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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이재용 석방/ 다시 시작된 ‘미투’/ 영화 <공동정범>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2. 7.

전지윤


 


이재용 석방이 보여 준 반동의 위험

 

박근혜의 겁박을 못이겨 두려움에 떨다 거액을 뜯긴 이재용, 피해자인데도 감옥에 갇혀 온갖 고생을 하고, 감옥 안에서는 옆방 죄수에게 직접 감을 깎아서 나눠먹고, 검사가 탕수육 시켜준다는데 짜장면을 먹고, 교도관에게 반말도 안하고... 고난 속에도 꺾이지 않은 아름다운 인격을 보여주다가, 2심 재판에서 누명을 벗고 나와 병상의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이것이 그동안 보수언론들이 퍼뜨려 왔고, 며칠전 정형식 판사가 완성시킨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스토리다. 이 정도면 지금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미투선언에 이재용도 동참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1심에서 5년 나온 것부터 불길하다는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설마했다. 지난 1년 동안 추가된 증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뇌물, 횡령, 재산해외도피, 범죄수익은닉... 이 모든 증거를 덮고 풀어주려면 개헌에 가까운 무리수를 둬야 한다고들 했다. 정형식은 그걸 해냈다.


주말에 시내에 나갈 때면, 문재인 정부를 공산혁명 정부라고 비난하며 이재용 석방등을 외치는, 노령층이 압도적이고 시끄럽지만 초라한 집회행렬을 보면서, 끈 떨어진 사람들의 발악을 보듯 약간의 안쓰러움도 느꼈었다.

 

그 사고방식이 이 사회 최상층부의 머리 속에도 있다는 걸 깜박했던 것이다. 촛불은 정치권력, 그것도 행정부의 교체에 그쳤고 아직 사회경제 체제와 권력은 그대로라는 걸 잊었던 것이다. 친미, 독재, 부패, 정경유착, 인권유린 속에 이 체제와 국가를 만들어 온 진짜 권력자들은 박근혜를 꼬리 자르기 해서라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힘을 회복하려 한다.

 

재벌, 기독교 우파, 사법부 등의 국가기구가 그 핵심에 있다. 촛불 이전으로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이들의 시도는 최근 충남인권조례 폐지와 이재용 석방으로 하나의 고비를 넘은 느낌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고 한다고 난리치자, 반나절만에 착오가 있었다고 발 빼는 문정부와 집권당이 이런 반격을 막아줄 거라고 믿기도 어렵다.

 

지난해 <조선일보>는 칼럼에서, 문정부의 몇가지 부분적 개혁 시도조차 비난하며 이 나라가 누구건데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온다고 했었다. 그런데 오늘 사설은 이재용 판결에 만족하며 우리 사회를 받치는 기둥이 아직은 건재하다고 느낀다고 썼다.

 

지난주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면 고문, 간첩조작으로 청춘과 인생이 망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여전히 판검사와 대법관, 국회의원 등의 자리에 앉아있는 그 책임자들도 나오는데, 이런 것들을 밝히고 바로잡으려는 것이 너무 싫다는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정형식에게 이재용 사건을 배당해준 장본인인 양승태의 으리으리한 집과 뻔뻔한 태도도 나온다.

 

반면 간첩으로 몰려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고 나온 할아버지는, 주변에서도 외면받고, 명절이면 혼자있는 골방에서 불렀다는 고향생각을 기타치며 부르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 촛불을 넘어서 나아가며, 저들을 받쳐주고 있는 기둥을 뽑아나가야 한다.

 

 

여성들이 진실을 말하자 폭발이 시작되고 있다

 

얼마전 <매일노동뉴스>에서 직업환경전문의 류현철 선생님이 공감격차에 대해 쓴 글을 봤다. 매일 1천명 아이들의 급식을 맡는 여성노동자의 팔꿈치를 보고 의사가 테니스를 치냐고 묻는 사례가 나온다.

 

서지현 검사의 고발에 대한 주변 여성들의 반응을 보며 느끼는 것도 비슷하다. 남성으로서 나는 그 심정을 얼마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지하철을 타고가다 노약자석에서 울음이 터진 아기를 안고 어쩔줄 몰라하는 이주민여성을 본 적이 있다.

