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이 글은 달트 3호에 실렸던 서범진 동지와 이재빈 동지가 쓴 ‘영국 SWP 분열의 정치적 의미와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를 읽고 그에 대한 피드백으로 쓴 글이다.
전지윤
두 동지가 이 논문에서 시도한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이 논문은 그동안 영국 SWP 분열 상황에 대해서 어쩌다 주워들으면서 어렴풋이 의문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상당 부분 해소해 주고 있다.
영국 SWP 분열 과정에서 제기된 쟁점들이, 오늘날 자본주의에 맞서 근본적 변혁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의미가 작지 않다. 그 점에서 두 동지의 노력과 수고는 값진 것이다.
특히 두 동지는 단지 상황을 설명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영국 SWP 분열의 정치적 함의와 교훈을 분석하고자 했다. 나는 두 동지가 평가하고 분석한 내용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또 많은 부분을 공감한다. 하지만 두 동지의 고민을 더욱 자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몇 가지 의문과 이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두 동지는 “왜 21세기의 첫 십 여 년 간 영국에서는 변혁 정당이 운동 건설의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 광범한 공동전선을 구성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인 방식으로 통용되었을까? 다시 말해, 왜 당보다 공동전선이 더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했을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라는 국제적 역사적 경험이 다수의 좌파와 그 동조자들에게” 미친 효과로 인해 “선진 대중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급진 개혁주의(혹은 ‘진정한 사회민주주의 전통의 복원’) 수준에 머물렀”던 것을 그 이유로 꼽는다.
두 동지가 소련과 동구권 실패가 낳은 효과를 중시하는 것은 분명 타당하다. 그 사건은 명백히 반자본주의적 좌파에게 더 불리한 이데올로기 지형을 만들었다. 비록 우리는 그 시기에 ‘붕괴한 것은 국가자본주의이고 진정한 사회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지만 말이다.
대중의 눈에는 그것이 인류의 사회주의적 실험이 실패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자본주의가 아닌 대안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상식’은 더욱 강화됐다.
하지만 그것을 어느 측면에서는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그 사건이 없었다면 ‘선진 대중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급진 개혁주의 수준에 머무르는’ 일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대중의 의식은 흔히 모순돼 있고 일상적 시기에 대체로 지배적 사상의 영향 하에 있다.
불만이 있더라도 체제 자체보다는 체제의 결과를 손봐야 한다는 개혁주의에 기우는 게 당연하다.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기 전에도 그것은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미 6~70년대에 대부분의 공산당도 개혁주의와 유로코뮤니즘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그래도 21세기의 첫 십 년은 단지 일상적 시기가 아니라 반전운동이 성장하는 운동의 고양기 아니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운동의 고양기라고 ‘대중의 의식이 급진 개혁주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서구에서 가장 투쟁이 활발했던 ‘68 반란’ 때마저도 대중의 의식은 혁명적이지 않았다. 대중의 모순된 의식 때문에 심지어 혁명적 시기마저도 개혁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20세기 초의 혁명적 시기에 러시아와 독일에서 먼저 지지를 얻었던 것은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혁명적 투쟁에 나서는 대중이라도 처음부터 ‘우리는 혁명과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며 나서지는 않는 것이다.
그 점에서 두 동지의 “만일 1910년대의 러시아 상황이나, 1940년대의 미국 상황이었다면 우리에게는 공동전선 이상으로, 독자적 당 조직의 활동이 강조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은 부정확하다. 침체기 때는 오히려 공동전선과 대중운동 건설보다 독자적 선전이 중요할 것이다. 반면 투쟁이 활발하게 솟구치던 이 시기야말로 두 동지가 말하는 ‘공동전선 정치’가 중요했던 시기다.
러시아에서는 전쟁과 짜르 전제정에 맞서서, 미국에서는 대공황과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서서 강력한 노동자 투쟁이 벌어졌다. 그 속에서 혁명가들은 개혁주의 지지 대중과 손잡고 강력한 운동을 건설해야 했고, 그 속에서 혁명적 조직과 정치의 필요성을 입증해야 했다.
