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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잼버리/김은경/주호민/서이초/러시아/스페인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8. 11.

전지윤

잼버리 사태 속에 생각하게 되는 문제들

잼버리 사태에 대해서 많은 비판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걸 이용해서 윤석열 정부와 우파들은 역시 여가부는 폐지해야 한다는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 정말 말도 안 되는데, 이번 사태는 정부 부처 중에서 가장 적은 예산과 인력이 주어지던 여가부를 무시하고 없애려던 윤석열 정부가 막상 문제가 생기자 여가부 뒤에 숨는 극강의 비겁함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로 물러나야 마땅했던 이상민같은 힘있는 부서 남성 장관들의 총알받이가 된 것을 보면서, ‘여가부를 없애려고 왔다는 김현숙 장관이 이토록 안쓰럽게 보이기도 처음이다. 또 일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이번 사태에서 봐야할 것은 새만금 갯벌과 생태계 파괴의 결과뿐 아니라 기후 위기의 심각성인 것 같다.

가장 폭염이 심각한 시기에 이런 행사를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서 보니까 원래 잼버리는 매번 이 시기에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 위기로 이제 이 시기 절정의 여름 폭염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 다시 찾아보니 잼버리의 원래 취지가 청소년들이 모여서 함께 야영을 하며 어려운 것을 이겨나간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보니 잼버리는 보이스카우트가 시작한 행사였다는 것과 아주 옜날 어렸을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만해도 보이스카우트는 초등학교의 같은 반에서도 제일 집안이 넉넉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들만 하는 것으로 보였다.

당시에는 비싼 단복을 따로 입고 자기들간의 경례를 하고 계급도 정해진 모습이 왠지 멋있고 부러웠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식으로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규율을 부과하고 극기훈련을 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이었을까.

더 찾아보니 보이스카우트는 원래 영국이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을 때 규율있는 애국소년을 일종의 소년병과 척후병으로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됐던 것이라고 한다. 이제는 남성중심적이고 호모포비아를 부추긴다는 비판 속에서 여러 차별들을 없애고 초기의 이런 성격이 거의 사라졌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런 기구와 행사들이 필요한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잼버리 사태를 포함해 지난 2년 동안 윤석열 정부에서 그것이 무엇이든 제대로 준비하거나 대처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수습도 못하고, 책임을 전가하면서 꼬리 자르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과 기억이 참 많이 떠오른다. 사실 윤석열같은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있는 경직된 조직은 우리 사회 곳곳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단지 개인적 특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동안 살면서 그런 크고 작은 조직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적이 있다. 그런 조직은 먼저 가장 권위있는 최고 지도자가 발언권을 독점하게 된다. 여기서 토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그 지도자의 의견을 듣는 자리가 된다. 회의를 하면 그 사람이 절반 이상을 발언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다른 구성원들도 어떤 이야기가 그 사람이 듣고 싶은 이야기일까 계속 눈치를 보게 된다. 따라서 비슷비슷한 의견들이 반복된다. 자기 주장을 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혹시 지도자가 생각하는 방향과 어긋나는 말이 아닐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수동적으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마음 편하기에 누구도 책임을 지고 결정을 하기를 꺼리게 된다.

따라서 비록 형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 모든 결정은 가장 권위있는 지도자의 뜻을 따르게 된다. 구성원 중에 일부는 이건 뭔가 아닌데하면서도 드러내서 말을 하는 것을 꺼리고, 어떤 결정이든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확신을 가지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기에 실수나 실패로 이어지기가 쉽다.

그러면 누구도 진정한 결정권이 없고, 위의 눈치만 보는 구조에서 제대로 대처하고 수습하기도 어렵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역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실제 어떤 결정이 내려지는데 가장 큰 구실을 한 지도자가 등장해서, 위쪽의 눈치와 심중을 살피며 형식적으로 결정을 내렸을 뿐이 중간, 하급 간부를 질타하며 책임을 묻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대부분의 구성원들도 다같이 그 사람을 비판하며 힘을 보탠다. 결국, 실제로는 결정권이 없었던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고 잘려나가고, 사태를 규명하고 책임을 문책하는 과정에서 지도자의 권위는 더욱 높아진다. 구성원들은 더욱 더 지도자의 눈치를 보면서 수동적으로 영혼없이 눈치보며 일을 하게 되고 더 많은 사고와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작은 잘못은 더 큰 잘못들로 발전한다.

