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토론과 논쟁

맑스주의자로서 여성억압에 대해 분석하고 실천하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1. 15.

- 논쟁에서 제기된 두 가지 쟁점에 대한 견해

 

김민재



['변혁재장전' 활동가 전지윤이 '노동자연대'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에 대한 논쟁이 전개돼 왔다. 아래 글은 이 논쟁에 개입하면서 몇가지 쟁점에 대해 또다른 측면에서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논쟁이 더 풍부하고 깊어질 수 있도록 날카롭고 진지한 의견을 기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작년 9, 전지윤 동지가 사회재생산이론, 맑스주의 전통과 여성억압의 관계 등에 대해 몇 가지 이론적 쟁점들을 제기하면서 쓴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모순의 교차와 투쟁의 결합>(이하 <결합>)에 대해 정진희 동지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쟁점들>(이하 <쟁점들>)이라는 반론글을 작성하였고, 최근에는 그에 대한 전지윤 동지의 재반론 <여성 억압-더 구체적이고 종합적 시야로 봐야 한다>(이하 <여성억압>)가 나왔습니다.


정진희 동지의 입장은 소속 조직 노동자연대의 입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한데, 노동자연대의 입장이나 실천에 대해 아주 잘 알지는 못하는 제3자의 입장에서는, 이 논쟁에서 여성 문제를 맑스주의 이론으로 분석하는 것과, 여성 문제에 대한 SWP와 노동자연대라는 조직의 태도 및 입장에 대한 평가가 다소 뒤섞여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더 많은 쟁점들이 제기되기는 했지만, 사회주의자로서 대학 내 여성주의 학회를 운영했던 경험이 있는 학생으로서 제가 견해를 밝히고 싶은 쟁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 가사노동이 생산적 노동인지 비생산적 노동인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지윤 동지가 기존 노동자연대의 태도를 비판하며, 가사노동이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잉여가치를 (간접적으로나마) 생산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정진희 동지는 가사노동이 생산관계 외부에 있는 무급 노동으로서 사용가치는 생산할지언정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비생산적 노동이라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습니다.


이에 대한 제 입장은 맑스주의 경제학에 입각했을 때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저는, 가사노동의 존재를 자본주의 하 여성억압의 핵심 동력이나 기제로 보고 가사노동이 자본가계급의 이윤을 늘려 준다는 명제를 애써 입증하려는 것이, 맑스주의에도 페미니즘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막신 몰리뉴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자본주의 하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별도의 기제나 동학, 범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며, 여성이라는 집단을 출산 가능 집단으로 정의했을 때 자본주의가 성맹적(sex-blind)이라는 사실 자체가 여성을 열등한 노동력으로 만듦으로써 차별의 토대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여성 문제에 대해 맑스주의자들, 특히 SWP 이론가들과 노동자연대가 선전하는 입장 및 태도에 대한 평가 문제입니다.(사실 이에 대해 논하자면 노동자연대 성폭력 사건에 대한 평가가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저는 노동자연대가 피해호소인에게 심각한 2차 가해를 저질러 왔으며 이에 대해 반성하고 그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논쟁의 쟁점은 이론적인 문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전지윤 동지는 <결합>에서, SWP와 노동자연대가 페미니즘과 선을 그으며 억압에 덜 민감한 태도를 보여 왔다고 비판하며 특히 남성 노동자가 성차별로 인해 얻는 이득이 적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 착취에 맞서는 투쟁만을 너무 강조하고 억압에 맞서는 투쟁을 과소평가하는 태도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진희 동지의 반론은 전지윤 동지도 이미 상당 부분 인정하는 원칙만을 반복하는 내용이었기에, 전지윤 동지는 재반론글 <여성 억압>에서 자신의 주장은 그 원칙에 반대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원칙에 부합하는 태도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음을 재차 강조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SWP와 노동자연대에 대한 전지윤 동지의 문제제기가 타당하고, 정진희 동지가 그 문제제기의 합리적 핵심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고 깎아내리려고만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만, 시야를 노동자연대로부터 (적어도 제가 경험한 바에 한해서) 운동 진영 전반으로 넓힌다면, 현재 맑스주의자들의 문제는 여성억압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성 당사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을 위해 페미니즘을 배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여성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주장을 하지 않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연대가 맑스주의에 입각하여 여성 문제에 대해 나름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며 기존 페미니즘 분석과의 이론적 차이를 강조하는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렇더라도 노동자연대가 전지윤 동지의 주장을 폄하하려고 하기보다는, 선전의 어조 및 태도를 되돌아보고 개선하는 것이 운동사회의 이런 지형을 바꾸는 데도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가사노동의 문제

 

1.1 가사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가?

