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레닌주의, No?

레닌주의, No?

이론의 혁신 2014. 11. 15. 13:16

이 글은 RS21 웹사이트에 실린 이언 버철의 글 <레닌: Yes! 레닌주의: No?>에 대한 폴 르블랑의 답변으로, 미국 국제사회주의조직의 기관지 <Socialist Worker>에 실렸다번역을 맡아 준 윤경준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는 아래.

http://socialistworker.org/2014/08/06/leninism-no


필자인 폴 르블랑(Paul Le Blanc)은 역사가이자 사회주의자로, 1960년대부터 트로츠키주의자로 활동했으며 2009년 미국 국제사회주의조직에 가담했다. 국역된 저서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이 있다.



폴 르블랑

2014년 8월 6일

번역: 윤경준


이언 버철(Ian Birchall)은 현재 진행중인 레닌주의의 가치와 의미에 관한 국제 좌파의 토론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최근 저작 <끝나지 않은 레닌주의: 혁명적 원칙의 귀환>의 핵심 쟁점들 중 하나이다. 여기서 나는 존경하는 동지가 말해야 했던 것에 대해 몇 가지 논평을 하고자 한다.

 

오랫동안 버철은 자신이 가장 흥미롭고 사려깊은 영국 맑스주의 저자들 중 하나라는 점을 보여 주었다. 이런 자질은 그의 저작 모두에서 넘쳐 흐른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에 대한 글, 조지 오웰과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에 관한 사색, 그리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및 그 전신 조직들[사회주의평론 그룹, 국제사회주의자들(IS) 등 - 편집자] - 버철 자신이 중요한 구성원이었던 - 을 이끌었던 토니 클리프(Tony Cliff)에 관한 방대하고 비판적인 전기문이 이 저작들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자질은 최근에 실린 버철의  ‘레닌 Yes! 레닌주의 No?’라는 제목의 rs21 웹사이트 기고문에서도 여실히 입증되어 있다(물음표에 주목하자). 시작 문단은 전문을 인용할 가치가 충분한 명문이다. “레닌주의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좌파와 유사 좌파 모두에게 최근에 흔한 일이다. 어떤 이는 왜 레닌주의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지 의아해 할지 모른다. 어느 누구도 연금술이나 사회신용설이 죽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기사들을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럴만하다. 레닌주의를 묻어 버리려는 이 열광은 사람들이 레닌주의가 죽어 있기를 바란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버철은 쉽게 얻어진 관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레닌의 사유와 실천에서 풍부하고, 창조적이며, 비판적인, 혁명적이면서도 놀랍도록 유용한 측면들을 계속해서 탐구해 나갔고, 그리고 몇몇 도전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버철은 레닌이 – 1917년 성공적인 노동계급 혁명을 조직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맑스주의 이론가 중 한 명으로서 – 오늘날의 진지한 활동가들에게 가르칠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분명히 생각하고 있다. “자유와 국가” 문제를 둘러싼 레닌의 맑스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의 공통점을 그가 이야기하는 대목은 특히나 흥미롭다. 어떻게 그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국가없는 사회주의의 목표는 결국 같은 것이다. 이것은 레닌과 레닌의 견해에 탄복한 아나키스트 혹은 아나키즘적 신디칼리스트 운동의 인물들(빅토르 세르주와 알프레드 로스머Alfred Rosmer 같은)과의 대화를 통해 집중 조명된다. 

 

다음의 사실에 대한 강조도 있다:

 

레닌은 정치적으로 너무도 강한 자기확신이 있어서 그는 그의 오랜 정치적 라이벌이던 트로츠키처럼 언제고 그를 밟고 올라설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도 당 지도부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레닌은 당이 자체적으로 봉기를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비에트[민주적 노동자 평의회]에 관하여 레닌보다 더 많은 경험이 있었던 트로츠키는 당의 지지만으로는 충분히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힘들므로 그 요구는 소비에트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레닌을 설득해야 했다.

