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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사회적 재생산: 얼마나 중요한 생각인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2. 14.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

번역: 두견 



 

사회적 재생산 이론(SRT)의 핵심은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삶의 생산을 하나의 통합된 과정의 일부'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종적이고 성적인 억압은 자본주의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발전에 기여해온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 이 글에서 SRT가 어떻게 자본주의에서 나날의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이 변증법적 접근법의 역사, 그것의 다변성, 그리고 그것의 잠재력들을 탐구한다. 수잔 퍼거슨은 캐나다의 윌프레드 로리에(Wilfrid Laurier) 대학의 디지털 미디어 및 저널리즘 관련 부교수로서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연구해 왔으며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이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출처: https://www.plutobooks.com/blog/social-reproduction-theory-ferguson/

 


 


사회적 재생산은 중요한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큰 아이디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다른 연구 분야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문제에 맞게 계속 수정된다. 우리는 예를 들어 교육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경제학에서 사회재생산 이론이 발전해 나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만약에 당신이 위키피디아에 물어본다면, 그것이 매우 일반적인 수준에서 불평등의 지속적 존재와 재구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적절한 정의다. 그러나 우리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그 용어가 어떻게 사용돼 왔는지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요점을 놓친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SRF로 축약해서 쓸 것이다)10년 넘게 끈질기게 지속되는 인간 삶(그리고 이에따라 인간 노동력)의 나날의, 그리고 세대를 거친 갱신이 단지 불평등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방법을 탐구한다.

 

SRF의 이러한 뚜렷한 기여가 항상 자명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전통 속에서도, 사회적 재생산은 서로 다른 의미로 여겨진다. 마르크스는 그 아이디어를 (직접 지칭하진 않았더라도) 자본 1권에서 소개한다. '단순 재생산'에 관한 23장에서 그는 '그것을 연결된 전체로서 그리고 끊임없이 갱신되는 흐름으로 본다면, 모든 사회적 생산 과정은 동시에, 재생산 과정'이라는 것을 숙고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더 나아간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수 조건인 임금 노동자를 재생산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한 세기 후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둘 다 이런 마르크스적인 통찰에서 시작해서 자본주의의 폭넓은 재생산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알튀세르)문화 자본’(부르디외)의 특성을 이론화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억압과 착취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 설명하는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자신들의 이론화를 발전시킨 것도 거의 같은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에 대한 이러한 모든 주장들과 함께, 그 용어가 너무 광범위하게 보여서 수많은 쓰임새가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은 많은 경우에 그것이 어떤 형태의 관습과 제도를 목록화하는 방법을 뜻하는 약칭의 한 종류처럼 보인다는 사실로 도움을 얻진 않는다.

 

그것은 흔히 자본주의 관계의 성격과 그것들을 갱신(또는 덜 일반적으로는 저항)하는 데 연루되는 노동력을 설명하거나 분석하기보다는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나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SRF의 장점을 옹호해 왔다. 그리고 그 용어가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지는 않지만 - 이 용어를 정식으로 채택한 SRF 클럽, 정당 또는 네트워크는 없다 - 나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그것이 나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적 재생산의 매우 구체적인 이론화의 분석적 통찰과 능력을 각인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는 내가 생각하는 SRF가 마르크스, 알튀세르, 그리고 부르디외가 사회적 재생산의 개념을 적용하는 방식과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

 

SRF는 느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일관된 사상학파이다. 이 세대와 다음 세대의 노동자들을 생산하는데 관련된 사회적 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축적하려는 자본주의적 드라이브와 필요하지만 모순되는 관계에 있다는 정치경제학적 통찰을 확인하고 발전시킨 것이다.(나는 필요하지만 모순되는 관계를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이런 통찰이 거의 200년 전에 마르크스 이전에는 가장 '과학적'(, 정치경제학적)이었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인, 안나 휠러(Anna Wheeler)와 윌리엄 톰슨(William Thompson)에 의해 예견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가렛 벤스턴(Margaret Benston)1969<먼슬리 리뷰>에 기고한 '여성 해방의 정치경제학'에 와서야, 우리는 그것이 불연속적이면서 논리정연한 이론적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한결같고 강력한 토론과 논쟁에 영감을 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전통에 대해서 너무 많은 기여자들을 전부 나열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단지 몇 가지만 언급할 것이다.

 

1980년대 요크대 대학원생으로서 그들의 아이디어가 내 생각을 형성하게 했던 사람들. 멕 루스턴(Meg Luxton), (Pat)과 휴 암스트롱(Hugh Armstrong), 월리 세콤비(Wally Seccombe), 조안나 브레너(Johanna Brenner), 바바라 라슬렛(Barbara Laslett), 리즈 보겔(Lise Vogel). 이들과 사이에서 중요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론적 공간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 다른 사람들.[예컨대,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또는 마리아 미즈(Maria Mies), 이들의 작업을 나는 한참 후에야 보게 됐다.]


SRF는 사회적 재생산의 필수불가결하고 축소할 수 없는 논리에 내재하는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동역학의 방법을 설명하겠다는 약속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젠더 관계는 가부장적 동역학에 의해 형성되는 반면(그리고 단순히 자본주의의 계급 주도적 명령을 나타내는 기능은 아니다) 그들은 또한 전체로서 자본주의적 사회 형성의 계속되는 유지와 재생산에 있어서 항상 구체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젠더와 계급간의 관계에 대한 이론화로 시작된 것이 새로운 세대의 SRF 이론가와 운동가들에 의해 다시 보정되고 있다. 보다 최근의 작업은 어떻게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 식민주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다른 억압들이 SRF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식별하는 필요하지만 모순된 관계속에 연루되어 있는지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많이 어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표현처럼 들릴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관계의 공동 구조화에 대한 흑인 페미니즘과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어떤 핵심적 통찰은 SRF에 새로운 생각을 고무시키고 알려준다. 하지만 SRF는 그런 접근법의 몇 가지 이론적 곤란함들을 넘어서고 있다. 내가 나의 논문인 "상호교차성""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통합적 존재론을 향하여"에서 논했듯이 말이다.

