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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주변"으로부터 본 소련의 건국사 – 4, 5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5. 12. 24.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4. 소련 문화와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의 그 유명한 <오리엔탈리즘> (1982)이 출판되고 유통되고 나서는, "동양"이 서양에서 재현되고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관심은 계속 상당히 높습니다. 사이드는, "여성적"이며, "피동적", 스스로의 근대화를 스스로의 손으로 이루어내지 못하고 정체된 "동양"에 대한 (왜곡된) 지식의 생산과 유통이 결국 제국주의와 식민화를 수반하면서 식민주의를 위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고 비판했습니다.

틀린 이야기는 전혀 아니고, 꼭 제국주의 시대의 '서양'에 한정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국적"이면서 "오묘한", 근대의 세계와 질적으로 다르며,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오지"에 대한 요즘 한국에서 나온 웬만한 기행문을 봐도 오리엔탈리즘의 냄개가 바로 풍겨지는 것입니다.

<인터뷰> (2014) 같은 미국 영화에서 재현된 "전제 왕국"으로서의 북한에 대한 많은 서술들도 고전적인 오리엔탈리즘적 클리세와 스테레오타이프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과연 1920년대니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의 "동양"의 재현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이었죠? 그걸 알면 초기 및 스탈린 시기 소련의 '주변'에 대한 정책의 성격을 약간 더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고전적인 오리엔틸리즘"으로 분류돼도 아쉬울 게 없는 작품들의 상당수가 분명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예술 작품이나 소설 등을 제작하는 전문가군의 상당수는 이미 제정 러시아 시대에, 제국주의 문화 속에서 형성된 이들이었으며, 모스크바/코민테른이 '중심'의 자리에 들어서는 '세계혁명'의 불균등한 지형은 그들의 제국주의적 상상력과 얼마든지 틀어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코민테른의 진정한 국제주의적 활동가들은 주관적으로 스스로를 "전세계 평등 시대의 도래를 위한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겠지만, 적어도 모스크바의 많은 지식인들의 입장에서는 코민테른이 "세계 문명화 사업"을 펼쳐나가면서 세계 "주변 지역"들을 "계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제작한 작품들은, 종종 아시아 혁명 활동가들에게 아주 큰 불쾌감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라인홀드 글리에르 (Reinhold Glier, 1875-1956)라는, 글라주노프와 림스키-코르사코브의 제자 격인 유명한 소련 작곡가가 1927년에 만든 발레 <붉은 양귀비꽃> (Krasnye maki)는 가장 악명 높았습니다. 요즘도 종종 무대에 오르는 이 발레에서는 '혁명하는 중국'은 무희(이자 기녀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도화 (桃花)로 대표됩니다. 도화와 중국인 "쿠리" (苦力)들은 소련 선박의 선장이라는 "진보적인 서양 남자"를 만나 혁명적으로 "개화"되고, 결국 이 발레의 줄거리는 소련 선장과 영국인 항만 감독, 그리고 "중국 반동"을 상징하는 도화의 본래 신랑인 이산포 (李山甫) 사이의 투쟁입니다.

이산포가 '반동'이 된 이유 역시 유럽에 유학을 "잘못" 가서 "부르주아 문명의 썩은 문화""잘못 교화된" 것이기도 하죠. '중국 대중'을 상징하는 여성인 도화를 이산포 등이 소련 선장 암살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는데, 선장을 사모하게 된 그녀는 선장을 지키면서 스스로의 몸을 장렬히 희생합니다. 1950년에 모스크바 방문 중인 모택동이 이 발레의 관람을 거부하고, 아예 스탈린에게 직접 "중국인 비하" 문제에 대한 제기를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오리엔틀리즘적 trope (비유, 수사)로 꾸려진 작품임에 틀림 없죠.

그렇다고 1930-40년대의 소련 문화가 전부 다 일색적으로 '오리엔탈림적'이었는가 하면, 꼭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 때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동양인'에 대한 서술의 방식 역시 쉽게 변모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사례로 제정 러시아 시대에 교사와 러시아 통신사의 터키에서의 기자 (사실상 정보 수집 전문가)로 일했던, 그러나 소련 시대에 접어들어 성공적으로 작가로 변신한 바실리 얀 (Vasily Yan, 1874-1954)의 몽골 서방 원정에 대한 3부작 (1939-1955)을 들 수 있습니다.

