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편집자] 이 글은 이재빈 동지의 ‘이견이 개진되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http://rreload.tistory.com/43)에 대한 반박글이다.
이재빈 동지의 나에 대한 반박 글을 잘 봤다. 이재빈 동지는 항상 에두르지 않고 날카롭게 문제에 접근하곤 한다. 이번에도 토론에 뛰어드는 이재빈 동지의 자세에서 강렬함이 느껴진다 ^^ 나는 공통점과 차이점 모두를 밝히며 우호적으로 진행돼 온 서범진 동지와 나 사이의 논쟁에 이재빈 동지도 기여해 줄 거라고 기대한다.
먼저 나는 이재빈 동지가 예측과 전망에 따른 힘의 집중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다. 또 내가 ‘파업지속일수와 파업 참가자 수까지 고려하자면서 그에 대한 자료나 분석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일견 타당하다. 아마 작업장 투쟁만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공유할 것이다. 그 외에도 이재빈 동지의 몇 가지 세부적인 주장에서 나는 배울 점들을 발견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재빈 동지는 내 주장에서 사줄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나 보다. 그래서 낯간지럽지만 나 스스로 다시 강조할 수밖에 없다. 즉, 두 동지가 강조하는 ‘계급의 귀환이란 명제는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직시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바로 나의 주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난 연말 다함께 내에서 논쟁이 벌어질 때 주요 쟁점이기도 했다.
나는 당시에 ‘우리가 그토록 말해 온 계급의 귀환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당시 나는 한 토론에서 통계를 인용하며 2012년과 달리 2013년 상반기의 파업 건수와 손실일수는 다시 줄어들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물론 하반기와 철도파업까지 반영한 통계는 기다려 봐야 한다고 단서를 붙였다.)
나는 철도파업을 평가하면서도, 올해 정세를 전망하면서도, 상반기의 철도 강제전보 반대 투쟁을 평가하면서도 이 점을 거듭 확인했다. 따라서 이재빈 동지가(서범진 동지도 그랬듯이) 나를 반박하면서 이 부분을 강조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공통점은 확인하면서 진정한 차이점을 바탕으로 논쟁을 이어가는 게 생산적 토론일 것이다. 내가 공통점을 지지하면서 차이점을 밝힌 것은 “일관성이 떨어”지는 태도가 아니다.
진정한 차이점
그러면 이재빈, 서범진 동지와 나의 진정한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 동지가 “산업투쟁보다 거리투쟁의 정치적 파급력이 강하다”(이재빈)고 보는 것에 있다. “거리에는 여전히 그 정도의 힘이 있다” 등 이런 강조는 이재빈 동지의 글에서 거듭 발견된다.
이재빈 동지는 “예측과 전망에 입각한 힘의 집중”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가 “집중해야 한다”고 보는 것도 당연히 거리 투쟁일 것이다. 이처럼 두 동지는 ‘계급의 귀환은 현실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거리투쟁에 대해서는 더 “낙관적”이라거나 더 “파급력이 강하다”고 본다.
반면 나는 계급투쟁의 양 측면인 작업장 투쟁과 거리 투쟁 둘 모두 지진부진한 상태이며, 이것이 바로 ‘계급의 귀환이 현실이 아닌 증거’라고 본다. 나는 일각의 ‘거리 투쟁보다는 작업장 투쟁이 진정한 계급투쟁’이라는 잘못된 관점을 두 동지가 받아들이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 지난 글을 다시 인용한다.
“2008년 촛불의 패배 이후 2009년 쌍용차 파업의 패배가 있었고, 그후 거리의 촛불이든 작업장 투쟁이든 모두 어느 선을 넘어서 더 나아가지 못해 왔다. 예컨대 거리 촛불은 반값등록금, 한미FTA, 국정원 선거부정 등을 계기로 다시 점화되면서 ‘어게인 2008’에 대한 기대를 키웠지만 곧 사그라들곤 했다. 작업장 투쟁은 2010년 현대차 비정규직 점거파업 등이 있었지만 역시 지지부진했다. 지난해 철도파업을 계기로 다시 기대가 커졌지만 결국 다소 허망하게 끝났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작업장 투쟁이든, 거리 투쟁이든 어느 하나의 가능성을 과장하거나, 반대로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둘의 결합·발전과 상승작용을 제약하는 메카니즘을 밝혀내고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재빈 동지는 나의 이런 관점을 “불가지론”, “예측과 전망이 빠진 분석”, “정치적 예측을 통해 힘을 집중시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운동주의”라고 비판한다. 나는 이 비슷한 비판을 지난 연말에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에 그것은 작업장 투쟁의 파급력을 더 높이 평가하고 더 낙관적으로 보던 사람들에게서 나온 비판이었다.
