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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차별과 착취의 사회적 기반과 원천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2. 23.

  

억압과 차별, 착취가 어디서 비롯됐고 작동하고 있는지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오늘날 상호교차성 이론이 부각되고 있지만, 사회재생산 이론이 좀 더 나은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 글은 사회재생산 이론이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 상호교차성 이론과는 어떤 관계이며 왜 더 나아간 분석과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인 티티 바타차리아(Tithi Bhattacharya)가 사회재생산 이론에 관한 그녀의 신간 서적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설명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번역: 전지윤)


 

출처:

https://rs21.org.uk/2017/12/21/capitalisms-life-source-the-domestic-and-social-basis-for-exploitation/

 




 

이 개념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재생산 이론은 무엇인가?

 

사회재생산 이론은 괜히 듣는 사람을 겁먹게 할지 모르지만, (다소 거창하게 보이는) 이 큰 단어들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질문을 감추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근본적으로 상품의 생산이고, 그러한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노동자라면, 노동자는 누가 생산 하는가?

 

사회재생산 이론은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노동자의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재생산되는 사회적 과정과 그러한 과정이 상품 생산에 미치는 관계를 이론화한다. 자본주의 생산에 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노동자가 작업장 문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그 서사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이다.

 

노동자에 의한 상품 생산이, 말하자면 오전 7시에 시작하여 오후 5시에 끝난다고 한다면, 사회재생산 이론은 아침 7시 전과 오후 5시 이후에 일어나는 일에 관한 것이다. 누가 그 노동자를 생산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면, 그 대답의 일부는 쉽고 거의 상식적인 것인데, 사적 영역이나 가정에서 사회적 재생산이 벌어지는 부분이라고 답할 수 있다.

 

분명히, 우리의 노동자가 저녁 식사를 하고, 침대에 가서 잠을 자고, 그리고 다른 비슷한 방식으로 일할 능력을 재충전했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노동을 하러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장시간 근무 후에 자신과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는 두 번째 근무를 해야 하는가? 그녀의 아이를 챙기고 달래는 일을 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새로운 일련의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러나 잠시 그것들을 제쳐두고, 그녀의 가정에서 노동력을 재충전하는 방법들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여기에는 노동자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또 다른 더 직접적인 차원의 문제가 있다. 출산 또는 생물학적 번식은 이전 세대의 노동자를 대체하며 새로운 노동자 세대를 재생산한다.

 

자본주의가 생산과 재생산이 결합된 본질을 속이며 흐리는 반면에, 우리가 쓰는 말은 때로 이것이 통합돼 있다는 사회적 메아리를 유지시켜주곤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출산을 위한 여성의 고된 노동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용어는 로마 사회에서 최하층민이 오로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그/그녀의 능력에 따라서 인구조사에 등록되면서부터, “자손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라틴어 프롤레타리우스’(최하층민)에 기원을 두고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재생산에 관한 기존의 저술들이 가사노동과 재생산 노동의 경계에서 멈춘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가들(가장 두드러진 사례로서 셀마 제임스(Selma James) 또는 마리아 로사 달라 코스타(Mariarosa Dalla Costa)의 경우)에 따르면 가족 내에서 여성들이 주로 수행하는 돌봄 노동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며, 다음에 그 노동력은 어떻게든 자본에 팔려간다.

 

자본은 이런 돌봄 노동을 통해서 엄청난 수익을 얻어내지만 단 한 푼도 지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학술 활동가들은 가사 노동에 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건설해갔다.

 

다른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은, 나 자신도 그들과 같은 입장인데, 노동력은 가족 내에서 부분적으로만 재생산된다고 주장한다. 교육 시스템, 대중 교통, 공원 및 수영장과 같은 휴양 시설, 깨끗한 물(미시간주의 플린트나 스탠딩 록을 생각해봐라)에 노동계급 공동체가 접근할 수 있는지 여부는 사회적 관계에 내포된 자원으로써 노동력 재생산에 중요한 요소다.

 

그러므로 노동력 재생산에 기여하는 이러한 자원들에 접근할 수 있는지는 개별적 노동자뿐 아니라 전체 계급에게도 근본적인 문제다. 또한 노동계급은 생물학적 생식을 통해서만 재생산되지 않았다. 노예제와 이주는 자본주의가 노동력을 재생성한 역사적 방식의 일부이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두 가지 역할을 한다: 그것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다양한 사회적 관습, 즉 그 과정을 이루는 모든 수많은 사회적 관계의 모세 혈관들을 이론화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분돼 보이지만 상품 생산과 분리돼 있는 게 아닌 이 관계들이 어떻게 통합된 전체를 형성하는지 이론화한다.

