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 페레Marga Ferré
번역: 두견
전세계적인 극우 반동 세력의 득세를 기존의 전통적 관점을 넘어서 분석하려고 시도하는 글로서 한국 청년남성들의 보수화도 사례로 제시하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 글은 윤석열의 쿠데타 시도와 그것에 대한 거대한 저항을 분석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의 필자인 마르가 페레는 스페인의 여성 페미니스트이자 좌파 활동가로서 유럽의 진보적 활동가들의 네트워크인 '트랜스폼 유럽'Transform Europe의 공동 대표이다.
출처: https://transform-network.net/blog/analysis/the-far-right-a-reactionary-backlash/
나는 수년 동안 극우 세력에 대한 분석을 읽어왔지만, 극우 세력이 왜 그렇게 많은 지지를 받는지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분석은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 몇 달 동안 <파이낸셜 타임즈>에 실린 연구와 오래된 페미니스트 서적, 두 명의 역사학자가 쓴 저널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 세 가지를 함께 읽으면서 내가 여기서 제시하고자 하는 해답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극우의 부상은 정치적 불만의 표현도, 사회적 병리 현상도 아니며, 반체제 감정의 표현도 아니다. 지난 10년간 극우 세력의 성장은 백래시이며, 더 나아가 전 세계적인 백래시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백래시일까? 지형의 변화에 대한 반동이다.
역사는 변화했다
일부 학계의 역사학자들은 세계화의 가속화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역사의 개념 자체의 변화이며, 이는 극우파의 부상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들의 주장에 큰 영감을 받았다. 이들은 세계사가 인류가 '진보'를 향해 나아가고 나아가는 일련의 단계(심지어 이름과 시작 및 종료 날짜도 있음)인 선형적인 역사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유럽 제국들 때문에 역사는 서양의 역사로 이해되어 왔으며, 그 나무의 꼭대기 가지에는 선진국들(강대국, 제국)이 있다. 그 나라들은 기술과 진보의 비전(보통 '문명'이라고 말해지는)의 주인인 엘리트 백인 남성이 이끈다. 그 아래에는 그 발전 모델이 제시하는 경로 위에 있는 국가들과 다른 모든 하위 그룹이 있다.
내가 독자들에게 제안하는 휴고Hugo와 다니엘라 파지오Daniela Fazio의 글에 그들의 생각이 소개된 새로운 역사가들은 이러한 역사의 개념이 이제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아시아, 특히 중국의 부상은 서구 역사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해체하고 있다. 그러나 탈식민주의 메시지를 담은 페미니즘과 반인종주의의 등장으로 인해서 이러한 역사관이 훨씬 더 글로벌하고 다양한 역사관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해체되고 전환되고 있다.
그들은 세계사로서 세례를 받은 역사를 받아들였고, 젠더나 계급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명할 소중한 진실에 기초하여 그렇게 했다: 오늘날 서구의 신화가 훨씬 더 다양한 세계를 위해 해체되면서 현대사에서 과소 대표되거나 보이지 않았던 하위 집단이 새로운 리더십과 인식론에 대한 새로운 요구를 하며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더 이상 자신을 권위자로 보지 않고 따라서 자신의 권력 지위에 도전하는 세상에서 특권적 지위를 잃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극우는 바로 특권을 잃고 있거나 특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반발이다. 그것이 조종하는 감정은 노여움도, 분노도, 정치적 박탈감도 아닌 원한이다.
역사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상실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상처받은 나르시시즘에 호소하는 분개한 희생자화다. 군국주의와 전쟁의 부상은 그들 밑에서 지형을 바꾸고 있는 세상과 자신의 위치를 밀어내는 물결에 대한 폭력적인 반응의 일부이다.
제4의 물결
1990년대에 큰 영향을 미친 페미니즘 서적 중 하나는 <백래시: 미국 여성에 대한 선언되지 않은 전쟁>이다. 이 책의 저자 수잔 팔루디는 당시 여성의 발전에 대한 보수적인 반발을 고발하며, 이러한 반발은 여성이 완전한 평등을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평등을 달성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통찰력 있게 지적했다.
