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드 하이더Asad Haider, 살라르 모한데시Salar Mohandesi
번역: 두견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남성 임금 노동자의 투쟁이 더 중요하고 우선이며 노동계급을 대표한다는 전통적 입장이 어떻게 현실과 어긋나게 되면서 사회적 재생산의 문제가 계급투쟁의 중요한 고리가 되었는지를 역사적이고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글이다. 이 글의 필자인 아사드 하이더는 <관점>Viewpoint Magazine의 편집자이자 <오인된 정체성>의 저자이다. 살라르 모한데시는 <관점>의 편집자이다.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의 급진적 재해석과 혁신을 추구하는 ‘전투적 연구집단’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다.
출처: https://viewpointmag.com/2015/10/28/making-a-living/
숨겨진 거주지
몇 가지 사소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와 같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투쟁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신중한 사고를 통해 발견되고 부유한 후원자에 의해 실현되어야 했다. 푸리에는 자신의 사회주의적 미래에 투자하기 위해 어떤 자선가가 올 때까지 로비에서 매일 기다렸다. 그는 심지어 나폴레옹에게 "사회 혼돈에서 인류"를 구출하기 위한 웅대한 계획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노동자들이 독립적으로 투쟁하기 시작한 1830년대와 1840년대가 되어서야 오귀스트 블랑키(Auguste Blanqui), 칼 마르크스와 같은 혁명가들은 사회주의가 지식인의 정교한 계획이 아니라 노동자 투쟁에 기초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생각은 자리를 잡았고, 특히 1860년대와 1870년대의 대량 이주, 산업의 확산, 극적인 사회정치적 구조조정 이후 수많은 국가들에서 헌정을 승인하고 민법을 개혁하고 의회를 설립하면서 전체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계급"의 투쟁에 자신을 정박시켰다.
사회주의는 이제부터 노동계급을 일관된 정치적 주체로 형성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물론 이 계급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불분명했다. 노동자들은 수천 개의 다른 범주로 분류되었고 노동 생활은 이질적이었고 노예제, 임금 노동, 소작과 같은 독특한 형태의 생산이 끊임없이 서로 피를 섞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고정된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농부처럼 가을에 땅을 수확하고 겨울에는 일하지 않고 지내며 봄에는 공장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항상 이동했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쪼개질 수 없는 단일성이기보다는 전통, 종교, 문화, 거래, 인종, 젠더, 민족의 차이로 꿰뚫린 혼돈의 다중으로 보였다.
이러한 무질서는 전략적 딜레마를 야기했다. 어떻게 그토록 이질적인 다수가 하나의 주체로 구성될 수 있단 말인가? 19세기 후반에 사회민주주의는 일련의 복잡한 실천과 이론적 제안으로 이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이제는 친숙해진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문제는 세 가지 기본 원칙에 기초했다.
첫째, 노동하는 다중의 한 부분이 나머지 전체를 환유법적으로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많은 선전이 증명하듯이, 공장의 남성 임금 노동자는 그 자체로 노동계급의 얼굴이 되었고, 그 투쟁은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둘째, 이 특정 주체의 이익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우선시되었다. 인종적 평등을 위한 소수인종의 욕망, 해방을 위한 여성의 욕망, 또는 자결을 위한 식민지 인구의 욕망은 공장 노동자들이 만든 혁명의 부차적 기능으로 실현될 것이었다.
셋째, 사회주의자들은 이 공장 노동자들이 일하는 작업장을 계급 형성의 주요 지형으로 특권화했다. 공장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가 세계사 속으로 들어서는 곳이기도 했다. 오토 륄레(Otto Rühle)와 같은 일부 사람은 이 '공장주의적' 논리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장에 있는 노동자들 뿐이다... 공장 밖에서 그는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소부르주아 환경과 중산층 생활 습관에 관여하는 소부르주아이다.”
좋든 나쁘든, 이 세 가지 방향은 모두 서로를 암시하며 처음에는 주로 전략적 고려 사항에서 파생되었다. 공장에서 산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차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이곳이 노동계급이 가장 강력하고 자본가들이 잠재적으로 가장 약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궁극적으로 이윤이 나오는 곳일 뿐만 아니라 전례 없는 수의 노동자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노동자들을 같은 중요한 위치에 집중시키면서 자본은 스스로를 망치는 바로 그 조건을 만들어 냈다. 널리 읽혀진 글에서 칼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대적 생산의 모든 조건은 노동계급의 결속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중세 시대에 각 장인은 완제품을 생산했다. 그는 산업적으로 거의 독립적이었다. 오늘날에는 완제품을 생산하는 데 흔히 수십, 수백 명이 필요하다. 따라서 산업은 협력을 가르친다.”