 

생산 관계의 변화는 재생산 관계에 영향을 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직장에서의 임금 삭감은 집 없는 사람이나 가정 폭력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고, 반면에 물의 민영화나 빵 및 기타 사회적 필수품의 가격 인상은 사회 및 작업장에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 이론에서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문제제기는 흥미로운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사회재생산 이론의 핵심 주장은 매우 친숙하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사회재생산 이론이 노동가치 이론의 분석적 확장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가치 이론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를 사고 속에서 재현한 것이다. 먼저 노동가치 이론을 좁은 경제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거부되어야 한다. 노동가치 이론은 두 가지 질문과 관련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 인간은 어떻게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 내는가? 체제로서 자본주의는 어떻게 스스로 재생산되는가?

 

사용가치의 생산이란 인간으로서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 , 읽을 책, 연주할 악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용 가치를 어떻게 생산하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누구를 위해 생산하는지가, 자본주의가 어떻게 스스로 재생산되는지를 결정한다.

 

노동가치 이론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가 세계 곳곳의 일터에서 상품 생산을 조직하는 사회적 과정을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서로 다른 구체적인 노동은, 직접적으로보다는 시장의 메커니즘을 통해 다른 노동에 견줘서 측정된다.

어떻게 서로 다른 상품(하나의 납작한 빵과 하나의 아이폰)이 그것을 만드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서로 등가성을 갖게 되는지를 밝힌다.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핵심은 서로 다른 종류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이 교환된다는 것에 있지 않다.(이것은 독립 장인/ 직공이 그들의 상품을 시장에 가져와도 일어나는 일이다.) 체제로서 자본주의의 특징은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고 판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자신의 독점적 지배와 통제 아래에서 그 노동력을 이윤 창출을 위해 일하도록 한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노동력의 대가를 지불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받는 임금이지만 노동자 자신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 또는 노동자가 이를 위해 구매하는 제품의 가격과 동등하다.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생산하는 추가적인 가치는 잉여가치로서 자본가에게 돌아간다.

 

사회재생산 이론이 정교화한 것은 바로 이 노동자의 재생산인데, 노동계급을 유지/보충하는 것은 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해 지급된 재화나 임금 뿐만 아니라 무급 노동(가사 노동, 아이의 출산)이기도 하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재생산 이론은 생명’(생물학적이면서 사회적으로도 이해되는)을 생산하는 사회적 관행과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적 관행을 통일된 체제 속에 결합시킨다.


사회재생산 이론에서 새로운 것이 있다면, 오로지 상품의 기원과 운명만을 다루는 노동가치 이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이 부분적인 설명에 그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에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 대부분의 설명에서, 노동력은 단순히 주어진다고 가정된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우리가 노동력을 단순히 거기 있는 것이거나, 그것의 생산에 역사가 없다고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자본주의가 매우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방식으로 노동력을 생산하고 자본에 유용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회재생산 이론의 매우 중대한 기여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비록 자본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행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 매우 특정한 형태를 취한다. 노동계급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이 이 재생산에서 중심적인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비역사적이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결정될 수도 없으며, 사회에서 특정한 형태로 자본주의에 의해서 조직된다. 예를 들어, 생산과 공간적으로 분리된 이성애적 일부일처제 가족의 출현은 현대 역사에서 우연적인 발전이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가장 적은 비용으로 손쉽게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제공 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과 관련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생물학적 재생산에 대해 뭔가 더 이야기하고 싶다. 트랜스포비아(트랜스젠더에 대한 적대와 혐오)가 성차별과 폭력의 새로운 선구자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의 능력(또는 사회재생산 이론의 개념에서는 노동력을 세대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은 자본주의 하에서 그들이 억압받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적 결정론이 아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생물학적 능력의 사회적 조직을 가리키며, 그러한 조직이 일어나는 방식은 역사적이며 문화, 지리 등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재생산 이론은 우리에게 생물학적 재생산에 관한 논쟁에서 트랜스젠더를 지지하도록 할 뿐 아니라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철저히 반대하도록 한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 노동력 세대 교체를 자본주의가 필요로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재생산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남성지배적인 가족 형태를 견뎌내도록 강요하면서 자본이 의존하는 구체적 신체 기능은 출산, 수유 등이다.

