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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논쟁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3. 25.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

- 길을 찾으려면, 협력하며 동지적으로 토론해야


전지윤

 


최일붕 동지가 나를 비판한 것에 대해 답변하는 글(http://rreload.tistory.com/260)을 쓰면서, 나는 이것이 과연 뭔가 제대로 된 토론으로 발전할 것인가?”라고 걱정했었다. <노동자연대> 169호에 실린 최일붕·김하영 동지의 재반박 글들을 보면서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씁쓸해진다.(http://wspaper.org/article/16985, http://wspaper.org/article/16996,

http://wspaper.org/article/17013)

 

일단 두 동지는 지난 글에서 내가 비판적으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설득력있는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두 동지의 답변은 좀 혼란스럽다. 김하영 동지는 모순을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현실은 모순돼 있고 분석은 현실의 모순을 다뤄야 한다. 그러나 주장 자체가 앞뒤가 모순되고 혼란스러워서는 안 되지 않을까


나는 두 동지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었다. “과연 지난해에 조직 노동자들은 파업 호소만 하면 싸울 자신감과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인가? 계급 협력을 우선시한 민중주의자들과 민주당과의 공조에 매달린 민주노총 지도부가 그 투지를 억누르며 성사 직전이던 총파업을 망쳤나? 총궐기는 총파업을 피하려고 고안된 것이었나?” 그러면서 나는 크게 네 가지의 비판적 제기를 했는데, 이에 대한 두 동지의 답변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나는 두 동지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최저임금 1만 원, 공적연금 강화, 비정규직 관련 요구가 왜 전국민의 지지를 받겠다는 뭔가 덜 중요한 민중주의적 요구인지가 설명돼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두 동지는 먼저 자신들도 그런 요구를 지지했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쟁점을 다뤄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다고도 강조한다.(이하 출처를 밝히지 않은 글을 모두 <노동자연대>169호에서 인용)

 

동시에 두 동지는 이 요구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계속하고 있다. “전지윤은 모른 체하지만, 비정규직 2법 저지, 최저임금 대폭 인상, 공적연금 강화 등은 노동계가 더민주당이나 시민단체들도 지지해 줄 것이라고 믿는 요구들이다.” 그러면서 부문과 업종을 넘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고 연대를 가능케 할, 나아가 더 넓은 사회적 지지와 연대를 불러 올 요구들이 앞세워져야 한다는 내 예전 주장도 문제삼았다.

 

그러나 과연, 민주당이나 시민단체가 지지하는 요구를 내세우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고, 지지하지 않는 요구를 내세우는 것이 더 나은 일인가? 시민단체가 외면하는 대기업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는 특별히 더 계급적 요구이고, 시민단체가 지지하는 테러방지법 폐지·위안부 합의 폐기·교과서 국정화 중단은 민중주의적 요구인가?

 

부문을 넘어 넓은 사회적 지지를 받는 요구나 투쟁이 문제가 있다면, 2014년 철도민영화 반대 요구와 파업도 문제가 있었고 철도공공성을 내걸지 말아야 했는가? 그렇지 않다는 걸 두 동지도 잘 알 것이다. 예컨대 테러방지법 폐기는 중요한 계급적 요구다. 민주주의의 제약으로 가장 고통받는 게 노동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일붕 동지도 노동자들의 관심사가 노동개악에 집중됐기에 테러방지법은 안타깝게도 결국 통과됐던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두 동지 자신도 관심사가 노동개악에 집중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로 노동자연대는 지난해 내내 노동개악 반대에 관심사를 집중했다. 이게 의심스러운 사람은 지난해 나온 노동자연대의 신문 1면과 헤드라인들만 쭉 훑어봐도 압도적 대부분이 노동개악 반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http://wspaper.org/4_oldies_cover.php)

 

민중총궐기에서도 노동자연대는 노동개악 반대를 압도적인 최우선 요구로 내걸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래서 백남기님이 쓰러지고 공안탄압 광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을 톤다운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노동계급이 노동조건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앞장서 싸우는 게 중요한 상황에서 말이다.

