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코민테른 3차 대회 - 미지의 영역에서 길 찾기

[독일 1921‘3월 행동’(March action) 여파 속에서 진행된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 대해서 재평가하는 글로서 독일 공산당의 분열과 갈등을 피하고 단결을 꾀하려던 시도라는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 근래 출판된 3차대회 속기록 전문이 이 작업을 가능케 했다. 이 글의 필자인 이언 버철(Ian Birchall)은 역사가이자 사회주의자이며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서 50년 이상 활동하다가 2013년 말에 탈당했다. 국역된 저서로는 <혁명의 현실성>(공저), <서유럽 사회주의의 역사>가 있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weeklyworker.co.uk/worker/1085/navigating-unchartered-waters/

 




많은 마르크스주의 좌파들이 코민테른의 처음 네 번의 대회를 언급하지만, 최근까지 그 대회들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이제 존 리델(John Riddell)이 기존의 제1, 2차 그리고 제4차 대회 속기록에 더하여 제3 인터내셔널의 제3차 대회 속기록 전문을 출판했다.

 

이런 속기록들은 실천을 위한 경전이나 일종의 조리법 지침서처럼 여겨져서는 안 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이어지는 몇 년간을 연구하기 위한 기록의 일부로서 중요하다. 그 시기는 노동계급 투쟁과 조직의 최정점이었다. 레닌이 참석한(특히 스탈린이 참석하지 않은) 코민테른의 처음 네 번 대회는 좌파 진영의 많은 이들에게 준거점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도 지금에 와서야 비로써 우리는 실제로 일어난 일의 온전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1921622일부터 712일까지 모스크바에 제3차 대회를 위해 모인 대표들은 역사적 명운이 걸려있는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 이은 또 하나의 세계적 전쟁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는 현실로 보였다.

 

대회 제목에 나와 있듯이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인간 문명을 최종적으로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 대표들이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를 알았을 리가 없다는 사실이, 역사가 칼날 위에 서 있고 실패는 재앙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그들의 의식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1921년의 맥락

 

1920년은 인터내셔널의 입장에서 좋은 시기였다. 2차 대회는 성공적이었으며 포위된 러시아는 국제 노동운동의 많은 부분들로부터 점점 더 큰 지지를 이끌어냈다. 대회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대중적 공산당의 창당으로 이어졌지만, 1921년 초에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경제적 어려움은 먼저 크론슈타트 반란으로, 그 다음에는 신경제정책으로 이어졌다.

 

3월에 독일공산당(KPD)은 치명적이었던 ‘3월 행동을 전개했다. 독일 중심지에서 적들의 도발에 대응하며, 당은 당원들 밖으로부터는 지지를 받지 못한 총파업을 전개했고 이는 야만적 국가 탄압으로 이어졌다. KPD는 당원의 반을 잃었고 초좌익적 행동으로 인해 독일사회민주당(SPD) 좌파와의 관계 역시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으며, 이는 1923년 혁명의 실패를 낳았다.

 

파울 레비(Paul Levi)의 행동 때문에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당의 이전 지도자였던 레비는 대체로 올바른 분석에 기초해 3월 행동에 반대했으나, 극심한 탄압을 받고있던 시기에 그것을 바쿠닌적 반란이라고 묘사하는 등 당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당 규율을 어겼다. 그 결과 그는 KPD로부터 쫓겨났다.

 

자연히 양쪽 다 매우 감정적이었고, 많은 기록들을 보면 그는 거만하고 쌀쌀맞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혁명가들이 꼭 호감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다(많은 이들이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레비는 명백히 인기없는 지도자였고, 그랬기에 효과적인 지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그의 추방이 확정된 대회 자리에 직접 참석하진 않았지만 레비는 계속 언급되었다.

 

레비의 입장은 당시 혁명가들에게 가능했던 선택지들 중 하나를 반영한다. 1922년에 그는 전후 혁명적 물결이 끝났으며 새로운 물결이 다시 일 때까지 혁명가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SPD에 다시 가입했고 시민적 자유의 문제에 헌신했다. 비록 이 입장이 제3차 대회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구현되기 전부터 분명 대안들 중의 하나를 대표했다.

