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프리즘
사회주의 여성해방론 논쟁에 부쳐: 갈등 없는 조화에 진보는 없다
윤미래
[‘사회주의자’ 동지들이 제기한 논쟁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던 차에, 최근에 변혁당에서 낸 반론 기사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사회주의자이면서, 페미니스트이면서, 페미니즘 중에서도 상호교차성과 반식민주의를 가장 중요한 준거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과도 ‘사회주의 페미니즘’과도 다른 견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져 짧게 글을 써 보았다. ‘사회주의자’나 변혁당과 달리, 이 글은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 내에 존재하는 여러 시각 중의 하나이며 상호교차성 페미니즘도 반식민주의 페미니즘도 대표할 수 없음을 미리 고한다. 우리는 대체로 그렇게 작업한다.]
논쟁 관련 기사들 링크
http://socialist.kr/not-socialist-feminism-but-socialist-womens-liberation/
http://rp.jinbo.net/change/62716
아직도 여성해방론이냐, 페미니즘이냐 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싸워야만 할까? 내 생각에는, 그렇다. 언어는 언제나 사회적 권력관계, 세력관계의 표현이며, 그래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언제나 특정한 헤게모니 블록에 결속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곧 특정한 곳에 경계를 긋는 것, 정해진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곧 대상을 정해진 방식으로 취급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노동자’와 ‘근로자’, ‘애완동물’과 ‘반려동물’ 같은 비근한 예에서 시작해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좌파’, ‘진보’ 같은 이념들에 이르게 되면 개념 하나의 외연을 두고 말 그대로 생사를 건 논쟁이 벌어진다. “종북은 진보가 아니다”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 발휘한 파괴력을 우리는 아직도 곳곳에서 느끼지 않는가. 우리가 공허한 개념 논쟁에 탐닉한 탓이 아니다. 거꾸로, 개념 논쟁이란 것이 대개는 아주 실체적인 사회적 이익, 권력, 갈등 관계의 언어적인 매개이자 구심인 탓이다.
논쟁이 여전히 상당 부분 이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에서, 변혁당이 ‘뉴페미’ 운동과 관련해 ‘여성노동권 쟁취’, ‘낙태죄 폐지’, ‘재생산노동의 사회화’ 등의 슬로건을 실천적인 지침으로 제시한 것은 반가운 전환이었다. 그러나 글 전체가 변혁당의 입장(‘사회주의자’ 동지들의, 내가 생각하기에는 적절한 용어로 말하면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실천과 연동된 것으로 제시하면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비판은 ‘의미가 없는’ 명칭 문제로 격하하는 바람에 ‘뉴페미 운동’에 대한 언급은 논쟁을 실천의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쟁을 봉합하는 권위처럼 불려나온 꼴이 되었다. 그러면서 정작 이 논쟁의 핵심인 ‘페미니즘과 연합할 것인가’의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당위적인 정언 명령으로 승격되어 논쟁의 대상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나는 이런 식으로 논쟁을 덮어버리는 것은 사회주의에도, 페미니즘에도 정세적으로 악수고, 실은 억압에 저항하는 모든 운동이 일반적으로 지양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아닌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라는 슬로건은 실천적으로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느슨하게 결집된 연합에서 탈퇴하겠다는 선언이다. 사회주의, 즉 노동자 계급의 헤게모니가 이 연합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한 활동가들이 이 선언의 주축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는 이미 ‘사회주의자’ 동지들이 논쟁을 제기하면서 내가 이 지면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상세하게 설명했기에, 내가 가장 핵심적이라고 여기는 한 가지 문제만 적시하고 싶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지금 상태로는 사유재산 몰수와 계획경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절대로 꺼낼 수가 없다. 페미니즘의 주력이 되는 학계, 여성 단체를 재정적, 인적으로 떠받치는 중간 계급과 유산 계급 여성들의 대다수가 이 의제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적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연합의 주력을 이루고 있는 한, 페미니즘이 제안할 수 있는 미래상은 암묵적이고 모호한 지향으로 가득차 있거나(없다는 뜻이다) 기껏해야 아무런 파국 없는 연속적이고 완만한 개선을 통한 변화에 그친다(화자가 어떤 급진적 열망을 담아 말하든, 전체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이 공유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재생산권의 사회화’를 급진적인 복지정책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일 청자는 거의 없다). 이런 청사진은 호황기 유럽에서와 같은 몇몇 예외적인 시기를 제외하고는 역사적으로 인민의 다수에게서 그다지 열광을 이끌어내지 못해 왔다. 하물며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가 장기 불황에 빠져 있고 지구 생태계는 앞으로 반세기를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페미니즘이 현실적인 청사진을 가지려면 이 파국적인 상황에서 여성이 어떻게 스스로 해방하고 세계를 구할 수 있는지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페미니즘이 이미 유산 계급 여성을 배제하지 않는 다원적 계급 연합으로 사실상 규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 연합에 참여하는 세력 일부가 아무리 급진적인 지향을 가지더라도, 헤게모니를 쟁취하고 그 지향에 반대하는 자들을 연합에서 배제하지 않고서는 영영 그것을 깃발에 쓸 수가 없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여성 해방의 기표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한, 이것은 여성 해방 운동 전체가 전망 없는 싸움에 깃드는 무력감과 그것을 위로하는 설익은 몽상 속에 언제까지나 주저앉아 있게 된다는 뜻이다. 