이것이 지금 윤석열 정부 꼭대기와 이 정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본다. 더구나 윤석열은 검찰, 감사원, 경찰, 국정원, 금감원 등과 주류언론까지 꽉 잡고 있으니 누구처럼 멸문지화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눈치보면서 납작 엎드린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만약에 코로나 사태가 윤석열 정부가 집권하는 시기에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새로운 팬데믹이 닥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상상하기도 두렵다.

더 본격화하는 김은경 신상과 영혼 털기

또 시작됐다. 김은경 민주당 혁신위원장을 노인 폄하라는 프레임을 짜서 괴롭히던 이들이 신상과 영혼 털기를 통한 인격살해를 더욱 본격화하고 있다. 김은경 위원장의 배우자가 어떻게 사망했는지, 시부모나 시댁과 관계가 어땠는지, 부부관계나 가족관계는 어땠는지가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다. 또 가족까지 불려나오고 있다.

그 내용 하나하나가 알고싶지도 않지만, 누구라해도 결코 공개하고 싶지 않은 가슴아프고 내밀한 사적 개인사들이다. 여성의 사생활을 공공재로 여기는 관점이 이토록 투명할 수 없다. 더구나 여성은 현모양처로서 끝까지 시부모를 봉양해야 한다’(왜 그래야 하나?)는 전형적인 낡은 가부장적 관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지난 대선 때 기득권 우파와 주류언론에 의해서 민주당 조00 공동선대위원장이 당했던 소름끼치던 인격살해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다. 이것은 공인에 대한 검증과도 무관하고, 김은경 위원장은 그저 임시직일뿐이고 무슨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하려고 나선 것도 아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반면, 지난 대선 때 윤석열 지지선언에 동참해 놓고도 갑자기 ‘1000만 노인의 공정한 대표자인척 하며 김은경 위원장에게 폭력적 갑질을 한 김호일 대한노인회장에 대해 검증하거나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듣기도 어렵다. 지금 대한노인회 홈페이지 대문을 가보면 김호일과 윤석열이 나란히 서서 웃고 있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 카르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안 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주류언론이 앞장 서 가족과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리고 만다는 법칙은 다시 확인되고 있다. 김은경 위원장은 무슨 급진좌파 정당을 돕겠다고 나선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저 자유주의적 야당을 상식적 수준에서 혁신하겠다는 시도조차 윤석열 정부와 기득권 우파들에게는 거슬리고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김은경 혁신위는 매우 후퇴한 혁신과제들을 제시하며 조기 종료한다고 한다. 사사건건 온갖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던 주류언론들의 보도 속에는 또 우리가 이겼다는 만족감이 느껴진다.

이 과정에서 이해하기 어렵고 어처구니없는 것은 개혁언론들의 태도다. 오늘도 한겨레는 노인 폄하로 설화만 일으키며 민주당의 위기 요인만 가중시키고 도덕성 논란까지 휩싸인 혁신위가 개딸들의 요구만 대변하다가 조기 종료한다는 식의 기사를 또 내보냈다.

이러한 족벌언론과 개혁언론의 이구동성합창이 중요한 이유는 그럴 때 진정으로 마녀사냥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노인 폄하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됐다. ‘삼인성호’, 즉 세 사람이 다 호랑이를 봤다고 우기면 결국 없던 호랑이가 만들어지는 현상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다.

바로 이런 메커니즘이 조국 교수 가족을, 윤미향 의원을 파렴치한 위선자들로 만들려던 족벌언론의 시도를 완성시켰고, 윤석열과 한동훈을 공정과 상식의 대변자로 만들었고, 검찰 개혁과 언론 개혁을 문빠들의 요구라고 낙인찍었고, 윤석열 정부 탄생을 가능하게 했고, 지금의 각자도생 사회를 앞당겼다.

우리 모두 주호민 작가의 자녀에게 사과해야 한다

서이초 교사의 비극을 일부 주류언론들이 주호민 마녀사냥으로 변질시킨 이후에 보게 된 글 중에서 가장 인상깊고 마음을 뒤흔든 글이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가 직접 쓴 글인데, 냉소적 반어법으로 구구절절이 지금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지만, 특히 2가지 대목을 읽는 동안에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기 어렵다. 첫째는 장애인을 낳은 것이 주호민 작가의 죄라고 지적하는 대목이고, 둘째는 주호민 작가의 자녀에게 이런 빌어먹을 세상을 만든 어른들의 하나로 사과하는 대목이다.