당장 1917년에 코르닐로프 쿠테타에 맞서서 볼셰비키가 멘셰비키나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했던 것을 공동전선의 고전적 성공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볼셰비키는 급성장하며 노동계급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소비에트에서 다수가 될 수 있었고,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공동전선 건설도 독자적 선전과 마찬가지로 당을 건설하고 계급에 뿌리내리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왜 21세기의 첫 십 여 년 간 영국에서...왜 당보다 공동전선이 더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했을까?”라는 물음은 다시 던져져야 한다. 즉 ‘왜 21세기의 첫 십 여 년 간 영국에서 왜 공동전선 건설을 통한 당 건설이 더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했을까’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답도 ‘소련과 동구권 붕괴가 낳은 이데올로기적 효과’에서만 찾지는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80년대의 침체기와 달리 그 시기에 반전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이 대중적으로 부상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1999년 시애틀이 기점이었다.
이런 대중운동은 당이 독자적으로 건설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가진 대중이 참가하는 운동은 공동전선을 통해서 건설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전 시기에 독자적 선전을 통해 혁명적 정치와 원칙을 방어하는 데 치중하던 혁명가들이 이제 공동전선과 개입주의적 운동 건설에 나선 것은 필요하고 정당했다.
둘째, 두 동지는 물론 단지 소련과 동구권 붕괴가 끼친 영향만 말하지는 않는다. 두 동지는 영국에서 산업투쟁의 수준이 쉽게 회복되지 않아 온 현실을 설명한 후 이런 “노동운동의 양상이 갖는 한계는 역설적으로 공동전선 정치의 유용성을 극대화했다”고 설명한다.
즉 산업투쟁의 침체로 노동계급 중심성을 말하는 변혁조직의 입지는 강화되기 힘들었고, 이 상황에서 공동전선의 필요가 더 커졌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두 동지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설명 방식을 너무 수용했다고 본다. 하지만 알렉스의 설명은 여러모로 혼란스럽다.
먼저 알렉스는 ‘산업투쟁만이 계급투쟁은 아니다’라는 앞선 자신의 주장과는 모순되게도 산업투쟁(경제적 계급투쟁)과 거리 투쟁(정치적 계급투쟁)을 구분한 다음, 전자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전 운동이 건설된 상황에서도 산업투쟁 수준이 높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계급 투쟁이 충분치 못했다’고 깍아내린다. 그러면서 슬쩍 자신들이 성장하지 못한 것을 외부적 조건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렇게 ‘변혁조직이 취약한 상황이니 공동전선으로 운동을 건설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첫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전운동의 한복판에서, 그것도 SWP가 그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데도 당원 규모가 반토막이 난 것은 단지 산업투쟁의 상대적 부족함으로 설명될 수 없다. 둘째, 설사 산업투쟁이 반전운동과 결합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해도 공동전선의 필요성은 감소되긴커녕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리스펙트같은 노동당 왼쪽의 공동전선적 당 건설은 더욱 탄력을 받았을 것이다.
셋째, 경제 위기 상황에서 계급투쟁의 방향에 대해 두 동지는 이렇게 주장한다. “경제 위기에 맞선 노동자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여러 세력의 연합이 아니라, 그 운동에서 관료주의에 발목 잡히지 않을 수 있는 현장조합원 운동의 힘이다. 그리고 이런 현장조합원 운동을 조직하는 데에서는 분명하고 날카로운 정치를 가진 당 조직의 존재가 중요해진다.”
이것도 알렉스의 정식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것이다. 알렉스는 위와 비슷한 주장을 하며 이와 달리 공동전선을 강조하거나 현장조합원의 힘에 대해 회의하는 입장을 ‘운동주의’,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한 회피’라고 딱지붙이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주장이 정치적 계급투쟁과 경제적 계급투쟁의 차이를 불필요하게 과장한다고 본다. 과연 정치적 계급투쟁에서는 여러 세력의 연합이 중요하지만, 경제적 계급투쟁에서는 현장조합원 운동을 조직할 날카로운 정치가 더 중요한가? 과연 경제적 계급투쟁에서는 관료주의에 발목잡히지 않을 현장조합원들의 힘이 중요하지만, 정치적 계급투쟁에서는 그런 위험과 필요가 덜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 나라의 예를 들어보자. 지난해 철도파업 때는 현장조합원 운동을 고무할 날카로운 정치뿐 아니라 직종을 뛰어넘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민영화에 반대하는 여러 사회세력의 연합도 중요했다.