 

적어도 맑스주의 가치론의 입장에서 볼 때 가사노동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볼 여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전지윤 동지는 <여성억압>에서 노동력 상품은 자본주의에서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고, 명백히 교환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가사노동이 교환가치를 만들지 않는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라고 하며 가사노동 없이는 노동력 재생산이 불가능함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집 안에서 무급으로 수행되는 가사노동이 과연 가치를 생산하여 노동력 가치에 그 가치를 더하는지의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물론 논쟁에 참여하신 두 분 모두 잘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노동력 가치에 대해 맑스가 말한 바를 재확인해 보겠습니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 가치인 한, 노동력 그 자체는 거기에 대상화되어 있는 일정한 양의 사회적 평균노동을 표현할 뿐이다. 노동력은 오직 살아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서만 존재한다. (중략) 노동력의 생산이란 이 개인 자신의 재생산, 즉 그의 생활의 유지이다. 살아 있는 개인은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귀착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다. (칼 맑스, <<자본론 I ()>>, 비봉출판사, 김수행 역, 223)

 

노동력의 가치는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의 가치로 분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가치는 이 생활수단의 가치[, 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변동한다. (칼 맑스, 위의 책, 225)

 

이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노동력 소유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그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입각했을 때 노동력 가치는 다음과 같이 계산될 것입니다. 편의상, 노동자가 일하고 돌아와서 다음날 일하러 갈 때까지 햄버거 1개를 먹어야 노동력이 재생산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때 그 노동자가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1개를 구매하여 먹는 경우를 가정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노동력 가치는 그 햄버거 1개의 가치인 1천 원일 것입니다.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만든 그 햄버거의 가치는 예를 들자면 불변자본 2백 원, 가변자본 4백 원 즉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일한 4시간, 잉여가치 4백 원과 같이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노동자가 식재료 150원어치만을 구입하여 직접 햄버거를 만들어 먹었다고 가정한다면, 노동력 가치는 150원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그 노동자가 식재료를 갖고 노동하는 시간이 5시간 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5백 원으로 환산하여 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노동자의 배우자가 식재료를 갖고 5시간 노동해서 똑같은 햄버거를 만들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전지윤 동지의 첫 글 <결합> 각주 10에서도 잘 지적되었듯이, “A의 엄마가 A에게 밥을 차려주고 옷을 빨아주는 것은 A가 생활을 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것을 얼마어치라고 계산해 내기는 어렵고, 시장에서 ‘A의 엄마가 A에게 밥하고 빨래해주는 능력‘B의 엄마가 B에게 밥하고 빨래해주는 능력을 상품으로 내놓고 서로 가격을 비교해서 구입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기에, 비록 해당 사회의 중년 여성이 가내에서 자식에게 밥을 차려주고 옷을 빨아주는 노동에 평균적으로 6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600원으로 환산하여 AB의 노동력 가치에 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똑같이 사람이 노동해서 만든 똑같은 햄버거라고 해도 가치를 갖지 않을 수도 있고 가질 수도 있습니다. 팔려고 만든 햄버거와 그런 목적 없이 만든 햄버거, 즉 상품인 노동생산물과 상품이 아닌 노동생산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노동자에게는 햄버거가 필요하기 때문에 햄버거를 생산한 사람이(아르바이트 노동자가, 혹은 노동자 본인이나 그 배우자가) 노동력 상품의 재생산까지 수행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약으로 보입니다. 아르바이트 노동자, 노동자 본인, 혹은 그 배우자는 햄버거를 생산한 것이고, 그 햄버거가 상품가치를 가져서 그 가치를 노동력 가치에 이전하는지, 아니면 상품가치를 갖지 않는지의 여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햄버거라는 유형의 물건을 무형의 서비스로 바꾸어도 결론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립학교에서의 교육과 훈련은 노동력 상품을 재생산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가사노동 역시 그렇다는 견해를 제시해 주신 분이 계셨는데, 맑스가 분명 노동력 가치 부분에서 교육과 훈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육과 훈련이 노동자에게 사용가치로서 필요하고 의미가 있기 때문에, 즉 노동자로 하여금 기술을 배우고 지식을 늘리도록 해 주기 때문에 교육과 훈련이 노동력 상품을 생산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유기체의 일반적인 천성을 변화시켜 일정한 노동부문에서 기능과 숙련을 몸에 익혀 발달한 특수한 노동력으로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훈련 또는 교육이 필요한데, 거기에는 또 얼마간의 상품들(또는 그 등가)이 소요된다. 이 비용은 노동력이 어느 정도로 복잡한 훈련과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비용은 [보통의 노동력의 경우에는 매우 적지만]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지출되는 가치 속에 들어간다. (같은 책 225)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훈련이든 교육이든 어떤 무형의 서비스이든 간에 거기에 소요되는 얼마간의 상품들(또는 그 등가)”입니다. 그러므로 공립학교에서든 공립병원에서든 어디서든 어떤 교육이나 훈련, 의료 등의 서비스가 그 노동자에게 무료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노동력 가치에 더해지지 않을 것이고, 반면 그것들이 상품으로 내놓아진 것이라서 노동자가 그 서비스를 받기 위해 비용을 내야 한다면 그만큼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품으로서의 음식을 만드는 노동이나 돈을 받고 어떤 장소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청소노동, 돈을 받고 간병해 주는 노동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가사노동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습니다. 가사노동이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에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한다면 공기도 노동자의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공기가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며 공기의 가치도 노동력 가치에 이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사노동은 사람의 노동이고 공기는 사람의 노동이 개입되지 않으니까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사용가치일 뿐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맑스의 다음 진술이 말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중략) 미국인 쿠퍼가 한 덩이 빵으로부터 그에 사용된 노동, 제빵공, 제분공, 농부 등의 노동을 빼버리면 무엇이 남겠는가? 인간에게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야생의 풀씨 몇 알이라는 것을 통속적으로 밝힌다면, 이 모든 의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교환가치의 원천이 되는 바와 같은 추상적 노동이 아니라 소재적 부의 원천으로서의 구체적 노동, 간단히 말해 사용가치들을 산출하는 한에 있어서의 노동이다. (중략) 사용가치로서의 빵에서는 식량으로서의 그의 속성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지 농부, 제분공, 제빵공 등의 노동들이 결코 아니다. 어떤 발명에 의해 이들 노동의 20분의 19가 생략된다 해도 빵덩이는 이전과 동일한 봉사를 할 것이다. 그것이 만들어져서 하늘에서 떨어진다 해도 그것은 사용가치를 조금도 잃지 않을 것이다. (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중원문화, 김호균 역, 22-23)

