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켈로그(Paul Kellogg)
번역: 두 견

러시아 혁명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뒤집고 재평가하는 또다른 글이다. 러시아 사회주의 지도자 율리 마르토프(Iulii Martov)는 1917년 이후 정치적 싸움에서 패배했지만, 소련 체제의 발전은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초기 비판이 정당했음을 입증한다고 것이다. 이 글의 필자인 폴 켈로그(Paul Kellogg)는 캐나다 앨버타주 애서배스카 대학교의 학제간 연구 교수다. 그는 <감옥 뒤의 진실: 러시아 혁명의 운명에 대한 성찰>의 저자이자 율리 마르토프의 <세계 볼셰비즘>의 번역자다.
출처: https://jacobin.com/2025/06/martov-russian-revolution-soviet-history
1917년 혁명 이전, 율리 마르토프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나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보다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에서 더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1917년 10월을 노동자 혁명으로 보았지만, 마르토프는 이를 대다수 농민으로 구성된 군인들의 봉기로 이해하며, 노동자의 대중적 참여가 부족하다고 판단해 신생 소련 국가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는 대체로 무시되거나 경멸의 대상이 된다.
마르토프는 1920년 10월 독일의 독립 사회민주당이 새로 형성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띠고 러시아를 마지막으로 떠난다. 뒤에 남은 그의 동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억압, 투옥, 죽음을 맞는다. 1923년, 마르토프는 49세의 나이에 독일에서 사망한다. 그가 앞서서 차르 치하에서 국내 유배 중 결핵에 걸렸던 것이 그의 생을 단축했다.
마르토프의 삶과 업적은 오늘날 훨씬 더 널리 알려질 가치가 있다. 일부는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이라 이름을 붙인 직후에 트로츠키가 내뱉은 기억에 남는 말을 떠올릴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가 속한 곳으로 가라 —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이 말이 마르토프와 그의 동맹인 멘셰비키 국제주의자들(멘셰비키 당 내 반전 소수파)을 향해,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에 항의하며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퇴장할 때 던진 말이었음을 아는 이는 적다.
마르토프가 대회장을 나서던 중,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역의 젊은 볼셰비키 노동자 이반 아쿨로프(Ivan Akulov)를 만난다. 목격자 보리스 니콜라옙스키(Boris Nikolaevskii)에 따르면, 아쿨로프는 마르토프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며 말한다: “우리는 마르토프라도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 말에 충격 받은 마르토프는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답한다: “언젠가 너희는 지금 참여하는 범죄를 이해할 것이다.” 아쿨로프는 1930년대 스탈린(Joseph Stalin)의 공포정치 속에서 수만 명의 사회주의자와 함께 사라졌다.
사회주의의 배달부
마르토프는 1873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나, 우크라이나 항구 도시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본명은 율리 오시포비치 체데르바움(Iulii Osipovich Tsederbaum)이며, 많은 러시아 혁명가처럼 가명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가장 흔히 불리는 이름이 된다. 짧은 생애 동안 마르토프는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수많은 기여를 했는데, 여기서는 그 개요만 간략히 다룬다.
1895년, 주로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거주지 빌나(오늘날 빌니우스)에서 유배 중이던 마르토프는 젊은 사회주의자 모임에서 메이데이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은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의 일반 유대인 노동자 동맹(분트)의 창립 이념 선언으로 역사에 남는다. 1890년대와 20세기 초반, '분트'는 러시아 제국 내 유일한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마르토프는 레닌, 알렉산더 포트레소프(Alexander Potresov)와 함께 러시아 제국 내 흩어진 좌파를 통합하기 위해 설계된 유명한 신문 <이스크라>(“불꽃”)를 창간한다. 그는 신문의 주필로서 레닌을 능가하는 실력을 보였고, 국경 경비를 피해 신문을 러시아 제국 도시로 밀수하는 조직에서도 전문성을 발휘했다.
그는 1911년 레닌과 볼셰비키가 은행 강도, 돈세탁, 위조, 지골로(호스트) 고용 등 비윤리적 자금 모집 방법을 사용한 것에 공개적으로 도전했다. 그의 팸플릿 <구원자인가 파괴자인가?>는 당시 논란이 되었지만, 이후에 그 사실과 분석은 모두 타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열렬한 반대자로서, 그는 트로츠키 등과 함께 망명지에서 발행된 일간지 <나셰 슬로보>(“우리의 말”)를 창간하며, 레닌이 당시 '유럽 최고의 사회주의 반전 신문'이라 고 부른 매체를 이끈다. 또한, 제2인터내셔널의 폐허 속에서 국제주의 좌파를 재구성하는 짐머발트 반전 회의를 조직하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1920년 폴란드의 침공에 맞서 러시아의 자기방어 권리를 지지했지만, 적군의 행동으로 폴란드를 “소비에트화”하려는 시도에는 반대했다.