“당신이 저지른 실수는 진짜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는 거야. 당신이 저지른 죄, 그리고 나도 저지른 바로 그 죄. 당신은 장애 아이를 낳았다는 죄로 심판 받고 있는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방지게 비장애인들의 권리를 넘본 죄. 당신은 감히 선을 넘었어. 설마 장애인을 배려하고 함께 산다는 그 새빨간 거짓말을 믿은거야? 그 말은 자신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함께 살 수 있다는 뜻이야.,, 마지막으로 00야. 그 수많은 댓글 중에 아무도 너를 걱정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없더구나. 아저씨가 사과할게. 진심으로 미안하구나. 우리 어른들이 이런 빌어먹을 세상을 만들어서 정말 미안하다. 우리를 용서하지 마라.” https://bit.ly/3OI0WZw

물론, 어떤 사람들은 냉소적이고, 반어적이고, 심지어 욕설까지 섞인 이 글이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가 이런 글을 쓰게 된 그 심정과 분노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왜 이 사건 속에서 장애 아동 교육에 대한 시설과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 대한, 장애 아동을 키우는 부모들이 직면한 지옥같은 현실에 대한 지적은 볼 수 없는가?

여기저기서 혐오, 낙인, 격리, 감금의 해법만 튀어 나오고 있다. 경기도 임태희 보수교육감은 교육을 방해하는 금쪽이와 부모에 대한 분리 처분을 들고 나왔다. 서이초 교사의 비극적 죽음은 이제 장애 아동과 그 부모들을 괴물로 몰아가는 것을 통해 해결책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아동을 자녀로 둔 부모가 절망과 분노로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문재인 정부 때 이뤄진 변화 중에서 좋게 보는 것 중에 하나가 안전안내 문자인데, 특히 그 지역에서 실종된 사람들을 같이 찾아달라는 문자가 좋았다. 하루에도 3~4번씩 날라오는 그 문자 중에서 대부분이 (아마도 치매를 가진) 70~80대 노인분들을 자녀가 찾고있는 경우인데, 간혹 20~30대인 사람도 실종된”, “배회중이라며 “000를 보면 알려달라는 문자가 온다. 지적장애나 발달장애인 자녀의 실종을 부모가 신고한 경우일 것이다.

그런 문자를 보면 많은 이들은 누군가를 애타고 찾고있을 부모나 가족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한편, 하루에도 3~4번이나 오는 그런 문자를 보면서, 치매나 장애를 가진 이들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는 이 사회의 문제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제, 그런 이들과 그 부모들을 괴물로 몰아서 사회에서 격리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게, 윤석열 집권 2년째 접어든 우리 사회와 주류언론이 만들고 있는 세상이다. 우리 모두 주호민 작가와 특히 그 자녀에게 사과해야 한다. 용서받을 자격은 없지만...

만인의 만인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 키워가는 각자도생 사회

서이초 교사의 비극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교사와 교육이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 많은 논의와 대안 제시가 이뤄지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면서 입시경쟁이 치열하고 부모의 학벌이나 소득이 더 높은 지역일수록 더 악성민원이 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것은 입시경쟁과 학벌과 시험성적에 따라 줄 세우는 능력주의 등이 구조적 배경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런 구조적 문제에 대한 고민과 해결이 아니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낙인찍고 공격하는 흐름도 있다. 하나는 맘충맘카페를 겨냥하는 여성혐오적 공격이다. 남초카페에서는 ‘92년생 김지영들이 엄마가 되더니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조선일보는 맘카페에서 갑질을 주도해 지역 소아과들을 폐원시켰다는 기사를 실으며 이런 분위기를 더 부추겼다. 하지만, 교사들과 소통하면서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여성인 것은 성별적 특성이 낳은 결과가 아니다.

가족 중에서도 여성들이 전적으로 육아와 양육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낳은 결과일 뿐이다. 이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거의 바뀌지 않고 있다. 예컨대 금쪽같은 내새끼같은 방송을 봐도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은 남편, 아빠의 책임과 자리이다.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은 언제나 모두 아내와 엄마의 책임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방송은 모든 것이 내 탓 같다며 아이에게 미안해 하는 엄마의 눈물, 옆에서 위로하는 아빠, ‘죄인이 됐다가 오은영 박사의 처방을 받고 다시 일어서는 엄마로 마무리된다.