 

그렇기 때문에 노동력 상품 생산의 경우에도 오직 교환가치의 담지자로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생산된 사용가치만이 노동력 상품의 가치에 포함될 수 있다.”(정성진, <자본주의와 가사노동: 마르크스 가치론의 쟁점>)는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가사노동 논쟁에서의 이 쟁점에 대한 리즈 보겔의 견해도 꽤 명확합니다.

 

가사노동 논쟁이 시작된 지 몇 해가 지난 후, 어떤 문제들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결국 밝혀진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라는 사회적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론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용이하였다. 일찍이 가사노동이 직접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들을 생산한다고 한 벤스턴의 통찰은 본질적으로 올바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학적 의미에서, 가사노동은 생산적일 수도 비생산적일 수도 없으며, 여성은 가사노동자로서 착취받지 않는다. 동시에,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의 재생산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리즈 보겔, <<맑스주의와 여성억압: 단일이론을 향해>> 2<10년 간의 논쟁>, 미출간, 황정규 역)

 

리즈 보겔도 말하고 있듯이,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에 필수적이라고 할지라도 가사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할 뿐 맑스주의적 의미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전지윤 동지도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여성억압>에서 정진희 동지의 입장에 대해 여기서, 러시아 혁명의 변질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전개 속에서 국가자본주의론을 제시하며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을 추구하던 자세는 찾기 어렵다.”고 쓴 것 같습니다.


저는 국가자본주의론도 자본주의 개념을 무리하게 확장시킴으로써 맑스주의 경제학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 버렸다는 에르네스트 만델(<<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사실의 검증을 이기지 못한 이론>, <궁지에 몰린 도식적 교조주의>에 나온 만델의 입장)에 동의하는 편이며, 이 문제에서도 가사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가치론을 혁신한다면 그 결과물을 계속 맑스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1.2 자본주의 하 여성억압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적, 실천적 대응: 사회적 임금 투쟁을 중심으로

 

또한 자본주의가 노동계급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물론, 가사노동에 육아를 포함시킨다면, 현 정세에서 국가가 보육예산 삭감 등을 통해, 자본가계급이 노동강도 강화 등을 통해 아이를 낳고 길러내는 일에 대한 책임을 개별 여성 노동자에게로 떠넘겨서 비용을 절감하려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전지윤 동지는 그런 의미로 위와 같이 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튼 가사노동이 마치 자본주의 하 여성억압의 동력이자 기제인 것처럼 보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특히, 비록 이 논쟁에서는 명시적으로 부각되지 않았지만, 많은 맑스주의자들이 여성 문제에 대해 설명할 때, 아내의 가사노동이 남편 노동자를 위해 무급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남편의 노동력 가치를 낮추고, 그래서 자본가로 하여금 가족임금을 선호하도록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 사례입니다.


