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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맑스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4. 11. 29.

[역자주] 이글은 2013년 1월 31일 미국의 <소셜리스트 워커> 신문에 실렸다.

http://socialistworker.org/2013/01/31/marxism-feminism-and-womens-liberation



이글은 곧 재발행 예정인 ‘여성과 사회주의: 여성 해방에 관한 에세이들’의 저자인 샤론 스미스가 2012년 시카고에서 열린 ‘소셜리즘 2012’ 컨퍼런스에서 발제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글에서 스미스는 여성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투쟁에 맑스주의 전통이 어떻게 접근해 왔는지 그리고 다른 이론들을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살펴본다.



샤론 스미스

(번역: 남수경)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여성부(제노텔)의 초대 리더였던 이네싸 아르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 없이 여성 해방을 생각할 수 없다면, 여성 해방 없는 공산주의 역시 생각할 수도 없다.” 이 말은 사회주의와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해 준다. 둘 중 하나가 없이는 그 어느것도 가능하지 않다.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작들에서 보듯이 맑스주의 전통은 그 출발부터 여성 해방을 위해 싸워 왔다.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지배계급이 여성들을 사회와 가정에서 이류 시민으로 전락시켜 놓고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의 도구로만 본다 … 부르주아는 [공산주의자들의] 진정한 목적이 단순한 생산수단으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폐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맑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의 가사 노동의 정확한 역할을 분석하는데 <자본론>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그는 계급사회에서 여성 억압의 기원을 연구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그 주제에 관해 폭넓은 민족/부족 연구노트 (ethnological notes)를 남기긴 했지만 말이다.


맑스 사후에 엥겔스는 여성 억압의 기원을 계급사회와 핵가족 등장의 산물로서 고찰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기원> (이하 ‘기원’)을 쓰기 위해 맑스의 ethnological notes의 일부를 이용했다. 엥겔스의 저작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어떠한 수정이 필요하더라도, 그 당시로서는 특히 여성의 지위가 열악했던 빅토리아 시대 상황에서 엥겔스의 저작은 여성 억압을 이해하는 데 선구적인 공헌을 했다.

  

실제로 엥겔스가 <기원>에서 여성들이 가족 내에서 남편에게 당하는 극심한 수치심 등 계급사회 이전에는 볼수 없었던 불평등한 여성 억압의 개인적 측면들을 주의깊게 관찰한 것을 주목할 만하다. 엥겔스는 핵가족의 출현을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불렀다. 비록 맑스의 노트가 이 세계사적 패배가 오랜기간에 걸쳐 - 계급사회 이전에 시작되어 계급사회 출현으로 이어지는 -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그 결과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평등권이 엄청나게 후퇴한 것이다.

더 나아가, 엥겔스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이 처음부터 가족 안에 내재화되었다고 분명히 주장했다.  


남자는 또한 가족 내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여성은 노예 상태로 전락했다. 여성은 남성의 정욕의 노예가 되고 단순히 아이를 생산하는 도구가 되었다 … 부인의 정조와 태어난 아이들이 자신의 적자임을 분명히하기 위해 부인은 남편의 권력에 무조건적으로 종속되었다. 만약 남편이 부인을 죽인다면, 그는 단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 뿐이다. 


엥겔스는 또한 계급사회에서 이상화되는 일부일처제가 근본적으로 위선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처음 출발부터 가족은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남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부일처제라는 특정한 성격”이 새겨져 왔다. 여성의 불륜은 비난받았지만, “남성에게는 명예로운 또는 최악의 경우에도 그가 기꺼이 감수하는 약간의 도덕적 흠집에 불과하다”고 엥겔스는 말했다.






따라서 여성 해방에 대하여 맑스주의 전통의 초기부터 두드러진 점 하나는 여성 쟁점들을  여성들만의 관심사인 이론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모든 지도적인 남성과 여성 혁명가들의 관심사로 보아 왔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프 트로츠키는 “삶의 조건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썼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가인 레닌은 가족 내의 여성 억압을 “가사노예제(domestic slavery)”라고 불렀다.