 

물론, 두 동지는 싸워서 자신의 조건을 지키지 못한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자들의 문제에 연대하고 나설 자신감이 생길 수 없다거나 최저임금을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다면 파업이 잘 안 될 것”(<150>)이라고 우려한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지난 글에서 조직 노동자들이 부문의 조건과 요구에 따라서 칸막이화되고 각개 약진·격파 당하는 상황에서 그런 입장은 부적절하다고 했던 것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노동자들은 박해받는 소수 종교와 탄압받는 학생들을 위해서 자기 일처럼 투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렇지 않다는 좌파들을 비판했다. 나도 비정규직 2법 저지, 최저임금 대폭 인상, 공적연금 강화 등과 같이 조직노동자를 넘어선 전체 노동계급의 지지까지 받는 요구들을 민중주의적이라고 깎아내릴 순 없다고 본다.

 

조직 노동자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지지를 받는 요구를 내세우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만약 그게 문제라면 빵과 평화같은 전체 노동자·민중의 열망을 대변한(심지어 토지 강령에서는 중간계급 농민의 요구에 타협한) 볼셰비키도 민중주의자였다는 말이 된다. 좌파는 이런 역사적 모범을 자꾸 잊을 게 아니라 거기서 배우는 게 옳다


더불어 자본주의가 뭐라고 보냐고 묻는 김하영 동지에게 되묻고 싶다. 왜 노동계급 중에서 조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에 대한 요구와 투쟁만이 그토록 중요하고 우선이라고 보는 것인지, 그것이 과연 정해진 마르크스주의 핵심 원칙인지 말이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을 넘어서는 문제로는 자신감을 갖고 파업에 나서기 힘들다는 주장이야말로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불신하는 것이 아닌지 말이다.

 

둘째, 나는 총궐기가 노동개악 저지 총파업을 피하기 위해고안된 것이라면 왜 그토록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고, 노동개악법의 국회 통과를 늦추는 효과를 낸 것인지 설명돼야 한다고 제기했다. 이에 대해 두 동지는 먼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민중총궐기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가졌다면, 그것은 총파업은 못 한다는 것을 둘러싼 단결이었을 것이라며 여전히 기존 견해를 반복한다.

 

그러나 동시에 민중총궐기의 압도적 주력부대가 노동자였고 파업들이 누적돼 온 결과가 노동자대회를 계기로 거리 항의로 나타난 것이며 민중총궐기를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부분 회복되는 징후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거의 다 노동조합이 동원한 것이고 약간의 농민과 빈민이 좀 더 붙은 것에 불과하며 이 힘이 노동개악도 막았다는 것이다.(민주노총 스스로도 연대한 사람들을 경시하며 이렇게까지 평가하지는 못할 듯하다.)

 

총파업을 총궐기로 대체하고 조직 노동자들의 동원을 회피하면서 노동자 투쟁은 더 이룰 수도 있었던 전진을 하지 못했다고 했던 지난번 글과는 약간 강조점이 달라진 것이다. 이것은 예측이 어긋나자 핑계를 찾는 것 아닌가라는 내 비판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예측이 어긋난 게 아니라 바램에 조금 못 미쳤을 뿐이라며 지난해 투쟁에 대한 평가를 자신들의 예측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자신감이 높아지는 노동자들은 파업할 태세가 돼 있다는 예측은 옳았고 지난해 상황도 그것을 보여 줬다는 말이다.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불신하는 전지윤은 이런 예측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노동계급은 실은 이미 귀환했다고도 한다. 심지어 “20년 전의 한국 노동자들에 비해 지금의 한국 노동자들이 약화됐다거나 사회적 고립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한다.

 

20년 전이라면, 1997년 총파업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민주노총 파업 지지율이 80%에 달하던 때이다. ‘이미 귀환한 노동계급을 못 알아 본 나로서는 당혹스러운 말이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최일붕 동지가 확률론적 기대값이 낮은 일에도 도박을 걸어야 한다고 말할 이유도 없다.

