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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논쟁

여성 억압 - 더 구체적이고 종합적 시야로 봐야 한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1. 4.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에 대한 논쟁

 

전지윤

 


 

내가 지난번에 쓴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 모순의 교차와 투쟁의 결합>(http://rreload.tistory.com/170)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이론적 혁신을 하기 위한 나름의 시도였다. 그 글에서 나는 기존 좌파의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에서 출발했고, 특히 노동자연대의 주장을 주로 검토했다.


노동자연대는 내가 한때 소속돼서 활동했던 이 나라 변혁운동에서 많은 기여를 한 조직이면서 여성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데서도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변화된 현실에 맞지 않는 점이 있기에 동지적 토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조금 손 봐서 <진보평론>에도 기고했고, 2015년 가을호에 실리는 행운을 누렸다. 더욱 반가웠던 것은 노동자연대측의 반론이 같이 실렸다는 사실이었다. 정진희 동지가 쓴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최근 쟁점들>(이하 <쟁점들>)이 그것이다.(이 글은 온라인에서는 볼 수 없고 <진보평론> 65호 지면에서만 볼 수 있다.)


여러모로 부족한 내 글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반응을 보인 것이다. 진보좌파 진영에서 부족한 것이 공동의 협력과 그 속에서의 동지적 토론이며, 정치적 토론보다는 감정적 반응이 나타나던 일부 풍토를 돌아볼 때 의미있는 반응이었다.


<쟁점들>우선, 마르크스주의 여성 차별 이론과 고전적·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설명하는 데”(181 - 이하 숫자는 <진보평론> 65호의 페이지 수) 글 앞의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내 글에서도, 논의의 출발점으로 다루었던 것이므로 대부분을 공감·지지한다.


이어서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쟁점을 다룬”(181). 이처럼, 이 글은 내가 제시한 문제제기를 직접적으로 논박하기 보다는 일반적인 쟁점들을 소개하며 논평하는 방식으로 씌어졌다. 내 문제제기는 본문보다 주로 각주에서 전지윤도 이와 비슷한 입장으로 보인다는 식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런 형식 때문에 아쉽게도 뭔가 본격적 답변이라는 느낌보다는, 여성 억압에 대한 노동자연대의 기존 입장을 다시 잘 정리해 소개하는 인상을 준다. 내 문제제기에 대한 구체적 검토와 반박에 주력했으면 더 진전된 토론이 가능했을텐데 말이다. 그러다보니 <쟁점들>에 대한 내 답변도, 이미 내가 첫 글에서 편 주장을 다소 반복하는 방향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쟁점들>은 여러 측면에서 나에게 자극과 도움을 주었다. 근래 민중총궐기 등을 통해 뜨거워진 정세 덕에 답변이 좀 늦어졌지만, 나는 다시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한 정치적 토론과 고민을 이어가고자 한다.

 

 

무엇이 우선이어야 하는가

 

먼저 <쟁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페미니스트들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내놓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태도는 옳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솔직히 밝히고 토론하는 것이 상호이해를 도모하고 장차 협력을 강화하는 데도 이로울 것이다”(181)

 

이것은 내 첫 글에 대한 이해보다 오해에 기반한 주장이다. 나는 첫 글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내놓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은바가 없다. 어떤 주장이든 공감과 지지할 부분만이 아니라 비판할 부분도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판과 이견 제시는 언제나 필요한 것이며, 내 글도 페미니즘의 일부 주장에 대한 몇몇 비판과 이견을 담고 있다. 내가 문제 삼은 것은 페미니즘에 공감과 지지보다는 선을 긋는 태도”, “페미니즘의 한계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 공감보다 비판에서 출발해 지지보다는 이견을 앞세우는 태도를 문제삼은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자의 출발점은 먼저 여성 억압 등 모든 억압에 가장 일관되고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이어야 하고 페미니즘은 계급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억압받는 집단의 처지와 목소리를 반영하는 사상과 운동이기에 이 점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적 공격과 우파 집권이 계속돼 온 한국 사회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은 가속화돼고 있기에 사회주의자들은 성차별적 사회와 우파에 맞서서 우선적으로 페미니즘을 방어하고, 억압에 맞서 그들이 발전시켜 온 구체적 분석에서 배우려고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바탕할 때 비판과 이견도 더욱 풍부하고 구체적이 될 것이다.


