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이 글은 그동안 ‘변혁재장전’에서 진행한 여러 세미나에서 토론하고 자극과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며 결코 개인적 성과물이 아니다. 이 세미나에 기여해 왔고,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격려와 많은 지원을 해준 준비위원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동지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초고에 대한 조언과 토론을 해 준 이상수, 이승현 동지에게 특히 감사드린다. 신자유주의가 가져 온 변화, 노동운동의 위기와 후퇴, 새로운 투쟁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방향 등을 다룬 꽤 분량이 긴 이 글을 세 차례에 나눠서 연재할 예정이다. 이 글은 그 첫번째이고 원래 있던 각주는 일단 다 생략했다.]
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이 나라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익숙하지 않았다. 일부 좌파들이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과시하며 차별성을 보여주려고 쓰는 낯선 용어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한국경제 위기와 IMF 구제금융, 구조조정 등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일부 좌파들만의 용어가 아니게 됐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좌파 활동가와 이론가들이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변화와 그 결과, 정부 정책, 이데올로기적 분위기 등을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하비는 이렇게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란 1970년대의 위기 당시에 등장했던 계급 프로젝트를 말한다. 개인의 자유, 해방, 개인책임 그리고 사유화, 자유시장, 자유무역 등의 미덕에 관한 무수한 수사로 포장된 신자유주의는,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회복하고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가혹한 정책들을 정당화했다. 신자유주의의 길을 선택한 모든 국가에서 나타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부와 권력의 집중을 고려하면, 이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장났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의 주장도 비슷하다.
신자유주의란 우리가 ‘금융’이라고 통칭해서 부르는 것, 즉 자본소유자 계급과 그들의 권력이 집중된 기관들이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이후 감소 추세에 있던 자본소유자 계급의 수입과 권력을, 대중 투쟁이 전반적으로 약화된 틈을 타 회복하려는 열망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였다.
데이비드 맥낼리의 설명은 좀 더 종합적이다.
대체로 1970년대 이후 인간의 삶을 다시금 시장이 규제하도록 만들려는 정책·실천·아이디어들의 총합이다. 사실 시장에 대한 찬양은 이미 18세기 또는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등장한 바 있기 때문에, 이 새로운 버전의 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이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는 물론 노동조합, 사회복지 프로그램 등에 대단히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이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을 ‘간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독트린과 연결된 학자로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나 밀턴 프리드먼, 이를 정책으로 추진한 정치가로 영국의 마가릿 대처 수상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신자유주의가 남긴 영향은 사회적 불평등의 증대, 남반구 제3세계의 전반적 부채 증가, 각국에서 치안 및 군사주의의 강화 등으로 요약된다.
자유시장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데올로기, 정책, 실천 등을 신자유주의라고 보는 것이다. 민영화, 규제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부자 감세, 복지 삭감 등의 대표적 정책을 통해 신자유주의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증대시키고 권력을 강화했다. 결국,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 특징짓는 것은 결코 억지가 아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몇 차례 위기를 거치면서도 약해지거나 사라지기는커녕 더 굳어져 왔다.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에 직면해 지배자들이 택한 처방도 대개 신자유주의적이었다. 그리스에서 지난 5년 동안 ‘인도주의적 위기’를 만들어 온 것은 바로 ‘트로이카’가 강요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이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는 크게 두 가지 편향이 있어왔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의미와 효과를 과장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 자신이 이런 편향의 대표 주자들이었다. 우파적 정치인과 학자들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세상은 그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세계화되고 탈산업화된 세상에서 국가는 힘을 잃었고, 시장을 거역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안은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는 게 대처의 구호였다.
신자유주의에 굴복한 자유주의자들과 중도좌파가 뒤를 이었다. 대표적으로 토니 블레어는 “우리는 200년 전에 시작된 산업혁명 시기와 유사한 대대적인 경제적·기술적·사회적 변동의 한가운데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했다.
이런 정치인,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적 대안은 실패했고 신자유주의 속에 노동계급은 해체됐다’며 자신들의 후퇴와 굴복을 정당화했다. ‘어떤 정치인과 노조도 눈 깜짝할 사이에 국경을 넘어가는 자본에 맞서 일자리와 노동조건을 지키기 어려워졌다’는 식이었다. ‘노동운동은 회복 불능의 상태로 추락했다’는 비관도 이어졌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의미와 효과를 과장하는 태도가 또 다른 편향을 불러냈다. 주로 좌파 측에서 나온,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는 태도가 그것이다. 특히 ‘노동자연대’와 ‘국제사회주의 경향’(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 IST)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입장은 신자유주의 속에서 벌어진 노동의 유연화, 불안정성 심화, 사회복지의 후퇴 등을 ‘사실과 다르다’고 평가 절하하곤 한다. 예컨대 “불안정성에 관한 많은 주장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을 출발점으로 삼아 일반화해 버리기 때문에 과장[이고] … 노동자들의 고용이 꽤 안정돼 있음을 보여 주는 수치를 무시하기 때문에 과장”이라고 주장한다.
“서유럽에서 불안정한 고용이 가차없이 균일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실증적 증거는 없다”고도 말한다.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역동성에 대해 우리가 매일 듣는 너무 친숙한 미사여구와 과장은 작업장의 현실과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렇게 주장한다.
“대부분의 반신자유주의 문헌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 전제는, 하비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국가가 사회보장 의무에서 발을 빼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증적 증거는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과장하는 편향에 대한 이해할 수 있는 감정적 반발이고 그것을 바로잡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 변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변화의 정도를 잘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입장을 대표하는 크리스 하먼은 신자유주의를 주로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보았고, 신자유주의를 통해서 자본주의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그다지 정확하게 묘사해주는 용어는 아니다. 자본주의는 이미 한 세기도 더 전에 종식된 자유시장 경제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변화 이전의 분석, 주체 설정, 전략과 전술 등을 대체로 고수하는 것으로 연결됐다. “좌파가 할 일은 불안정성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반대요인들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노동자연대’도 이런 입장에 따라서 거의 10년 가까이 ‘조직 노동자들이 여전히 가장 중요하며 그들의 작업장에서 파업, 점거같은 방식으로 대대적 투쟁에 나서는 일이 곧 벌어질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작업장이 여전히 저항의 중심”이라며, 이런 투쟁의 부활을 “[노동]계급의 귀환”이라고 불렀다.