레닌이 ‘가사노예제’라고 부른 것이 여성 억압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의 핵심이다. 자본주의를 위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가족의 역할과 그 안에서의 여성의 불평등한 역할에 여성 억압의 근원이 있다. 역사적으로 자본가계급 가족이 부의 세습을 위한 제도로서 역할을 한데 반해, 노동계급의 가족은 체제에 노동력을 원활하게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바로 이것이, 노동자들에게는 아니지만, 자본가들에게는 현재의 노동력을 매일 재충전하고 다음 세대의 노동자들을 길러내는 노동력 재생산을 값싸게 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식은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꾸리는 데 드는 거의 모든 경제적 부담을 정부나 자본가계급에서 나오는 비용이 아니라 외벌이 또는 맞벌이 수입에 생존을 의존하는 노동계급 가족 단위에게 부담시킨다. 


노동계급 가족의 대두는 또한 서로 다른 계급의 여성들이 겪는 억압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기 시작했다. 상류 계급 여성의 역할은 가문의 부를 이을 자손을 생산하는 것임에 반해, 노동계급 여성은 현재와 미래의 노동자 세대를 가족 안에서 돌보는 역할을 한다. 즉, 체제를 위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아내”의 역할의 의미가 “아내는 수석 하인이 되었다 … 만약 그녀가 그녀의 임무를 가족 내의 사적인 서비스로 수행한다면, 그녀는 공적인 생산에서 제외되어 임금을 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공적인 생산에 참여해 독립적으로 수입을 얻고자 한다면, 그녀의 가족 내에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오늘날까지도 직장과 가정의 서로 상충되는 요구들이 모든 워킹맘들의 주요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하지만 특히 빨래, 가사, 요리와 다른 가사노동들을 돕는 도우미를 고용할 처지가 못되는노동계급 가족 내에서 특히 더 그렇다.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서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는 여성과 남성에게 고정되게 구분되는 성역할 -  여성에게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주수입원인 가장에게 종속되어 가족을 잘 돌보는 주부상을 포함하는 -  에 충실할 것을 강요한다. 이런 이상적인 성역할이 노동계급 보통사람들의 실생활을 거의 반영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70년대 이후 대다수의 여성들이 노동력에 편입되었지만,  이상적인 가족상과 여성이 가족 내에서의 가사 책임에 더 적합하다는 가설은 계속되어 왔다. 가족 내에서 여성의 돌보는 역할은 그들의 지위를 사회 전체에서 이류 시민으로 전락시킨다. 왜냐하면 여성들의 주책임이 - 그리고 가장 큰 공헌이 - 개별 가족들의 필요에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가족에서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그들의 사회에서의 이류시민의 위치를 이해하고 다음의 기본적인 질문들에 답할 수 있게 하는 핵심이다. 왜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기본적인 법적 평등을 보장할 남녀평등 수정헌법(Equal Rights Amendment)이 없을까? 왜 여성은 남성에게 좌지우지되는 성적 대상으로 강등되었는가? 왜 오늘날 여성은 여전히 자신의 육체와 재생산을 스스로 통제할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이런 문제들은 가족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영향은 가족 안에서의 삶을 훨씬 더 벗어난 데까지 미치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들은 여성 억압의 뿌리로서 가족이 그 중심에 있다는 것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여성 해방의 전제로서 가족 내에서의 성평등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들을 이해했다. 1920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가족 내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실질적인 평등을 이루는 것은 … 몹시 어려운 문제이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기 전에 우리 모두의 가정에서의 습관이 혁명화되어야만 한다. 가족 내에서 남편과 아내의 실질적 평등이 없다면,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평등을 진지하게 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러시아 혁명은 또한 혁명정당이 “억압받는 이들의 호민관”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이론적, 실질적 수준에서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이 어떻게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기 시작했다. 레닌은 혁명적 의식의 목표에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일부로써 사회의 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싸우는 것이 필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주장했다.