반면, 지난해 국정원 촛불운동 때는 여러 세력의 연합뿐 아니라 민주당을 추수하며 운동을 통제하는 ‘시국회의’ 지도부에 맞서는 날카로운 정치도 중요했다. 철도파업 때도 노조 지도부의 투쟁 회피에 맞설 현장조합원의 힘이 필요했지만, 국정원 촛불 때도 촛불에 찬물을 끼얹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에 맞선 기층 노동자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국정원 시국회의를 주도한 개혁주의 정치인들과 철도 파업을 주도한 노조 관료들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노조 관료들이 국회를 공을 넘기며 적당한 수준으로 투쟁을 마무리하려 할 때, 중재자 구실을 하며 그 공을 받아서 국회로 가져간 것은 개혁주의 정치인들이었다.
이것은 개혁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와 자본가를 중재하는 특수한 계층이 노조 관료이고, 노조 관료의 정치적 표현이 개혁주의 정치인이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노조 관료과 개혁주의 정치인은 분업 관계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며, 정치는 개혁주의 정치인들이 의회 내 협상으로 풀고, 경제는 노동자의 일이지만 주로 노조 관료들이 협상을 통한 해결을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혁명가들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거부하며 정치적 계급투쟁과 경제적 계급투쟁의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 그 점에서 위에서처럼 두 영역의 차이를 강조하는 주장은 양편향을 낳을 수 있다. 한편으로 정치적 계급투쟁에서 공동전선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며 노조관료에 기반한 개혁주의자들을 추수할 수 있다. 반면, 경제적 계급투쟁에서 날카로운 정치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며 노동자 단결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다.
넷째, 두 동지는 영국 SWP와 함께 한국 다함께의 위기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2000년대 초반 다함께가 급성장한 성공 요인을 ‘공동전선 정치’에서 찾고 있다. “이 모든 성공은 활발한 거리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개방성, 궁극적으로는 공동전선 정치에 빚지고 있었다.”
반면 2000년대 중반부터 다함께가 겪은 정체와 위기의 원인을 ‘공동전선 정치에서의 이탈’에서 찾고 있다. “운동이나 캠페인 보다, 신문 · 가판 · 포럼과 같은 조직의 일상이 강조되었고, 운동 개입에서는 ‘다함께’적 분석과 선명성 등이 더 부각”되면서 “‘공동전선의 정신’으로부터 갈수록 이탈”돼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충분치가 않다. 먼저 다함께 급성장의 주요 요인이 과연 ‘공동전선 정치’로만 설명될 수 있는가? 테러와의 전쟁의 갖는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분석과 선전을 꾸준히 한 것이 중요하지 않았던가?
전쟁과 신자유주의의 뿌리가 자본주의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분석하며 노동계급의 중심성을 옹호하며 연대를 건설한 것도 중요하지 않았던가? 탄핵 반대 투쟁 때 급격한 전술적 전환을 이루면서 효과적으로 개입한 것이 중요하지 않았던가? 이것들은 단지 ‘공동전선 정치’로 설명할 수가 없다.
반면 2000년대 중반 다함께의 정체도 ‘공동전선 정치에서 이탈’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 다함께는 공동전선과 캠페인에 치중하면 할수록 성과가 나지않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상황을 봐도 그렇다. 다함께는 지난해 철도파업과 올해 의료 민영화를 앞두고 민영화 반대 공동전선에 엄청난 자원과 인력을 투여하고 있다. 웬만한 지역의 민영화 반대 공동전선 간사를 다 다함께 지회간사들이 맡았을 정도다.
또 진보당 마녀사냥에서 다함께의 태도는 선명한 독자성보다는 종북 마녀사냥에 대한 일종의 타협이었다. 철도파업 평가 때도 선명한 독자성보다는 노동자들의 정서를 눈치보며 톤다운된 별도 소책자를 만드는 식이었다.
결론을 짓자. 영국 SWP 분열에서 ‘공동전선 건설이 중심이냐 당 건설이 중심이냐’, ‘거리의 정치투쟁이냐 작업장의 경제투쟁이냐’는 식의 대립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대립에서 알렉스 등은 당 건설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예컨대 알렉스는 공동전선 건설을 강조하면 당 건설이 소홀해진다고 우려한다. 두 동지가 쓴 글에서 재인용하겠다.
“우리의 최고의 인재들이 [1999년 이후 당 건설 보다는] 운동 건설에 완전히 스스로를 내던지게 됐다. … 이것은 우리가 가진 자원이 당 건설 작업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두 동지는 ‘공동전선의 정치’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두 동지는 결론에서 이렇게 썼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와 현재 노동운동의 수준은 여전히 우리에게 공동전선적 방식의 적용(예컨대 프렉션)을, 혹은 최소한 공동전선의 정신을 요구하고 있어 보인다.”