근래에도 “박근혜와 맞서는 데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할 세력은 역시 조직 노동자들이다. … 노동운동은 노동계급 고유의 (즉, 착취에 저항하는) 방법을 사용해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알다시피 이런 일은 쉽사리 벌어지지 않았고 그럴 때면 항상 갑갑한 상황의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을 불러냈다. 개혁주의 지도자들, 특히 노조 관료들이 그들이다.
“지난 몇 개월을 되돌아보면 노조 중앙지도부의 동요와 후퇴가 조합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킨 것이 문제였지, 현장조합원들이 싸울 힘이나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투쟁을 회피하는 지도자들이 문제지 현장 조합원들은 싸울 준비가 됐다는 것이다. “지금 현장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다. … 지도부가 단호하게 파업을 명령하면 따를 태세가 돼 있다.”
IST와 ‘노동자연대’가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왜냐하면 토니 클리프가 주도적으로 건설한 IST는 2차 대전 이후의 변화된 현실을 과소평가하고 기존 분석과 입장을 고수하려는 정통트로츠키주의 경향에 반발하면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것을 지적한 바 있다.
토니 클리프는 이와 같이 “트로츠키가 말한 문구에 집착하면서 트로츠키의 말에 담긴 정신을 제거하는 교조적인 트로츠키주의”에 심각한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세계를 제대로 해석하고, 그래서 그것을 변혁하기 위한’ 과제에 정면 도전하기 시작했다. … 클리프는 변화․발전한 현실을 직시하며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혁신을 시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국가자본주의 이론, 영구무기경제 이론, 일탈한 연속혁명 이론을 통해서 변화된 현실을 설명해 냈다.
이처럼 2차 대전 이후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분석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던 IST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대해서는 왜 둔감한 반응을 보였을까? IST의 일원이었던 닐 데이비슨도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1948년에서 1973년에 이르는 시대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비교하면, 이에 뒤따른 시대에 대한 우리의 토론은 명확성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먼저, 신자유주의적 공격이 낳은 결과를 강조하는 것이 노동자·민중의 사기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가 지나쳤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이론들의 여러 기능 가운데 하나는 체제가 단지 통제 불능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도전도 할 수 없다는 인상을 주는 것[인데] …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잘못”이란 것이었다. “고용의 불안정성 증가를 강조”하는 것도 “노동자들이 힘도 없고 수동적으로 당한다는 관점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에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둘째, 2차 대전 이후의 변화를 분석한 IST의 이론 자체에 약점이 존재했던 것 같다. 그 이론은 ‘상시군비경제’ 이론인데, 군비 투자로 자본이 몰리면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가 저지되고 이윤율 저하를 늦추는 효과를 낸다는 주장이었다.
“전후 호황을 지속시킨 것은 케인스주의가 아니라 1930년대 공황을 끝낸 요인과 같은 요인, 즉 대규모 군비지출이었다. … 상시군비경제라고도 부르는 이런 군비지출이 미국 경제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그러나 이 ‘상쇄요인’은 일시적일뿐이며 결국은 다시 이윤율 저하 경향과 경제 위기가 고개를 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70년대 초반에 경제 위기가 닥치자 IST는 의기양양하게 주장했다.
“군비 지출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고질병에 대한 단기 해결책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 1971년에, 그리고 1974년과 1980년에는 훨씬 더 큰 규모로, 호황과 불황의 낡은 패턴이 다시 나타났다.”
이제 자본주의는 다시 장기적 침체와 불황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 IST의 주장이었다. “공황이 세계 많은 부분을 야만 상태로 몰아넣어서든 아니면 잇따른 노동자 혁명으로든 어느 식으로든 해결될 때까지, 공황의 현 국면은 계속될 가능성이 많다.”
이런 분석은 분명 2차 대전 이후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였고 설명력이 있었다. 하지만 군비 투자라는 한 가지 요인으로 그것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좀 단순했다. 결국 그 한가지 요인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지연됐던 위기가 필연적으로 재개될 것이라는 식이었다. 즉 자본주의는 경제적 붕괴를 피할 수 없고, 그것은 거대한 노동자 저항을 낳을 것이라는 일종의 ‘파국론’과 닮았다. 닐 데이비슨도 그 점을 지적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클리프는, 전후 호황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막간극이며, 그 후 제 2차 세계대전의 직전 트로츠키가 선언한 해결할 수 없는 위기와 “생산력의 침체”가 재개되어, 이것이 일시적인 후퇴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계급투쟁의 부활을 낳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셋째, 더 근본적으로는 기존의 분석에 의문을 품고 이견을 제시하기 어려운 IST의 분위기가 새로운 분석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것 같다. 현실의 변화를 안 보려하는 정통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반발 속에 발전해 온 IST의 분석과 주장은 어느 순간 새로운 ‘정통’이 됐다.
IST의 주요 활동가인 존 몰리뉴는 이 ‘정통’에 대한 이견 제시가 갈수록 쉽지 않아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지난 15년간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당 지도부의 노선에 대해 단 한 번도 당내에서 중요한 도전이 제기된 적이 없었다. … 이러한 상황은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의 관점에 비추어보면 정상이 아니다.”
문제는 단지 이론적 약점과 불명료함이 아니었다. 핵심은 변화하는 현실에 비추어 기존 분석을 끝없이 재평가하고 갱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민주적 구조와 분위기였다. 닐 데이비슨도 이렇게 지적했다.