노동자들이 어느계급이 영향을 받는지에 상관없이 모든 전제, 억압, 폭력과 학대에 대응하도록 훈련되지 않으면 노동계급 의식은 진정한 정치적 의식이 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이 다른 것이 아닌 사회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훈련되지 않으면 말이다.




이 공식은 계급투쟁에서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서 싸우는 데서 사회주의 운동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너무나 중요하다. 나는 여기서 이 공식을 특히 여성 억압을 논의하는 데, 그리고 그것이 이론적,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논의하는 데 적용하겠다.


이 인용구에서 레닌이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가 노동계급 착취에 기반한 시스템 - 그리고 계급이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나누는 주요한 분리 - 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는 또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형태의 억압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형태의 억압은 노동자들뿐 아니라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몇가지 예들은 이 점을 쉽게 보여 준다. 먼저, 인종 프로파일링(racial profiling: 인종적 편견에 기반한 범죄자 추정 - 역자주)을 보자. 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운전하면서 경험하는 것은 흑인과 여타 유색인종에 속한 노동계급 사람들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다. 현실에서는, 유색인종이 아무리 비싼 양복을 입고 최신형 벤츠를 운전한다 해도 경찰의 인종차별적인 프로파일링에 걸려 차를 세워야 하는 처지를 면할 수 없다.


이번에는 특히 여성에 대한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유리 천장(glass ceiling). 왜 기업이나 정치계 최상층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백인 남성들의 영역인지는 바로 너무나 간단하고 분명하게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때문이다. 백인 남성들의 이너써클이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고, 흑인과 여성들은 거기에 초대받지 않는다.


“부자 아무개가 겪는 일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노동계급과 가난한 사람들에 비하면 그들이 겪는 억압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레닌이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억압에 효과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일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이익에 기반해 사회를 운영하도록 노동계급을 훈련시키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맑스주의의 이 두 가지 측면, 즉 노동계급 자기해방에서의 혁명가들의 역할과, 어느 계급이 영향을 받는지를 가리지 않는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옹호자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나?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거나 파업에 들어가고 남성과 평등한 임금을 요구할 때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 투쟁들에 우리가 완전한 지지를 보내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하며, 페미니즘이나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투쟁을 포함한 억압에 반대하는 중요한 운동들의 일부는 특정 계급에 기반하지 않는 운동으로 대두되었다.


증거가 보여주듯이, 나는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여성 해방 운동, 게이 해방 운동, 민권 운동과 블랙파워 운동을 포함한 운동들이 일반 대중의 의식과 특히 노동계급의 의식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친 강력한 사회 투쟁들 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여성해방 운동의 발전은 사회에 오랫동안 지속되는 영향력을 가졌고, 바로 그 때문에 지난 40년간 우파들은 여성운동의 성과들을 공격해 왔다. 그것이 바로 페미니스트들이 '한 무리의 남자를 좋아하지 않거나 성적 매력이 없는, 신랄하고, 이기적이고, 유머감각도 없는 여자들로, 그래서 피해자 멘탈리티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모든 곳에 성차별이 있다고 상상하는 여자들'로 묘사되는 가운데 페미니즘이 공격을 받고 있는 이유이다.


따라서 지금의 역사적 상황에서, 지난 40 여 년간 페미니즘이 끊임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도 페미니즘을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성차별주의에 반대하고 여성해방에 대한 방어로서 페미니즘을 원칙상 방어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정의가 무엇인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주창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모든 맑스주의자들이 항상 페미니즘을 방어하고 여성운동이 이룬 엄청난 성과들을 소중히 여길 필요성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1960년대 이후 (우파의) 반격에도 말이다. 우리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일부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나는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일부가 수십년 전 여성해방에 대해 환원주의적 접근론에 빠졌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 조직의 몇 가지 핵심적인 이론적 논점에서도 이것이 보이는데, 이에 대해 간략히 요약하겠다. 

