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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민주주의 혁명의 이론가로서 로자 룩셈부르크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12. 24.

피터 후디스PETER HUDIS

번역: 두 견 

대부분 영어로 소개된 적이 없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의 새로운 판본은, 그녀의 생각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 혁명은 민주적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실패할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글의 필자인 피터 후디스는 구소련 사회에 대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시도한 것으로 잘 알려진 오크톤Oakton 커뮤니티 칼리지의 철학과 교수이자 <프란츠 파농: 바리케이드의 철학자>의 저자이다.

출처: https://jacobin.com/2022/08/rosa-luxemburg-theorist-marxism-democratic-revolution

수 세대에 걸쳐 사회주의 사상가와 활동가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삶과 사상에 대해 씨름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출판된 영어 전집 4권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의 유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많은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다. 이전에 출판된 3권과 함께 새로운 모음집은 현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격변 중 하나인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그녀의 글을 한군데로 모았다.

룩셈부르크가 그녀의 소책자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에서 1905년을 분석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이것은 새로운 번역으로 4권에 등장한다.) 그러나 1906년부터 1909년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새 책의 자료 중 5분의 4 이상이 처음으로 영어로 소개되고 있다. 원래 폴란드어로 작성된 그녀의 글 중 대부분(전체 550페이지의 약 절반)은 다른 언어로 나온 적이 없다.

러시아어로 말하기를 배우기

룩셈부르크는 그녀 세대의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와 마찬가지로(카를 마르크스 자신도 마찬가지) 보통선거권을 가진 민주공화국이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데 가장 적합한 구성이라고 주장했다. 2인터내셔널의 많은 동시대인들처럼 그녀는 자본주의 내에서 민주적 개혁을 위한 투쟁과 자본주의를 폐지할 혁명적 변혁에 도달하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고 보았다. 심지어 그녀는 두 가지를 갈라놓는 이들과 가차 없이 싸웠다.

그러면서 룩셈부르크는 평화로운투쟁의 형태와 혁명적 시기의 투쟁 형태를 구별했다. 두 시나리오의 목표는 노동계급의 의식과 힘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화 시기에는 이러한 투쟁이 부르주아지 지배의 틀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운동이 선거, 집회, 언론, 노동조합 등에 적용되는 기존 법률의 범위 내에서운영되도록 요구한다.

룩셈부르크는 이것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 일어나야 하는 일종의 철제우리라고 불렀다. 따라서 그러한 시기의 대중투쟁은 아주 드물게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혁명적 국면에서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고 주장했다.

"혁명의 시대는 가둬놓은 증기가 주전자를 쪼개는 것처럼 '합법성'의 새장을 열어서 계급투쟁을 벌거벗고 방해받지 않는 개방된 공간으로 내보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과 정치권력은 혁명의 과정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법률들'에 의해 휘어지거나, 묶이거나, 압도당하지 않고 떠오른다."

룩셈부르크에게는, 1905년 혁명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이 짜르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대규모 파업에 참여했던 대중의 활동과 지혜가 그러한 순간의 분명한 사례였다. 그녀가 1906년 초에 썼던 것처럼, “러시아 혁명과 함께, 부르주아지의 거의 60년 동안의 조용한 의회적 통치 기간이 끝나고 있다.” 서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파업을 정치적, 조직적 관점에 통합함으로써 러시아어로 말하기를 시작할 때가 왔다.

“오늘날 독일의 노동계급이 사용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승리를 빚지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전술은 주로 의회 투쟁을 지향하며,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맥락을 위해 고안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기초로 사용하는 데 명예로운 첫 번째 운명을 맞은 국가이다. 바르고 차분한 의회 생활의 시기가 아니라 격동적 혁명의 시기에 말이다.”

 

즉각적 과제

룩셈부르크가 이러한 글을 쓴 이후로 많은 평론가들은 다소 점잖은 사회민주당을 보다 혁명적인 방향으로 밀어붙이려는 그녀의 노력을 칭찬해 왔으며, 다른 사람들은 룩셈부르크의 관점이 서구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러시아의 절대주의 체제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경시한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이 노동자 투쟁의 강력한 무기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계속해서 그것의 사용과 효과가 주어진 조건과 환경, 그리고 투쟁의 순간에 항상 의존하는 무기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둘째로, 그녀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의 즉각적인 실현과 같은 유토피아적이거나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가능하고 역사적으로 필요한 목표는 민주공화국과 8시간 노동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의 관점에서 사회주의는 두 가지 주요한 이유로 러시아에서 즉각적인 의제가 될 수 없었다. 당시 노동계급은 러시아 제국 인구의 극소수(15% 미만)에 불과했고, 사회주의가 단일한 국가에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오직 국제적 혁명의 결과일 수 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재의 혁명에서 달성할 수 있는 결과는 러시아의 사회 발전 수준을 말할 것도 없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 계급 관계와 프롤레타리아트 활동이 그때까지 달성한 발전의 수준과 형태에 달려있을 것이다.”

폴란드 노동자 운동에 대한 긴 에세이에서 그녀는 이 점을 더욱 발전시켰다.