따라서 나는 비슷한 반박을 할 수밖에 없다. 왜 ‘거리 투쟁이 더 파급력이 있으므로 거기에 집중하자’, 또는 ‘작업장 투쟁이 더 파급력이 있으므로 거기에 베팅하자’만 예측과 과제 제시인가? ‘둘 다 잘 결합·발전하지 못하며 가능성과 한계를 보일 것이다’는 왜 예측이 아닌가? ‘따라서 둘의 결합·발전을 통한 계급투쟁의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왜 과제 제시가 아닌가?
이런 입장을 나의 문제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이것이 자랑스럽게도 로자 룩셈부르크와 내가 공유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운동은 한 방향으로만, 즉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도 움직인다...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그러므로...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현학적인 도식들이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분리되거나 서로 부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의 서로 얽혀 있는 두 측면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대중파업론>)
로자는 “어떤 원인과 계기들이 대중의 폭발로 이어질까 하는 것을 예측하고 계산하기란 아주 어렵다”고도 지적했다. 너무나 많은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들과 주관적, 우연적 요소들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낙관도 비관도
우리는 박근혜가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주되게 할 것인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을 주되게 할 것인지 선택해서 대비할 이유가 없다. 박근혜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작업장 투쟁과 거리 투쟁의 파급력 차이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두 동지가 ‘당분간 거리 투쟁이 작업장 투쟁보다 더 파급력이 크고 낙관적’이라며 제시한 근거가 별 설득력이 없고 다르게 해석될 여지도 있다는 게 내 제기였다. 따라서 이재빈 동지는 나에게 ‘왜 재해석이나 근거 제시가 빈약하냐’고 되물을 게 아니라 나의 제기에 맞서 자신들의 근거를 더 설득력있게 방어했어야 했다.
다시 묻겠다. 첫째, 두 동지가 제시하는 파업 건수와 파업 참가자 수 통계가 작업장 투쟁이 앞으로 계속 정체·하향할 것이라는 추세를 보여 준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2013년의 통계가 2012년보다는 낮아졌지만 2010년이나 2011년보다도 높은 수준인데? 두 동지처럼 2004년부터 계산하면 하향 추세로 해석되지만, 2010년부터로 따지면 상승 추세로 해석되는데?
더구나 2012년보다 몇 가지 수치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2013의 작업장 투쟁은 침체했다고만 볼 수도 없다. 공공의 현대차라는 철도노조에서 역사상 최장기 파업을 벌이고 정부와 정면충돌하며 10만의 연대 시위가 일어난 게 2013년이다.(내가 여러 수치와 사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 취지는 여기에 있다.)
둘째, 2008년에 1백만 명까지 올라갔다가 지난 7년간 5만 명 이상을 넘어 본 적이 없는 거리 투쟁의 규모를 그래프로 그리면 과연 거리 투쟁은 상승 추세라고 말할 근거가 될 수 있는가? 그것도 작업장 투쟁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실제로 통계를 찾아보면 2008년부터 지금까지 ‘전체 집회 발생건수’와 ‘불법폭력시위 발생건수’는 모두 뚜렷한 하강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작업장 투쟁이든, 거리 투쟁이든 수치와 그래프는 둘 다 섣부른 낙관도 비관도 불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쟁은 언제든 터져나올 수 있지만, 그것이 거리일지 작업장일지는 단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지난 연말에 나는 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민주주의 투쟁이든, 작업장 투쟁이든, 반제국주의 투쟁이든 핵심 고리를 포착하는 전술적 유연성을 주장했다. “정세는 계속 변화하고 따라서 정세의 핵심 고리도 계속 변화한다...정세 변화에 따라서...핵심 고리는 바뀔 수 있고 그에 따라 유연하게 개입해야 한다...그러면서 우리는 투쟁을 연결하고 결합시켜야 한다. 이처럼 집중점을 가지고 투쟁을 준비하면서도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하려면 민주적 토론과 평가가 필수적이다.”(<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가2>)
반면 내 반대편에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 반대 투쟁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동지들이 있었다. 그 동지들은 거기에 베팅해서 힘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올해 도 통상임금, 철도 강제전보, 의료민영화 저지 등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며 힘을 집중하는 게 옳을 것이다.