 

이 글에서 이와 연관된 주요 부분들은 타인에게서 배우려는 레닌의 열린 자세를 강조하고 있고, 원칙에 있어서 근본적 차이가 있는 경우 결연히 결별하려는 그의 단호함에도 불구하고 동지들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조직적 단결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의 결의도 보여주고 있다. 버철은 이렇게 한탄한다. “분열은 통합을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리고 이것이, 레닌을 흉내 내려는 추종자들이 분열을 통해 그를 흉내 내는 게 훨씬 더 쉽다고 느끼는 이유이다.”

 

독자들은 이 아주 가슴에 와 닿고 유익한 “토론 기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이유로 RS21에 실린 것이겠지만). 나는 그가 우리에게 던진 몇 가지 쟁점들을 토론하는 것으로 내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싶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

 

논의 전개 과정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목에서에서 버철은, 스탈린주의자들이 부정하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레닌주의” 교조를 사용하는 것에 트로츠키와 동료들이 저항하면서 스스로를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로 규정하여 자신들의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저항이 진정한 레닌주의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던 사실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사실, 버철은 이 용어가 영국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쓰였다고 다소 겸손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트로츠키 자신이 1920년대 후반 러시아에서 그리고 1930년대 망명지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는 많은 사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버철에 따르면 볼셰비키-레닌주의자라는 자기 규정은 마치 누군가가 스스로를 ‘농업적 농부’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농담은 우리가 “볼셰비키”와 “레닌주의자”를 단어를 거의 동의어로 생각한다면 말이 된다. 알다시피 볼셰비키는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 내의 특정한 혁명적 분파였고, 레닌은 그 분파의 가장 중요한 리더였다. 레닌의 사상과 영향력이 볼셰비키 안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하긴 했지만, 그가 단순히 “전권을 행사”했던 것은 아니다. 1905년에서 1917년까지 볼셰비키 그룹 내에서 레닌과 날카롭게 대립했던 걸출한 동료들의 예는 많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레프 카메네프, 알렉세이 리코프, 니콜라이 부하린 등.

 

때때로 레닌은 표결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볼셰비키 안에는 ‘레닌 동지’에 반대해서 저항했던 여러 반대 흐름들이 존재했다. 하나 혹은 그 이상의 특정한 문제에 대한 반대(트로츠키는 적어도 한번 이상 이러한 태도를 취했었다), 그리고 때때로는 더 광범위한 기반을 가진 반대 - 좌익 공산주의자들, 민주집중파, 노동자 반대파, 그리고 어떨 때는 볼셰비키 전체 - 가 있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 역사를 몸소 겪은 동료들이 생존해 있었던, 그리고 그 기억들이 선명했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볼셰비키-레닌주의자”였다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가 “레닌주의적-레닌주의자”라라 이야기하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특정한 개념화에 대한 집착을 보여 준다. 비판정신을 가진 동지들의 민주적 집단 속에서 살아가며, 삶과 그 의미를 찾으려는 레닌의 근본적인 성향. 물론, 이것은 버철의 기사에서 근본적인 줄기에 비춰 일관성이 있다.

 

  레닌은 레닌주의자였을까?

 

버철은 이 질문을 제기하면서 적절하게 대답하고 있다: “레닌은 중요한 혁명 지도자였고 그의 삶과 그의 업적이 다시 주목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맑스는 그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변했었다. 레닌은 자신을 레닌주의자라 선언했을까?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 부분은 잘 설명되어있으며 이 근거에서 아마도 우리도 역시 레닌주의자 … 혹은 맑스주의자들이라고 우리 스스로를 불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금세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 레닌이 그 자신을 레닌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자신이 맑스주의자라고 주장했다(맑스의 명시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자”라는 단어는 맑스가 생존해 있던 동안에는 가지지 않았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맑스주의라는 용어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엔, 관료적 독재 체제와 연관된 빈약하고 보수화된 이론적 구성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맑스 사상의 풍요로움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다소 빈약한 “정통교리”의 모음을 뜻하는 개념도 포함된다. 누군가는 맑스주의라는 용어가 “우리가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전략과 조직노선을 발전시키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버철 자신은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폐기하자고 제안하진 않지만 레닌주의에 대해서는, 문자 그대로 이런 제안을 (앞서 이야기한 물음표를 사용해서) 하고 있다. 