 

사회적 지지 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노동자 투쟁의 폭발 가능성은 확률적 기대값이 높은 일일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가능성이 높았던 총파업은 왜 실질적이 되지 못한”(이것은 총파업을 아무것도 아니었던 양 일축하려는 내 표현이 아니라 159호에 실린 김하영 동지 자신의 표현이다)총궐기로 톤다운 됐던 것일까?

 

셋째, 여기서 문제는 내가 던진 또 다른 의문으로 연결된다. “한상균 지도부가 지난해 몇 차례나 총파업 지침을 내린 것이 과연 총파업을 억누른 것인지, 그런 파업 호소에도 왜 실질적인 파업이 벌어지지 않은 것인지가 설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꾸준히 자신감이 높아져 온 노동자들이, 1997년 총파업 수준의 힘과 사회적 지지까지 갖추고 있었다는데 말이다


이에 대한 두 동지의 답변은 지난번과 별 다르지 않다. ‘민중주의지도자들이 문제였단 말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한데 민주노총 내 국민파·전국회의·중앙파 등도 민중주의적이고 훨씬 더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민중주의적이라고 한다.

 

이처럼 거의 모든 노조 간부들이 민중주의인 상황에서 한상균 집행부노동조합 관료 전체의 규범에 순응했고, 그래서 “‘민중총궐기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총파업을 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럼 이처럼 민주노총 거의 모든 정파를 장악한 채 투쟁 약속을 계속 어기는 민중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두 동지가 제시하는 대안은 간단하다. “좌파 활동가들의 독립적인 네트워크가 있어야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독자적인 투쟁도 해 나갈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자주파, 국민파, 중앙파에 현장파, 전지윤까지 다 민중주의적이거나 거기에 순응하는 상황에서 좌파 활동가들의 독립적인 네트워크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으며 과연 만들 수 있는 것인가?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힘이 강력하고 사회적 지지도 많은데 왜 독자적 투쟁이 가능한 독립적 활동가 네트워크는 안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파업 지침만이 아니라 독자적 투쟁이 가능한 독립적 활동가 네트워크도 있어야 파업이 가능하다면 지난해 노동자연대의 예측은 너무 낙관적이었던 것 아닌가?

 

결국, 노조관료로부터 독립적인 현장조합원들의 행동과 네트워크 건설은 특정한 조건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 그것이 가능할 정도로 자신감과 투쟁 수위가 높아지진 않고 있으며 단지 노조관료들이 투쟁을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니란 점도 직시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작업장 투쟁만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니다.

 

최일붕 동지의 왜곡과 달리 나는 작업장 투쟁과 대립시켜 거리 투쟁의 가능성을 높이보고 내 예측이 맞았다고 자랑한 바가 없다. 나는 오히려 그런 입장을 반편향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나는 계급투쟁의 양 측면인 작업장 투쟁과 거리 투쟁 둘 모두 지진부진한 상태이며, 이것이 바로 계급의 귀환이 현실이 아닌 증거라고 본다.”(http://rreload.tistory.com/49)

 

따라서 나는 민중총궐기를 예측한 바도 없고, 단지 민주노총 총파업과 민중총궐기 등을 지지하면서 작업장 투쟁과 거리 투쟁의 결합,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의 결합, 부문의 칸막이를 넘어선 더 넓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를 거듭 주장해 왔을 뿐이다. 이것이 왜 기회주의적 민중주의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넷째, 내가 지난 글에서 마지막으로 던진 비판적 제기는 민주노총 지도부와 자주파에 대해서는 이토록 지나친 잣대를 들이대는 노동자연대가 정의당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우호적 태도를 보인다는점이었다. 정의당은 현재, 노동자연대가 그토록 문제삼는 민중주의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계급연합적 성격의 진보정당인데 말이다.

 

이에 대해 두 동지는 우리가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또는 더 일반으로 자민통계를 차별한다는 전지윤의 비판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말한다. 녹색당, 노동당, 정의당, 민중당 중에서 특히 정의당에 더 우호적인 것 같다는 내 관측이 근거없다는 것이다. 다른 세 정당에 대해서는 성장을 환영해야 한다”, “대체로 지지할 만하다며 공약을 소개하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데 말이다.