현재 우리의 어려움들이 우리의 내부적 문화와 구조가 아니라 단지 잘못된 관점들에 의해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동지들은, 옳은 관점들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회피하게 된다. …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논쟁을 하는 것만이 …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현재의 체제에서는 이것이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
분석과 이론의 새로운 혁신은 그것을 차단하고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환영하는 분위기 속에서 발전할 수 있다. 또한, 끝없이 변화하는 구체적 현실은 그 변화를 뒤따라가는 구체적 분석과 실천적 검증을 통해서만 제대로 포착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대한 과장도 과소평가도 아닌 독자적이고 정확한 분석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할 때 진정으로 올바른 전략과 전술이 나타날 수 있고, 진정한 자신감도 생겨나며 사기 저하를 피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제 신자유주의가 어떤 변화와 효과를 낳았는지 공정하게 재평가하는 것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신자유주의는 어떤 변화와 재앙을 가져 왔나
일부 좌파는 신자유주의를 ‘독자적인 축적체제’ 또는 ‘금융주도 축적체제’라고 분석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질적으로 변화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생산보다 유통이 더 중요해졌다’거나, ‘금융자본이 생산자본과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거나, ‘이윤율 저하 경향은 사라졌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너무 압도돼서 자본주의의 질적 연속성을 가볍게 본 것이다. IST는 이런 태도를 반박하는데 치우치다가,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이 도달한 하나의 단계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고전적 제국주의와 대비되는 자본주의 발전의 한 국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정책 차원에서 케인즈주의 시기와 단절해 있고 이와 연관된 이데올로기적․경제적 변화로 볼 때 ‘그렇다’라고 답변하고 싶은 유혹이 든다. 고전적 제국주의와 구별되는 한 단계로 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다. … [그러나]구체적으로 말해서 신자유주의 ‘축적 체제’가 자본주의 세계 경제를 안정적인 성장 경로 위에 올려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많은 연구 사례들이 보여 주듯이, 그 대답은 명백히 ‘아니오’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독자적인 축적체제’는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역사에서 구분되는 하나의 단계로는 볼 수 있다. 이미 IST 전통은 자본주의를 ‘고전적 [자유경쟁] 자본주의’(산업혁명부터 19세기말까지), ‘독점 자본주의’(19세기말부터 1930년대 대공황까지), ‘국가자본주의’(대공황 이후부터 2차대전 이후 장기호황까지)라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해 왔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연속성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역사적으로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시대적 변화를 밝히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IST의 주요 활동가인 크리스 하먼과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단계 구분의 기준도 제시해 왔다. 닐 데이비슨도 그것을 지지한다.
자본주의는 맑스가 <자본>에서 확립한 모델에 따라 작동하는 순수한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 발전의 순차적인 단계들을 규명하려 시도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시대를 규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한 주된 상쇄 경향의 [시대적] 변동을 규명하는 것이다.
크리스 하먼에 따르면 ‘고전적 자본주의’ 단계에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한 주된 기제는 공황 그 자체였다. “주기적 공황은 어떤 회사들을 궁지에 빠뜨려서, 다른 회사들로 하여금 방해받지 않고 다시 팽창을 시작할 수 있게 하였다.
‘독점 자본주의’ 단계에서 그것은 미국·독일에서 주로 나타난 ‘파산과 합병을 통한 대규모 독점체 형성’과 영국에서 주로 나타난 ‘제국주의 정복을 통한 시장과 투자 출구 마련’의 결합이었다. ‘국가 자본주의 단계’에서는 “높은 수준의 무기비용이 체제의 안정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 경향과 이윤율 저하 경향의 상쇄, 그리고 호황 기간의 연장을 수반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상쇄경향도 체제를 위기에서 구출해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체제는 간간히 끼어든 일시적 회복을 빼고는 장기적 위기에 처했고, 이런 장기 침체기를 하나의 단계로 보기 어렵다는 게 IST의 주장이었다. “세계 전체의 성장률은 장기 호황기보다 훨씬 낮았을 뿐 아니라 장기 호황이 끝난 후 15년간보다도 낮았다”는 것이다. 하먼은 이것을 처음에는 “끝없는 위기”라고 했다가 철회했지만, 여전히 “탈출할 수 없는 반복적인 위기들의 국면”이라고 했다.
그러나 닐 데이비슨의 지적처럼 “자본주의처럼 역동적인 체제가 40년간 영구적 위기(또는 반복되는 위기)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윤율의 실질적 회복은 통계적으로도 부정하기 어렵다. 데이비드 맥낼리는 미국경제에 대한 통계를 제시하며 이렇게 지적한다.
평균 이윤율은 1982년부터 1997년까지는 그 이전1964~1982년의 18년간의 하락 경향성과는 반대 방향으로 지속 상승했다. 그리고 1997년부터 다시 하락곡선을 긋는다. 그러다 2001년 이후에는 일정 기간 동안 상향 곡선을 그리게 된다. … 1982년부터 1997년 사이 미국의 이윤율이 2배로 증가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도 비슷한 지적을 한다.
Shaikh와 Tonak는 1979년에서 1983년 사이에 잉여가치가 9%이상 상승했다고 계산하고 있는데 이는 전후 다른 어떤 5년간의 증가율보다 크다. 고정자본투자는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증가하였던 반면에 잉여가치의 증가율과 증가량 모두 1980년대 내내 상승했다. 이 모두가 이윤율 증가에 기여했다.
IST도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했다. 다만 IST는 그런 이윤율 회복이 2차대전 후 장기호황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근거로 1970년대 중반 이후로 자본주의를 ‘장기 위기’로 규정했다. 하먼은 “1970년대 말에 저점에 도달했던 이윤율이 1980년대 초부터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 2000년대에도 이윤율은 장기 호황이 지속된 1940년대말, 1950년대, 1960년대 초 수준에 결코 미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설득력이 없다. 이런 식이면 자본주의는 2차대전 이후 약 25년간을 제외하면 항상 위기였다는 말이 된다. 2차대전 이후의 장기호황은 자본주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자본주의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고용이 늘고 임금·복지도 향상되는 이례적 패턴을 보였다. 따라서 이 기간의 이윤율을 기준삼아, 그보다 못 미치는 시기를 불황으로 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닐 데이비슨은 이런 분석의 문제점을 두 가지 더 지적한다.
첫째로, 이런 기준은 다음에 찾아올 수 있는 모든 호황이 반드시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복지 제도를 확대하며 계급의 자신감을 올리는 등의 효과를 가져 올 것이라는 기대로 이어질 수 있다. …
둘째, 맑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자본가들과 경영자들은 그들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 4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 편이다. …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생산에 투자를 계속하고 그에 대한 이득을 회수할 수 있다고 확신할 만큼 이윤율이 충분히 높은지 여부이다. 그리고 1982년부터 2007년까지 많은 경우 실제로 높았다.