또 하나는 문제행동을 자주 일으키게 되는 장애아동이다. 발달장애나 자폐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동이 사고를 냈다는 기사가 뜨면, ‘저런 애들은 집이나 시설에 가두거나 특수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댓글들이 달리고 장애인 혐오적 막말들이 쏟아진다. 언론은 장애아동의 구체적 행동이나 신상정보, 가족관계들을 공개하는데 아무 주저함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도 장애아동들 자신이 문제가 있거나 잘못한 경우는 많지 않다. 교육의 본질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에 있고, 장애인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만들어진 사회에서 장애아동들이 차별과 편견을 뚫고서 이것을 배우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 교육을 위한 조건 마련과 지원에 무관심하던 사회는 문제가 생기면 장애아동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장애아동과 자기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들은 이중의 죄인이 돼서 또 온갖 혐오와 비난에 시달려야 한다.

이처럼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 비난하고 도려내려는 접근은 생기부에 그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대안을 불러내고 있다. ‘문제아들은 낙인을 찍어서 솎아내자는 이 대안에는 그 학생을 어떻게 교육하고 변화시켜서 공동체로 돌아오게 할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사회의 책임과 구조적 해법을 찾을 필요가 없게 해주는 대안이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 더 키워가는 각자도생 사회에 어울리는 대안이다. 사건과 사고만 생기면 정치인이나 연예인 개인들을 낙인찍으며 클릭 장사를 하는 조선일보나, ‘범죄자를 찾아내 엄벌을 외치는 윤석열과 한동훈이 이미 보여주는 방향이다.

이상민 탄핵 기각 무정부상태와 각자도생의 재확인

어제는 윤석열 정부가 등장하고 나서 2번째로 가장 슬픔과 분노로 가득찬 날이었다. 첫 번째는 1년 전에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던 1029일 그날밤이었다. 그 후로도 슬픔과 분노는 사라질 일이 없었지만, 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은 애타는 마음으로 탄원의 편지를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에게 보냈었다. 그 탄원 편지들을 모두가 읽어봐야 한다.

“그날 국가가 용산구청이 매년 해오던 대로 인파관리만 제대로 했더라면…그날 경찰들은 시민들의 119, 112신고에 제대로 대응만 해줬더라면…그날 그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만든 안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만 되었다면…그날 행정안전부장관은 매뉴얼대로 재빠르게 수습만 제대로 했더라면…그날 우리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있었다면…우리 가엾은 159명들은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청년들로 살아갈텐데”

그리고 유가족들은 재판장님 살고 싶습니다! 살려주세요! 이 땅에 소망을 갖고 살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절절하게 호소했다. 이것에 대해서 어제 헌법재판소는 잔인하고 분명한 답을 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려주고 싶은 것은 이태원에서 죽어간 159명의 생명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와 이상민 행안부 장관과 이 국가의 통치 질서라고 말이다.

역시나 사법부는 가장 보수적인 국가기구였고, 기득권 체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헌법재판소는 이태원 참사 이후에 아무런 반성과 사과도 하지 않고, 극우 정치인과 유튜버들을 앞장세워 유가족들을 죽도록 괴롭히던 윤석열 정부의 안전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윤석열이 임명한 인권위원은 피해자들이 몰주의해서 스스로 너무 많이 모였다가 참사가 났다고 했고, 인재개발원장은 이태원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축제를 벌이고자 하는 자들이라며 유가족을 모욕했다.

헌재 덕분에 윤석열 정부는 이번 수해 속에서 일어난 오송 참사와 수십 명의 죽음에 대한 책임도 아주 맘편하게 비켜갈 수 있게 됐다. 이미 윤석열은 검찰을 동원해 말단 경찰들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면서 책임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한다던 말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 책임은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감독한 자신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시키는대로 한 하수인들에게만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제 윤석열은 거꾸로 이상민 탄핵 시도가 반헌법적 행태였다며 탄핵소추권 남용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며 큰소리치고 있다.

극우유튜버들은 어제 현장에서도 또 막말과 조롱을 하며 유가족들의 상처에 칼을 쑤셔 박았다. 살아돌아온 이상민은 참사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목소리를 소모적 정쟁이라고 뻔뻔하게 규정했다. 길거리에서 수백명이 죽어도 국가의 책임은 없다는 각자도생 사회에서 우리가 살기 위한 유일한 길은 윤석열 정부를 몰아내는 것 밖에 없어 보인다.