 

정의당 내 좌파에 대한 상대적 친화성(무비판적인 건 아니다)을 드러내는 게 무슨 문제인가?”라고도 한다. 그런데, 정말 무비판적이지 않다면 그 동지들이 종북몰이에 타협하고 야권연대(양경규 공동정부 구성까지 논의할 수 있다”)를 추수한 것을 비판해야 옳다. 한상균 위원장이 잡혀갈 때 나오지 않은 정의당 의원들을 얼마나 일이 많았겠습니까라며 옹호한 것도 말이다. “좌파적 노동운동가라고 추켜세우기만 할 게 아니라.

 

게다가 두 동지의 민중당에 대한 상대적 차별은 이번에도 계속되고 있다. “민중연합당은 장차 북한 관료의 (미온적) 지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자민통계가 북한 통치자들의 지지를 받길 원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종북몰이에 시달리는 세력의 친북성을 맥락없이 거듭 지적하는 게 과연 비판적 지지인가? 나처럼 방어를 강조하는 것은 아첨인 반면?

 

결국 두 동지는 내가 던진 네 가지 문제제기와 의문에 대해서 별로 성실하거나 설득력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반면 안타깝게도 지면을 가득 채운 것은 나에 대한 온갖 왜곡과 감정적 매도다. 나는 지난번에 근거없는 온갖 ‘~주의를 남발하는 것을 피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더 많은 ‘~주의가 돌아 왔다. “초좌파적 선전종파주의”, “회색주의”, “중간주의”... 이게 다 나에게 정확하게 적용되므로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같은 딱지를 붙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토론과 비판이 가능하다고 본다. 실제 내가 쓴 지난번 반박글에는 이런 딱지 붙이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동지에게는 그것이 벗어나기 어려운 하나의 습관이 돼 버린 것 같다.

 

, 나는 지난 글에서 구체적 근거와 인용 제시도 없이 자의적으로 상대의 입장을 왜곡해선 안 된다고 항변했다. “나는 결코 공무원연금 개악을 수용하고, 민주노총 총파업에 사실상 반대하며, 민주당과 전략적 야권연대 등 계급협력을 추진하자는 입장이 아니라며, 내가 그 정반대의 주장을 한 근거를 샅샅이 찾아서 제시하고 인용했다.

 

그랬더니, 두 동지는 이를 뒤집을 근거와 출처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근거없는 왜곡을 두 배로 해서 나에게 돌려주고 있다. 두 동지는 마치 내가 이런 주장을 한 것처럼 서술한다. “노동계급은 자력으로는 전진할 수 없다”, “상황을 돌파하려면 민중연합당을 엄호해 진보정당을 재건해야 한다”, “진보당 재건 안 되면 노동운동의 돌파구가 열리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내 주장을 이상하게 과장하고 비틀어서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은 더 많다. 내가, 총궐기를 자민통계가 다 조직한 것처럼 착각했고, “공무원연금 투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 ‘거리 항의와 노동자 파업의 결합을 반대했, ‘조직 노동자들의 양보를 지지했다는 식이다.

 

도대체 내가 언제 어디서 이런 주장을 하고 태도를 취했다는 말인가? 트로츠키, 레닌, 그람시, 룩셈부르크 등을 쉴 새없이 인용하는 것도 좋은 데, 그보다 먼저 나를 비판하는 근거부터 제시해야지 않는가?

 

지난해 연말 민중총궐기 투쟁 국면에서 내 입장을 매도하는 부분도 심각하다. 여기서 최일붕 동지는 전지윤은 노조 지도자들에게 파업 촉구하는 것을 아예 반대했다 어차피 민주노총 총파업은 가능하지도 않다고도 덧붙였다. 노동자 파업 촉구를 지지하기를 냉담하게 거절했다고 쓰고 있다. 내가 연석회의 석상에서 총파업 촉구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써 온 글과 달리 회의에서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다는 말이다. 회의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뻔히 알텐데도, 이런 왜곡을 하는 걸보면 서글프기도 하다. 자신들의 방향과 전술에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파업 반대자로 보면서 파업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곧 파업 촉구 반대라는 식의 비약을 하는 것 같다.