 

SRF에 관한 다른 두 가지 사항은 여기에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역사유물론적 분석이다. 역사적 특수성의 문제는 중요하게 취급돼야 한다. 억압의 조건과 형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세계 북반구의 대다수 여성들은 모성과 직업들 사이에서 끌려다니며 (남성지배적인 지형 안에서) 제한된 '해방적인' 섹슈얼리티를 협상한다. 그 경험들 중 어느 것도 100년 전에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역사적 변화는 임의적이거나 단순히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생각 여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가 규정하는 가능성의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감당할 수 없는 완전히 사회화된 육아 같은 몇몇 사회적 실천과 제도들이 있다. SRF는 항상 이것을 감안한다.

 

둘째, SRF는 인간 노동력을 생산하는 과정과 가치 생산 과정 사이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변화하는지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간다. 내가 위에서 주목을 요하며 진하게 강조했듯이, 그 관계는 필요하고도 동시에 모순적이다.

 

그것은 자본가들이 그들 스스로 생산하지는 않지만, 가치 생산의 핵심적인 조건으로서 인간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노동자들(노동력의 담지자)은 당연히 기본적 생계의 필요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임금과 사회적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경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필요 충족을 축적에 종속시키는 조건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력과 삶 그 자체의 갱신을 위해 지불하는, 임금과 사회적 지출을 제한하고 통제해야 한다. 생산과 재생산의 필요하지만 모순되는 관계를 파악하면서, SRF는 마르크스가 인식했던 생산과 재생산의 통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만든다. SRF는 우리에게, 겉보기에는 독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인종적이고, 젠더화되고, 성적이고, 식민화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관계가 강탈과 축적의 자본주의적 계급 동역학의 일부이며 한 묶음인 방식을 조사하도록 자극한다.

 

그래서 그것은 노동계급 사람들의 기본적 생존의 필요뿐만 아니라 자본이 기꺼이 지불하려고 하는 것을 넘어서는 신체적, 정서적, 지적 요구와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능력을 - 대부분의 경우 완전히 없애지는 않지만 - 제약하는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히 가치 창출의 구성요소로서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굴절된 사회성 안에 놓여있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관계로서 노동을 검토하도록 요구한다. SRF는 나아가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은 노동이나 노동자가 아니라 소외된 노동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동시에, 인간이라는 포장재 없이는 이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다. 그것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의 몸과 마음이, 그들이 속해있는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사회의 동력에 맞서서 반격할 수 있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SRF가 단지 불평등에 한정되지 않고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동역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 점에서, 그것은 경제시스템 이상의 수준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해를 공유한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자본주의는 광범한 사회적 구성체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도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가치 창출의 필수조건으로 논의한다.

 

하지만 그는 그 재생산에 끌어들여진 사회적 관계를 약간 분석하는 것에서 멈춰버린다. 재생산 과정을 약간 기술적으로, 기술 이전이나 이민 정책이나, 생물학적 재생의 문제처럼 취급한다. 마르크스는 더 넓은 사회적 관계의 일부로서 가족 안에서 성별화된 관계를 탐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삶을 만들어내는 것과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 사이에는 필요하지만 모순되는 관계가 있다고 지적하지만, 우리가 비경제적 억압을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그것에 대해 정교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더 광범위한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과 재생산의 - 체계적 통합 속에서 - 필수불가결한 관계에 대한 그의 주장은 SRF가 작동하는 기반을 만들어준다. SRF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재구성하지만 그 전제들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한다.

 

알튀세르와 부르디외의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생각은 다소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알튀세르는 자신이 재생산의 사회적 관계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의 필요 조건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에 기반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을 영속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국가 기구와 제도)를 찾아냈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교육 시스템과 다른 문화적 제도와 관습들을 뚫고 들어가 '문화 자본'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서 계급 이동성을 막는 경향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알튀세르는 비록 적어도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데올로기의 자율적 경향에 대한 그의 강조는 SRF가 아니라 이중체계 이론에 대한 기반을 마련한다. 미셸 바렛(Michele Barrett)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의 논리적 확장이다. 다른 한편, 부르디외는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 관계에 대한 것에서 벗어나서, 개별화된 불평등의 세대를 걸친 전파를 설명하는 쪽으로 그의 관심을 바꾸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본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오해하여) 비물질화하고,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무산자간의 관계가 아니라, 뭔가 하나라도 소유한다면 자본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알튀세르와 부르디외 둘 다 사회적 재생산과 생산 사이의 필요하지만 모순된 관계를 통해서나 그 안에서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다른 억압의 비인간적 논리들을 간파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내가 여기에서 SRF의 전통을 지나치게 일반화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SRF의 설명들은 분석보다는 역사적인 설명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 요점은 SRF의 틀 속에는 그러한 일부 틀린 출발점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억압적인 관계가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의 매우 본질적 일부인지에 대한 강력한 설명을 제공한다.

 

가장 좋은 SRF 설명은 순전히 역사적인 것도 아니고, 순전히 추상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역사와 이론 사이를 옮겨 다니며, 삶을 만들어내는 것과 강탈과 축적을 향한 자본주의 경향 사이의 모순된 관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준다.

 


(기사 등록 201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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