 

남성과 여성, 또는 시스젠더(사회적으로 주어진 성과 스스로의 정체성이 일치하는)와 트랜스젠더라는 신체의 생물학적 차이는 여기서는 오로지 자본이 필요에 따라 이러한 차이를 연계하고 조직하는 방식으로서만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논의는 생물학적 출산 기능이 시스젠더 여성과 트랜스젠더 여성 중 누구에 의해서 수행되느냐는 궁극적으로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후자의 현상이 사회형태 안에서 결코 일반화되지 않았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러한 기능이 자본에 의해 요구되고 조직되는 한, 여성 억압뿐 아니라 젠더적 억압과 폭력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가족은 노동계급이 재생산되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위에서 말했듯이, 이주는 그것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이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이주와 인종에 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사회재생산 이론은 자본주의에서 이주와 인종차별의 구실에 관해 두 가지 수준의 분석을 제공한다. 첫 번째 분석은 알아듣기 쉽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노동력이 자본에 유용하게 되는 방식에 관심을 갖는다.

 

이성애적인 노동계급 가족은 분명히 자본의 기본적인 근원이었지만, 노동력이 특정 국가와 지역, 또는 제한된 공동체에서 구성되는데 있어서 강제 이주, 노예 제도, 이민 또한 핵심적 수단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특히 노예제도는 자본주의에 부차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얽혀있는 것이다. ‘추상적자본주의(/인종에 중립적이면서 축적을 위한 추진력만 갖추고 있다고 가정되는)역사적자본주의(구조적으로 얽힌 성/인종이 축적을 보조하는)를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이론적인 실험에 그칠 뿐이다.

 

추상적으로만 자본주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민족 국가, 전쟁 또는 섹스에 대해 말하지 않고 중력의 법칙으로만 지구상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우리가 노동력을 이미 이용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용 가능하게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이것이 일어나는 무수한 과정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어떻게 특별히 성애화된/인종차별화된 사회적 관계 안에서, 노동력이 재생산되는지를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억압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핵심 조직자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사회재생산 이론에서 인종 및 인종주의에 대한 질문에 분석의 두 번째 수준이 있다.

 

자본 재생산의 조건으로서 노동력의 재생산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사회재생산 이론은 또한 모든 노동력이 동등한 것으로 재생산되는지를 묻는다. 생산 체제로서 자본주의는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서로 다른 노동 능력 사이만큼이나 서로 다른 상품 사이에 동등성을 수립하고자 분투한다. 그러나 모든 노동력은 동등하지 않다. 어떤 신체/사람들과 그들의 노동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본의 지배력에 더 취약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재생산된다.

 

이러한 차이의 효과는 종종 그들이 직장에 있을 때도 (여성이 가장 늦게 고용되고, 가장 먼저 해고되고, 임금 차별을 받는 등으로) 자주 나타나지만, 이러한 차이의 생산은 사회재생산의 중추들 교육체제, 보건의료에 대한 접근성,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었는지 아니면 부모 모두가 [민중의] 대규모 투옥 때문에 [아이를 돌보지 못했는지] 및 그것들이 이러한 차이를 생산하는 데 하는 역할들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이 두 가지 일을 아주 효과적으로 한다. 먼저 자본 축적에서 억압이 하는 구실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이론화함으로써 착취와 억압 사이의 분석적 갈라짐을 결정적으로 거부하고 그 둘이 내면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보여 준다.

 

둘째, 사회재생산 이론은 이들 사이에 얽혀있는 통일성을 인식하기 때문에 억압에 대해 분명히 비기능적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인종주의/성차별주의(그리고 다른 구체적 억압들)는 자본이 필요해서만들어낸 양식이기 보다는, 차라리 자본주의가 사회적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들이 지나가면서 나타난 어두운 브리콜라주(여러가지를 닥치는 대로 꿰어만든 것)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안정된 양식도 영원한 것도 아니며, 축적과 그것에 맞선 투쟁 모두에 의존한다. 이것은 억압의 형태와 강도가 그것에 맞선 집단적 투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한 축적을 향한 드라이브와 억압이 뗄 수 없게 묶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틀거리 속에 있는 한 자본주의는 억압에 맞선 우리 투쟁의 한계를 설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해서, 사회재생산 이론은 이론적으로 억압에 맞서는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계급, 인종차별, 여성 억압 또는 섹슈얼리티를 떼어내서 살펴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즉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상호교차적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회재생산은 상호교차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것에 대한 답변은 거의 소논문 수준으로 길어야 한다!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는 이미 우리를 위해 그것을 썼으며, 그것은 내가 편집한 곧 나올 사회재생산 이론에 관한 책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상호교차성 모델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일부 이론적 문제만을 제기할 것이다.