 

아기를 안고 몸을 계속 좌우로 비트는 모습을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때 같이 가던 여성 동지가 그 여성 앞을 가리고 섰다. 그러자 그 여성은 아기에게 젖을 물렸고, 아기는 잠잠해졌다. 아기는 배고프다고 울었고, 건너편의 남성들은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여성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던 것이다.

 

너무 일상적이라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 지하철역 출구에서 남성만 골라서 쥐어주는 귀청소방명함, 뒤풀이할 곳을 찾다보면 흔히 보는 커다란 러시아 도우미입간판, 어떤 기사에든 줄줄이 따라붙는 노출사진과 성인웹툰 광고 등을 보고 이런데도 여혐이 없대지 XX'하는 여성 동지의 반응을 보곤 한다.

 

피해서사는 여성과 소수자들이 그걸 즐겨서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피해서사라고 비판받기도 하던 <82년생 김지영>은 이렇게 서지현 검사가 용기를 내고 투쟁하도록 이끄는 구실도 했다.

 

미투보다 먼저였던 여성들의 입은 왜 막혔는지, 왜 우리는 귀 기울 수 없었는지, 왜 더 많은 여성이 말을 할 수 없었는지 모두 따져볼 문제다. 서지현 검사도 가해자에 대한 비난보다 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는지, 왜 조직이 귀 기울일 수 없었는지, 왜 다른 의도를 의심 당했는지 주목해 달라고 했다. 너무 많은 곳에서 비슷한 패턴을 볼 수 있다.

 

많은 여성들이 가장 가까운 믿었던 관계 속에서 그런 일을 겪는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얼어붙고 이것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현실을 부정하며 혼란에 빠진다. 이어서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거나 원인을 제공한 게 아닌지 자책한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도 곧 가장 끈질기고 지겨운 서사들에 부딪힌다. 승진을 기대했는데, 연애 관계의 발전을 기대했는데, 다른 일로 앙심을 품어서, 원래 사람이 이상해서... 발언의 의도와 진실성을 의심받게 되는 것이다. 벌어진 일에 비해 과도한 대응을 하면서 상대방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으로 비난받기도 하고,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런 반응을 접하면 대부분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고 다시 입을 닫게 된다. 하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 안으로 쌓이고 그것은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마지막 한 가닥 기대마저 끊기거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어느 순간 폭발하기도 한다.

 

서지현 검사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이런 방법 밖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다는 데 8년이 걸렸다고 했다. 8년을 넘어서 13년이 지나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봐 왔다.

 

지금 많은 분들이 안태근, 최교일과 검찰조직에 분노하며 비판하고 있다. 피해자의 아픔과 용기에 공감하고 불의에 분노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은 항상 반가운 일이고 그것에 힘을 보태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알다시피, 성폭력과 성적대상화는 가부장제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고 검찰만아니라 운동사회까지 포함해서 우리 사회 곳곳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이처럼 곳곳에서 벌어져 온 크고 작은 잘못들에 눈감고 있다가 이번에야 목소리를 높이는 게 보기 싫다는 반응도 이해가 간다.

 

폭력의 피해자에 공감하고, 내가 그 처지라면 얼마나 힘들까 상상하며 감정이입하는 것은 중요한 첫단계다. 두 번째 단계도 필요한데, 내가 바로 주변의 여성과 소수자에게 상처와 고통을 중 당사자가 아닐지 상상해 보는 것이다.

