의 단순한 구도 속의 전형성은 성공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였다. 학교폭력을 다룬 이 영화에서 친구를 괴롭히다가 죽게 하는 가해자 학생과 그 부모들은 너무 전형적이다.
가해 학생들은 그냥 타고난 괴물들이고, 학부모들은 그냥 돈 많고 양심 없는 사람들이다. 피해학생은 그저 가난하고 착한 희생자다. 거기다 개연성까지 떨어지면 영화를 보다가 허탈해진다. 현실의 인간과 사회는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 점에서 대조적인 것은 <매스>였다. 다소 종교적인 분위기도 있지만, 미국 학교 총기난사 피해자와 가해자 부모들 4명이 한 장소에 모여서 2시간 동안 대화하는 것이 전부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긴장감과 집중력은 대단하다.
자신들이 어떻게 그 아이들을 키웠고,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고, 지금은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말하는 것을 듣다보면, 피해자도 세상에 하나뿐인 구체적인 사람으로 다가오고, 가해자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타고난 괴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왜 이런 비극이 계속 반복되고 어떻게 그것을 벗어날 것인지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가해자를 지목하고 처벌하고 추방하는 것만이 전부이고 가장 정의로운 것처럼 생각하는 오늘날 일부의 태도와는 분명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처벌로만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혁명이란 사람들을 감옥으로 보내서 이루어지는 건 아니죠. 혁명은 부모가 어떻게 아이들을 기를 것인지, 학교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우리가 세상에 어떤 동화를 만들어놓을 것인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레베카 솔닛)
(기사 등록 202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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