  

먼저, 환원주의란 무엇인가? 순수한 형태의 환원주의는 계급투쟁이 계급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성차별주의의 문제들을 저절로 해결할 것이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접근법은 억압의 문제를 계급의 문제로 “한정”한다. 또한 그것은 노동계급 내에서의 성차별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라는 어려운 물음에 답하지 않고 여성억압을 없애는 데 있어서의 남성의 객관적인 계급이해를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분명히 이 조악한 접근법이 1960년대 여성해방 운동 이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여성해방을 중심적인 것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 온 IS의 전통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환원주의 방향에 순응해 노동계급 여성의 억압의 경험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것은 여성 억압에서 남성이 ‘이익’을 보는가라는 질문의 잘못된 이론적 리트머스 테스트로 이어졌다고 주장하겠다. 또한 여기서 나는 단순히 책임 전가를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왜냐면 어느 정도 우리 ISO 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접근법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 이하 SWP)의 핵심 지도자들의 일부가 <국제사회주의저널International SocialismJournal>에 실린 일련의 논문들에서 논쟁을 했는데, 내가 방금 말한 주제들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 논쟁 전체를 여기서 요약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핵심 쟁점들에 대해서는 정리할 수 있다.


먼저 1984년 SWP의 지도적 당원인 크리스 하먼의 “여성해방과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논문을 보자. (나는 크리스 하먼이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맑스주의자들 중 하나이고, ISO의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을 훈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따라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이슈는 그가 맑시즘에 엄청나게 공헌한 것에서, 비록 중요하긴 하지만, 작은 감점이다.) 그 글에서 하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여성억압에서 노동계급 남성이 얻는 이득은 실제로는 미미하다 … 이득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결국 가사노동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그 문제는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의 무임금 노동에서 이익을 보는 정도에 국한된다.


노동계급 남성이 그의 아내의 노동에서 직접적으로 얻는 이익을 대략 계산할 수 있다. 그것은 만약 그가 스스로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해야 하는 경우 사용해야 할 노동의 양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하루에 한 두 시간에 불과하다. 여성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자신과 남편을 위해 해야 할 부담인데, 그것이 남성 노동자에게 그리 커다란 이득은 아니다.


하먼이 위에서 언급하는 것은 아이가 없는 경우 여성에게 지워진 가사노동의 부담에서 남성이 얻는 “미미한” 이익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만하다. 

 

또 다른 영국의 사회주의자 존 몰리뉴는 하먼의 주장에 대해 남성이 얻는 이익이 미미한 것 이상이라고 대응했다. “하먼은 우리들에게 이것이 ‘여성이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직장에서 돌아와 자신과 남편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의 부담’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남성] 노동자가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왜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득인가?”


몰리뉴의 주장에 SWP 중앙위원인 린지 저먼과 쉴라 맥그리거는 날카롭게 대응했고, 몰리뉴 또한 똑같이 날카롭게 대응했다. 그 논쟁은 1986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린지 저먼은 “남성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들과 이익들은 어떤 의미로도 대단한 것이 아니다. 존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이 대단한 이익도 아니다. 따라서 이런 이익들 때문에 남성들이 “매수될” 물질적 근거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쉴라 맥그리거는 몰리뉴가 맑스주의 전체를 저버리는 것인양 주장했다. “여성억압과 이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해 올바른 이론을 가지려면, 우리는 맑스주의 전통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억압에서 이익을 본다는 존의 입장은 그 전통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이 논쟁이 진행되면서 하먼이 처음 주장했던 것, 즉 남성이 보는 이익은 “미미하다”는 것에서 노동계급 남성은 여성억압에서 아무런 이익을 보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입장이 변했다. 심지어 가족 내에서 남성이 여성에 비해 갖는 이점들이 “실질적”이지 않다는 주장과 함께.