막신 몰리뉴는 <가사노동 논쟁을 넘어서>에서,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다른 수많은 요인들이 있고, 저렴한 서비스 시장이 있거나 소비할 때 변형 노동이 거의 필요 없는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등의 경우에는 오히려 가사노동이 없을 때 노동력 가치가 낮아질 수도 있음을, 그래서 가사노동과 노동력 가치 사이에 어떤 법칙을 세울 수는 없음을 보여준 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 번째 전통적인 명제는 가사노동이 노동력 가치에 공헌하는 바가 가정 내에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중략) [가족임금이 지급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이러한 두 경우의 차이는 여성의 지위에 극히 중대한 의미가 있다. 만약 임금이 위에서 정의한 의미에서 가족임금이라면 기혼여성이 노동인구 밖에서 전업주부로 남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가족은 만족스러운 생활수준에서 가족을 재생산하기 위해 추가 소득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혼여성의 공통 대응은 노동인구에 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가사노동의 수행 여부가 가정 내 여성의 지위를 설명할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아마도 중요한 것은 남성 노동력의 가치가 가족임금 이하로 떨어졌고,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없거나 진입할 의지가 없는 의존적인 주부가 가족임금을 보조하기 위해 노력을 배가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으며 오히려 이미 주어진 상황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중략) 따라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사노동에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자본이 무급가사노동에서 경제적 가치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전업주부의 존재는 주부로 남기에 충분한 임금이 존재하느냐는 사실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Maxine Molyneux, <Beyond the Domestic Labout Debate>, New Left Review, 116, July-August, 1979, 황정규 역)

 

요약하면, 임금이(이 경우에서는 가족임금이 지급되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독립변수이고 전업주부의 무급 가사노동이 종속변수인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몰리뉴는 가사노동 논쟁에 참여한 논자들이,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로 흡수하여 설명해야만 그것이 맑스주의적 분석이라고 오해한 결과 오히려 가사노동을 지나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설명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평가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사노동이 자본가계급에 도움을 주는 정세나 조건을 지적한다 해도 왜 하필이면 남성이 아닌 여성이 집에 남아 가사노동을 하는지의 질문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맑스주의 이론이 이 질문에 답하고 자본주의 하 여성억압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임신, 출산 가능성이 자본주의 생산관계 하에서 여성을 열등한 노동력으로 만드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론적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천적으로는 전지윤 동지가 <여성억압>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적 임금으로서의 복지제도를 확충할 것을 국가에 요구하는 투쟁이 필요하다는 진단에 동의합니다. (아마 정진희 동지도 동의할 것 같습니다.)


또한 만약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이 현재 남한에서 벌어진다면 그 운동에 대해 비판만 하는 것보다는 개입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활동가의 자세일 것입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 운동이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아 보이고, 현 상황에서는 활동가들이 사회적 임금을 위한 투쟁의 중심을 개별 가정에서의 가사노동으로 설정하기보다는, 이미 시장화된 영역에서 돌봄노동자로 고용된 (아마도 주로 여성일) 노동자들의 권리나, 보육의 공공성 및 사회화 요구로 설정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2. 여성억압에 대해 SWP와 노동자연대가 선전하는 입장 및 태도에 대한 평가

 

저는 노동계급 중심성이라는 개념은 노동계급 투쟁만이 중요하다며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피억압자들의 투쟁을 기각하는 노동자주의와 전혀 다르다.”(정진희, <쟁점들>)는 데 동의하며, 바로 이것이 맑스주의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한 것이며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이라고 배웠습니다. 물론 사회주의자는 여성중심성, 장애인중심성, 기타 등등 모든 피억압 당사자들의 중심성을 말하지 않고 하필이면 노동계급 중심성만 말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억압에 맞선 투쟁과 착취에 맞선 투쟁이 동등하지 않다는 말은 맞습니다.