 

그의 입장이 옳았음을 역사가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를 숙명론적이라고 비판한 것은 정당하다. 상황이 반드시 꼭 그렇게 되어야 할 필연성은 없었고, 1921년 중반의 세계를 바라보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혁명적 기회들이 아직 다 소진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한 타당한 근거들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레비의 입장이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우파를 대변했다면, 좌파는 공세 이론이라고 불리게 된 것을 지지하는 모양새였다. 이걸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노동계급 전투성의 쇠퇴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공산당이 공세를 펼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인터내셔널의 집행위원회 중 몇몇이 이 입장에 공감했다. 특히 헝가리 공산주의 지도자 벨라 쿤(Béla Kun)이 그랬지만, 칼 라덱(Karl Radek)과 지노비예프(Grigory Zinoviev)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이 요약한 대로, 공세 이론의 가장 대표적인 적용이었던 3월 행동은, 독일 당 지도부가 자신들이 당 기구의 시험관 속에서 꾸며낸 하나의 결정을 통해 상황을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그것은 당 대중들의 즉각적인 방향 전환을 불러왔지만 내부적·지적·정치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결정이었음을보여 주었다. 가능성이 멀어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어려운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분명 해야 할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노동계급의 의식을 당들 스스로가 대체하려고 했다는 것에 위험성이 있었다.

 

CI(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도부(레닌과 그와 가까운 이들, 특히 트로츠키)의 전략은 한편에서는 패배주의와 수동성을 거부하고 다른 편에서는 의지만 앞세운 모험주의도 거부하는 중간적 노선으로 향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특히 독일 당에서의 대규모 탈당 사태 앞에서, 분열을 피하고 운동을 하나로 묶어 두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한 기초는 행동이, 그 안에서 취해져야 하는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세심하고 진지한 분석이었다.

 

전술과 전략

 

대회는 사태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그가 독일어로 한 3시간짜리 연설)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그러고 나서 곧바로 본인이 이를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로 통역하면서 멈추지 않고 장장 9시간 동안 연설을 했다!

 

그의 보고는 예전부터 구할 수 있었으나, 대회의 맥락 속에 놓였을 때 비로소 관련성을 얻는다. 트로츠키의 분석은 미국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중요한 경제적 중심은 더 이상 유럽이 아니라 미국에 있습니다. 유럽은 쇠락했고, 대체로 점점 더 쇠락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완연해진 과정을 파악한 것이다. 1945년 전까지 거대한 유럽 식민지 제국들은 큰 틀에서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깊은 위기 속에 있었고 계속 그럴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한편, 그는 시간적 척도에 대해서 공표하지는 않으려 했다. “역사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악랄하게 우리를 배신한 상황에서, 사건의 속도에 대해 논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명백히, 대표들 중 보다 낙관적이고 의지주의적인 이들에 반대하는 방향이었다.

 

투쟁은 어쩌면 더 길어질 것이고, 어쩌면 바라는 만큼 열정적으로 전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투쟁은 힘들 것이고 많은 희생을 요구할 것입니다. 축적된 경험은 우리를 더 기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투쟁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말로 표현되었지만 그의 일반적인 관점은 맞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자본주의는 살아남았지만 수 년 간의 공황과 파시즘의 발흥이라는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살아남았다.

 

이어서 전술과 전략에 대한 5회의 열띤 세션(3일이라는 일정 속에 빡빡하게 배치된)들이 바로 대회의 중심에 있었다. 이 세션들은 3월 행동과 공세 전략에 대해 주로 다루었다.

 

논쟁은 활기찼고 종종 격렬했다. KPD 대표단에는 양측의 대표들이 다 있었고 사건들에 대해 날카롭게 갈리는 평가들이 제출되었다. 몇몇 연사들은 KPD가 그 어떤 실질적 손해도 입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레비의 입장에 동조했던, KPD의 하인리히 맬젠(Heinrich Malzahn)50만 명의 노동자들이 3월 행동에 참여했다는 지노비예프의 주장에 대해, 20~22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는 조심스러운 분석으로 대응했다.

