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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국가’에 대한 기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1. 18.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최근에 넷상의 진보 사이에 한 가지 재미있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몇주전에 구순을 맞이하신 세계 진보의 원로 격인 촘스키 선생이 현재 시리아의 쿠르드족 지구에서 주분하고 있는 약 2천 명의 미군이 "쿠르드족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공방이 벌어진 겁니다.

 

이 발언의 반대자들이 촘스키 선생의 "미 제국주의에 대한 몰이해" 내지 "착각", 그리고 주권 국가인 시리아의 영토에서 무허가로 들어 있는 미군 주둔의 국제법상의 불법성 등을 강조하는 반면, 또 찬성파는 - 아마도 트럼프에 의해 곧 이루어질 - 미군 철수 이후의 터키와 시리아 통치자들의 손에 쿠르드족이 어떤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는 것입니다.

 

물론 쿠르드족이 미국에 의해서 이용 당했다가 다시 한 번 ""을 당하는 모습은 전혀 즐거운 모습이야 아니지요. 그런데 미국이 로자와 등 시리아의 쿠르드족 거주 지구에 들어간 것은, 결코 "쿠르드족 보호"를 위해서는 처음부터 아니었습니다. 쿠르드족 민병대는 임시적 이용 대상이었고, 목적은 - 당연히도 - 친러/친이란 시리아 정권 전복의 촉진, 그리고 이란과의 접경지구 점령이었죠.

 

한데 시리아 정권 전복 계획은 인제 확실히 빗나갔고, 또 쿠르드족 거주 지구에서의 미군 주둔이 - 어쩌면 모스크바 쪽으로 더 가까이 갈 위험성이 있는 - 터키의 불만 대상이 됐기에, 트럼프가 "대이란 침략 준비"보다 "대터키 관계 관리"가 우선이라는 결정을 내려 철수 명령을 내린 겁니다. 터키로부터의 엄청난 무기 주문들이 미국이 아닌 러시아 쪽으로 가면 미국 군산복합체의 손실액이 하도 클테니까요.

 

쿠르드족의 운명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고 지금도 안중에도 없죠. 그런 것은 미국의 계산서에 들어갈 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미국의 결정권자들이 쿠르드족 운명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할 수 있다고 촘스키 쌤이 간주하셨다면 이건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반대자들의 논리가 맞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촘스키쌤만이 그런 류의 착각을 일으키시는 것도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아무래도 특정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대학 교원 등으로 나름의 중산층 이상의 '조직 생활' 하다보면 그 국가에 대해서 맑시스트로서 - 내지, 촘스키의 경우처럼 아나키스트로서 - 가지지 말아야 할 각종 착각들을 절로 가지게 됩니다. 체제에의 포획 효과라고나 할까요?

 

우리 대한민국의 "진보 지식인 사회"를 보면 어쩌면 촘스키쌤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진보 같으면 이명박, 박근혜 등 극우파가 다스리는 국가라면, 모범적인 맑스의 제자들답게 그 국가의 반민중적이며 계급적인 성격을 냉정하게 분석하곤 합니다. 한데 약간 더 소프트한, 자유주의 지향의 보수가 지금처럼 권력을 장악한다면? 맑스주의적 분석의 예리함은 점차 둔해지기 시작합니다.

 

왜 내로라하는 진보 논객들이 현 정부를 "개혁" 내지 "진보"로 부르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어느 통계를 봐도 이명박/박근혜 시절과 비교했을 때에 상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집권 초기에는 인천공항에 가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쇼를 벌였지만, 공공기업인 서부발전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리가 이번 김용균 노동자의 참사에서 그대로 다 본 게 아닙니까? 비정규직의 비율은 박근혜시절에도 32%이었고 지금도 32% 정도입니다.

 

양극화는? 개선의 조짐이라고는 전무합니다. 지니계수는 박근혜 말기 시절 그대로 0,355 정도며, 상위 20% (, 부유층과 중상층)의 소득은 여전히 하위 20% (빈민층, 워킹푸어)보다 딱 7배 높습니다. 상대적 빈곤율은 17% 그대로고요... 경제 정책은, 오히려 박근혜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이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공공부문 민간 투자 허용 수위만 보시죠. 군사 예산 증가의 폭은 8% 이상이며, 2008년 이후 최고액입니다. 군 정찰위성와 F-35A 개발, 철매-II 성능개선형 미사일 확보 등 군의 윗 대가리들의 꿈들은 많이 이루어지겠지만, 청년실업자, "취준생"들의 고통은 그냥 여전합니다.

 

도대체 뭐가 "진보"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걸 이 정부를 지지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진보 논객 분들도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죠... 촘스키 쌤이 미군에 "쿠르드족 보호"를 기대하시지만, 아마도 한국의 진보는 현 정권에 "평화"를 기대할 것입니다. 지금의 대북 평화 노선이야말로 현 정권의 유일무이한 매력포인트임에 틀림없죠. 한데 이것도 과연 "진보성"인가요? 개방하려 하는 북조선의 "저임금 인력"이나 "매장자원"에 대한 남조선 기업들이 흘리고 있는 군침과는 전혀 관계 없을까요?

 

진보 동지 여러분, 저는 문 정권의 평화 정책에 대한 지지 철회를 호소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오해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동기야 어떻든간에 일단 지지할 만한 걸 지지해야죠. 아무리 이번 정권처럼 사회, 경제정책상 대단히 보수적인 정권이라 해도요. 그런데 지지할 걸 지지한다 해도 제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헛된 꿈을 꾸지 맙시다. 자본주의 국가는 그냥 총자본의 이윤 확보를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그 수장은 가령 이재명이 돼도 그럴 것이고, 유시민이 돼도 그럴 것입니다. 밑으로부터의 압력이 국가로 하여금 괜찮은 방향으로 움직이게끔 할 수는 있지만, 그건 국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압력의 효능일 뿐입니다....


 

(기사 등록 201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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