이렇게 노동계급중심성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여성(전체)의 관점이나 혹은 장애인(전체)의 관점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관점, 이해관계에 따라 여성운동, 장애운동을 해야, 그리고 그 운동이 생산 영역에서의 운동과 결합되어야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도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부문들의 우위와 열위를 따지는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관점으로 운동에 임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여성운동 일각에서는 특정 노동조합이나 특정 남성 활동가들의 실천적 오류를 마치 남성 전체의 물질적 이해관계처럼 확대하고, 노동계급 중심성이 노동운동만을 절대시하고 여성운동을 부차화하며, 단결을 위해 성차별을 묵인하는 개념이라는 악선전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8년 하반기에 출간된 책 <<오빠는 필요없다>>에서 전희경 씨는 맑스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 번째로 주목해봐야 할 것은 맑스주의가 여성 억압을 설명하면서 (중략) 여성 억압의 문제를 계급 모순에 흡수해왔다는 점이다. (중략) 이런 논리는 주요 모순부차적 모순을 나눔으로써 억압에 순위를 매기고 더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대동단결론으로 연결됐다. 억압의 실체는 단일하며 여성 노동자의 이해와 남성 노동자의 이해가 일치한다고 전제하고, 체제 변혁을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계층 이해(‘특수한이해)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공통의 이해(‘보편적이해)를 위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에 대한 저임금과 차별 해고에 적극적으로 공모해온 예에서 보았듯이,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는 일치하지 않는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이매진, 149)

 

맑스주의를 제대로 학습한 사람이라면 계급적 이해라는 말을 위와 같이 사용하는 것이 맑스주의에 대한 완전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오해에 대해 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이 공론장에서 이의를 제기한 바는 제가 알기로는 없으며, 이 책은 최근까지도 페미니즘을 배우는 이들을 위한 추천도서 목록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자연대가 기존 페미니스트들의 맑스주의 비판이 왜 부당하며, 여성운동이 왜 노동계급 중심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지윤 동지가 “‘남성이 여성 억압에서 이득을 얻는다는 생각은 단지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여성 억압과 차별에 무관심하거나 연대하지 않는 남성들을 보고 겪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런 관념을 버리고 동일한 이해관계를 깨닫고 여성과 남성이 단결하자고 해서 그것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정확한 지적입니다


비록 <<오빠는 필요없다>>에 나온 주장이 맑스주의에 대한 오해라고 할지라도, “아무튼 맑스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나 노동조합의 남성 활동가들이 그런 잘못된 언행과 실천을 해 왔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라는 말에 대해 맑스주의가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실천으로 입증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고, 그 고민에는 선전의 어조나 태도에 대한 고민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전지윤 동지의 주장은 사회주의적 원칙을 폐기하고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타협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원칙을 더 잘 설득하기 위해서 노동자연대가 선전의 어조나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지윤 동지의 주장에 반응하는 정진희 동지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진희 동지의 글은 마치 전지윤 동지가 여성운동에서의 노동계급 중심성이라는 원칙 자체에 반대하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지윤 동지는 페미니즘을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만 앞세우느라 억압받는 여성들에 대한 공감을 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라고 한 것인데, 이것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페미니스트들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내놓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반응하거나, ‘여성 억압에서 남성 노동자가 이익을 얻는가?’라는 질문을 여성 노동자의 고통을 경시하는 맥락에서 자꾸 던지고 이익을 얻지 않는다는 답만 강조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마치 전지윤 동지가 이 쟁점 자체를 회피하는 것처럼 왜곡하거나, 남성 노동자의 이익에 대한 이제까지의 노동자연대의 태도, 어조를 전술적 측면에서 성찰하는 대신 전지윤 동지도 이미 동의한 원칙만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하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여성 문제에 대한 SWP와 노동자연대의 각종 기사를 공감하며 읽어 왔고, 린지 저먼이나 토니 클리프의 책을 여성주의 세미나 커리로 자주 사용해 온 입장에서, 저는 SWP와 노동자연대가 이 주장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억압에 맞서 싸우는 것 자체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이나 분리주의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데 더 열성적인 것 같은 노동자연대의 어조와 태도 때문에 타당하고 올바른 주장을 받아들일 때도 망설이게 됩니다. 이런 태도는 특히, 성차별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아직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넘어가지는 않은 활동가들로 하여금 노동자연대에 반감을 갖고 확고하게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편을 들도록 유도합니다.


노동계급 중심성이 노동자주의와 다르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부문 운동에서의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확보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노동계급 중심성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전지윤 동지가 제기하시는 것이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고, 노동자연대가 각종 여성 문제에 대한 개입과 실천을 나름대로 잘 해 왔다고 방어하고 싶은 마음이 앞설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제기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여성운동을 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이 노동자연대와 같은 사회주의자임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rreload.tistory.com/164

* ‘변혁재장전’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변혁 재장전’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