자본가들이 가족 내에서의 여성억압의 주수혜자이고 온갖 성차별적인 헛소리들이 여성의 이류 시민으로서의 위치를 강화하는 데 쓰이고, 또한 노동계급 남성들이 여성해방에 객관적인 계급적 이해를 갖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또한 이런 식의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 여성억압의 심각함을 과소평가하고 노동계급 내에서의 여성억압에 맞서 싸워야 할 필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하나의 좋은 예로, SWP의 주장들을 1920년에 레닌이 독일 혁명가인 클라라 체트킨과 나눈 대화에서 한 다음의 말과 비교해 보라. 러시아 혁명 후 몇 년이 지난 후에 레닌은 여성해방을 이루는 데 놓인 장애물들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이 가사노동처럼 사소하고, 지루하고, 힘과 시간을 뺏기는 일에 진이 빠져 사기가 저하되고 지루해하며, 심장박동이약해지고, 의지가 느슨해지는 것을 남성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흔한 광경보다 더 [여성억압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가 있을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남편들이,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남편들조차도, 그들이 “여성의 일”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기만 한다면 아내들의 부담과 근심을 얼마나 많이 줄여 줄 수 있는지, 또는 완전히 해방시켜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은 “남성의 특권과 위엄”을 거스르는 일일 겁니다. 그들은 편안히 쉬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낡은 노예 소유주의 관점을 당과 대중 사이에서 반드시 뿌리뽑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치적 과제, 노동계급 여성들 안에서 당 사업을 수행할 남성과 여성 동지들로 이루어진 활동가 층을 이론적 실천적 훈련을 통해 만들어 내는 것만큼이나 시급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볼셰비키당은 혁명 전과 후에 모두 노동계급 남성들의 성차별적인 태도에 반대해 논쟁하는 동시에 당의 여성부를 통해 여성 노동자와 여성 농민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데 상당한 힘을 쏟았다. 

 

볼셰비키당의 지도적 당원이자 여성억압에 관한 지도적인이론가이기도 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917년 1차 전 러시아 노조회의에 참석해서 남성 노동자들에게 여성 노동자들이 동일한 임금을 받는걸 지지하자고 호소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는 남성 노동의 가치가 여성 노동의 가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자본가들이 남성 노동력을 값싼 여성 노동자들로 대체하겠다는 위협으로써 남성의 임금에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 문제를 순수한 ‘여성의 이슈’로만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오늘날, 우리의 강조점이 볼셰비키의 이론과 실천에 더 일치해야 하고, 여성 - 또는 억압받는 다른 집단들 - 이 노동계급 내에서 직면하는 억압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모든 전선에서 그것에 맞서 싸우려는 시도를 진지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더구나 페미니즘은 여러 가지 다른 계파들과 서로 다른 이론적 토대를 가진 광범위하고 다면적인 운동이다. 가장 부르주아적인 형태에 기반한 “페미니즘”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워서 이를 무너뜨리고는 지적으로 우리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억압에 맞서 싸우는 데 도리어 해가 된다. 우리가 잘 모르는 중요한 논쟁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진행되어 왔는데, 이는 여성해방과 맑스주의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페미니즘의 모든 계파들을 무비판적으로 또는 무차별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가 노골적으로 적대시해야 할 한 특정 계파가 있는데 바로 부르주아 또는 중간계급 페미니즘이다. 지배계급과 중간계급 여성들도 억압에 직면하지만, 그것이 노동계급에 속해 있는 대다수 여성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전략을 그들 손에 맡길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지난 45년 이상 동안 기업의 최고경영진과 정치권으로의 여성의 진출은 전문직과 경영진 여성들의 필요에 전적으로 부응하는 전국여성조직(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과 페미니스트 머조리티(Feminist Majority Foundation) 같은 조직 형태의 중간계급 페미니즘을 제도화했다.


이것은 1990년대 이후 소위 “파워 페미니즘”이라는 것으로 나아갔다. 페미니스트 저자인 나오미 울프(Naomi Wolf)는 이 새로운 접근법에 대해 그녀의 1994년 저작인 <불에는 불Fire with Fire>에서 가장 잘 요약했다. 그녀는 그 책에서 “파워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소위 “피해자 페미니즘”의 대안으로 만들어 냈는데, 그녀에 의하면 ‘피해자 페미니즘’이란 “반사적인 반자본주의,  인사이더-아웃사이더 멘탈리티, ‘체제’에 대한 혐오감 같은 1960년대의 혁명적 좌파의 잔재인 낡은 습관들”을 포함한다.