 

먼저, 나는 상호교차성 이론가들이 인종과 젠더 및 자본주의 아래서 그 기능에 대한 풍부한 경험적 연구를 우리에게 가져다 줬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또한 현대 세계의 형성에 있어서 억압의 중심성을 주장했다. 이 두 가지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공통된 근거를 찾아야만 하다.

 

놀랄 것도 없이, 오늘날 미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어떤 사람이 스스로 상호교차성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다면, 그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반()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확실히 우리가 함께 일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누군가일 것이다.

 

그러나 상호교차성은 자본주의적 현실을 이해하고 이어서 변혁하는데 적절한 도구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상호교차성에 대해 제기하는 이론적 문제는 용어 자체에서부터 출발한다. 상호교차성은 서로 다른 억압(예를 들어 인종차별과 성차별주의가)이 격자 모양 현실의 다양한 교차점에서 엇갈리고 결합된다는 것을 뜻하는 용어이다.

 

비유로서 교차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교차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도로가 만나는 곳이다. 그러나 인종과 젠더가 도로나 사회적 관계를 분명히 구성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서 생겨났으며 무엇이 그것을 뒷받침하는가? 나아가, 그 교차점의 논리는 무엇인가?

 

이 용어와 그것이 애초부터 제기하는 문제들을 넘어서, 총체성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념과 이런 종류의 격자 모양의 사회에 대한 의문이 있다. 관계들의 부가적인 결합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해하는 총체성과 똑같은 것이 아니다.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와 그의 뒤를 이은 버텔 올만(Bertell Ollman)의 연구는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총체성을 통해 의미하는 바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둘 사이에 주요한 차이점 두 가지만을 살펴 보겠다.

 

사회적 총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다. 변화, 변형, 적응력이 이것의 특징이다. 사회(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많은 구절들에는 거의 생기론(모든 것을 기계적 물질작용으로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여 생명력과 활력으로 설명하려는 이론)적 편향이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는 마치 사회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인 것처럼 쓰고 있다. 반면에 격자틀이나 상호교차성으로 사회를 보는 관점은 대체로 2차원적이며 너무 정적이다. 이러한 교차점 중 어느 것이 변화하거나, 어디선가의 변화에 반응하든 개념이나 은유로서는 별 의미가 없다.

 

둘째로, 마르크스주의의 프로젝트는 내재적인 모순의 개념을 통해 역사적 변화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변화와 사회적 총체의 변동이 외부적인 것이 아닌 내재적인 모순을 통해서 추동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에 상호교차성은 그것이 정적인 모델이기에, 항상 존재하는 억압에 대해 역사를 초월한 모델을 말하며,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임의적인 설명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회적 억압들이 상호교차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억압들은 어디에서부터 비롯하는 것인가?

 

이론과 개념은 단지 우리의 세계를 설명하는 도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무장시켜 주기에 중요하다. 여기에서도 상호교차성은 그 작업을 수행하기에 다소간 부적합하다.

 

예를 들어, 상호교차성을 따라 가면, 왜 우리가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하는지를 분별하기가 매우 쉽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러 복합적인 교차로에서 억압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그런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이 백인, 남성 노동자와 연대하고 대화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상호교차성 이론가들의 경험적 발견이 상호교차성의 방법론과 실제로는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흑인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발견은 인종과 젠더가 실제로 어떻게 상호적으로 구성돼 왔는지 보여 준다. 인종과 젠더가 억압의 분리된 시스템으로 존재하거나, 오로지 외부적으로만 관계된 궤적을 그리는 분리된 억압이 아니라 말이다.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가 지적했듯이, 사회재생산 이론은 우리에게 상호교차성의 통찰을 유지하고 재배치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지만, 집합적 현실에 대한 그것의 이론적 전제는 거부한다.