팔루디의 책을 통해 극우파의 부상은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첫 번째로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의 제4의 물결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장담하건대, 데이터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 1월 25일, 파이낸셜 타임즈는 많은 극우에 대한 분석가들의 머리를 폭발적으로 자극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기사는 한국, 미국, 독일, 영국에서 성별에 따른 청년의 투표율을 보여주었다.
이 연구는 (훨씬 더 진보적인) 젊은 여성과 (더 보수적이고 극우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젊은 남성의 정치적 태도 사이에 큰 격차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현상이 스페인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을 합리화하려는 이상한 시도들이 종종 나를 놀라게 한다. 여성이 더 '온건하다'는 주장부터 '이주민과의 접촉이 적다'는 생각 등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학계에 만연한 젠더에 대한 경시 없이도 이것이 전 세계를 휩쓴 제4 물결의 결과라는 것은 분명하다. 거의 10년 전, 이 물결이 등장했을 때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표현되고 세대 간 요소가 강한 대중 운동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이전의 페미니즘보다 더 반자본주의적인 페미니즘, 즉 가부장제의 역사적 역할을 무장 해제하고 평등에 대한 열망을 위한 싸움에서 승리한 페미니즘의 물결이었다. 극우파는 이러한 변화, 지배적인 남성이자 역사의 창조자인 가부장pater familias의 축출에 대한 폭력적인 반응이다.
여기서 나는 많은 분석이 마초주의와 인종주의를 도덕적, 문화적 태도로 축소하여 자본주의에서 이 두 가지 구조가 우리를 더 착취하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여성과 이주민의 노동력이 더 저렴하다는 자명한 사실은 이들의 분석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현실이 정반대인데도 데이터를 부정하고 여성과 이주민이 소수자라고 계속 주장하며 우리를 그렇게 취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저는 그들의 고집스러움에 감탄할 정도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분석적 맹목은 성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 불평등과 극우 세력의 성장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다시 말해 경제학적 정설이 이 현상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고한 거부감이 느껴진다.
만약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하지 않은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의 극우의 성공이나 불평등이 가장 극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극우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물론 경제적 상황이 극우 세력의 성장에 방아쇠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극우 세력의 원인은 아니다.
냉정한 경제학적 계량법은 원한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원한은 백래시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다. 이를 더 잘 이해하려면 한국의 극우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테레자 카펠라Tereza Capela 등의 훌륭한 연구(https://www.mdpi.com/2076-0760/12/5/259)를 읽어보면 결정적으로는 그들의 태도가 오로지 원한과 피해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반동적 속삭임
나는 훈련된 감각으로 그들이 제기하는 위협에 직면하여 극우파의 일부 주장을 달래려는 (유럽 좌파조차도 자유롭지 않은) 특정한 경향의 냄새를 맡는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세계적인 현상이다. 나는 우리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멀리 나갔다는, 우익으로 향하는 이 젊은 남성들의 요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한다는, 이민이 문제라는,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대량학살이 아니라는, 더 많은 무기를 사야한다는, 기후 위기가 그렇게 근본적이지 않다는 등의 주장을 속삭이듯 미묘하게 말하는 것을 듣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반대라고 주장하고 싶다. 극우에 대한 대항적 개념과 숙적은 바로 페미니즘, 특히 젊은 여성과 그들의 요구, 민족보다 계급이라는 개념, 평화, 다양성, 평등, 사회 정의, 연대, 생태, 공동의 세계를 옹호하는 것이다. 또한 서구의 편협하고 위계적인 세계관을 극복하는 관점으로 이들을 옹호해야 한다.
나는 극우가 우리 서발턴(억압받는 하층민)들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 에너지에 대한 반발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하지만 수잔 팔루디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이미 일어난 변화뿐만 아니라 미래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는 점도 경고하고 싶다. 그들은 변화를 막기 위해 변화에 난폭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극우 즉, 순수한 반동이다.
(기사 등록 20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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