결국 IST는 어느 순간 2차대전 이후 정통트로츠키주의자들이 겪은 것과 비슷한 오류에 빠졌다. 즉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자신들이 고수하려는 입장에 끼워 맞추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자.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 경향을 일부 상쇄하며 회복·팽창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모순이 생겨났는지, 그런 모순이 2008년 이후 본격화한 위기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등을 파헤쳐야 한다.
그럼 먼저 신자유주의 시대에 지배계급이 어떻게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할 수 있었는지부터 돌아보자. 나는 그것을 크게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 공격과 착취율 강화, 산업 구조조정과 노동의 유연화, 시공간적 재배치와 강탈적 축적, 금융화와 신제국주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경찰국가화의 다섯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고자 한다.
1)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 협공과 착취율 강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노동자들을 더욱 더 쥐어짜는 것이라고 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주의가 주력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70년대 중반의 낮아진 이윤율과 위기에 직면해서 말이다.
이것이 수월하려면 노동자들의 저항정신과 조직력을 꺽어놓는 게 필수적이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 각국 정부와 고용주들은 노조의 권한, 노동자의 권리, 임금, 복지혜택을 예전의 낮은 수준으로 되돌리기 위해 협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닐 데이비슨은 이런 공격이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전략과 방향을 담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첫째로는 실업률이 증가하도록 의도적으로 방관하는 것이었다. 이는 고금리 유지, 혹은 국가가 산업부문에 제공해야 할 보조금, 공공 계약, 수출입 통제 등을 거부하는 것을 통해 구현되었다. … 둘째 전략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장들과 노동조합으로 조직화한 한두 개의 주요 노동자 부문과의 사이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 셋째 전략은 노동조합 조직화 수준이 낮거나 없는 지역으로 가서 사실상 새로운 산업 부문과 생산기반을 창출하고, 이것이 자리를 잡기 전에 최대한 조직화 문화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전형적으로 레이건 시대의 미국과 대처 시대의 영국에서 모두 나타났다. 레이건과 대처가 이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가게 된 고비는 광부 노조(영국), 항공관제사 노조(미국)의 패배였다. 두 노조 모두 각 나라에서 잘 조직된 노동운동의 상징이었기에 패배의 후폭풍은 더 크고 쓰라렸다. 이 패배들은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되돌릴 수 없게 했다.
이언 앨린슨도 1970~80년대에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고착화시킨 “세계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패배의 경험 네 가지”로 “영국의 광부 파업(1984)과 미국의 항공관제사 파업(1981), 그리고 인도 뭄바이에서 벌어진 직공 파업(1980),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발생한 도시 반란(1989)”을 꼽는다.
이런 중대한 패배는 이후 크고 작은 패배들과 노동운동의 침체를 낳았다. 이처럼 패배와 사기 저하의 분위기를 이용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더 쥐어짤 수 있게 됐다. “미국의 실질임금은 1978년에서 1983년 사이에 10% 이상 하락”했다.
프랑스에서도 “1959년부터 1974년까지 총임금의 평균증가율은 6.6퍼센트를 기록했지만, 1974년 이후에는 겨우 1.9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같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이윤을 만들었지만, 생산된 부에서 노동자들이 가져가는 몫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 기간 올라간 생산성은, 동결되거나 삭감된 실질임금과 결부되어 있었다. 생산성 증가와 임금상승의 상관관계는 무너졌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측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인상해준다는 낡은 개념은 완전히 사라졌다. … Andrew Glyn은 OECD상위 17개 국가에서 소득의 노동 몫이 1970년대 중반에 75%에서 2005년에 66%로 하락했다고 추정했다.
국민의료보험, 공영 주택, 사회적 임금 등의 복지 혜택이 공격당하면서 1970년대와 같은 복지국가는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다.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되거나 병들고 늙어가도 국가가 자신을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갔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좀비가 다시 원기를 회복하게 된 결정적 요소였다.
2) 산업 구조조정과 노동의 유연화
조직된 노동운동의 힘이 약화되자 기업주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산업, 생산방식, 노동과정에 대한 구조조정을 적극 시도할 수 있게 됐다.
“차별적 임금구조를 도입하고, 교대근무제를 도입하거나, 고용의 불안정성과 비정규 고용(임시직, 시간제, 계약직)을 증가시키고, 고용·해고·작업재편에 있어 고용주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마침내 생산이 보다 유연”해졌다. 기업주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줄이고 더 불안정하고 임금이 낮고 열악한 일자리로 그것을 대체했다.
우리 주변을 돌아다보면 대규모 다운사이징, 오래된 공장 및 설비의 폐기처분, 작업 과정과 기술의 대대적 재편 등에 대한 증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1973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유럽 주요 6개국의 제조업 종사자 수가 700만이나 감소했고, 이는 총고용의 25%에 해당했다. 1979년에서 1983년 사이에도 대략 35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은 노동 형태가 매우 유연할 뿐 아니라,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누리던 여러 혜택과 지원에서도 제외됐다. 그 여파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조건도 같이 더 열악하고 유연해졌다.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에서 ‘린 생산방식’이나 그것의 변형된 형태가 도입됐다.
이처럼 “지난 30년간 불안정 노동이 증가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1980년대에 경제와 생산이 증가하고 노조는 패배를 경험했을 때, 고용주들은 풀타임이든 시간제든 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라 점점 더 많은 ‘임시’ 노동자들을 ‘유연성’이라는 미명 하에 고용하였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준 곳은 중국이다. 중국에서는 ‘농민공’이 대표적인 저임금 불안정 노동이다. ‘농민공’이라 불리는 “이러한 중국 이주노동자들은 대규모의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한다. … 이들은 중국 제조업 일자리의 75%를 차지할 정도로 많지만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결국, 오늘날 세계 노동자의 4분의1 만이 안정적인 고용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나머지 4분의 3은 임시·단기직이나 영세자영업, 무임금 가족노동 등 비공식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게 국제노동기구(ILO)의 조사 결과이다.
이 모든 공격과 후퇴의 과정은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토대를 약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전통 속에서 전수되고 축적돼 온 인적관계, 저항의 문화, 투쟁의 경험과 풀뿌리 기반 등이 사라져갔다. “기업의 거대한 구조조정 물결 속에서, 또 공장의 지리적 재배치와 노동조합 파괴 과정 속에서 이러한 인프라 대부분이 침식당했다.”