 

맑스주의 문제를 잠시 더 논의 해보도록 하자. “맑스주의-인본주의” 철학자인 라야 두나예프스카야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맑스 사후 맑스주의”의 열등함에 집착한 나머지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비롯해 맑스를 따랐던 모든 이들을 구별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때때로 종파적인 허세를 부리며, 이 “맑스주의-인본주의자들”은 오직 그들 - 맑스와 헤겔을 따르는 - 만이 맑스의 심오한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이를 이용한다.) 맑스 Yes, 맑스주의 NO.

 

그러나 우리 중 다수는 맑스주의자라는 용어를 경멸적이지 않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믿고 있다. 우리에게, 이 용어는 맑스(그리고, 그렇다, 그의 가까운 동료 연구자 엥겔스)의 기본적인 개념적 방법론적 접근법을 뜻한다. 또한 그들의 정치적 전략과 전술 그리고 노동계급 운동의 경험을 포함하는 일련의 믿을 수 없을 만치 풍부한 연관된 분석과 통찰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맑스주의가 닫힌 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맑스주의는 다수의 원천들로부터 도출되었고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경험과 결합하여 계속 진화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맑스주의는, 맑스 사후 그의 기본적 접근법을 수용하고 활용하려 노력해 온 사려 깊고 진심 어린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복합적이며 때로는 모순된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고 규정한다, 그것을 간단히 버리기에는 지난 수십 년간 이 단어와 연관되어 있는 전통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은 분명히 맑스주의에 대한 레닌의 접근법이었다. 그는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어떤 것들을 단호하게 거부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1910년 이후 칼 카우츠키(Karl Kautsky)의 궤적이나 1921년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궤적과 같은 것들을. 그러나 레닌은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이 용어를 통해 그가 나타내려 한 것들과, 혁명적 원칙에서 이탈한 자들에 의해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들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구체적으로 가려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슷한 접근법이 레닌주의에 관해서도 타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레닌주의

 

“레닌주의”라는 용어는 레닌의 사망 시기에 공산주의 운동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그는 분명히 이러한 용어의 사용을 반대했을 것이다),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기 위해,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더 큰 영향력을 확립하기 위해서 스탈린에 의해 잘못 사용되었다. 

 

버철이 지적하듯이, 레닌의 실제 사상과 정치적 행위는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과정과는 분리될 수 없는 통찰력을 담고 있기에 복합적이다. 스탈린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레닌주의”의 지적인 피상성 속에서는 레닌의 정치적 사고와 관점들의 풍요로운 축적물들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생애 동안 레닌에 의해 발전된 이 사상들의 대부분은 45권에 달하는 그의 저작선집에 모아져 있다. 물론 레닌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안팎의 다른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폐쇄적이고 발전을 멈춘 교조로서의 “레닌주의”는 정치에 관해 레닌이 견지했던 총체적인 입장과 양립할 수 없지만, 독창적인 정치적 접근법, 그리고 사상 체계라는 것은 있음을 논증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진짜 레닌주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스탈린과 그의 동시대인들이 (스탈린 추종자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말하는 “레닌주의자”에 대한 요약은 아주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이것이 레닌의 사상을 집대성하려는 – 일반적으로 “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 모든 노력들이 반드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반(反)스탈린주의자들 조차 이 용어를 혼동하고 잘못 사용해왔지만, 다수의 혁명가들의 저작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레닌주의”에 대한 논의들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나데즈다 크루프스카야[레닌의 아내 - 편집자], 레프 트로츠키, 루카치 죄르지(Lukács György), 안토니오 그람시,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에른스트 피셔(Ernst Fischer),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 던컨 핼러스(Duncan Hallas),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와 그 밖에 많은 이들.

 

레닌(혹은 맑스)이 항상 옳기만 했던 건 아니었던 것처럼 이 동지들 – 때때로 서로 의견이 달랐던(물론 레닌과도) – 도 어떤 사안에 관해서는 분명 오류가 있었고 또 다른 경우엔 옳기도 했다. 그들은 레닌주의라는 단어와 연관된 빛나는 전통의 일부이다. 특히나 우리 문화 전반에서 널리 쓰인다면 어떤 명칭들은 유용할 수 있다 – 그것이 “사회주의자”이든 “맑스주의자”이든 혹은 “레닌주의자”이든 간에 그렇다. 이 명칭을 버린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명확성을 높여 주지만 어떤 경우에는 혼란을 야기한다.