특히 잘 듣고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1세기도 전에 영국에서 살았던, 인간으로서 여러 한계와 약점을 가졌을 마르크스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에 대해 완벽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주류 페미니즘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전쟁에 이용됐는지 날카롭게 폭로한 헤스터 에이젠슈타인도 이런 말을 덧붙인 바 있다.

 

나는 좌파 남성들의 과제로 끝을 맺으려 한다. 페미니즘을 배워라.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지탱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욕구, 경험, 지혜를 고려하지 않은 어떠한 사회 변혁의 시도도 모두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라.”

(<위험한 불륜? 페미니즘과 법인기업 세계화>)

 

더구나 나는 첫 글에서 썼듯이 마르크스주의는 닫힌 체계가 아니며 어떤 사상과 이론에서도 합리적 핵심을 흡수해 그 자신을 더욱 풍부하게 강화시킬 수 있는 열린 체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방법론과 기본적 명제들에 바탕하면서도, 그가 미처 살펴보지 못한 문제들과 새롭고 변화된 현실에까지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가사노동과 마르크스

 

나는 가사노동 문제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가사노동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지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자본론>에서 노동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은 자본의 재생산에서 필요조건이라면서도 하지만 자본가는 이를 노동자의 자기 유지본능과 생식본능에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고 썼다.


노동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양육, 청소, 요리 등의 가사노동을 간과했던 것이다. 자신의 방법론을 이용해서 상품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을 통합해서 분석했다면,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에 대한 더 종합적 분석이 가능했을텐데 말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그를 비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에는 오늘날의 핵가족이나 그 안에서의 가사노동이 충분히 형성되지도 않았다. 마르크스가 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녀를 둔 귀족이나 부르주아 여성의 가사노동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차별적 편견이 극심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한 남성으로서 마르크스가 왜 초역사적 혜안을 보이지 않았냐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가혹할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세기가 넘게 지나며 많은 변화가 있었고, 특히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사 속에 많은 성과가 축적된 오늘날에도 우리가 마르크스의 주장에 스스로를 가두려 한다면 그것은 얘기가 다르다. “가사노동은 생산적 노동’, 적어도 간접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으로 구분하는 게 적절하다는 내 주장을 겨냥한 <쟁점들>이 바로 이런 문제를 보이고 있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해당 노동이 유용한지 또는 인간생존에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중심으로 가치나 생산적인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오해한 것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가사노동처럼 생산관계 밖에서 일어나는 무급 노동을 놓고 생산적 노동의 범위 확장을 논한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취지에 맞지 않다”(200)고 했다. ‘마르크스는 상품 생산관계과 그 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유급노동에 대해 분석했고, 상품 생산관계 밖의 무급 가사노동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러시아 혁명의 변질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전개 속에서 국가자본주의론을 제시하며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을 추구하던 자세는 찾기 어렵다. 더구나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에 필수적이며 생산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는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의 일부라는 내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이 거의 없다.


물론, 이런 내 주장이 페데리치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페데리치의 견해와 같다”(199)고 하면서, 반박의 의미에서 리즈 보겔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긴 하다.(사족이지만, 사실 나는 <쟁점들>을 보긴 전까진 페데리치의 견해를 알지 못했었는데 덕분에 페데리치의 책들을 찾아보면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사노동에 대한 페데리치의 분석 과정과 방법은 나와 똑같지는 않아 보인다.) “보겔은 가사노동에는 사용가치가 있지만 교환가치는 없으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은 아니고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직접 비교할 수 없다고 본다”(199)는 것이다.