빈 자리를 차지한 것은 소비주의, 개인주의 문화와 생활양식, 변덕스러운 유행이다. 이제 사회 참여, 노동조합 활동 등은 낡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3) 시공간적 재배치와 강탈적 축적
자본주의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시공간적 조정’을 통해서 그것을 돌파하려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가 발전시킨 그 기본적 아이디어는 유휴 자본을 흡수할 이윤 창출 기회가 부족했던 것이 위기의 원인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리적 팽창과 공간적 재조직화는 이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 실제로,
1985년에서 1989년 사이 4년 동안에만 일본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는 3배 늘었다. … 중국으로의 아웃소싱 때문에 1992년에서 2001년 사이에 일본에선 무려 25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 독일 자본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중부·동부 유럽 등으로 진출해 나갔다. 그리하여 독일 기업들의 해외 직접 투자는 1985년에서 1990년 사이 4배나 증가했고, 1995년에 다시 2배 더 증가했다.
이런 ‘시공간적 조정’은 주로 동아시아를 향해서 벌어졌다. 그래서 “1990~1996년 사이 단 6년의 기간에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총자본은 거의 300% 가량 증가”했다. 같은 시기 미국과 일본의 자본은 40%, 유럽은 10% 증가하는 데 그쳤다.
특히 중요한 것은 중국이다. 자본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뤄지면서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됐다. 중국에 직접투자된 해외 자본의 규모는 “1985년 10억 달러에서 2002년 500억 달러로 증가했고, 이는 17년만에 50배 가량 증액”된 것이었으며 “중국의 GDP는 1978년에서 2005년 사이에 12배나 증가했다.”
이러한 지리적 재배치, 그 과정에서 이뤄진 인건비 절약 등은 생산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어들게 했다. 투자비용 대비 이윤양은 크게 늘어났다. 이뿐 아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 과정에서 ‘노동력 착취를 통한 축적’만이 아니라 ‘강탈을 통한 축적’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탄생기의 시초축적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관찰했던 폭력적 강탈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소수의 수중으로 자원과 자본이 집중되고, 다수가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는 과정 말이다. 하비는 ‘강탈적 축적’이 이뤄진 다양한 경로를 지적한다.
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그리고 소농 인구의 강력한 추방 … 다양한 형태(공유·집단·국가자산 등)를 띤 소유권의 배타적 사유재산권으로의 전환, 공유물에 대한 권리의 억압, 노동력의 상품화와 생산 및 소비의 대안적 (토착적) 형태의 억제, (자연 자원을 포함한) 자산의 전유를 위한 식민지적·신식민지적·제국적 과정, 토지의 교환과 조세의 화폐화, … 인신매매, 고리대금 및 국가채무와 가장 곤혹스럽게는 탈취에 의한 축적의 혁신적인 수단으로서의 신용체계 이용 등이 포함된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일부 자본가들은 자원, 자산, 노동력 등을 매우 낮은 비용이나 거의 무상으로 이용하며 더 높은 수준의 이윤 창출 기회를 얻게 됐다. 다국적 기업들이 투자한 남반구 개도국에서는 바로 이런 과정이 전개됐다.
“토지 사유화와 인클로저, 이를 통한 플랜테이션 농업, 광산업, 친환경 관광산업, 벌목업, 거대한 댐 건설, 도시 부동산 투자 등”이 전개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자기 땅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고, 재산없는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세계경제는 그 규모면에서 3배나 증대했고, 전 세계적 자본 축적의 새로운 중심축들이 생겨났다”는 게 맥낼리의 설명이다. 역시 가장 극적인 과정은 중국에서 벌어졌다.
중국의 경우, 토지 사유화는 말 그대로 공유지 인클로저였다. … 부동산 개발업자들, 야비한 투기꾼들, 해외 자본과 한패를 이룬 정부 관리들은 농촌 토지의 수탈 대열에 동참, 가치가 점점 더 오르는 자산들을 쌍끌이라도 하듯 긁어모았다. … 이와 동시에 토지 강탈 및 강제 퇴거, 그리고 농촌의 빈곤화는 중국의 수억 명 민중을 농촌에서 쫓아냈다.
4) 금융화와 신제국주의
과장하지만 않는다면 ‘금융화’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어난 변화를 잘 포착하게 해 준다. 데이비드 맥낼리는 금융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람들의 관계를 점점 더 금융상품의 매매, 즉 금융거래 관계의 일부로 만드는 다양한 과정들을 일컫는다. 그 결과 음식이나, 물, 주거, 의료, 교육, 노후 등 인간 생활의 전반적 과정이 갈수록 시장과 화폐에 의존하게 된다. 또한 이 용어는 자본주의 경제가 갈수록 신용대출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는 상황, 그리고 부나 이윤이 전통적인 제조업에 비해 은행 등의 금융기관에 더 많이 분배되는 상황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시점은 1971년에 미국 정부가 달러와 금의 태환을 중지시킨 순간이다. 일정량의 화폐를 가져오면 중앙은행에서 그것을 일정량의 금과 교환해주던 것을 멈추자 이제 화폐는 금, 즉 실질 가치(의 저장고)와 직접적 연결고리가 끊어진다. 굴레를 벗어난 규제받지 않는 금융시장들의 급격하고 폭발적인 성장이 이어지게 된다.
금융기관들도 가계와 기업에 대출해주고 이자를 받아서 수입을 늘리던 전통적인 형태를 벗어나게 된다. 이제 은행과 금융기관들은 대출과 부채를 주식, 채권 등 판매 가능한 투자상품으로 재포장하는 ‘증권화’에 몰두하게 된다. 너도나도 이런 금융상품과 파생금융상품의 판매와 수수료 수입이라는 돈놀이에 나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제 금융시장은 1960년대 중반에서 1984년까지 그 규모가 무려 200배나 커졌다. “1973년의 하루 평균 외환 거래량은 150억 달러였다. 그러네 12년 뒤 이것이 무려 그 10배인 1500억 달러로 뛰었다. … 다시 10년 뒤 그 수치는 자그마치 1조 2000억 달러로 솟구쳤고 기존의 기록은 새발의 피가 되고 말았다.”