전쟁에 반대한 러시아 카갈리츠키와 모든 양심수들을 석방하라!

러시아의 좌파적 사회학자인 보리스 카갈리츠키Boris Kagarlitsky가 구속될 위험에 처했다. 지난 725일에 푸틴의 연방보안국(FSB)은 카갈리츠키를 테러리즘 정당화라는 이유로 고발했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일뿐이고 진정한 이유는 그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면서 러시아 정부와 푸틴을 비판해 왔기 때문이다.

현재 구금중인 카갈리츠키는 재판 결과 7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한다. 지금 전세계에서 수많은 좌파 단체와 활동가들이 카갈리츠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연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가 수십년간 수많은 책을 내고 활발한 주장을 제시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그가 쓰거나 공저한 책이 여러 권이 나와있다.

내가 기억하는 카갈리츠키는 91년 소련 몰락 때부터였다. 소련 몰락에 대해서 보수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좌파적인 분석을 하는 아주 드문 러시아의 사회주의자가 카갈리츠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내가 신봉하던 국가자본주의론과 달랐기에 곧 그에 대한 관심은 멀어졌다.

정답에 대한 신봉에 회의를 느끼면서부터 러시아에 대한 카갈리츠키의 분석과 주장들을 더 열린 마음으로 듣게 됐다. 그러다가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러시아 국가주의와 푸틴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그의 용기와 분석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됐다.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해 국제적인 좌파의 혼란과 국내에서도 심지어 좌파의 이름으로 푸틴을 변호해주는 학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카갈리츠키의 분석과 주장은 도움이 됐다. 특히 카갈리츠키는 그런 혼란을 단지 욕하지 않고 설명하려고 했다.

“글쎄, 나는 미국인들이 모든 종류의 장소에서 끔찍한 일을 많이했기 때문에 왜 이런 의견이 나오는지 이해한다.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또는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경우 러시아보다 미국 제국주의와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러시아 제국주의는 주로 구소련 국가들의 문제이다.”

즉 미국 제국주의에 당한 경험이 많은 나라의 좌파들이 혼란을 겪는 것은 이해할 측면이 있고, 반면 그런 좌파들도 러시아 제국주의에 고통을 당한 민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충고였다. 동시에 그는 푸틴의 침략 행위가 미국 제국주의를 강화하고 있다는 역설을 지적하며 좌파의 혼란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옳지 않다. 푸틴의 전쟁이 객관적으로 미국제국주의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전쟁은 나토를 강화, 확장하려는 사람들에게 이유와 논거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카갈리츠키는 전쟁 종식을 핑계로 우크라이나 민중에게 러시아에 대한 항복과 영토 양보를 요구하는 좌파들을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민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영토 양보나 국경 수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 이것이 원주민이 스스로 선택을 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식민주의적 사고의 전형적인 예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카갈리츠키는 이 전쟁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무기 지원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했다. 그는 “1917년 차르 정권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은 혁명가가 아니라 전쟁에 갈 의향(능력)이 없는 후방 부대에서 나왔다고 했다. 사실 아무리 서방의 지원을 받아도 우크라이나가 군사력으로 러시아를 이기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웠다.

그 점에서 무슨 스포츠 경기 중계하듯이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과연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을까 관람하는 사람들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카갈리츠키가 과거부터 일관되게 푸틴을 비판하거나 소수민족의 저항을 지지하지는 않았다는 비판은 존재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카갈리츠키가 억압과 침략을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지식인이기 때문에 카갈리츠키가 주목받고 있지만, 이미 수많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반전 반푸틴 입장 때문에 지독한 탄압을 겪어 왔다. 따라서 카갈리츠키와 러시아의 모든 양심수와 정치범들은 모두 당장 석방돼야 한다.

Freedom for Boris Kagarlitsky! Freedom for all Russian political prisoners!

안도의 한숨을 나오게 하는 스페인 총선 결과

스페인 총선 결과는 매우 다행스럽다. 우파인 국민당과 극우 신나치 복스등 우파들은 합쳐서 171석을 얻었는데 이것은 집권 연정 구성을 위한 176석에 미달한다. 물론 중도좌파인 사회노동당과 급진좌파 연합인 수마르 등의 좌파들도 합쳐서 171석을 얻었다.