 


노동력 상품과 가사노동

 

그런데 첫째, 보겔의 견해에서 강조점은 가사노동은 생산적이지 않다는 데 있지 않다. 내가 이해하기로 보겔의 강조점은 가사노동은 가정 내에서 소비되는 필수적 사용가치를 만들어내는 [잉여노동이 아닌] 필요노동의 일부라는 데 있다. 따라서 그것을 생산적, 또는 비생산적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http://isj.org.uk/lise-vogel-and-the-politics-of-womens-liberation/


둘째, 나는 보겔의 견해는 일면적이라고 생각한다. 보겔은 가사노동이 필요노동의 일부라는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지만, [출산·육아를 포함한] 가사노동이 노동력 상품을 만든다는 점을 간과했다. 노동력 상품은 자본주의에서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고, 명백히 교환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가사노동이 교환가치를 만들지 않는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노동력 상품은 자본주의에서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유일하고 특별한 상품이다. 그런 노동력 상품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도,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높인다는 점에서도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만들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컨대 이혼시 재산분할권이 인정되는 이유는 가사노동이 만들어 낸 가치에 대한 인정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가사노동을 통해 노동력 상품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주로] 여성들은 임노동 관계 속에서 착취를 당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착취와 강탈을 구분했다. <쟁점들>은 내가 은근슬쩍 강탈개념을 끌어들인다고 했는데, 나는 공공연하게강탈 개념을 끌어들였고 자본주의는 착취를 통한 축적이 주된 기반이지만, 강탈을 통한 축적이 그것을 보완한다고 분명히 주장했다.


나는 노동계급 여성이 겪는 이중의 굴레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임노동 착취뿐 아니라 가사노동에 대한 강탈까지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체제에서 여성이 더 억압·차별받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이상의 내 주장은 이미 첫 글에서도 제시한 바 있지만, 피터 커스터스의 <자본은 여성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를 읽으며 더 발전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의 유급 임노동과 주로 노동계급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 둘 모두를 필요로 한다. 특히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가사노동에 의존하면서, 그것에 댓가를 지불하지도 않고 그 가치를 깎아내려 왔다.


이 지점에서 나는 <쟁점들>이 보이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운동이 대안을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202)는 비판일변도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운동은 여러 한계와 약점을 보였다. 체제가 가하는 [성별] 분업 구조를 수용하거나, 임노동 여성과의 연대에 소홀한 부문주의의 위험 등을 말이다. 하지만 이런 한계와 약점은 자본주의에서 개혁을 위한 투쟁이 모두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투쟁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투쟁에 대해 비판만 앞세우진 않는다. 가사노동 임금 운동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일단 가사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고 아무 댓가도 지불하지 않으려는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이 우선돼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페데리치는 여성들은 타인을 돌보면서 임금은커녕 연금도 못 받기 때문에 노후에 보상이 아니라 벌을 받는 격이라며 신랄히 비판한다.(<혁명의 영점>)


이런 주장에 공감하며,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이 이룬 성과를 지지하고 나아가 가사노동에 임금만이 아니라 연금 등 여러 사회보장책을 제공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 운동을 체제에 맞선 더 크고 근본적인 투쟁과 연결시키기 위한 비판을 덧붙여야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마저 양육수당, 유급육아휴직 등 가사노동에 대한 댓가를 일부 지불하는 상황에서 이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누구에게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

 

이처럼 공감과 지지보다 비판과 이견을 앞세우는 태도는 바로 여성 억압과 차별에 대해 덜 민감한 태도와 연결돼 있다는 게 내 첫 글의 지적이었다. 그리고 <쟁점들>은 바로 이 점을 다시 반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사회에서 여성이 얼마나 더 고통받는지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겪는 고통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의 실제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급 남성이 얻는 이득이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193)

 

남성 노동자는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기는 데에 여성 노동자보다 고작 하루에 40분 정도만 더 쓴다.”(193)

 