하루 평균을 기준으로 1973년에 세계 외환시장에서 거래된 통화가치는 상품 무역 거래액의 2배였는데, 1995년에는 70배로 폭등했다. 파생금융상품 거래 장외시장의 규모도 주식, 채권시장의 규모를 훌쩍 뛰어넘어서 성장해 갔다. 1990년대 말에 전지구적 외환거래의 양은 세계 전체 연간 GDP보다 10배 이상이나 큰 공룡이 돼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윤의 더 많은 부분이 금융부문으로 이전됐다. 1973년에 미국 경제에서 금융수익은 전체 이윤의 16퍼센트를 차지했지만, 2007년에는 금융수익이 미국 경제의 총이윤 중 41퍼센트나 차지하게 됐다. 이런 변화 속에서 ‘금융화가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 자체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라는 측면만 강조하는 것은 부족했다. 이런 변화는 단기적 이윤만을 앞세우는 자본주의의 속성과 투기적 성격을 분명히 더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부채의 시대’였다. 가계, 기업, 국가 모두가 부채를 늘려나갔다. 노동자들도 부채와 신용의 노예가 돼 갔다. 사회복지 서비스의 축소 속에 “신용카드 사용과 같은 소비자 신용과 주택이나 토지 구매를 위한 융자, 즉 모기지 대출 제도 등을 통해 노동자들은 점점 더 깊숙이 그 신용체계의 궤도에 빨려들어” 갔다.
단결해서 투쟁에 나서는 게 힘든 상황에서는 대출을 늘리는 게 낮은 임금을 보완하기 위한 일종의 대안적 선택이 되기도 한다. 또 주택마련 등에 들어간 과도한 부채는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작용도 한다. 파업이 길어질수록 노동자들은 돌아오는 이자지급과 카드할부금, 채무 상환 날짜의 압박에 더 크게 시달린다. 적당한 타협으로 빨리 파업을 끝내길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다.
제3세계 국가들도 부채의 덫에 걸려 재앙을 겪었다. 1960년대말에서 1980년까지 제3세계 국가들의 부채는 12배나 증가했다. 그런데 미국을 중심으로 금리를 급격히 올리면서 이 나라들은 외채 부메랑 위기에 빠져들었다.
국가 부도에 직면한 이 나라들은 빚을 갚기 위해 빚을 져야 했다. 악랄한 채권자 IMF가 등장했고,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했다. 사유화, 노동유연화, 정부보조금 삭감, 대외개방 등으로 구성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제3세계 민중의 피를 쥐어짜서 채권자들의 금고를 채우는 내용이었다. 근래 그리스에서 반복되고 있듯이 말이다.
제3세계의 부와 자원은 다국적 기업과 서방 은행들로 이전됐고, 이상하게도 빚은 갚을수록 늘어났다. 제3세계 정부들은 빈곤과 질병 속에 죽어가는 국민들을 보면서도 매일 수억 달러의 외채를 상환해 나가야 했다.
그러면서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와 다국적 기업들의 헤게모니가 전세계적으로 더욱 공고해져 갔다. “자본 국제화와 시장 세계화는 조화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특히 가난한 나라들과 관련해서 더더욱 균형을 잃은 관계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확립은 오히려 미국과 미국 금융의 헤게모니를 다시 강화시키는 과정이었다.”
이런 제국주의의 경제적 패권 강화는 2000년대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시도된 제국주의의 군사적 패권 강화 시도와 분리될 수 없다.
5) 이데올로기 공세와 신자유주의 경찰국가화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가져왔다. 시장의 자유로운 운동과 경쟁을 제한하는 모든 것은 악으로 규정됐다. 공동체의 구실, 사회적 책임 등은 최소화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별 노동자들은 서로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에 직면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에서 성별․인종별․민족별로 나뉘어지고 정치적․성적 지향, 종교적 믿음에 따라 분할되어졌다. 실업, 가난 등은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여자아이들과 동성애자는 물론이고 가난한 아이들(특히 유색인종 빈곤층 자녀들)은 자신들이 ‘열등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머릿 속에 각인시키게 된다. 가난한 동네, ‘길 건너편’의 빈민가 출신, 더 어두운 피부색 사람들, ‘정상이 아닌’ 섹슈얼리티,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결점이자 오점으로 낙인찍힌다.
소수자,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구실을 했다. 끝없는 크고 작은 희생양 찾기와 사기 저하가 이어졌다.
자존감뿐 아니라, 안전감과 자신감이 첫 번째 희생물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영향을 받은 개인들은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를 떨어뜨린 죄를 지은 개인들을 찾아내려는 열병을 앓게 된다. 갈등과 적대는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죄인들은 특정되고, 폭로되며, 공개적으로 비난받고 응징을 당한다.
복지는 노동자들을 타락시키는 ‘질병’이 됐고, 저항은 사회를 위협하는 ‘범죄’가 됐다. 단지 이데올로기적 공세만은 아니었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강제하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규율과 처벌이 뒤따랐다. 미국에서 그것은 경찰력과 감옥의 강화로 나타났다.
“신자유주의의 규율과 처벌에 의한 통제 철학을 실제 구현하는 곳은 학교도 공장도 아닌 바로 감옥이다. 그 결과 1980년 이후 미국의 범죄율은 낮아진 반면, 감금자 수는 450%나 증가했다. … [복지 삭감과 억압 강화]이 모든 것이 추구하는 바는 규율과 처벌에 의한 계급적 통제, 그리고 인종차별과 억압이다.”
즉, 폭력이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는 지렛대였다. 지배계급은 입법, 사법, 치안, 투옥과 감금 등을 통해 목적한 바를 이루려 했다. 대량해고, 투옥, 파업 분쇄를 위한 대규모 경찰력 투입 등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특징지었다. 이 임무를 수행한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적 경찰 국가’였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는 사회복지와 안전망 제공에서는 후퇴하고 약화됐지만, 폭력과 억압이라는 측면에서는 강화됐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는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중요하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신자유주의적 공세로 전환하는 데 국가가 한 구실을 분석하는 게 더 중요했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처럼 “국내자본 및 외국자본의 편에서 이윤있는 자본축적의 조건들을 고무시키는 것을 기본임무로 하는 국가장치”에 대해 설명했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전문가와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민주적이고 의회에 의한 의사결정보다도 행정적 지시체계나 사법적 결정에 의한 정부를 강력히 선호”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형식화·사법화되고, 의회 대신 행정부, 특히 경제 부처의 권력이 강화되며, 완전고용과 산업경제의 발전을 추구하는 대신에 금융자유화, 경쟁력 강화, 사회 복지의 노동유연화, 사적 부문에로의 권한 이양이 지배적이 된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 국가는 확실히 지배적 자본가 계급에는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축적, 그리고 더 많은 자유를 제공한다.