“현 상태에서 노동계급은 아직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위대한 과업을 완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은 먼저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을 내면화해야 한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아직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다... 모든 가장 큰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의 대다수를 그 배후에 두게 될 때, 자본주의의 마지막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노동자의 혁명

그러나 이것이 러시아 혁명이 자유주의나 부르주아적 틀에 국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 흐름과 매우 유사하게 멘셰비키 경쟁자들과 정반대로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가들이 직면한 당면 과제는 노동계급이 통제하는 민주공화국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는 혁명을 이끌기에는 너무 취약하고 타협적이었기에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의 민주적 형태를 옹호하는 유일한 투사이자 옹호자가 되어야 했다.” 그녀는 오늘날 러시아의 상황이 19세기 프랑스의 상황과 같지 않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의 자유, 보통선거권, 공화정,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을 위해 앞장서 투쟁하지만, 1848년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를 가득 채운 환상을 가지고 싸우지는 않는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그것을 도구화하기 위해 [그러한]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운다.”

그녀는 이 점을 다른 곳에서 더 확장했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부르주아 혁명은 과거 독일과 프랑스에서와 같이 부르주아 계급의 과제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그리고 그들의 노동자로서 이해관계를 이미 고도로 의식한 계급의 과제이다. 정치적 자유를 추구하는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지가 이익을 얻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와의 계급투쟁을 해결하여 사회주의의 승리를 앞당길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혁명은 동시에 노동자 혁명이다. 그것이 바로 이 혁명에서 절대주의에 맞선 투쟁이 자본에 맞선, 착취에 맞선 투쟁과 반드시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이 혁명에서 경제적 파업이 정치적 파업과 도저히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다.”

룩셈부르크는 기술적으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을 적용하는 것을 포함하여,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달성하는 데 피착취 대중 다수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녀는 나중에 191812월에 독일 혁명 동안 그녀가 이끌었던 그룹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독일 전체의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대다수의 명확하고 모호하지 않은 의지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투쟁의 방법, 관점, 목표에 대해서 의식적인 승인을 해주지 않는다면 결코 정부 권력을 장악하지 않을 것이다.”

 

한 걸음 앞으로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관점은 그녀의 사후 수십 년 동안 비서구 세계의 혁명 정권이 직면한 문제와 관련한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노동계급이 민중의 소수만을 대표한다면 구체제가 전복된 이후에 민주공화국에서 어떻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녀가 주장하듯이 사회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주적인 계급정치만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토지 사유재산에 대한 농민의 굶주림이 아마도 그들을 농민들과 대립하게 만들었기 때문인가? 그리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제 아래에서 그러한 민주공화국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룩셈부르크는 1908년에 폴란드어로 쓰여진 주목할 만한 에세이인 "세 개의 두마Dumas[1905년 혁명 이후 만들어진 유사 의회]의 교훈"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다루었는데, 이 에세이는 이전에 영어로 소개된 적이 없다. 혁명이 패배한 이후, 1908년까지 러시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술의 모든 세부 사항을 엄격한 자기 비판에 종속시키려는 노력을 배가"해야만 한다고 촉구하면서 그 발전 과정을 조사했다. 그녀는 세 차례의 두마의 역사를 평가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혁명에 대한 양보로 1906년부터 러시아 제국에 설치된 의회 기구들은 상층계급에게 점층적으로 편중된 제한된 선거권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 두마와 이 흐름에서 그것의 엄청난 정치적 중요성은, 정부를 먼저 전복시키지 않은 의회 시스템과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못한 정부는 (첫 번째 두마가 헛되이 견지했던 믿음처럼) 구권력을 물리칠 수 없고, (두 번째 두마가 하려고 했던 것처럼) 반대의 도구로서 그 권력에 대항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로 반혁명의 도구가 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1905년의 혁명과 달리 구정권 타도에 성공한 미래의 혁명이 직면할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앞을 내다보았다.

“러시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일시적으로나마 정치적 힘을 얻게 된다면 국제적 계급투쟁에 엄청난 격려가 될 것이다. 그것이 폴란드와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권력을 잡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일단 노동자가 권력을 갖게 되면, 그들은 러시아 국가 전체에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는 당장의 혁명적 임무를 직접 수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루 8시간 노동을 확립하고, 농업 관계를 전복시키며, 한마디로 그들의 프로그램의 모든 측면을 구체화하여, 그들이 부르주아 통치에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고, 이런 식으로 그것의 국제적 전복을 앞당기게 될 것이다.”

 

혁명적 현실주의

그러나 문제는 남아 있었다. 노동자들이 대중의 소수를 구성한다면 민주공화국에서 어떻게 장기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룩셈부르크의 대답은 그들이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했다.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 부르주아지, 농촌 지주, 쁘띠 부르주아지 및 대다수 농민의 반혁명적 작전에 의해 권력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불가피한 제거로 나타난다. 결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전복된 후 공화국은 사라지고 고도로 제한적인 입헌군주제의 오랜 통치가 뒤따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계급 관계는 이제 온건한 입헌군주제조차 혁명적 행동과 공화주의적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인도되어지는 길을 가도록 되어 있다.”