 

당신은 올해 가을에 출판될 사회재생산에 관한 글들이 실린 책을 편집했다. 어떤 주요 이슈를 다루고 있나?

 

나를 위한 중요한 고려 사항 중 하나는 우리 시대에 사회재생산 이론의 전략적 함의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임노동/자본 관계 밖의 사회적 관계가 자본의 재생산에 결정적이라는 것과 노동력의 형성이 어떻게 해서 자본 재생산의 근본적 전제 조건을 제공하는지 보여 준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생산현장 밖에서 벼려지고 유지된다면, 생산현장 밖에서도 그러한 관계가 도전받고 중단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최저생계 수단이나 삶의 재생산을 돕는 서비스 등을 둘러싼 사회운동(주거, 의료복지, 또는 인종폭력에 맞서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작업장 안에서 발전하는 투쟁만큼이나 반자본주의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이 책을 살아있게 만드는 중요한 주제이며, 나는 작업장에서의 투쟁의 수준이 낮을수록 더욱 더 이런 관점을 발전시켜야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지난해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38일 여성 파업의 핵심 조직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폴란드에서 낙태 불법화 시도에 맞선 역사적인 여성 파업(2016)과 거대한 페미니즘적 동원으로서 비슷했던 아르헨티나의 남성 폭력에 맞선 ‘Ni Una Menos’(한명도 더 잃을 수 없다) 활동가들이 만든 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

 

국제 여성 파업에 대한 요구는 처음에 폴란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나왔고 서서히 50개 국가의 활동가들을 포함시키며 성장해 갔다. 우리는 여성이 작업장뿐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의 모든 분야에서도 노동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파업이라는 단어를 채택했다.

 

미국에서 38일은 우리에게 사회재생산 이론을 실제로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우리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사상 최저 수준임을 알았다. 전통적으로 유용하던 노동계급의 조직화 도구들은 대부분의 작업장에서 사라졌거나 수십 년 동안의 실리적 조합주의로 인해 무뎌져있었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자본에 의해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종종 계급투쟁의 영역이 생산에서 재생산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38일은 특정한 종류의 조직화를 통해서 이런 즐겁고도 구체적인 교훈을 입증해 줬다.

 

30개 이상의 미국 도시에서 사람들은 시위, 행진, 대학 캠퍼스에서의 특별토론 및 3개 학군에서의 실질적 작업중단의 형태로 파업에 참가했다. 여성들은 직장에 병가를 내고, 남편들에게 그날 하루 스스로 밥을 해 먹으라고 편지를 써놓고는 교사, 간호사, 성노동자 그리고 어머니로서 집회와 행진을 했다.

 

우리의 성명서는 셰릴 샌드버그 (Sheryl Sandberg)와 같은 사장들의 린-인 페미니즘(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 여성에게만 가능한 여성주의)과 매파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과 같은 제국주의적 페미니즘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며 ‘99 퍼센트의 페미니즘을 주장했다.

 

나에게 그날의 절정은 한 젊은 트랜스여성의 연설이었다. 우리의 뉴욕 집회에서 그녀는 자신이 작업장에서 페미니스트사장에 맞서 어떻게 성공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만들어냈는지 이야기했다.

 

사장들의 페미니즘이 사그러질 때, 고용인들의 권리가 돌아오게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 사장들의 페미니즘에 맞서며, 그녀에게는 38일이 ‘99%의 페미니즘을 위한 출발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38일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조직적 실천과 형태를 재건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38일은 우리에게 오늘날 힘이 합쳐진 세계적 페미니즘 운동을 위한 엄청난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지난 40년 동안의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강탈은 우리에게 이런 운동 건설의 필요성을 확실히 보여 줬다.

 

여성 파업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세계적 운동이 성장하려면 마르크스주의자들로만 구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러한 운동을 건설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면 오랜 동안의 패배, 종파주의와 비겁함에 의해 망가져온 우리의 이론과 실천을 다듬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그러한 준비에 결정적 도움을 줄 것이며, 더불어 그런 운동 속에서 단련된 새세대의 활동가들은 사회재생산 이론 자체에 분명히 새로운 생각과 행동의 융합이나 실천의 철학을 가져다 줄 것이다.

  


(기사 등록 2018.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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