나아가 신자유주의 국가는 독립노조와 사회운동 등 “자본축적을 제약하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 결속에 대해 필연적으로 적대적이다.” 그래서 “종종 폭력적인 수단에 의존해 경제와 사회에 개입”한다.
즉 국가는 자본이 마음대로 지배하게끔 완전고용이라는 목표와 ‘시장’으로부터는 후퇴하지만, 유연화에 저항하는 노동 부문에는 철퇴를 날리는 것이다. … 이렇게 1970~1980년대 서구에서 신자유주의는 노동에 대한 공격을 통해 케인스적 복지국가의 사회적 근간이 되는 사회적 세력 관계를 허물어 버림으로써 사적 재산권을 확대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특히 하비는 “신자유주의적 국가 구성에 대한 첫 번째 실험”이 바로 1973년 칠레에서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 이후에 이뤄졌음을 강조한다. 처음부터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국가는 소득과 임금보다는 투자의 회수에 더 유리한 조세법 개정 … 수익자 부담금의 부과, 그리고 기업에 대한 다양한 항목의 보조 및 조세 감면 제공 등을 통해 부와 소득을 재분배한다.”
이것이 피노체트가 칠레를 ‘신자유주의 교리의 실험장’으로 만들면서,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노동운동을 폭력적으로 분쇄하면서 추진했던 방향과 모습이다.
6) 결과 - 이윤율의 회복, 노동계급화, 돌아오는 위기
신자유주의적 공세의 결과는 우리가 수십 년간 지켜보고 피부로 느껴 온 것이다. 먼저 각국에서 노동자 임금의 하락은 그 반대편에서 부자·기업주들의 이윤과 소득을 증대시켰다. 이처럼 이윤몫이 증가하자, 그것은 이윤율이 하락을 멈추는 데 주요한 구실을 했다.
그래서 “1997년 미국경제의 이윤율은 1970년대 초의 수준을 다시 회복했고 유럽에서는 이윤율이 1960년대 중반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사회적 양극화와 소수 권력자 집단으로의 부의 집중을 낳았다.
197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시행한 이후 … 미국에서 소득자의 상위 0.1퍼센트가 전국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8년 2퍼센트에서 1999년에는 6퍼센트로 증가[했고] … 영국에서 소득자의 상위 1퍼센트는 1982년 이래 전국 소득에서 차지하는 몫을 6.5퍼센트에서 13퍼센트로 배가시켰다. 그리고 좀 더 넓게 살펴보면 우리는 모든 국가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부와 권력의 비정상적인 집중을 확인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일시 해결하고, 새롭고 더 강력한 자본 축적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또 다른 결과도 나타났다. 그것은 성공적인 자본축적이 항상 수반하는 프롤레타리아트화와 노동계급의 양적 성장이다.
1980년에서 2000년대까지 세계시장에 들어 온 노동계급의 수는 몇 배나 증가했다. 그 절반 이상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증가했다. 그 규모를 보면 “동아시아에서 노동자 계급은 1억 명에서 9억 명으로 무려 9배 증가”했다.
특히 놀라운 성장세를 보인 것은 바로 중국이다. “2002년 중국의 제조업 종사 노동자 수는 세계 최대의 산업 국가들, 즉 G7(미국,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의 노동자 수를 다 합한 것보다 2배 가량 더 많”았다. 역시나 자본주의의 성장은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게 될 사람들’의 성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어제의 성공은 오늘의 실패를 준비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도 다를 수 없었다. 데이비드 맥낼리는 1990년대 중반에 전세계적으로 제조업체들이 직면한 상품 가격의 내림세를 “마침내 후기 자본주의 시기에 이윤율이 현저히 하락하는 상황”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것은 1982년부터 시작됐던 신자유주의적 호황이 과잉축적과 경쟁적 투자 속에 이윤율 하락이라는 저주에 다시 걸려들기 시작한 증거였다. 경쟁 격화 속에 과잉 투자와 과잉 축적, 수익성 하락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바로 ‘1997년 동아시아 위기’였다.
이 위기의 여진은 1998년 러시아 금융위기, 2000년 미국 닷컴기업 위기, 2001년 아르헨티나 파산 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로 신자유주의적 팽창기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2007년 이후 발생한 위기의 참된 의미는 … 지난 25년의 신자유주의적 팽창과는 질적인 단절을 뜻한다.”
국제적 노동운동의 대응 실패와 위기
노동운동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왜 신자유주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을까. 많은 좌파들이 노조 관료들과 지도부의 수세적이고 타협적인 대응이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분명 타당한 지적이고 진실의 일면을 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설명은 불충분하다.
노동과 자본 사이를 중재하며 갈수록 협상을 우선하고, 투쟁보다 타협을 선호하게 되는 노동조합 관료층의 형성은 자본주의와 노동조합이 존재하는 이상 필연적이다. 하지만 다양한 객관적 변수들, 주체적 대응의 상호작용 속에서 노조관료층도 투쟁을 가로막지 못하거나, 스스로 투쟁에 나서 왔다. 그럴 경우에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공격을 관철시키지 못했는데, 가장 중요하기로는 기층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투지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따라서 정말 물어야 할 것은 왜 노동자들은 노조 지도부가 타협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면서 신자유주의 공세를 막아설 자신감과 투지를 발휘하지 못했을까여야 한다. 어떤 조건과 전략이 이런 실패를 낳은 것인가?
그것은 노동조합을 통한 투쟁과 타협을 제도화시킨 틀 속에서 권익 향상을 추구한 노동조합주의적 대응과 전략이 낳은 실패였다. 물론, 이 전략은 장기호황기 속에서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지키는 데 성공해 온 전략이었다. 하지만 성공 속에서 이 전략의 모순과 문제점도 커져 왔다.