 

서지현 검사에게 실망과 상처를 준 최교일, 박상기, 동료 남성검사들의 위치에 자신을 넣어보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게 훨씬 더 어렵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내가 했던 발언, 취한 태도들이 또 다른 서지현 들에게 큰 상처와 고통을 주지 않았을까? 또 다른 서지현들을 외면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돌아보면 나 자신부터 정말 미안하고 후회되고 되돌리고 싶은 순간과 상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고개를 들기 어렵다. 아마 다른 분들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서지현 검사를 방어하고 검찰을 비난하는 글 바로 밑에 또 다른 서지현을 공격하는 글을 올려놓고 있지 않은가? 서지현 검사는 응원하고 신뢰하면서, 또다른 서지현은 불순한 의도로 거짓말과 중상모략을 하고 있다고 다짜고짜 의심하고 비난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상상하고 감정이입을 해보면 반성과 용서는 피해자에게 직접 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서지현 검사의 말이 새롭게 다가오게 된다. 지금 이 사회에는 힘들 때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무는 것 뿐이었다는 또 다른 서지현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듯이 그런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서 겪은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면 그때 세상은 폭발해 버릴 것이다. 이미 그 폭발은 시작된 것일지 모른다.

 

용산참사 9주기와 영화 <공동정범>

 

최근 용산참사 9주기 추모식과 영화 <공동정범> 시사회에 갔었다. 결코 맘 편하게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지난해부터 계속 나온 군함도, 택시운전사, 1987같은 영화들보다 더 좋았다.

 

그런 영화들은 나름의 개성을 보였던 감독들(류승완, 장훈, 장준환)이 충무로 주문에 따라 뻔한 공식대로 만든 영화란 느낌이 들어 좀 별로였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테니 감동받은 분들에게 딴지 걸 생각은 전혀 없다.

 

용산참사는 2008년 촛불시위와 그해 하반기에 불어닥친 세계경제 위기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촛불에 한방먹은 이명박 정권이 경제위기에 직면해 다시 불도저같은 추진력을 증명하려하면서 벌어진 참극이었다. 그해 여름 쌍용차에서도 살인진압은 이어졌다. 요즘 강추위를 보며 새삼 느끼지만, 9년전 이 새벽에 물대포를 쏜 거 자체가 살인적인 짓이었다.

 

영화 초반에 망루를 향해 쏟아지는 물대포와 경찰 무전음, 그리고 어느 순간 안에서 번뜩이는 불길... 9년전 그날 ‘6명 사망이라는 뉴스 자막을 보면서 느꼈던 그 감정이 살아나면서 잔뜩 긴장이 됐다. 하지만 이어서 영화는 악마같은 정권과 경찰, 순수하고 선한 피해자라는 뻔한 공식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 영화에 여성주의가 담겼다는 말에 처음엔 잘 이해가 안 갔다. 소재가 그런 것도 아니고, 주인공들은 다 남성이고... 보고나서야 그 의미를 곱씹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억압과 지배가 세밀하게 얽혀 있는 세상을 읽어내는 관점이며 인식론이니까.

 

영화는 집단의 뒤로 개인을 가려버리거나, 소수자와 타자의 고민을 배제하거나 침묵시키며 통일 단결을 말하지 않는다. 망루에서 살아나온 사람들 사이의 원망, 의심, 견해차이, 불편한 감정들을. 또 스스로에 대한 후회와 자책, 마음의 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분법을 넘어서 하나의 비극적 사건 속에 수많은 기억, 감정, 상처, 의미들이 서로 교차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부차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살아움직이는 유기체의 각 부분을 떼어내서 중요성을 가리는 것처럼 무의미하다.

 

이것은 단지 용산참사 피해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수많은 투쟁 현장과 우리 주변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 모두 이 큰감옥에 같이 살고 있으니까. 문제는 순수한 피해자들이 악마적 가해자를 찍어서 도려낸다고 풀리지 않는다.

 

영화는 마지막에 서로 다른 처지와 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게 출발점일 수 있다고, 공감의 한마디가 꼬인 실타래를 풀 실마리일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상처받은 마음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상처만을 보면서 다른 이들의 고통을 도무지 보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그것이 여기저기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낳는지. 그래서 영화가 끝나니, 처음에 다같이 무대에 나와서 인사를 했던 주인공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다시 떠올랐고, 감독님들만이 아니라 그 분들이 너무 고맙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이명박, 김석기 등을 처벌해야할 이유를 이보다 더 강력하고 구체적으로 호소할 수 없는 영화, 공동정범을 꼭들 보셨으면 좋겠다.

 

#공동정범 #이명박구속 #김석기구속

 

 

(기사 등록 20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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