함께 일하고, 생산 과정에 협력하고, 공통의 상황과 무엇보다 같은 착취를 경험하고 공유하면서, 공장의 임금 노동자들은 차이점을 극복하고 하나된 힘으로 뭉칠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정치적 실천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단단하고 강력해지는 공장이라는 학교에서라고 가정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본래 본질적으로 전략적 성격을 띠었지만, 역사의 목적론적 서사를 통해서 대체로 정당화되었다.
산업화는 산업 임금 노동자들을 어느 정도 동질적인 계급으로 만들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기계의 영향으로", 카우츠키는 계속해서 “사업분야 간의 구분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움직임들이 내포하는 대리주의는 단지 일시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곧 모든 힘들게 일하는 대중이 단순하게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일한 노동계급이 되는 경향이 있음을 보았다. 우리는 또한 다른 노동하는 계급들이 노동 조건과 생활 방식에서 점점 더 프롤레타리아트를 닮아 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하는 계급들 중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에너지, 지성, 그리고 그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의식에서 꾸준히 성장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른 노동계급 집단 자신들의 사라져가는 생존자들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들의 감정과 사고 방식은 그 위치가 어떠하든 간에 비자본가 대중들 전체의 표준이 되고 있다.”
이 이론의 모든 모순, 배제, 위계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실천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19세기, 특히 20세기를 거치면서 계급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수천 만 명의 노동자에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노동조합, 위원회, 그리고 가장 흔히 대중적인 정당으로 조직된 역사적 노동계급은 일련의 엄청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투쟁 사이의 주관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요컨대, 계급은 일상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성공이 사회민주주의가 그 자체에 대해 말한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된다. 임금노동의 이질성은 공장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고, 노동계급의 조직화는 오로지 목적론이 예견한 선을 따라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캐슬린 캐닝(Kathleen Canning)은 20세기 초 독일의 여성 섬유 노동자에 대한 연구에서 어떻게 임신 경험이 작업장 바닥 동료애의 기초가 되었는지 설명했다.
이 여성들은 부분적으로는 성차별 때문에 노동조합 - 독일 섬유 노동자 협회DTAV - 에 적당히 관여했지만 때때로 감독관들의 성희롱과 강간에 항의하면서 처음에는 살쾡이 파업을 시작하는 경향이 있었다. 캐닝은 "1902년에서 1904년 사이에 여성은 DTAV 평조합원의 17~23%를 차지했지만 이른바 공세적 파업 참가자의 53%를 차지했다"고 회상했다. 1908년까지 DTAV는 "마사 호프Martha Hoppe를 최초의 여성 대표자로 임명하고 그해 총회에서 '여성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하는 독일 여성들이 노동조합을 정치적 구성의 특권적 장소로 여기는 사민당(SPD)에 가입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여성 당원들은 공장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집에 머물면서 집안 일을 했고, 보통 식품 가격의 인상에 초점을 맞춘 정치적 모임에 의해서 당에 모집되었다. 봉기, 분열, 패배의 격렬한 연속 끝에 독일 공산당(KPD)이 탄생한 후, 여성 투사들은 새로운 당이 남성 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초점을 두는 것에 도전하며 식량 폭동과 소비재 탈취를 시작했다.
1922년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관한 여성 연구 그룹의 구성원들은 가사 노동이 비생산적이라는 제안에 실망감을 표시하고 새로운 노동계급적 요구들을 제의했다. 협력적인 가정일, 하루 8시간으로 가사노동 제한, 가사 노동에 대한 임금, 여성의 자유로운 직업 선택, 그리고 성적인 자유. 1928년 섬유노동조합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관계에 대한 여성을 위한 에세이 대회를 후원하여 글모음집을 발간하였다.
KPD는 마침내 대공황 기간 동안 이 도전에 반응하였으며, 그것은 공장 내 노동계급의 응집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는 임금관계의 근본적 특성이 실업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제프 일리Geoff Eley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공격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정체성은 공장 바닥이 아닌 거리 모퉁이에 모인 실제 구성원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면서(1930년 이후 80%가 실업자였다), KPD는 1930~32년의 성장 기간 동안 여성, 청년, 세입자, 복지 청구인 및 기타 주변의 더 넓은 기반의 "비계급"적 동원의 목소리를 싫든 좋든 찾아냈다.