1(<칭기스칸>, 1939)에서의 주인공인 칭기스칸은 분명히 그 당시 소련인들의 주적인 히틀러를 비유적으로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칭기스의 잔혹성을 서술하는 대목들이 "몽골인에 대한 이국화"라고 할 정도로 선정적입니다. 제가 그 책을 어렸을 때에 읽었는데, 칭기스의 대군에 맞선 코레즘 왕국의 왕태자 잘랄아드딘의 아들의 심장을 몽골 군인이 잘라내서 꺼내 칭기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준 장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한데 동시에 몽골 침략에 대항하는 중앙아시아인들의 '수난 과 투쟁'은 이 책에서 매우 친근하게 서술됩니다. 아무래도 이미 "소련사람"이 된 우즈베크와 타지크인들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오리엔탈리즘'보다는 차라리 '정책적인 배려'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몽골인들에 대한 '악마화'만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몽골이 이미 소련의 보호국이 된 상황에서는, 그 당시 몽골군의 매우 높은 기술적 수준 등도 현실적으로 형상됩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면, 1920-40년대의 소련 문화에서의 '아시아'의 재현은 매우 복합적이며, 종종 자기모순적입니다. 소련인/러시아인들을 "계몽"의 주체로 상정시키며 아시아인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작품들이 다수 있는가 하면, 레오니드 솔로비요프 (Leonid Solovyev, 1906-1962)<고요함을 전복한 자> (Vozmutitel' spokoistviya, 1940)처럼 중앙아시아의 김선달 격의 트릭스터 (trickster)인 호자 나스레딘 (Hoja Nasreddin)이야기를 하면서 "부하라 칸국"의 이야기에 빙자해서 사실 스탈린의 독재 국가를 풍자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소련도 가면 갈수록 유럽 역사에서 브기 드물었던 "초중앙집권적인" (super-centralized) 국가 모델로 발전돼 갔던 상황에서는, 소련인들에게는 아시아의 매우 군주권이 확고했던 고대, 중세 국가들의 이야기들은...차라리 그들 스스로의 이야기로 들리기 쉬웠습니다. 동양도 서양도 아닌, 매우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러시아 특유의 현상이기도 하지만, "유럽 혁명" 이상으로 "아시아 혁명"에 더 초점을 맞추었던 1920-40년대 소련사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좌우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렌즈로 소련의 1920-40년대의 문화를 고찰할 만하지만, 그 렌즈만이 충분치 않다는 것도 사실로 보입니다.

5. 1920년대의 소련: 소수자들의 반란들

아마도 1920년대에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에게는 소련만큼 인기 있는 나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신문들을 보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나 일문 신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소련 관련의 보도를 매우 호의적으로 했습니다. 1925, -일 수교가 되고 <동아일보><조선일보>의 모스크바 특파원 파견이 가능해지자 두 신문은 각각 철학 박사 이관용과 동경제대 법대 출신인 김준연을 모스크바에 특파했습니다.

김준연은 나중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지낼 정도로 소련에 "" 빠졌지만, 취리히 대학 출신의 이관용이 신간회 간사를 지내는 등 대략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정도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한데 모스크바 관련 보도의 논조는 둘 다 비슷했습니다. 그 논조는 매우 소련 친화적이었고, 가장 강조하는 포인트는 바로 소련에서의 '민족 문제 해결', 소수자들의 위치 상승,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출신들에 대한 차별 근절이었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이런 문제들이 핵심적이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지요.

모스크바의 동방로력자공산대학 (KUTV) 등이 세계 각처 많은 반제 투사들을 무료로 교육시키고, 코민테른이 해외 반제 운동의 커다란 후원세력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20년대에 모스크바에 유학 온 조선인 (예컨대 나중에 <숫자 조선 연구>로 유명해진 의사 김세용)이나 미국 흑인 등의 회고를 보면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로운 환경에서 공부했다는 점은 확인됩니다. 나중에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어서 스탈린의 소련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던 중국의 베테랑 혁명가 왕범서 (王凡西)의 회고록을 봐도, 그가 모스크바에서 체류했던 1927-9년에 소련인들로부터 받은 '환영''따뜻한 대우'를 매우 상세히 이야기합니다.

,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관용과 김준연의 보도가 꼭 "미화"만이 아님을 이야기할 수 있죠. 한데 소련이 1920년대에 "민족 문제"를 국내적으로 "해결"했다고 말하면 사실 역사의 현실과 다소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소련은 "민족 문제 해결"에 분명히 큰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동방로력자공산대학을 포함한 당 학교에서 각 민족의 차세대 간부들을 (민족어로 수업하면서) 교육시키고 관직에 진출시키는 등 모스크바의 '중심'과 소수자들이 사는 도시, 마을 사이에서 '민족 간부'라는 중간 "중계자" 계층을 부지런히 양성한 거죠. 고려인의 신문인 <선봉>과 같은 소수 민족들의 언론기관, 출판기관, 극장 등을 세우는 등 "각 민족 문화 발전"에 상당한 예산을 책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에 "민족 문제"가 여러 모로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여러 현상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현상 중의 하나는 바로 1920년대에 소련의 소수 민족 거주 구역에서 자주 일어났던 각종의 반란들이었습니다. 사실 그 반란과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저항 운동을 진압하느라고, 1920년대 내내 붉은 군대는 쉴 사이 없이 바빴습니다. 저항 운동들이 무장 반란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는 이유는, 내전 시기로부터 주민들의 손에 상당수의 화기가 남아 있었다는 상황 이외에는 소련에서의 의회주의 부재이기도 했습니다. 공산당과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해서 경쟁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는, 불만 세력들은 매우 쉽게 무장저항이라는 최종적인 저항 형태로 직행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불만의 이유들은 아주 다양했습니다. 중앙집권적인 국가인 소련이 '폭력 독점'이라는 차원에서 화기를 강제 수거하여 주민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것, 이와 함께 토착 지배 세력들의 신분을 강등시키고 그들을 점차 소멸해나간다는 것, 문제의 지역을 소련에 강제 합병시켰다는 것, 아니면 주민들의 민의에 대한 관심 없이 행정 편리주의적으로 정책 집행을 한다는 것, 이 모든 부분들이 아주 쉽게 반란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토착세력과 공산당 권력 사이 충돌의 전형적인 사례는 1924-5년 체첸 (바로 1990년대에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와 전쟁을 두 차례나 하게 된 그 체첸) 반란이었습니다. 사실 체첸에서는 현지 공산당 간부 이상으로 샤리아 율법의 전문가인 알리 미타예프 (1885-1921)나 이슬람 성직자 나즈마딘 고친스키 (1859-1925)의 권력은 더 강력했습니다. 공산당 간부들은 중앙으로부터 받은 통달대로 식량 등을 공출해야 했다면, 미타예프나 고친스키는 현지민들이 생각했던 "사법 정의""민족 문화"를 상징했습니다.