베팅과 힘의 집중
반면 나는 올해 정세를 전망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6월로 예정된 의료민영화 반대 투쟁, 상반기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 등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다. [반면, 종북몰이와 민주주의 문제를 둘러싼 투쟁도]...언제든 다시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런 분석과 전망을 바탕으로 우리는...구체적 계급 역관계와 상황의 변화, 대중 정서 등을 판단하면서 시의적절하게 구체적 전술로 적용·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2014년 정세 전망과 변혁운동가들의 과제’)
그리고, 현실은 어떠했는가? 4월 16일에 세월호 사태가 벌어졌다. 솔직히 말해 어느 누가 이 끔찍한 세월호 사건을 ‘예측하고 베팅해서 힘을 집중’할 수 있었는가? 누구도 예기치 못한 이 사건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며 정세의 핵심 고리로 부상했다. 사실 세월호 사건만 없었다면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에 ‘베팅’하고 힘을 집중하자는 입장이 크게 틀릴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세 변화에 맞게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하며 핵심 고리를 움켜쥐어야 한다는 내 주장이 ‘힘의 집중을 부정하는 것이고 과제 제시를 포기’하는 것인가?
레닌은 전략과 전술은 “계급관계를 총체적으로 분석한 뒤에 결정하는”것이며, 또한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새로운 정치 사건들에 비추어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로자는 “상황에 가장 민첩하게 적응하고 대중의 분위기에 될 수 있는대로 긴밀하게 접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적 토론은 이런 정세 추적과 전술 전환을 신속하고 적절하게 하는 데 필수조건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계급투쟁의 어떤 한 양상과 측면만 강조할 이유가 없다. 생각해봐라. 지난해 5월 국면에는 국정원 촛불이 5만까지 번져갔다. 이때는 ‘역시 거리투쟁이 중요하다’고 했어야 할까? 지난해 연말에는 철도 파업이 유례없는 최장기 파업으로 나가며 정국을 뒤흔들었다. 그때는 ‘아니다 작업장 투쟁이 중요하다’고 했어야 할까? 그러다가 최근에는 세월호 참사로 분노의 불이 붙었다. 다시 ‘거봐라 거리 투쟁 아니냐’고 해야 할까? 세월호 촛불은 금새 사그러들고 있다. 이제는 ‘아닌가’해야 하나? 이러다가 세월호의 후폭풍 속에 6월에 의료민영화 반대 투쟁이 커지면?
물론, 만약 ‘당분간 거리 투쟁의 파급력이 더 클 것’에서 이재빈 동지가 말하는 ‘당분간’이 세월호 참사 직후의 한두달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얘기는 다르다. 나 자신도 세월호 참사 직후 거리 투쟁의 가능성을 주목했다. 반면 그것이 적어도 1~2년을 바라보는 예측이라면 나는 그런 양자택일식 ‘예측’의 근거 부족과 전술적 경직성을 우려하는 것이다.
서로 원인이자 결과로서 끝없이 상호작용하는 계급투쟁의 분리될 수 없는 측면들을 결합시키자.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정경분리를 받아들여 양 투쟁의 결합을 가로막고, 지배계급의 이간질에 휘둘리며, 투쟁에 브레이크나 거는 개혁주의를 비판하자. 투쟁과 요구가 결합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 ‘계급의 귀환’이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자.
내가 최근에 세월호 국면에 쓴 몇 개의 글들은, 현재 투쟁의 가능성과 약점을 분석하며 바로 이런 과제를 제시하려는 나름의 시도였다. 따라서 이재빈 동지가 나에게 “결합이 가능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언급해야 할 책임”을 물은 것도 다소 의아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족을 달겠다. 이재빈 동지는 제목에서 “이견이 개진되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썼다. 그래서 나는 내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방식의 문제를 지적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방식에 대한 지적은 없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봐도 토론에서 핵심은 내용이지 말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 방식이 과도하게 차이점만을 긋는다거나,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자극적인 용어를 쓴다거나, 근거없는 비방이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다시 한번 날카로운 개입으로 논쟁의 심화에 기여해 준 이재빈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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