낙태와 피임에 대한 성적 개혁의 선동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비동맹적 좌파 의사, 사회 복지사 및 기타 활동가 간의 놀라운 협력과 함께 이것의 일부였다. KPD(또는 개별 공산주의자와 그들의 전문가 조직, 당이 후원하는 연합 및 포럼)는 1931년 낙태 개혁을 위한 캠페인과 1933년 이전에 번성했던 놀라운 성 상담 클리닉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다시 말해, 공장에서 남성 임금 노동자의 살아있는 경험이 노동계급 형성의 전체 역사를 환유적으로 대변하고 따라서 전략적 차원에서 헤게모니를 가졌다는 사회민주주의의 내기는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문제는 현실에서는 항상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주변적인 임금 노동의 상상된 경험에 기초했기 때문에, 그 실천에서 요구되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모호하게 했다. 불확정적인 결정을 역사의 불변의 철학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결정의 배후에 있는 전략적이고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고려 사항은 사라졌다. 그것들은 이제 전통으로 남아서 우리를 괴롭힌다.
공장의 바깥
물론 20세기, 특히 지난 40년 동안 많은 급진주의자들이 이 목적론을 비판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공장 노동자와 그의 욕망이 계급 전체를 대표한다는 믿음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공했고, 공장에서 임금 노동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근시안적인 집착은 애초에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노동의 영역을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임금 노동은 정의상 노동자가 생활에 필요한 돈과 노동력을 교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적 비판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임금 지불이 자동적으로 배부르고 건강하며 피로가 풀린 노동자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이 임금 노동자들이 다음날 업무에 복귀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노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레오폴디나 포르투나티Leopoldina Fortunat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동만이 임금을 남성 노동자의 재생산에 필요한 사용가치로 전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사용가치는 그가 직접 또는 즉시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용가치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즉 소비할 준비가 돼 있는 사용가치로 변환하려면 더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노동력을 다시 채우는 그러한 노동을 그들은 사회적 재생산이라고 불렀다. 생산 지점에서 임금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종종 보이지 않는 요리, 청소, 보살핌, 교육이다. 이것이 없으면 누구도 노동력을 팔 수 없고, 임금으로 교환할 수 없으며, 잉여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고 페미니스트들은 정당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사회적 재생산은 일반적으로 가족 형태 내에서 이루어지며, 강제로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은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여성이었고, 때로는 임금노동자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흔히 무급이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일부 페미니스트들, 특히 이탈리아의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 재생산을 단지 일종의 활동으로뿐만 아니라 투쟁의 전체 영역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생산과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활동이 항상 상호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은 자주 무시되거나, 자연화되거나, 폄하되었다. 예를 들어 E.P. 톰슨Thompson의 계급 형성에 대한 권위있는 설명인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을 보자. 당시 대부분의 사회주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톰슨은 분리되고 자연화한 가정 영역이라는 개념을 고수했다. 그는 가정은 자연적인 분업에 의해 관리되지만 직장에서는 그 분업이 역사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암시했다.
그러므로 '진짜' 착취는 가정이 아닌 직장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진짜' 정치, 따라서 계급 투쟁과 계급 형성은 직장에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 그는 사회적 재생산의 지형을 역사의 바깥, 그곳에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는 잠자코 넘어갔다. 이 지형은 역사적으로 여성으로서 성별화되어 왔기 때문에, 이것은 기본적으로 여성을 역사에서 제외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하면서, 톰슨은 자신도 모르게 19세기 사회주의 운동과 같은, 지금은 공식 역사처럼 된 목적론적 서사를 재생산했다.
따라서 페미니즘적 비판은 다각적이어야 했다. 이론 수준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 재생산, 부불 노동, 잉여 가치의 개념을 탐구했다. 역사의 차원에서는 그동안 받아들여진 계급 형성의 이야기를 해체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조안 스콧(Joan Scott)과 루이스 틸리(Louise Tilly)의 유명한 책 <여성, 노동, 그리고 가족>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재생산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정치와 계급 형성의 장소라고 주장했다.
둘째,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의 형태는 항상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하나의 변화가 다른 하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셋째, 가정은 사회적 재생산 활동의 배타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과 생산 모두의 복합적인 장소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동시대적인 실천의 수준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 재생산의 지형에서 일련의 투쟁을 조직함으로써 공장이 계급 형성의 주요 현장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낙태 합법화 투쟁, 가사 노동을 위한 임금 캠페인, 또는 버스 요금, 전기 요금 또는 임대료를 일방적으로 줄이기 위한 대규모 운동(때로는 "자동 감축"이라고 불리던 것)을 언급할 수 있다. 여성들은 생활비를 놓고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했다. 더구나 한때 공장 그 자체를 찬양했던 많은 공장 남성 노동자들이 1960년대 후반에 투쟁을 외부로 확장할 때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지만 종종 잊혀진다.
1969년, 뜨거운 가을로 알려진 노동자 투쟁의 물결은 임금 인상, 더 나은 복지수당, 공장 운영에 대한 더 큰 발언권을 가져왔다. 그러나 반동은 빠르고 치밀했다. 한편으로 노동조합은 보다 민주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억누르는 위원회 체제를 만들어 정치적 자율성에 대한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가들은 단순히 일반 생활비, 임대료, 식품 가격, 기본 서비스 비용을 인상함으로써 이러한 더 높은 임금에 대응했다.