북반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안타깝게도 노동조합이 심각할 정도로 관료주의적으로 되어 버려, 거의 경제적 노조주의의 실무자처럼 되고 말았다. 여기서 경제적 노조주의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조합원에 기반한 노조의 한 운영방식으로, 대개 법률가나 전문 교섭요원, 아니면 경쟁력있는 노동 공무원 등 ‘전문가 집단’에 의존하면서 권익을 지키려 한다. 특히 이 경제적 노조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주로 직접적인 임금이나 사회보장적 혜택에 관한 협상 문제에 초점을 맞춰 운동하는 노조의 특정한 스타일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 도처에 존재하는 다른 피억압 공동체들의 투쟁에 연대하거나 관여하기가 정말 어렵다.
이런 노동조합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은 미국의 ‘실리적 조합주의’(business unionism)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고용주와의 오랜 다년 계약에 기반하고 있다. 계약기간 동안, 이슈들은 극소수 노동자가 관련된 '고충처리절차'에 의해 처리된다. 계약 갱신 즈음해서 “상투적인” 파업이 때때로 벌어지지만, 노조는 몇 년의 수동화된 시기 후에 조합원들을 행동으로 동원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선거에 초점을 두고 새로운 작업장을 조직한다. 노조는 정치적으로는 민주당과 동맹관계이다.
‘실리적 조합주의’는 기존 조합원들의 조건을 잘 지켜내고 혜택도 가져다 줄 수 있었지만, 갈수록 조합원을 수동화시켰고 시야가 협소해 졌다. 그리고 이제 장기호황이라는 조건이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경기가 나빠지고 이윤이 쪼그라들면서 정부와 기업주들은 쉽사리 양보하지 않았고 공격적 태도를 강화해 갔다. ‘국가의 경쟁력’, ‘회사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협조하고 양보하는 것이 결국 노동자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체제의 특정 부문의 생존에 달려있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었다. 현재의 생활수준과 노동조건을 지키는 일은 ‘우리’ 공장, ‘우리’ 회사, ‘우리’ 나라 전체를 괴롭히고 있는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며,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괴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언론도 이런 주장을 반복했다.
많은 노조 지도자와 노동자들이 ‘기존 조합원들을 지키기 위해 신규 조합원과 비조합원들의 피해를 눈감아 줘야 한다’거나, ‘고용안정을 보장받기 위해 임금 인상을 양보해야 한다’는 압박에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1984년 GM에서 타결된 노사 협상안은 그것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이 “타결안의 ‘핵심요소’는 UAW[전미자동차노조]가 — 전국적 파업을 벌이지 않고서도 협상할 수 있는 — 고참 조합원을 위한 몇 가지 보장조항을 제공받는 대신에 기층고용인의 보호를 기꺼이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즉 “고참조합원에 대한 불안정한 보호조치들을 제공받는 대신 신참 노동자의 권리를 희생하는 파우스트적인 교환”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다층임금제 협상의 성공이 고참 노동자들에게 안전성을 보장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이들의 교체를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었다.”
이제 노동조합은 노사협조주의로 기울어갔고, 의례적인 파업조차 점차 줄어들어 갔다. 노동조합이 정치적으로 의존하던 미국 민주당도 신자유주의를 뒤쫓으며 악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민주당 정부 하에서도 상황이 나아질 수는 없었다. 노동자들간의 경쟁은 치열해져갔고 노조 조직률은 갈수록 하락해 갔다. 노동조합은 쇠락해 갔다.
이것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 서유럽 등에서 국제적 규모로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대규모 노동조합이 하나둘씩 고용주들의 공격에 함락 당하자 노동운동은 절망적으로 퇴각했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대처와 맞섰던 광부 노조, 레이건과 맞섰던 항공관제사 노조의 심대한 패배는 노동운동의 이런 쇠락을 가속화시키는 핵심 지렛대가 됐다.
정부와 기업주들은 노동운동의 전통과 기반이 취약한 지역이나 심지어 다른 나라로 공장과 시설을 옮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더욱 노동조합은 취약해지고 조직률은 하락해 갔다. 노동조합들은 다른 노동조합들과 통합해서 덩치를 키우는 식으로 대응했지만, 이것이 신규 조직률의 하락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노동운동의 전통과 기반이 없었던 지역이나 새롭게 성장하는 서비스 산업 등에서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노동조합원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균열도 커져갔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들은 해외무역에 노출된 공장들이 다름 아닌 저임금 노동을 찾아서 자신들을 내팽개칠 수 있다고 느꼈다. … 한편 이웃들은 노조원들을 시샘하기 시작했다. … 노조원들이 일하는 공장은 여전히 보수가 괜찮지만 이웃들은 그렇지 못했다. … 그들은 노조원들이 힘들다고 말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여겼다. 노조원들이 온갖 혜택과 보호를 받는 응석받이 아이같다고 생각했다.
노동유연화와 복지 삭감 속에서 비정규직뿐 아니라 정규직도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됐고, 노동조합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랬다. 노동자들의 자신감은 낮아졌고,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이론과 개념들이 제기됐다.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이 그렇게 많은 호응을 얻은 [주된] 이유는 고용이 불안정해진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거나, 그들이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어서가 아니라, 지난 30년간의 패배와 신자유주의의 부상, 복지국가의 해체가 2차 세계대전 후보다 오늘날의 노동자에게 실업을 훨씬 더 심각한 문제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 이것은, 작업장 조직화가 연이어 실패하고 조직이 축소되는 현상과 함께,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힘이 사라졌다고 느끼게 했습니다. 이는 또한 많은 좌파들이 산업 노동계급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이 뭔가 새로운 현상이라고 믿는 경향을 낳았습니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 http://anotherworld.kr/164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이론의 혁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 새로운 투쟁의 도약을 위해 3 (0) | 2015.10.28 |
---|---|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 새로운 투쟁의 도약을 위해 2 (0) | 2015.10.25 |
왜 '아래로부터 사회변혁'이 그토록 중요한가 (0) | 2015.09.25 |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적 원칙은 어떠해야 하는가 (0) | 2015.09.24 |
저항을 위한 토대 건설하기 (0) | 2015.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