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영화 <인터뷰>를 둘러싼 소동은 여러 가지로 희비극적이었다. 사실 헐리우드가 김정은 암살 영화를 만든 것은 그만큼 북한이 국제적으로 고립된 가난하고 힘없는 독재국가라는 점을 보여 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소니영화사가 돈에 눈이 멀었어도, 한 나라의 최고권력자를 정신나간 난봉꾼으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암살해 죽이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의혹 제기만으로도 ‘국민에 대한 모독’이라고 난리를 치며 산케이 지국장을 기소했던 박근혜 정부를 떠올려 봐도 말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 미국 우파의 관점은 매우 역겨운 것이다. 영화 감독인 세스 로건은 “이 영화의 해적판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했다.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은 소니사 회장에게 보낸 메일에서 “[이 영화 덕분에] 한국에서 실제로 그런 구상(김정은 암살 시도)을 시작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이들은 미국이 벌여 온 제국주의적 학살과 침공을 지지해 온 자들이기도 하다.(세스 로건은 올해 이스라엘의 학살에 대한 공개 지지 서명을 했었다.) 이 자들은 미국의 군사력과 CIA가 북한 민중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다. 망상에 그치고 있지도 않다.
원래 흥행하기 힘들었을 이 영화는 북한 해킹설이 나오면서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원인을 찾기 어렵고 책임을 돌리고 싶을 때 ‘북한 해킹설’을 꺼내는 것은 이제 미국 정부도 애용하는 수법이 됐다. 오바마는 이를 빌미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다시 지명할 수 있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박근혜에게 ‘종북’이 우파 결집과 진보 이간질을 위한 꽃놀이패라면, 오바마에게 북한은 중국 포위와 한미일 동맹 구축을 위한 꽃놀이패다. ‘핵을 보유한 독재국가인 북한’이란 핑계가 없었다면 ‘한미일 군사정보공유 약정’이 이처럼 일사천리로 발효되긴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 미국은 MD 구축을 향해 더 성큼 전진하게 됐다.
이명박 말기 때 큰 반발 속에 중단됐던 한일 군사정보 교류는 이제 약간 형태를 바꿔서 실행되게 됐다. 단지 모양을 바꿨기 때문만은 아니다. 반제국주의와 한반도 평화 문제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정치 세력의 입이 막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통합진보당은 이제 해산됐고, 자주파는 ‘종북’이란 멍에에 눌려 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3권 분립
진보당 해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헌법재판소는 자본주의 국가와 3권 분립의 본질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그들은 우리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부분의 정당과 의원들은 자신들을 선출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소수 특권세력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나마 그 특권세력을 공격해 온 진보적 정당과 의원들은 국회 안에서 잘 보이지도 않더니, 이제 헌재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 선출된 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한 헌재 재판관들은 선출되지 않은 진정한 권력자들이다. 현재 구조에서는 이 재판관 9명중 8명을 집권여당과 대통령 쪽 사람으로 구성할 수 있다. “국가의 실질적인 업무는 막후에서 진행되며, 의회에는 잡담이나 늘어놓는 업무가 맡겨졌다”는 레닌의 지적이 정말 실감난다.
헌재는 87년 6월 민주항쟁 끝에 헌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헌재는 6월 항쟁으로 뒤로 물러선 지배자들이 만들어 놓은 보루라고도 볼 수 있다. 기층의 압력에 좀 더 민감한 의회 등에서 개혁 입법과 정책이 추진되더라도, 사법부에서 제동을 걸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3권 분립’의 진정한 효과는 여기에 있다고 지적해 왔다.
“헌법 해석이 그것을 제정한 사람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만의 차지라는 것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였던가? 헌법의 조문은 살아있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며, 부르주아적 의미만이 헌법의 유일한 살아있는 의미라는 점을 파악하지 못하였던가?”(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이 결정은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흔드는 헌법 파괴와 우리 사회를 혼동에 빠트리는 것을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헌법 수호 의지를 담은 역사적 결정”(박근혜)
이 결정으로 우파는 다시 결집하고 있고, 이를 대대적인 공격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일보> 김대중은 “미국도 나라의 안보를 해치는 일이면 고문도 하고, 도청도 하고, 추방도 한다”며 “헌재의 결정으로 모처럼 국민이 내쉬는 안도의 숨소리를 박근혜 대통령은 놓치지 말고 포착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라고 코치했다.
안 그래도 박근혜 정부는 이 결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헌재 결정 다음날 있었던 ‘코리아연대’ 등에 대한 대대적 압수수색은 명백히 장경욱 변호사를 겨냥한 공격 개시였다. 장경욱 변호사가 ‘코리아연대’가 연관된 국제 행사에 참석해 북한과 접촉했다는 논리다. ‘종북몰이’와 간첩조작에 가장 큰 파열구를 내 온 장경욱 변호사에 대한 이 정권과 국정원의 증오심은 감추기 힘들 정도다.