이런 매도를 당한 것은 나만이 아니다. 최일붕 동지는 나와 함께하는 공무원노조 활동가 회원도 진지하게 연금 방어와 이충재 반대를 했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유일한 근거는 그 동지가 노동자연대가 발의했던 여러 연서명에 참가하지도, 호응해 주지도 않았다는 것뿐이다.

 

제안도 하지 않은 서명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동지가 공무원 연금 개악과 이충재 지도부의 후퇴에 반대하는 여러 글을 쓰고 온갖 집회에 참가하고 조합원들의 대거 참가를 조직해 온 것은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http://rreload.tistory.com/m/search/%EC%A0%95%EA%B8%B0%ED%98%81)

 

가장 가슴아픈 것은 쓰레기 분석”, “충격적으로 드러난 부정직운운하며 나를 인신공격하는 부분이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데, 이미 노동자연대 홈페이지에 특별코너를 만들어 전지윤의 야비한 거짓말”, “최악의 기회주의자”, “예의 그 교활함을 비난하는 글을 1년반 전부터 올려놓고 책자로 만들어 배포해 왔기 때문이다.(http://wspaper.org/article/15181) 그러면서 이번에 같은 단체에 있었던 사람들끼리 언쟁한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는 건 너무 궁색하다.

 

내가 노동자연대를 “‘성폭력 가해 단체로 낙인 찍으려고 끊임없이 모략과 음해를 했다는 것도 억지다. 나는 한 성폭력 사건에서 우리가 잘못 대처했고, 당시 노동자연대 지도부였던 나부터 큰 책임이 있다고 반성하면서, 피해자에게 함께 사과하자고 제안했을 뿐이다. 그러면 내가 나 자신을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 찍었다는 말인가?(‘더 늦기 전에 함께 반성하며 이 고통을 끝냅시다http://rreload.tistory.com/117)

 

게다가 최근,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나를 비판한 글들을 모아 또다른 소책자로 제작해 판매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단체의 총선 공동투쟁본부참가 신청까지 가로막고 나섰다. 우리는 총선을 앞두고 진보좌파 진영이 힘을 모으자는 취지에 공감해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을 압박해 우리의 연대체 참가조차 가로막는 노동자연대 지도부의 비동지적 태도는 어떻게든 정당화되기 어렵다.

 

구속까지 겪으며 18년 가까이 같이 활동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적대감을 드러내야 하는가. “있으나 마나 한 조직하나마나한 소리라면서 이처럼 고슴도치처럼 반응할 이유가 있는가. 노동자연대의 주요 회원 중에 단 한 명도 전지윤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거듭된 확인이, 앞으로도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압박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난 2014년 내부 논쟁 때 나를 방어해 준 동지들이 40여 명이나 있었다는 게 새삼 감사하게 여겨진다. 이 매우 고맙고 용기있는 동지들이 기가 죽어 우물쭈물하면서 ‘29:1’의 토론회가 됐던 것이라는 최일붕 동지의 말은 솔직하지 않다. 그의 분파는 세계 최단명이었다고 하지만, 그러면 분파 활동을 3개월 밖에 허용하지 않는 노동자연대의 규약이 문제였다는 말이 된다.

 

사실, 두 동지가 이처럼 감정적으로 나오는 것이 내 지난번 글 때문이 아닌지 하는 후회도 된다. 조심한다면서도 좀 날을 세운 것이 두 동지의 감정을 건드렸다면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또다시 단순한 위선이며 가식적”“빈말이라 무시하겠지만 이 말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노동자연대 동지들의 주장에 많은 부분을 공감·지지하며, “투쟁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의 있게 뛰어든것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이제 그만 감정적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동지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을 해줬으면 좋겠다. 전체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지켜보는 여러 동지들을 위해서도 함께 협력하면서 토론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그러면서 마르크주의의 핵심 원칙이 정말 무엇인지 같이 찾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빈말이라도 이런 반응과 제안을 듣고 싶다.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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