 

심지어 러시아 지도부 사이에서도 분열은 눈에 보였다. 트로츠키는 공세의 철학에 대해 혹평했다.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적인 이 유명한 공세의 철학은 다음과 같은 신기한 전망에서 나왔다. ‘수동성의 벽이 점차 올라오며 운동을 망치고 있다. 그러니 전진하여, 이 벽을 뚫고 나가자!’ 우리는 우리가 이 공세의 철학을 가장 중대한 위험으로 여긴다고, 그리고 이걸 실천에서 적용하는 것은 가장 중대한 정치적 범죄라고 독일 노동계급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 라덱은, 공세 이론은 거부하는 한편 3월 행동은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독일 공산당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저질렀든, 코민테른의 독일 지부로서, 당이 투쟁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거짓말인지를 3월 행동을 통해 대중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당은 투쟁할 의지를 보여주었고, 그럼으로써 참을성 없는 프롤레타리아들의 광범위한 대중, 무엇보다도 실업자들이 당과 함께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또 다른 독일 대표 에른스트 프리슬란트(Ernst Friesland)3월 행동이 당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고집했다. “우리는 독일 노동계급 사이에서 영향력을 전혀 잃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영향력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커져 가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사실에 대한 검증에 부합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당원의 최소한 절반, 어쩌면 2/3정도를 잃었다.

 

레비의 선동에 의해 KPD에서 추방된 초좌익 그룹인 KAPD(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가 대회에 참석한 것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들은 인터내셔널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 중 몇 개에 반대하는 주장을 함으로써 논쟁의 쟁점을 명확하게 하는 기능을 했다. 주장이 전달되지 않으면 표결에서 만장일치로 이겨도 의미가 없고, 반대파의 존재가 없으면 주장은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는 법이다. KAPD는 통일전선 전략이 기회주의적이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오래된 반혁명적 노동조합을 깨끗이 없애버려야 한다고 요청했다.

 

3월 행동에 대해 가장 명료하게 비판한 사람은 클라라 체트킨이었고, 체트킨은 추가적인 발언 시간을 받아서 1시간 15분 동안 레비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그녀는 레비가 말한 모든 주요 주장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운동의 규율 안에 머물렀다.

 

체트킨은 그저 여성 문제에 대한 작업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아질 사람이 아니며, 코민테른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연구될 자격이 있다. 그녀는 레비에게 화해를 구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썼다.

 

저는 우리의 대의를 위해서, 그렇게 폭력적으로 그리고 현명하지 못한 방식으로 당의 문을 박차고 나가지 말 것을 동지에게 간청합니다. 동지는 지금 당장은 저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최소한 제가 더 정확한 정보를 갖고 돌아올 때까지요. 힘든 희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의를 위해서 그렇게 하셔야만 합니다. 당을 살리고자 그렇게 용감하게 나락으로 뛰어드셨으니 이제는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있을 자제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지치지 않고 체트킨은 또한 여성 문제에 대한 토론도 제기했다. 노동계급의 남성과 여성들을 동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그녀는 여성만으로 구성된 분리된 조직에 반대했다. 그녀는 그들이 여성들 사이에서 우리의 일을 하기 때문에그렇게 불리는 것이지, “여성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닌여성위원회의 설립을 요청했다. “그 반대로 우리는 여성위원회가 남성을 포함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특히 체트킨은 운동 내에서의 열린 토론을 솔직담백하게, 그리고 매우 적절한 방식으로 옹호했다. 그녀는 혁명가들이 적을 돕게 될까봐 두려워서 비판을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훌륭하게 정리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공산주의자로서 쓰는 글이나 하는 말을 우리 반대자들이 이용하는 방식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한 줄도 써서는 안 되고 입을 열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반대자들은 모든 것을 왜곡하고 모든 꽃으로부터 꿀을 빨아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온전히 유효한 의견이다.