두 동지는 “SWP 지도부는 적어도 머릿속으로는 언제나 ‘운동 건설을 통해 당을 조직한다는 방향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역량의 한계로 인한 물리적 긴장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문제였다”고도 지적한다.
하지만 나는 ‘공동전선 건설이 중심이냐 당 건설이 중심이냐’, ‘거리의 정치투쟁이냐 작업장의 경제투쟁이냐’는 잘못된 대립이라고 본다. 실제로 영국 SWP는 공동전선과 거리의 정치투쟁을 강조하던 시기에도 성장하지 못하며 위기를 겪었고 결국 카운터파이어가 분리해 나갔다.
역사상 최대규모의 반전시위와 리스펙트의 부상 과정에서도 SWP가 성장하지 못한 것은 시사적이다. 그런데 카운터파이어의 분리 뒤에 당 건설과 작업장에서의 계급투쟁을 그토록 강조하던 노선 아래서도 SWP는 성장하지 못하며 위기에 처했고, 이번엔 RS21이 분리해 나갔다.
당과 공동전선, 또는 당과 계급은 분리될 수 없는 변증법적 관계다. 당은 계급의 일부이며 계급 속에서 배우고 동시에 가르치면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 당이 계급 속에서 배우고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 바로 당 건설 과정이다.
따라서 공동전선 건설에 치중하느라 당 건설에 소홀했다는 주장은 형용모순이다. 물론 당 건설 과정에서 독자적인 선전과 토론을 중시하는 방식과 공동전선과 대중행동 건설을 중시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당 건설의 서로 다른 방식이지 어느 하나가 당 건설이고 어느 하나는 아닌 게 아니다.
정세가 침체돼 있고 이데올로기적 고립이 심할 때는 혁명가들이 독자적 선전과 토론을 통해 변혁적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한 당 건설 방식일 것이다. 반면 정세가 고양되며 대중행동이 나타날 때는 공동전선을 건설하며 적극 뛰어드는 게 중요한 당 건설 방식일 것이다.
정치적 중핵이 건설돼 있느냐 아니냐는 변혁조직의 발전 단계에 따라서도 또 달라질 것이다. 변혁조직 건설의 초기에는 독자적 선전과 분석이 중요할 것이고, 이후에는 대중운동 속의 개입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공동전선 정치’를 잣대로 SWP의 분열과 위기를 설명하는 것은 핵심이 아니라고 보인다. 객관적 정세의 변화나 어려움도 핵심이 아닐 것이다. 80년대의 침체기 때도 SWP의 위기는 이처럼 심각하진 않았다.
분열 과정에서 논쟁이 된 신자유주의의 성격, 연속혁명, 여성억압 등을 둘러싸고 각 세력들이 강조한 정치적 주장의 차이도 핵심이 아니라고 본다. 사실 이런 정치적 차이의 발생은 건강한 변혁조직이라면 당연한 것이고 언제든지 자유롭고 발전적으로 토론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SWP는 반전운동의 성공, 리스펙트의 일시적 성공과 뒤이은 실패, 경제 위기의 도래와 노동자 투쟁의 지체 등을 거치면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60년대 말 특정한 필요에 따라 도입된 조직 모델을 ‘레닌주의’라면서 교조적으로 고수하며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
두 동지가 인용했듯이 닐 데이비슨은 “우리 당에 실행되는 민주적 중앙집중제는 민주주의를 훼손시켜가면서까지 중앙집중제(‘결단력 있는 지도부’)를 특권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속에서 SWP는 동지적 토론 속에 평가를 끌어내고 이런 평가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환과 혁신으로 나가가는 것에 실패했다. 모순은 누적돼 갔고 이것은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해서 폭발했다. 그런데 SWP 지도부는 또다시 ‘레닌주의는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강력한 지도부’를 뜻한다고 강변하며 경직된 대응으로 일관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사회변혁 활동가들은 이런 SWP의 위기와 분열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는 두 동지의 주장은 정말 타당하다. 그리고 두 동지의 날카롭고 대담한 분석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다시 확인컨대 나의 이번 의문과 이견 제시는 두 동지의 기여에 대한 나름의 보답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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