이 글을 쓰기 직전에 그녀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승리가 이미 보장돼 있을 때만 전투에 임하는 것은 불쌍한 지도자이자 가련한 군대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반대로, 나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일련의 특정한 승리를 약속하려는 의도가 없다. 오히려 노동계급이 역사적 의무에 충실한 채 전개되는 모순과 혁명의 점점 더 넓은 지평과 일치하는 투쟁 전술을 계속 성장시키고 실행한다면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적 발전에 의해 준비된 모든 것에 직면할 용기와 결의를 가져야 하며, 이와 관련하여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경우에도 이 혁명에서, 19세기에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랬던 것처럼, 계급투쟁을 위한 새로운 모순, 새로운 과제, 새로운 길을 밝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지구적 군대를 위한 전위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 주장의 의미를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개념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승리만큼이나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길로도 모든 국제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최종 승리를 향해 진군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24시간 만에 끝나는 갑작스러운 도약이 아니라, 짧고도 늘어진 깨어짐이 있는, 아마도 길고 격렬한 계급투쟁의 역사적 기간으로서 제안해야 한다.“

이것은 혁명적 현실주의의 놀라운 표현이었다. 룩셈부르크는 노동계급의 통제 하에 있는 민주공화국(이것이 그녀와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해한 방식이었다)조차도 국제적 혁명이 없다면, 노동계급이 소수를 구성하는 나라에서.권력에서 강제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혁명은 그것이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미래에 자본주의의 뿌리 뽑기가 발생할 수 있는 지적 퇴적물을 제공한다는 적어도 한 가지 차원에서 중요한 사회적 전환을 낳았을 것이다. 요컨대,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정치적 형태가 "철저한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약 비민주적인 정권이 권력을 유지한다면, 노동계급은 스스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과 훈련 없이 남겨질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짧은 기간이라도 존재했다면, 그것은 나중에 다가올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고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자기 성찰

이 주장은 10년 후인 19172월 혁명에서 짜르 체제가 마침내 전복되고 같은 해 10월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를 말해 준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을 선언하면서도 물질적 조건이 사회주의 사회의 즉각적인 창설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것이 레닌이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촉진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노력한 이유이다.

그러나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레닌의 접근 방식과 룩셈부르크의 접근 방식을 구분했다. 첫째, 그의 정권은 정치적 자유의 억압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 공화국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룩셈부르크가 1918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비판에서 그것을 날카롭게 반대하도록 했다. 둘째, 레닌은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면 영구적으로 그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통치에 기반한 민주적 사회를 만들어서 세계에 투영된 해방의 비전이 다른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도록 영감을 주는 한,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은 최악의 결과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룩셈부르크의 발언과는 매우 달랐다.

특히 룩셈부르크의 입장은, 패배한 혁명 이후에 부르주아지가 항상 폭력적인 탄압에 의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드러진다. 실제로 그녀는 19191월 베를린에서 일어난 스파르타쿠스 동맹 봉기의 패배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잃게 됐는데, 그녀는 충분한 대중적 지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그것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룩셈부르크는 비민주적인 수단을 통해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꾀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자신의 죽음 이후 수십 년 동안 일어난 많은 혁명의 비극적인 결과를 예견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성찰을 어떻게 평가하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녀는 별로 논의되지 않았던 (특히 당시 러시아 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의 경우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차별성있는 개념을 발전시켰지만 너무 적은 관심을 받았다. 이 글들을 영어로 출판하는 것이 그러한 소홀함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비록 룩셈부르크의 많은 아이디어들이 민주사회주의자, 반제국주의자, 페미니스트들이 오늘날 고심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적어도 하나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그녀의 관점은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자주 반복되는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사적 착취자에게 노동자의 노동을 판매하는 것이 폐지되면 오늘날의 모든 사회적 불평등의 근원이 사라질 것이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지가 "인간 사회의 모든 불평등"을 종식시키는 기반을 제공할 것이라는 룩셈부르크의 주장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레닌, 카를 카우츠키, 레온 트로츠키 등을 포함하여 제2인터내셔널의 거의 모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경향과 이론가가 이를 공유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견해를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유재산권을 제한하려 했던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나 사유재산권을 국유화하여 폐지한 소련, 중국 및 기타 개발도상국의 정권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사유 재산과 "자유" 시장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현대성을 정의하는 모든 소외된 형태의 인간관계를 대상으로 훨씬 더 깊은 사회적 변혁이 분명히 필요하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이 지닌 인본주의적 함의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 봄으로써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세대의 과제이다. 사회주의의 의미에 대한 비판적인 재평가를 수반하는 것은 룩셈부르크 시대에는 의제에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녀 작업의 전반적인 정신은 확실히 그것을 고무시킨다. 그녀는 1906년에 이렇게 썼다.

“자기 성찰, 즉 계급 운동 자체의 방향, 논리, 기초의 모든 단계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은 노동 대중이 거듭거듭 힘을 얻어내서 새롭게 투쟁하게 해주는 저장소이며, 이를 통해 그것은 자신의 망설임과 패배들을 자신의 강함과 피할 수 없는 미래의 승리에 대한 수많은 증거로 이해한다.”

 

(기사 등록 202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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