 

 

타협

 

토니 클리프와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é)같은 몇몇 역사가들은 대회가 3월 행동에 대해 감싸고 돌았으며 더 날카롭게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 논쟁에 대한 전체 기록을 보면 그런 주장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3월 행동과 공세 이론은 둘 다 무자비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타협이 있었다. 만장일치로 통과된 테제들은 공세 이론을 거부했지만, 3월 행동의 몇몇 긍정적 측면들을 인정했다. 이는 운동을 하나로 묶어 놓기 위해서 필수적이었다. 3월 행동을 더 강하게 비난했었다면 KPD의 추가적인 분열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레닌이 설명한 바와 같이,

 

물론 우리의 테제들이 타협인 것은 비밀도 아니다. 그리고 타협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제3차 대회를 열고 있으며 명확한 근본적 원칙들을 만들어 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특정 상황 하에서의 타협은 완전히 필수적이다.

 

전술과 전략에 대한 대회 위원회는 3월 행동을 일보 전진으로 규정했다. “(1)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용기 있게 투쟁했고 (2)당이 투쟁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는 사실이 아니었고 위험한 선례를 남기는 것이었다. 반면에, 3월 행동을 패배로 평가하는 것은 독일에서의 사기 저하를 더 심화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분열은, 독일 당에서든 혹은 인터내셔널에서든, 운동에 심각한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독일에서든 어디에서든 그 누구도 3월 행동을 따라해야 할 본보기로 여기지 않도록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를 비판하는 것과 그런 모험주의적 전술을 피할 필요성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중요해졌다. 집행위에서 나온 문서는 노동자 군대의 전위가 고립된 전투를 하도록 강제될 때, 적과의 무장 대립은 피해야만 한다. 오직 대중만이 대중을 승리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타협에 대한 리델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차후에 명확히 하자고 하면서 몇몇 쟁점들을 논의하지 않고 남겨 두거나 미룬 한편, 사회주의 운동에서 너무 자주 무시되었던 필수적인 목표는 성취했다. 그것은 바로, 이후에 더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혁명적 세력들의 단결을 유지하고 더욱 단결된 행동과 토론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 지반 및 원칙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리델은 부록에서,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자료 보관소에서 이용 가능하며 면밀한 연구를 할 가치가 있는 텍스트들을 발췌하여 인용한다. 체트킨의 <레닌에 대한 회고>가 그것이다. 여기서 체트킨은 대회 기간 동안의 논의를, 특히 (바로 그의 재능이 필요했기 때문에) 레비를 다시 운동으로 끌어들이려는 방법을 찾으려 한 레닌의 시도를, 레비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실패한 시도를 자세히 이야기한다. 타협을 위한 기반과 레비의 지도자로서의 결점에 대한 레닌의 언급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런 회고록들은 세심한 연구를 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진짜 운동의 복잡한 동학에 대한 그의 민강함을 드러내는, 레닌의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리델은 흥미로운 일화 하나를 찾아냈다. 3월 행동에 대한 논쟁에서 체트킨과 독일 대표단의 다른 구성원인 프리츠 헥케르트(Fritz Heckert) 사이에 날카로운 충돌이 있었다. 하지만 며칠 후에 체트킨의 생일이 다가오자, 이 노련한 투사에게 큰 장미 꽃다발을 선물하는 일은 다름 아니라 헥케르트에게 맡겨졌다. 뒤에서 이렇게 만든 사람은 레닌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

 

회상하는 여러 명의 비평가들은 의장 지노비예프를 포함한 인터내셔널 지도부의 결함과 그 특사들의 부족한 자질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것은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의 해묵은 문제, 즉 인력 부족의 한 측면일 뿐이었다.

 

1914년 제2 인터내셔널의 몰락은 운동으로 하여금 간부층의 대부분을 잃도록 했다. 보다 경험이 부족한 동지들이 CI를 재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 당의 많은 가장 훌륭한 투사들이 내전에서 사망했다. 그 결과 많은 지도자들이 자기 직책에 부합하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 벨라 쿤은 헝가리 혁명을 망쳐 놓았고 우익 탄압 때문에 본국으로 갈 수가 없어서 CI 집행위원회에서 직책을 맡게 되었다.

 

(리델은 쿤이 레닌에게 보낸 특히 불쾌한 편지를 찾아냈는데, 거기서 그는 체트킨이 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그녀가 너무 늙어서 운동에 기여할 수 없으니 자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의 역할에 대한 비판을 더 날카롭게 하려는 어떤 노력이든 새로운 인력을 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런 인력은 없었다.