적군의 폴란드 진입에 대해서 마르토프의 입장은 "우리의 선동 활동의 중심에 외교 정책에서의 모험주의를 거부하는 요구를 두는 것(소비에트 체제를 폴란드인과 독일인들에게 칼끝으로 강요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해야 했다. 1921년, 페도르 단(Fedor Dan), 에바 브로이도(Eva Broido)와 함께 망명지에서 <소치알리스티체스키 베스트니크>(“사회주의의 배달부”)를 창간한다. 이후 40년간 이 신문은 소비에트 내부의 사건을 독보적으로 다루며, 오늘날 역사가들에게 필수적인 자료로 남는다.
“가장 끔찍한 일”
마르토프는 1917년 이후 나타난 해로운 경향을 다른 이들보다 훨씬 일찍 파악했다. 그의 저서 <세계 볼셰비즘>에서 그는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모든 구성 요소의 조직된 자발적 활동의 최대한 발전으로만 가능하다 — 즉, ‘사회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독재를 절대적으로 배제하는 조건에서, 그러한 독재의 필수 동반자인 공포와 관료주의를 함께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제프 스탈린의 일당 독재는 이 분석이 정당했음을 쓰라리게 확인했다.
1920년대 중반, 관료주의의 힘은 모두가 볼 수 있었다 — 트로츠키가 1923년 <새로운 노선>에서 유명하게 분석한 관료주의다. 1930년대 중반, 소련 전역에 공포가 만연하며, 1937~38년 대공포 시기 681,692명이 처형되고, 수백만 명이 굴라크에서 강제 노동에 처해지며,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후자는 홀로도모르: “기아로 인한 죽음”)에서 수백만 명이 인위적 기근으로 사망한다. 스탈린 시대의 관료적 타락은 잘 알려지고 잘 기록된다. 그 점에서 이를 쓰는 것은 별로 새롭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볼셰비즘>은 1917년 사건 이후 2년도 안 된 1919년에 쓰였으며, 트로츠키의 <새로운 노선>보다 4년 앞섰다. 마르토프의 비판은 스탈린의 국가가 아니라 레닌과 트로츠키의 국가를 겨냥했다. <세계 볼셰비즘>은 그의 생애 동안 전체가 출판되지 않았다. 1919년 키이우에서 연재되던 사회주의 출판물이 폐쇄되며 그것이 일부만 공개됐다.
마르토프의 책에 담긴 분석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1918년 팸플릿 <러시아 혁명>에 담긴 것만큼이나 일관되고 중요했다(이 팸플릿 역시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마르토프의 책, 1917년 사건에 대한 그의 분석, 그리고 마르토프 본인은 역사의 후방 거울 속으로 사라지며, 1917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빈약하게 만들었다.
마르토프의 분석 일부는 러시아 혁명에 관한 표준 문헌에 들어간다. 1917년 11월, 러시아 제국 사회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인 파벨 악셀로드(Pavel Axelrod)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토프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우리가 직면한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승리한 봉기다, 즉 거의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레닌 뒤에 서서 전복(perevorot)을 통한 사회적 해방을 기대한다.” 이 문장은 마르토프가 레닌과의 잘 알려진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1917년 10~11월에 진정한 혁명이 일어났다고 마지못해 동의했다는 증거로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편지 전체를 읽으면 훨씬 더 복잡한 분석이 드러난다. 마르토프는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깊이 비관적이었다: “상황은 비극적이다 …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권력 장악이 그것이다.” 왜 마르토프는 이것이 “가장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는가? 그의 견해로는, “거의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레닌을 지지했지만, 그들은 대체로 방관자로서 구경꾼 역할을 했다.
그는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틀림없이 수동적”이라 묘사하며, 그들의 정치가 “결의안을 넘어가지 않고”, 10월 봉기에 대한 동조는 “미래에 대한 우려, 실업과 학살에 대한 두려움, 레닌주의자들의 힘에 대한 불신으로 마비되었다”고 본다.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수동적이었다면,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에서 적극적인 요소는 누구였는가? 마르토프에 따르면, 그것은 군대에서 나왔다: “25일 밤, 레닌의 ‘군사혁명위원회’는 해군과 병사들로 여러 ‘전략적’ 위치를 점령했고, 아침에 페트로그라드는 권력 장악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주요 볼셰비키들도 10월에 대해 비슷한 지적을 한다. 1922년 칼 라덱(Karl Radek)은 혁명 사건을 이렇게 요약한다: “혁명군사위원회는 …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혁명의 순간,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긴급 회의에서 연설하며, 그가 말하는 동안 도시 주민이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었고, 한 권력이 다른 권력으로 교체되었음을 몰랐다”고 언급한다.