울프는 자본주의가 소수를 위해 다수를 억압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여자도 돈만 있다면 성적 억압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하면, 여성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위해 최대한 많은 부와 권력을 쥐어야 한다는 것이 울프의 메세지였다. 울프는 맑스주의를 폄하하면서 “‘혁명’을 기다리는 동안 여성들이 생산수단을 차지하는 편이 더 낫다 … 여성들이 운영하는 기업들이 21세기 권력의 연료전지(power cells)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울프는 여성들 사이의 계급적 차이들을 받아들인다. “때로는 여성들 사이의 적대적 관계는 건강한 것이자, 심지어 우리의 완전한 사회 참여라는 당연한 귀결에 힘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을 관리하고 비판하고 해고하면 그들의 피고용자들은 때로는 이해할 만하게도 그들을 싫어하게 된다.”


사회주의자 또는 페미니스트는 파워페미니즘이나 다른 어떤 종류의 중간계급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 부르주아 페미니즘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고, 이에 대한 볼셰비키의 대응방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유익하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방법을 제시했다. 1909년에 나온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반’이라는 팸플릿에서 노동계급 여성과 지배계급 여성들이 그들이 일정한 경험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왜 동맹을 맺을 수 없는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남성들의 세계가 나뉘어져 있듯이, 여성들의 세계도 두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 그룹의 이해와 열망은 그들을 부르주아 계급에 가깝도록 만든다. 또다른 그룹은 프롤레타리아와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은 여성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 두 진영이 모두 “여성해방”이라는 일반적인 슬로건을 따르지만 그들의 목적과 이해는 다르다. 이 두 그룹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들 계급의 이해와 열망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이 그들이 스스로를 위해 설정한 목표와 과제에 계급적 색채를 띠게 한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기반에서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 싸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근본적 변화 없이 여성해방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맑스주의자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저없이 거부해야 할 페미니즘의 두번째 계파는 분리주의인데, 비록 1970년대 이후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들은 모든 노동계급 남성들이 모든 지배계급 남성들과 함께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체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성차별의 시스템을 묘사하는 현재 사용되는 가부장제라는 용어와는 대비되게 분리주의는 인종주의를 비롯한 다른 모든 종류의 억압보다 여성 억압을 우위에 두었다.


예를 들면, 수잔 브라운밀러(Susan Brownmiller)는 그녀의 1975년 저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Against Our Will: Men, Women and Rape)>에서 강간에 대해 분석하면서 1955년에 일어난 에메트 틸(Emmett Till)에 대한 린치에 대해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결론에 도달했다. 14살의 (흑인 소년) 틸은 그해 여름 흑백분리 정책을 시행하고 있던 미시시피에 친척을 만나러 갔다가 십대의 장난기로 캐롤린 브라이언트라는 백인 기혼 여성에게 휘파람을 부는 “범죄”를 저질렀다. 틸은 고문 끝에 총에 맞아 살해되어 탈라하치 강에 버려졌다.  


틸이 린치를 당해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운밀러는 틸과 그를 살해한 자가 권력을 공유했다면서 공공연한 인종주의적 주장을 했다. “틸의 케이스만큼 분명하게 여성을 차지하려는 남성들간의 적대감을 드러낸 것은 없다 …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백인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것에 대한 검열이었다”


페미니즘의 다른 계파들은 가지각색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일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받아들인 이중체제 이론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모두의 분석을 혼합하려고 시도했지만, 이 두가지 서로 병렬적인 구조 사이의 내재적인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다. 하나는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서 자본주의에서 그들의 공동의 적에 대항해 같이 싸우는 것이 필요한 반면,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계급의 남성으로 구성된 가부장제 하에서 모든 계급의 여성이 그들의 공동의 적에 대항해 싸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의 제 3세대 페미니즘(Third Wave Feminism)은 반(反) 인종주의와 LGBT(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투쟁들에 똑같이 중요성을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가부장제 이론을 더 우위에 두지 않았는데, 이는 엄청난 전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제 3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체제에 도전하는 투쟁을 건설하기보다는 라이프스타일과 언어의 변화에 주력하는 개인주의와 투쟁에서의 후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덫에 빠졌다.    