 

회고해 보면 레닌과 트로츠키가 그 운동 속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취약함의 신호였다. 그렇게 적은 수의 개인들에게 그렇게 많이 의존한 운동은 사실 매우 약했다. 독일에서 룩셈부르크의 피살로 볼 수 있듯이, 한두 명의 뛰어난 동지들에 의존하는 혁명은 쉽게 꺾이는 것이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을 숨기려 하지 않았고 쉬운 해결책을 거부했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세상은 넓고 복잡하며,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꽤 어려운 책무이다.” 그들의 명확함과 확고함 말고도 인상적인 것은 어떤 겸손함이다. 여기서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 동지들, 우리는 우리나라에 세계 혁명의 보루를 건설했습니다. 이 나라는 아직 매우 뒤쳐져 있고, 아직 매우 미개합니다. 이는 빈곤이라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다른 보루가 없다는 것을 감안하고 이 세계 혁명의 보루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에 또 하나의 요새가 세워지면 러시아의 요새는 그 중요성의 9/10을 상실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다른, 더 중요한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유럽에 있는 동지들에게로 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동지들, 우리가 혁명의 러시아 요새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믿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레닌은 권력을 잡는 것에 대한 볼셰비키들의 생각을 묘사했다.

 

우리는 국제 혁명이 우리를 도와주러 와서 그 경우 우리의 승리가 온전히 담보되거나, 혹은 심지어 패배한다 할지라도 다른 혁명가들로 하여금 우리의 경험에서 얻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혁명의 대의를 수행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리 대단치 않은 혁명적 작업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결 v 선명성

 

그 대회는 선명성과 단결 사이의 균형의 필요성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에서 가장 많이 되풀이되는 주제들 중 하나를 드러냈다.

 

올바른 균형을 보장해 주는, 미리 결정된 공식은 없으며 균형은 특정한 구체적 상황 속에서 실천을 통해 성취되어야 한다. 그래서 체트킨은 선명성의 중요성을 주장했지만, 레닌은 공세 이론의 지지자들을 모욕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체트킨의 가장 예리한 논평들 중 하나에 의해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전선의 단결은 혁명적 선명성, 혁명적 에너지와 혁명적 행동을 희생한 대가로 성취되어서는 안 된다. 단결은 절대 그런 값을 치르고 얻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정교한 결의안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살아 있고 힘 있는 행동으로 결론을 내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다.

 

체트킨이 보았듯이, 단결과 선명성의 요구는 종종 충돌했다. 미리 결정된 공식은 없으며, 오직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려는 행동이 있을 뿐이다.

 

KPD는 또한, 비록 3월 행동에 대한 소동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훨씬 중요했고 제4차 대회에서 통일전선 전략이 전개될 수 있도록 기반을 놓은 계획을 발표했다. 19211KPD는 주요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출판했다. 서한은 여러 개의 방어적 요구들(임금, 실업, 생활비, 식량 공급)을 제기했고 단결된 행동을 요청했다. 서한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이 편지를 받는 동지들이 이 요구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건 당연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우리는 그들이 이런 요구들을 위해 결단력 있는 투쟁에 즉시 착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리델은 지노비예프를 포함한 ECCI의 구성원들이 원래는 통일전선 전략에 대해 경멸적인 입장이었음을, 하지만 레닌이 그 중요성을 얼마나 고집했는지를 보여 주는 몇 개의 문서들을 찾았다. 그는 공개서한이 논의된, (레닌이 참석하지 않았던) 인터내셔널 집행위 회의 속기록을 인용한다. 지노비예프는 그것이 대중운동이라기보다는 문학적 판타지에 더 가깝다고 기각했고, 부하린은 그것을 레비의 기회주의적인 횡설수설로 불렀다.

 

이는 대회 직전에 레닌이 지노비예프에게 보낸 편지와 매우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 편지는 공개서한 전술은 명백히 모든 곳에서 적용되어야하고 이 공개서한 전술의 필요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모든 자들은 제3차 대회 이후 한 달 내로 코민테른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RILU(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

 

3차 대회는 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Red International of Labour Unions)의 발족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는 CI의 소중한 동맹세력이 될 프랑스, 스페인과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있는 많은 수의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을 코민테른의 세력권 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중요한 계획이었다.