진보당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예고, 민주주의를 짓밟고 공안기관에 날개를 달아주는 온갖 입법 예고 등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북한에 대화를 제의한 것은 7.4남북공동성명과 유신체제 선포를 병행했던 박정희 흉내처럼 보인다.(박정희의 손을 잡으며 주체사상화를 추진했던 북한은 이번에도 ‘박근혜의 진정성을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다. 헌재 판결 직후 정부에 ‘개기기’ 힘든 분위기 속에 한국노총 지도부는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노사정 합의’틀에 들어갔다. 다음날 박근혜는 “노동시장 개혁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로 이 벽을 넘지 못하면 우리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도 어려울 것”이라며 노동자 공격 명령을 내렸다.
비리 재벌총수들이 곧 가석방될 것이라는 소문도 커지고 있다.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던 진보·노동운동 세력이 더 위축되면 개별 기업주들도 더 양보하지 않거나 공격적인 자세를 취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이석기 의원과 한상균 위원장
특히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다시 후퇴할 가능성이 우려된다. 2심에서 ‘RO는 실체가 없고 내란음모는 무죄’라는 판결이 나온 것은 원래 우리에게 유리한 기반이었다. 이 ‘반 발짝 전진’을 기초로 ‘내란음모는 무죄인데 내란선동은 유죄’라는 모순을 파고들며 단결해 싸우는 게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헌재 판결로 다시 우리 편이 두 발짝 뒤로 밀려난 셈이 됐다. 지배자들은 대법원에서 내란음모 2심 판결마저 뒤집으며 우리 편을 몇 발 더 물러서게 하고 싶을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우리가 단결해서 이석기 의원 등을 방어하며 대법원 판결이 2심보다 더 나은 결과가 되거나 적어도 후퇴하지는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헌재 진보당 해산 결정의 기초를 일부 허물 수 있을 것이다. 헌재 판결로 두 발짝 후퇴한 것을 일부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 전대통령 카터조차 이석기 의원 구명에 나섰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이 가능성이 어둡게 보인다. 진보진영에서마저 다수는 ‘이석기 의원 등이 종북적 입장에서 폭력적 행동을 추구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석기 의원 등과 선을 긋지 않은 게 진보당의 실책이며 이제라도 그렇게 하라’는 평가와 조언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내란음모는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안 보기 때문이다.
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진보당과 거리를 두고 선을 긋고 있다. ‘진보당 해산규탄 원탁회의’에는 진보진영의 원로 분들은 많지만, 막상 진보·노동운동의 주요 기층 세력들은 들어와 있지 않고 행동도 확대되지 않고 있다. 진보당, 이석기 의원과의 정치적 차이점을 밝히거나 비판적 의견을 말하는 것이 문제라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진보당 방어나 연대 행동에 소극적인 태도로 이어지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방어가 확대되지 않는 것에는 진보당이 스스로 자초한 점이 있다는 주장도 근거는 있다. 진보당은 분명 우리 운동에 기여하고 헌신한 측면만이 아니라 잘못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앞으로도 지배자들은 정치적으로 결함이 있고, 많은 실책과 잘못을 범했고, 다른 정파에게 여러 상처와 앙금을 남긴 조직들을 탄압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누구나 완벽히 지지할만하고, 타 정파에게 어떤 오해와 악감정도 남기지 않은 조직이 지배자들의 탄압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그런 ‘누구나 지지하는 무오류의 순결한 조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꺼이 방어할 마음이 우러나는 그런 ‘결함이 없는 완벽한 조직’이 탄압받을 때를 기다릴 게 아니라 지금부터 함께 지배자들의 공안 탄압에 맞서야 하지 않을까? 말 몇 마디 때문에 10여년을 감옥에 갇히게 된 죄 없는 사람들을 구출해야지 않을까?
그 점에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당선자의 태도는 모범적이다. 한상균 당선자는 당선 확정 다음날 열린 진보당 해산 규탄 집회에 참가해서 함께 비를 맞으며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선거 과정에서 경쟁했던 상대방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정치 쟁점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이다. 이런 자세가 지속·확대되길 기대한다.
강력한 공세에 나서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의 모순은 여전하고 위기는 재발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한상균 지도부의 등장은 기층 노동자들이 강력한 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77일간의 옥쇄파업과 3년간의 옥살이와 171일간의 고공농성을 거치며 단련된 투사를 새로운 지도자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좌파적·투쟁적이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기층 노동자들의 조직과 행동을 건설해내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 맞설 뿐 아니라 민주당에 끌려다니다 뒤통수 맞지도 않는 노동운동, 작업장의 문제와 전국적 정치 쟁점을 연결시킬 수 있는 노동운동, 나아가 정치적 차이는 토론하면서도 공동의 적에 맞서 단결하는 노동운동이 돼야 한다. 정규직 – 비정규직의 단단한 단결로 결국 ‘진짜 사장이 나오게’ 만든 씨앤앰의 모범을 보라.
적이 크고 강력해 보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간에 벽을 쌓고 손을 놓은 채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벽을 허물고 손을 잡고, 더 이상 누구도 굴뚝이나 고공으로 몰리지 않는 세상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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