이런 주장을 읽다보면 <쟁점들>전지윤은 고작이라는 표현을 문맥에서 떼어 내어 인용하면서, 마치 이현주 기자가 이중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여성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왜곡”(193)했다고 비판하는 이유가 더 이해가지 않는다. 내가 고작이란 단어를 문맥에서 떼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복된 주장으로 다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쟁점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남녀 노동자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른지 하는것이 핵심 쟁점”(184)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나도 첫 글에서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 사이에 부차적·단기적 이해대립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장기적 이해는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었다.(<쟁점들>“[남성이] 일시적으로 얼마간 이득을 볼 수는 있지만”(195), “사소한 이득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196) 등의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과 부차적·단기적 이해대립사이에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쟁점들>이 더 나아가서 여남간의 차이를 크게 보는 관점 자체가 노동자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진정한 해결책을 추구하지 못하게”(195)한다고 보는 데 있다. 그러다보니, 남성의 상대적 이점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된다”, “고작등의 주장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은 그저 사상가들이나 이론가들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183)라는 스스로의 주장을 무색케하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 억압에서 이득을 얻는다는 생각은 단지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여성 억압과 차별에 무관심하거나 연대하지 않는 남성들을 보고 겪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런 관념을 버리고 동일한 이해관계를 깨닫고 여성과 남성이 단결하자고 해서 그것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해고돼서 라인에서 쫓겨나는 흑인·비정규직 노동자를 외면하고 그 라인의 빈자리로 들어오는 백인·정규직 노동자가 '이런 차별을 통해 진정으로 이득을 얻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자본가'라고 말한다고 해서 단결이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백인·정규직 노동자가 흑인·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공동의 이해를 실천에서 입증해야 한다.


, <쟁점들>은 여성이 더 억압받는 구체적 현실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를 놓치고 있다. 추상적으로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고 단결해야 한다는 일반적 주장만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의 단결이 어떻게 가능한지라는 진정한 문제에서 부족한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상품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의 통일된 체제

 

이것은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서 착취와 억압이 어떻게 결합돼서 축적을 추동하는지에 대한 종합적 이해와 관련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쟁점들>은 가족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가사노동은 생산관계 밖에서 일어나는 무급 노동이며 가족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203)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가족은 지배계급이 축적을 지속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기제(메커니즘)의 하나”(203)일 뿐이라는 것이다.


,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과 토대는 상품 생산과정에서 임노동 착취이며, 가족과 가사노동을 이와 동등하게 중요한 것으로 격상”(203)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착취에 맞선 노동자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부정하는 실천적 결론”(206)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자본주의적 착취와 가부장제의 억압을 병렬하는 이중체계론보다는 낫지만, 여러 가지로 미흡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주로 상품 생산과정에 주목하면서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 대한 분석에 소홀하고, 노동력 재생산에서 가족과 가사노동이 하는 핵심적 구실을 보지 못하며, 임노동 착취에 맞서는 것이 더 중요하고 진정한 계급투쟁이라는 식의 해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것에 반발하며 이중체계론이 다시 부상할 여지를 제공하기 쉽다. 따라서 <쟁점들>의 주장처럼 내가 마르크스주의와 유물론에서 배우자면서, 그것이 부족하다는 앞뒤가 안 맞는 말’(185)을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더 풍부하고 통합적인 일원론을 발전시키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중체계론을 반박하면서도, 사회재생산 이론에 바탕해 기존의 단순하고 부족한 일원론을 넘어서자고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상품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의 통일된 체제로 자본주의적 축적의 전체 과정을 파악하고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나아가 자본-노동의 사회적 관계와 이데올로기의 재생산까지 분석을 확장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윤의 유일한 원천인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가족과 가사노동이 하는 구실을 역사적이고 유물론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쟁점들>은 가족만이 아니라 이주 노동도 노동력을 재생산을 한다고 주장하는 데, 이주민이 본국의 가족에서 출산·양육됐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셋째, 전체 노동계급 투쟁의 일부로서 착취에 맞선 투쟁과 억압에 맞선 투쟁을 모두를 자리매김하며, 그것을 서로 결합시키는 관점을 발전시켜야 한다. <쟁점들>이 소개하듯이 20세기에 유럽의 혁명가들이 여성의 참정권과 낙태권, 출산휴가 등을 위해 앞장서 싸운 것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이것이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억압과 착취라는 이중의 굴레에 처해 있는 노동계급 여성들은 이 체제를 지탱하는 것에 있어서도, 이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에 있어서도 결코 부차적이거나 보조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 그들의 불만과 요구들도 마찬가지다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할 때 노동계급 중심성이라는 개념은 다른 피억압자들의 투쟁을 기각하는 노동자주의와 전혀 다르다”(210)<쟁점들>의 주장은 진정성을 얻게 될 것이다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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