도시 주민이 잠을 자는 동안 부르주아지에서 프롤레타리아로 권력이 이양되는 시나리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마르토프의 절친이자 동지인 라파엘 아브라모비치(Raphael Abramovitch)는 그의 마지막 저서 <소비에트 혁명, 1917-1939>에서 이를 슬프고 아이러니하게 묘사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수도의 노동 대중이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은 전쟁에 지친 농민 소년들이 병사나 해군 복장으로 승리했다.”
<세계 볼셰비즘>의 분석을 바탕으로, 아브라모비치는 러시아와 다른 국가에서 “일시적인 신흥 계급”인 농민과 병사들의 역할을 묘사한다. 제국주의 전쟁의 참호에서 4년간의 학살은 그들을 잔인하게 만들었고, 좌파든 우파든 극단적 정치에 열려 있게 했으며, 민주주의와 토론 대신 총검으로 정치적 분쟁을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일시적 계급은 세계 정치의 궤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노동자 권력과 국제 사회주의의 지속적 기반을 제공할 수는 없었다.
충성스러운 반대파
1917년 12월, 악셀로드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마르토프는 이러한 혁명이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노동자 대중이 레닌을 지지하지만, 그의 체제는 점점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상퀼로트’ — 무장한 병사, ‘적위대’, 해군으로 이루어진 잡다한 대중의 공포정치가 되고 있다.” 그는 “대다수 농민의 의지에 반하고, 도시 민주주의 전체(국가, 공공, 민간 사무직, 기술자, 자유직, 교사 등)에 반하는 통치와 공산주의 실험은 붕괴로 이어질 뿐”이라고 예측한다.
마르토프는 또 다른 예측을 한다: “공포정치, 시민 자유의 짓밟음, ‘계급 독재’의 이름으로 헌법제정의회에 대한 학대는 지난 8개월 동안 인민이 획득한 민주적 교육의 싹을 근본적으로 죽이고, 모든 종류의 보나파르티즘에 가장 비옥한 토양을 준비한다.” 스탈린의 전체주의 형태로 발전한 보나파르티즘은 국제적 좌파에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운다.
10월 이후, 마르토프와 그의 멘셰비키 당은 레닌의 “충성스러운 반대파”로 자리 잡는다. 그들은 반혁명과 제국주의 개입에 맞서 신생 국가를 방어하며, 당원들은 내전 중 적군에 입대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동시에, 그들은 언론 자유 억압, 소비에트 선거 파기, 볼셰비키의 정치적 반대자 체포와 억압, 볼셰비키 통치를 뒷받침하는 점점 더 자의적인 공포 사용에 반대한다.
마르토프는 1918년 팸플릿 <사형제도 폐지!>에서 이러한 공포를 비판한다. 1917년 2월 민주주의 혁명 이후 등장한 임시정부는 사형제를 폐지했지만, 그해 여름 전선 병사들에게 다시 부과되며 마르토프 등이 강하게 비판한다. 권력을 잡자마자 볼셰비키는 이 결정을 공식적으로 뒤집어 전선에서 사형제를 다시 중단한다.
하지만 레닌은 이에 반대했고, 국가가 승인하는 사형은 새로운 국가에서 곧 일반화된다. 마르토프는 이 관행을 강하게 비판한다: “권력을 잡자마자, 사형제 폐지를 선언한 첫날부터 그들은 살인을 시작했다.” 곧 이 살인은 다시 국가의 공식 승인을 받는다: “재판 없이 수만 명을 학살한 후, 볼셰비키는 이제 사법적 처형으로 나아갔다.”
마르토프의 이러한 관행에 대한 열정적인 비판은 페이지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 피의 광란은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형제애를 인류의 최고 목표로 선언한 교리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이 광란은 러시아 노동자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국가가 승인하는 공포에 대한 이 강렬한 반대는 마르토프가 노동계급의 자발적 활동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그의 관점에서, 자발적 활동은 윤리적 정치 실천에 대한 깊은 헌신 없이는 사라진다. 레닌과 볼셰비키의 특징인 목적과 수단의 분리는 마르토프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출발점이다.
그의 사망 이후, 마르토프가 주목을 받은 것은 트로츠키가 그를 "민주적 사회주의의 햄릿"이라고 지칭한 것처럼, 경멸적인 태도로만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평가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마르토프의 심리를 추측하기보다 그의 이론과 실천을 분석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학자들(S. V. 티우티우킨(S. V. Tiutiukin), O. V. 볼로부예프(O. V. Volobuev), I. Kh. 우릴로프(I. Kh. Urilov))에 의해 마르토프에 대한 관심이 환영할만하게 부활하고 있다. 영어권 좌파는 그들의 작업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것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기사 등록 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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