 

RILU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주요 노동조합들이 가입해 있는, ‘국제 노동조합 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Trade Unions)에 대한 대안적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하지만 CI의 성명들 중에는 개량주의의 힘에 대한 과소평가와 서유럽 노동운동에 대한 무지를 반영하는, 어느 정도의 승리주의가 있었다.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은 (KAPD의 초좌익적 입장과 반대로) 현존하는 노동조합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끊임없이 강조되었다.

 

IFTU는 일반적으로 황색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이라고 지칭되었다. 대회 소집 문서(의심의 여지 없이 지노비예프가 초안을 작성한)IFTU임박한 그리고 온전한 붕괴에 대한 예측이 있었다. 사실 IFTU에는 1921년에 24백만 조합원이 있었다. 이는 RILU보다 상당히 많은 것이었다. RILU가 주변화되고 결국 1937년에 끝난 반면 IFTU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살아남을 것이었다. 지노비예프의 개막 연설에서 IFTU자본주의의 마지막 보루, 다소 낙관적으로 묘사되었다.

 

반복적으로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은 황색이라고 지칭되었다. (프랑스어 ‘jaune’에서 온) 이 단어에는 분명 배신자라는 뜻이 있었다. 전쟁 동안 그리고 그 이후 IFTU 지도자들의 반동적 역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배신자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것과, 노동자 대중의 조직을 배신자노조로 부르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그런 행동은 분명히 단결된 행동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스코틀랜드 주조소 노동자이자 노동조합 대표인 토마스 벨(Thomas Bell)의 매우 분별력 있는 기고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문제제기된 적이 없어 보인다.

 

암스테르담에 관해서는, 그것을 맹목적인 물신의 대상으로 만드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잊어서는 안된다. 영국의 경우를 보면 분명히 그렇지 않다. 우리는 비판의 가장 좋은 방법이란 비판 자체에 너무 많은 무게를 두지 않는 것임을 발견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각국의 노동조합에 들어가서 반동적 지도자들을 타격하는 것을 통해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노조와 지지자들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로부터 빼앗아 올 수 있게 된다.

 

 

질문들

 

이 속기록들이 불러일으킨 몇 가지 생각과 질문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려지는 CI의 상은 다소 약한 지도부가 있는, 취약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조직의 상이다. 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 활동하는, 대단한 용기와 진실성을 가진 많은 혁명가들의 운동을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코민테른을 단순히 모방해야 할 모델로 보는 것보다는 그 약점과 한계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1917년 이후 레닌은 미지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마르크스, 카우츠키 혹은 다른 그 누구에게 이어받은 명확한 일련의 원칙들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판단에 기반을 두고, 타협을 하고 급격한 전환을 하며 활동해야 했다. 그가 대회에서 지적했듯이, 권력을 잡는 것은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도박과도 같은 것이었다.

 

레닌의 장점(그리고 그가 연구되어야 하는 이유)은 임기응변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레닌의 장점이 노동계급에게서 배울 줄 아는 그의 능력에 있다고 말한 것 때문에, 작년에 나는 <Weekly Worker>지에서 맹비난을 받았다. 그래도 나는 내가 썼던 내용을 고수한다.

 

마지막으로 리델의 작업은 필수적인 역사적 질문들을 제기한다. 러시아 혁명은 혁명을 확산시킬 가능성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레닌은 한 번도 일국 내 사회주의를 상상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KPD의 분열과 취약함을 보면, 우리는 독일에서의 혁명이 과연 가능했는지라는 매우 어려운 질문에 직면한다. 아니면 1921년에 기회가 이미 지나갔다고 한 레비가 옳았던 것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돌아보기 속의 질문이다.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의 보고에 따르면 1923년의 독일은 확실히 혁명적 상황처럼 보였다. 우리가 그 정도의 대중 동원력을 가진 상황에서 그 정도의 인플레이션에 직면한다면, 분명 혁명적 상황에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가능했는가?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기사 등록 201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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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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