 

이제, 논의를 단순화해서, 내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레닌주의라는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밝히고 싶다.

 

노동자들과 다른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투쟁과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을 결합하려 한 그의 헌신 속에서 레닌은, 노동계급 사이에 경험과 의식에 있어서 다양성과 불균등성에 대한 이해를 보여 주었다. 그는 전체로서의 노동계급 – 그리고 다른 사회적 계층들 내의 동맹들 - 을 그들의 집단적 이익을 위한 투쟁으로 이끌어낼 잠재력을 가진 연대와 공동의 목표에 대한 폭넓은 인식에 도달했다.


정치적 사회적 투쟁에 있어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의 필요성과, 억압에 맞선 투쟁에서 승리를 위한 노동계급의 우위(혹은 주도권)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를 결합하면서, 민주주의 투쟁의 흐름들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모아지는 방식에 대한 놀라운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레닌은 개혁을 위한 투쟁을 혁명적 전략에 통합시키는 접근법을 고수했다.

 

레닌의 사상과 실천에서, 우리는 공동전선 전술의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다. 공동전선을 통해, 혁명조직이 자본주의의 현상에 대한 혁명적 관점을 효율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레닌이  생기 넘치고 혁명적이며 국제주의적인 접근법 -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심오한 분석을 포함하는 - 을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실천적이고, 민주적이며, 혁명적인 조직에 관한 하나의 일관된 개념화로 통합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비록 그는 한 번도 이것을 “레닌주의 당”이라 말한 적도 없고 우리가 이 흔하게 왜곡되고 오해 받은 이 용어에 집착할 어떤 이유도 없지만.

 

레닌은 굳이 “혁신적”이려 애쓰지도 않았고, 이 모든 것을 그가 다 발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맑스주의 지식인 집단 내 수 많은 다른 사상가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상의 일정 수준을 끌어올린 – 이에 대한 예시도 가능하다 – 창조적인 사상가였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그는 위에서 요약된 요소들을 그의 모국인 러시아와 전 세계에 강한 반향을 주는 방식으로 제시하였다. 내가 생각하기로, 이것은 레닌주의라고 정당하게 이름 붙여질 수 있다.

 

  레닌주의, NO?

 

이것은 나를 이 기사의 제목에 걸맞는 결론으로 이끈다. 비록 버철은 그의 글 제목에 물음표를 달았지만 (“레닌주의”라는 용어를 거부하는 암시적인 고려), [내가 여기에 - 편집자] 쉼표를 추가한 것은 우리가 레닌의 실제 정치 사상(그리고, 내가 그의 글을 똑바로 독해한 것이라면 버철 자신의 실제 정치사상)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이를 정의한다면 그 용어를 폐기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나의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물론 명확하게 언급되어있는 것처럼 이런 결론과, 기사의 제목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레닌주의 NO!”라고 반응하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그 이유를 이야기할지 말지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다. 때때로 어떤 명칭에 대한 거부는 그 명칭과 관련된 “긍정적” 내용마저도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러한 실질적인 의견 불일치는 단지 전문용어가 아니라 현실에서, 무엇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 줄 진정한 논쟁과 토론을 요구할 것이다.

 

순전한 용어상의 비판은 또 다른 문제이다. 물음표와 쉼표, 그리고 용어를 어떻게 쓸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우리는 동일한 기본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기 때문에 나는 이언 버철과 같은 사람과 동지로서 같은 혁명조직에 몸담고 있을 수 있었다. 본질적인 우리의 사명은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더욱 정확히 알려 노력하는 것이고 자유와 경제적 정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오늘과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명확히 밝히려 노력하는 것이다.


* ‘변혁 재장전’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변혁 재장전’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이론의 혁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7차 정치혁신 세미나  (0) 2015.01.14
5차 정치혁신 세미나  (0) 2014.11.17
레닌주의, No?  (0) 2014.11.15
레닌: Yes! 레닌주의: No?  (0) 2014.11.15
4차 정치혁신 세미나  (0) 2014.10.27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전개와 오늘날의 전망  (0) 2014.10.27
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