하지만 다른 군소 민족주의(카탈루냐와 바스크) 정당들과 합쳐서 연정을 구성해 재집권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파연합은 노골적으로 소수민족 억압을 주장했기에 군소 민족주의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결과가 반가운 것은 집권 좌파연합 정부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대패하면서 우파연합으로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극우 신나치 정당인 복스의 급부상이었다. 반이민, 혐오정치, 반페미니즘, 트랜스포비아를 선동하면서 프랑코 독재를 찬양하는 복스가 집권 연정에 참여할 가능성은 심각한 실질적 위협이었다.

이것은 이미 극우익 신나치가 집권당이 된 이탈리아와 연정에 참가하게 된 그리스, 스웨덴, 핀란드와 함께 유럽에서 인종주의적 신나치들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는 공포를 불러왔다. 스페인 총선 직전에 이탈리아의 극우익 총리인 멜로니는 이제 애국자의 시간이 왔고 유럽의 힘의 균형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며 기세등등한 자신감을 보였다.

반면 그리스에서 시리자와 스페인에서 포데모스가 보여 준 실패는 유럽에서 급진좌파들의 위기를 상징했다. 영국 노동당만이 예외이지만, 스타머 대표가 제레미 코빈으로 상징되는 좌파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우경화하는 것을 통해 집권하려는 모습은 우울한 측면이 컸다.

하지만, 스페인 총선 결과는 희망을 남겨주고 있다. 비록 집권 좌파연합 중에서 급진좌파가 쇠퇴하고 중도좌파가 성장하긴 했지만 전체적 지지율과 의석수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2019년 말에 집권한 이후 좌파연합 정부가 추진한 최저임금 인상, 공공주택 확대, 성평등, 트랜스젠더 권리 확대 등의 개혁들이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코로나 비상상황과 고통이 불만과 어려움을 낳기는 했지만, 경제적 회복 속도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함께 좌파연합 정부를 구성했던 포데모스는 사실상 해체되다시피 했지만, 대신 수마르라는 새로운 급진좌파 연합이 그 공백을 일부 메웠다.

공산당 소속이며 노동부 장관인 욜란다 디아즈가 수마르를 이끌며 주32시간 노동제, 23세부터 2만 유로의 기본자산 지급 등을 약속했다. 위기에 처한 급진좌파들이 정치적으로 후퇴하거나 소멸하는게 아니라 급진적 노선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좌파들의 연합 시도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반갑다.

물론 이번 총선 결과가 어느 쪽도 분명한 승리라고 말하기 어려운 아슬아슬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좌파 연정 구성이 실패한다면 재선거로 갈 가능성도 존재한다. 한때 전세계 급진좌파들의 희망과 모델을 제시한다고 여겨졌던 포데모스의 실패와 해체도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이들이 포데모스가 초기의 급진성과 독립성을 잃고 연립정부에 참여하면서 실패했다고 평가하지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고 본다. 지금의 상황은 포데모스가 연정에 참가하면서 더욱 극심해졌던 스페인 경찰, 검찰과 사법부의 공격과 탄압을 빼놓고 말하기 어렵다.

프랑코 독재 시대에 기반이 다져진 이 억압적 국가기구들은 급진좌파가 국가권력에 접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청과 사찰을 하며 거대언론들과 손잡고 포데모스를 파렴치한 위선자와 범죄자집단으로 만들기 위한 총력 공세를 펼쳤다. 이것은 상당 부분 성공했고, 그것이 낳은 냉소와 환멸을 이용해 복스같은 신나치 극우익이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포데모스가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운동이라는 대중적 투쟁과 목소리를 민주적으로 대변하면서 의회정치와 연결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한 점은 있다. 하지만 급진좌파들이 분열해서 각개약진할 것인가 어떻게든 연대와 연합을 유지할 것인가, 중도세력이 주도하는 연립정부를 밖에서 비판만 할 것인가 참여해서 변화를 만들어낼 것인가는 여전히 남는 문제다.

이 모든 것은 한국에서도 직면하고 고민할 문제다. 한국에도 독재시절에 그 기반이 다져저 어떤 좌파적이고 개혁적인 요소도 싹을 잘라버리려고 하는 검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들과 족벌언론의 카르텔이 강고하고, 다당제와 연립정부가 아니기에 국민의힘 내부에서 극우익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급진좌파의 분열과 위기는 더욱 심각하기 때문이다.

(기사 등록 202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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