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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미국의 헤게모니와 '친해진' 진보?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7. 14.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인제 어언 15년이나 지났습니다. 지금도 많이 그리운 노회찬 선생을 모시고, 제가 그 때에 그의 오슬로대 특강을 주선하고 통역을 맡았습니다. 그 때에 강의 주제는 미국의 대중국 전략에 있어서의 한반도이었습니다. 노 선생은, 그 당시에 뜨거운 현안이었던 정부의 제주도 강정리 해군 기지 건설안을 이야기하면서, 이는 궁극적으로 중국에 대한 미국 측의 견제 전략의 일환이지 대한민국의 자주적인 움직임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꿈이란 그 누구의 헤게모니적 영향권에 속하지 않는, 미국권과 중국권 사이의 '교량'이 되는 한국, 나아가 통일 한반도라고 이야기를 해주신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고 노 선생님은 소위 '자주파'도 아닌 '평등파'이셨습니다. 그러니 '통일'이나 '반미'를 위주로 해서 운동하신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계급 문제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 운동을 이어나가신 거죠.

한데, 2000년대말 같아서는, 노 선생을 비롯한 '평등파' 분들도 기본적으로 노쇠하면서도 그 지배력을 적어도 한반도 남반부에서 계속 유지하는 미 제국주의와, 급격히 부상하면서 아직 대외적으로 신중한 노선을 견지하는 중국 제국주의 사이의 양비론적이며 다소 중립적인, 현실과 민중의 이해 관계를 중시하는 입장을 보통 가지곤 했습니다.

, 한반도 민중들의 이해 관계의 차원에서 되도록이면 여러 제국주의 사이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그 어느 쪽의 헤게모니 전략의 피해자도 더 이상 되지 않고 오로지 '평화'를 위주로 운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었죠. 이런 양비론적이며 어느 쪽의 헤게모니에도 반대하는 한국 혁신 운동, 계급 운동의 전통적 입장은 사실 그 역사적 기원은 오래 된 것입니다.

한국 진보 운동의 역사란, 오랫동안 대국, 혹은 대국에서의 패권주의적 운동체로부터 '배신'을 당해온 입장입니다. 19458월에 박헌영 등도 미군을 '해방군'이라고 맞이했지만, 그 뒤에 1년이 지나면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지하에 들어가서 수배를 피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지요. 일면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자들에게 절대적 존재이었던 소련은 1936-8년 대숙청 때에 수천 명 조선 (고려인) 혁명가와 지식인, 간부, 민중 등을 총살에 처하게 하고 "고려인 강제 이주"를 감행했습니다.

한위건이나 그의 라이벌 장지락 (김산), 주덕해 등 많은 뛰어난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입당해서 목숨을 내놓고 일했던 중국 공산당도, 1930년대 중반에 '민생단 사건'의 광란 속에서 수백 명의 조선 혁명자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헤게모니 세력도 다 불신하여 오로지 한반도 민중을 위한, 중립에 가까운 국제적 입장을 취하려는 것은 그 만큼 그 역사가 길고 뿌리 깊은 경향이지요.

15년 전만 해도 그 당시에 그 말기에 접어든 민노당 안에서도 이와 같은 반헤게모니적 입장은 '평등파' 사이에서도 당연시됐죠. 그런데 지금 보면 한국을 비롯한 세계 진보 운동의 여러 단체나 영향력이 많은 개인들은 이와 거의 정반대를 향하는 길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사회진보연대 등 일각의 단체들이 지금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다는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대한 현실 이상의 긍정적 평가를 하지만, 바깥에서도 슬라보이 지젝 같은 영향력이 높은 좌파 철학자는 나토에 대한 모든 비판을 다 포기한 채 러시아 견제를 위한 나토의 모든 행동을 다 긍정하려 합니다.

중국이나 러시아만큼 미국이나 일본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려는 '균형적' 자세를, 민노당의 후계 정당 중의 하나인 정의당의 대외적 발언, 발표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죠. 오늘날 정의당의 지도 인사들이 15년 전의 노회찬 선생의 강의와 같은 취지의 강연을 오늘날 할 것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러시아 제국주의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보내는 충격파들은 너무나 컸죠. 21세기 백주대낮에 한 강대국이 인접 약소국을 침략해서 그 영토의 일부를 떼어서 병합한다는 '땅 떼먹기', "땅 훔치기"는 진보 운동자를 비롯한 세계인 모두를 경악케 했죠. 물론 현실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무기를 줄 데가 나토 이외에 없어서 나토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반대한다는 것은 지금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자기 땅을 지키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투쟁 포기를 요구하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니까요.

한데...영토 병합 흉모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미국도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계속해서 이런저런 침공, 침략, 무장 개입들을 국외에서 해오지 않았는가요? "자유주의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 재벌들이 방글라데시나 베트남에서 안심하고 큰 돈을 투자하고 현지 노동자들의 싼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배경에는 당연히 세계 곳곳에서의 미군 기지들이 있습니다.

자유주의를 내걸지만, 사실 고도의 군사화를 그 전제로 하는 세계 질서지요. 그리고 19세기말에 인도나, 안남 (베트남), 인니 등을 식민 지배하는 영국이나 불국, 화란국 등은 자유주의 국가들은 아니었나요? 자유주의는, 역사적으로 충분히 대외 침략과 식민지배의 동반자가 됩니다. 그런 자유주의의 진보적 별동대가 되는 게 과연 세계 진보, 한국 진보의 미래로의 길인가요?

오해를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크라이나를 지금 초토화하고 있는 러시아 제국주의에 결사 반대를 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의 자국 주권,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한데 약소국인 우크라이나인들의 투쟁을 지지할 수 있어도, 저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는, 아무리 '자유주의' 등을 그 이념으로 내걸어도 궁극적으로 자본의 이윤 추구,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위한 국제적 테두리를 만들어주는, 환경 파괴적이고 극도로 군사주의적 질서라고 봅니다.

러시아의 퇴보적인 강도짓이 밉다고 해서,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에 기대를 걸거나 그 옹호에 나설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국의 당국가나 러시아의 안보 기관 본위의 국가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기후 위기의 해결 등이 가능한 협동적인 사회주의적 생산과 분배의 미래로, 즉 포스트자본주의적 미래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궁극적 전망에 대한 의식이 현재 많은 진보 운동 단체의 행동에 보이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죠.

(기사 등록 202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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