페미니즘의 계파들 중 가장 적은 관심을 받아온 것이 바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인데, 나는 이들이 지난 몇십년간 여성억압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했는지를 이제서야 깨닫고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전선에서 홀대를 받아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 포스트모더니스트 페미니스트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 페미니스트들이 일원론(맑스주의)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이들의 공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시에 그들은 그들이 단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포함한) 많은 맑스주의자들에게 무시를 당했다. 그들은 이제서야 겨우 합당하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그룹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도움이 되는 노동계급의 재생산에 있어서의 역할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해를 발전시키고 확장시켜 왔다. 맑스가 자본론에서 사회적 재생산 - 즉, 세대를 거쳐 자본주의 전체 체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과정들 - 의 역할에 관해 설명한 기본 개념들을 받아들여 리즈 보글 (Lise Vogel) (그녀의 책 <맑스주의와 여성억압>이 Historical Materialism과 헤이마켓 출판사에서 곧 재발간될 것이다 — 2014년 1월에 재발간됨. - 역자 주)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맑스의 필요노동의 개념을 이용해 가사노동의 역할을 처음으로 심도깊게 이해하고 발전시켰다.


나는 또한 마사 지메네즈 (Martha Gimenez)가 기여한 것도 언급하고 싶은데, 그녀는 수십년에 걸쳐 여성 억압에 맑스주의를 적용해 왔다. 보글처럼 지메네즈는 다른 페미니스트들과의 여러 중요한 논점에 대한 논쟁에 기여를 했다. 여기에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남성에 대한 기여가 아닌 자본에 대한 기여로 보았으므로 맑스주의는 환원주의'라고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2005년에 지메네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하에서 생산방식이 재생산방식을 결정하고 그 결과 여성과 남성 사이에 분명한 불평등한 관계가 있다는 개념은 일종의 경제주의나 계급환원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닌 자본축적에 의해 움직이는 생산방식이 남녀관계의 복잡한 네트워크에 미치는 거시적 영향을 인지하는 것이다. 

생산의 조직과 재생산의 조직간의 "상호작용을 가정하거나 또는 후자에 우선권을 주면서 이와 다르게 주장하는 것은 문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재생산이 생산에 종속되는 것을 입증하는 압도적인 증거들에 대한 이론적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억압에 관한 맑스주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맑스주의가 여전히 살아 숨쉬며 발전하는 이론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심화되는 맑스주의와 페미니스트 이론은 또한 여성 억압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실천의 잠재력을 더 깊게 하고 넓히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맑스주의와 페미니스트 이론뿐 아니라 맑스주의와 페미니스트 실천이 필요하다는걸 강조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 실천은 혁명정당 건설과 연결되어야 하는데 왜냐면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 없이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이 자동적으로 여성을 해방시키지는 않아도 여성 해방을 위한 물질적 기반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볼셰비키적 전통에서 그것은, 모든 면에서의 혁명적 과정을 통해 혁명가들이 위로부터의 억압뿐 아니라 노동계급 내에서의 억압에도 맞서 싸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데 있다. 이 과정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맑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다. “따라서 혁명은 필수적인데 이는 자본가계급이 다른 방식으로는 타도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본가들을 타도하는 계급은 오로지 혁명을 통해서만 모든 낡은 악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에 적합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혁명가의 구실이 필수불가결하다면 우리는 노동계급 내의 성차별주의에 맞서 싸우는 데 있어 부딪히는 도전들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에 기반해 여성해방을 위해 노동계급 전체의 힘을 모으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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