포르투 마르게라Porto Marghera의 화학 공장에서 일하는 이탤로 스브로지오Italo Sbrogio는 나중에 이 계책이 부분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생활비 상승 문제를 거론하며, 이런 점을 감안해 공장 내부의 개입은 외부로, '사회적'으로도 옮겨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공장 내부의 투쟁은 이제 전략적 교착 상태에 직면했다. 다른 지형에서 투쟁함으로써 그것들을 둘러싸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은, 주목해야하듯이 공장을 바로 옆에서 둘러싸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지역에서 시작된 ‘자동 감축’ 캠페인의 이면에 있는 주요한 전략적 고려 사항 중 하나였다.
스보르지오는 이 운동이 곧 공장 주변을 넘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회상한다: "사람들은 임대료를 낮추고, 빈집을 점거하고, 음식값을 적게 지불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마을 곳곳에 지역 위원회를 설립하여 조직했다. 우리는 심지어 일부 슈퍼마켓에서 기본 식품 가격을 인하하도록 강제하는 쇼핑 파업을 조직할 수 있었다.
한 경우에서, 대규모 자체 감축 시위는 투사들이 "우리가 줄인 가스 및 전기 요금 고지서를 모두 태워 거대한 불을 지르면서 절정에 달했다. 4개월 간의 전국적인 시위 끝에 정부와 노조는 전기 요금을 인하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위원회 관계자들은 공장과 동네이웃 사이에 이처럼 강한 유대감은 이전에는 없었다고 말했다.”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이러한 투쟁으로 집단적 생활 방식에 대한 실험, 탁아소, 공동 주방 및 민중의 건강 센터들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 방지를 보장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형태의 삶에 대한 이러한 실험들은, 그들이 훨씬 더 광범위한 투쟁의 전선에 완전히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반문화를 넘어섰다.
물론 생산 지점을 넘어선 이러한 총체적 움직임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있었고, 많은 공장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이 2열로 내려가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것은 사실 운동 내에서 중대한 모순으로 판명될 것이었다. 그러나 투쟁의 열기 속에서 전략이 일상이 되자 공장을 우선시했던 오래된 서사가 무너지고 계급 형성의 다른 경로가 드러났다.
정치적 문제
오늘날 정치적, 계급적 지형이 변화하는 가운데, 수용된 규범에 대한 충실성보다 전략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회적 재생산의 활동은 여전히 강력한 계급적 대립의 장으로 남아 있다. 재생산의 영역에 대한 자본주의적 공격은 긴축 - 사회적 재생산의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것 - 의 형태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시간을 쥐어짜기 위한 증가하는 대응은 재생산 노동의 시장화와 상품화를 가속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많은 정치적 쟁점들은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영역을 통해 정면으로 그려지고 있다. 치솟는 임대료, 무너지는 건물, 기금이 부족한 학교, 높은 식품 가격, 심각한 부채, 경찰의 폭력, 물, 교통 및 보건 의료와 같은 기본적인 사회 서비스에 대한 불충분한 접근 등. 반인종주의, 반경찰 폭력, 반긴축과 같은 가장 역동적인 대중 투쟁이 주로 이웃 주민들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업률이 13%를 넘는 퍼거슨에서 사회운동은 작업장이 아닌 거리에서 태어났다. 한때 이 나라에서 공장 투쟁의 중심이었던 디트로이트에서 오늘날 주요 투쟁 중 하나는 물을 위한 투쟁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적 재생산이 경제적 필요성의 초역사적 범주이며 따라서 생산을 인류학적인 필수의무로 결합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마이클 데닝(Michael Denning)의 말처럼 “노동의 제안이 아니라 생계를 꾸려야 하는 의무”에서 시작하는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의 특수성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가 사회적 재생산의 관점을 가정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 상태가 말하자면 임금 직업이 아니라 실존적 무임금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에서는 실업이 고용에 선행하고, 비공식 경제가 공식 경제에 선행하며, 프롤레타리아가 임금 노동자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충분히 분명해진다.
사회적 재생산 수준의 투쟁은 패스트푸드 산업, 농업, 병원, 대학, 물류 분야의 투쟁과 연결되어 분석 및 적대해야할 통합된 분야의 필요성을 입증한다. 오늘날의 정치적 문제는 새로운 계급 권력을 구축하는 긴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러한 다양한 지형에서의 투쟁의 다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 조직화의 문제로 다시 한 번 우리를 이끈다.
(기사 등록 20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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