그 세력을 궤멸시키고 체첸인들이 소지했던 화기를 몰수하려 했던 소련의 군경은 1924-25년에 대포와 폭격기를 동원하여 체첸에 "원정"을 가야 할 정도로 현지에서 소련 국가 권력이 취약했습니다. "원정"하면서 101개의 마을에 포격을, 16개의 마을에 폭격을 진행하고, 874명의 "폭도" (주로 종래의 권력자나 권위자)를 체포하고, 그 중에서는 109명이나 총살형에 처하게 했습니다. 사실 체첸 지역에서 대대적인 국가 폭력의 행사를 했던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체첸인들이 "충성스러운 소련인"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그 뒤로도 반복적으로 무장 저항이 일어나곤 했죠.

같은 1924년에 원동에서 퉁구스와 야쿠트인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불만을 부추긴 것은 소련 당국의 대외 무역 독점 정책이었습니다. 외국 상인과의 모피 무역으로 토착사회 구성원 중의 상당수가 치부할 수 있었는데, 소련의 일률적인 국가 본위의 경제 정책이 그 수입원을 끊어버렸습니다. 현지 당국들이 주로 유화책을 썼다가 나중에 대숙청 시기가 도래하자 과거의 "폭도"들을 체포, 총살했습니다. 같은 1924년에 그루지아 (조지아)에서 멘셰비키들이 반란에 나섰습니다. 온건 사민주의자인 멘셰비키들이 그루지아 민주 정부를 운영했다가 1921년에 소련에 강제 합병을 당한 것입니다.

멘셰비키들의 입장에서는 집권당인 볼셰비키들은 "같은 사회주의자"이긴 했지만, 소련의 1당체제에서는 멘셰비키들이 볼셰비키들과 민주적인 선거 경쟁을 할 수 없어 무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루지아 독립의 부활을 외쳤던 이 반란은 폭격기와 대포 등 무력으로 진압되고 약 3천 명의 반란자와 시민들이 희생됐습니다. 이 일로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들의 후원자였던 유럽의 사민당들 사이에서의 괴리만이 아주 커진 것입니다.

1927-8년의 야쿠트 공화국에서의 반란 역시 현지민 사회주의자들이 일으킨 겁니다. 중앙에서 파견된 간부들이 현지민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하지 않으며, 현지 민족 사회주의자들이 중앙의 후보들과 선거에서 민주적으로 경쟁할 수 없어서 "무장 시위"하게 됐다는 것은 반란자 측의 해명이었습니다. 한데 이와 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반란자들의 지도부는 총살에 처하게 됐죠.

"민족 문제 해결", 소련 정부의 괄목할 만한 "역차별 정책", 즉 소수 민족 문화 진흥책과 간부 양성책에도 불구하고, 멀기만 했습니다. 세계 혁명이 불발되고, 민족/국민 국가를 지향하게 된 소련은 주민들을 무장해제시키면서 토착 지배자들을 공산당 간부로 교체시키는 과정에서 상당한 저항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토착 지배 세력들뿐만 아니라, 중앙이 아닌 현지민/민족 이해관계를 우선시했던 비주류 사회주의자나 민족 독립을 주장하는 멘셰비키 같은 사민주의자나 소련이라는 국가를 우회해서 해외 세력과 연계하려 했던 세력 등은, 소련 당국과 무장 충돌을 종종 일으켰습니다. 소련은 그들을 진압하면서 빈번히 포격과 폭격을 동원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는 권위주의적인 혁명 이후 '좌파 국가'로 시작된 소련은 '좌파적'이라기보다는 그냥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국가로서의 성격을 더 공고하게 했던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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