정치에 일방적 견인이란 없으며, 연합에 참여하는 세력은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견인한다. 그리고 상대를 당기는 힘은 대개 사회적 권력에 비례하는 바, 계급 사회에서 유산 계급을 배제하지 않는 계급 연합은 십중팔구 유산 계급의 주도 하에 흘러간다. 페미니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유산 계급을 왼쪽으로 견인하려는 소수파가 성공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변혁당의 반론 기사가 언급한 ‘뉴페미’(나는 ‘넷페미’라는 명칭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세대 또한, 애초에 인터넷에서 ‘디씨 갤러리’와 국정원이 합작해 만든 극우파의 언어로 결집해야 할 만큼 여성 인민이 페미니즘과 유리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탄생하지 않았거나 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탄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지금까지 해온 방식으로는 앞으로도 그들과 소통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스스로를 ‘래디컬’이라 일컫는 넷페미/뉴페미들의 주류는 이미 기존의 페미니즘 담론에서 별로 제기되지 않는 문제, 그러니까 남성 중심적이기까지 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아주 계급적인 문제에 천착하고 있으며, 그런 속물적인 문제에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는 유산 계급의 자매들을 그 무엇보다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 천착의 방식과 결과가 지극히 반동적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덜 계급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1920-30년대 독일 파시즘의 가장 전투적인 분파는 분노를 약자들에게 돌리기를 선택한 노동자, 빈민 계급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사회주의 운동은 아직도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사회에 좌파적 대안이 없을 때 이런 자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도덕적인 유산 계급의 비판과 설득은 대체로 별 효과가 없다는 것뿐이다.
페미니즘은 다양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은, 계급 정치의 언어로 풀어 말하면 연합은 너희를 배제하지 않으니 합류하라는 설득이다. 이것은 기존에 페미니즘 운동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었던 여성들이 참여를 요구할 때 기득권 여성들이 내놓을 수 있는 타협안으로서는 매우 유효했지만, 단순히 참여할 권리가 아니라 헤게모니를 - 그것도 지금 여기서의 헤게모니를 - 내놓으라는 요구에는 답이 되지 못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옳다, 그렇게 하자’나 ‘(지금은) 안 된다’ 뿐이다. 그런데 과연 근시일 내에 페미니즘 운동의 헤게모니를 노동자계급에게, 혹은 하다못해 노동자, 농민, 빈민 등 피착취 계급에게 옮겨오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그렇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다. 흑인 페미니즘이나 무슬림 페미니즘, 급진 생태주의 페미니즘, 사회재생산 페미니즘 등 새로운 세대의 피억압 여성들이 이끄는 조류들이 페미니즘의 의미를 다시 쓰고 있는 정세에, 나는 이 여성들에게서 가장 강대하고 완숙한 혁명의 에너지를 본다. 세계의 여성 인민은 지금 자신들의 노동 - 전형적인 임금노동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이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농업, 가내 생산, 살림노동, 감정노동, 그리고 임신과 출산, 월경 등 인간의 생물학적 재생산까지 포괄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노동 - 을 세상을 만들고 떠받치는 근간이자 미래의 중심 가치로서 새롭게 인식하고, 강자의 시선과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조리되는 대상을 벗어나 스스로 주체로 일어서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헤게모니는 연합을 깨지 않고 우선 협력하면서 연합의 틀 안에서 가능한 만큼 급진적인 의제들을 제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세력을 늘려가는 완만한 방식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성 전체에 맞선 여성 전체의 단결’, ‘(전문직) 노동을 통한 여성의 해방’, ‘(순수) 여성 의제만을 중심으로 삼는 운동’ 등 근로 인민 여성들을 침묵시켜 왔던 페미니즘의 암묵적 공리와 규칙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정면으로 깨부수면서 자라났다. 70년대 이후로 새롭게 대두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비롯한 유산 계급 주축의 여성 운동에서 진보적인 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그것이 태생적인 계급적 한계 때문에 완성하지 못했던 해방의 전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합명제는 먼저 여성들 내부를 가로지르는 모순과 적대를 전면화하는 이러한 반명제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여성들 사이의 계급 갈등과 투쟁이 시작되기를 원한다. 기존 페미니즘의 언어에 접근할 수 없었던 여성들, 무학, 빈곤, 고령 여성들이 여성의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무대의 한가운데에 올리고, 질서와 평안을 뒤흔드는 것을 무릅쓰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를 원한다. 그 언어가 그들을 착취해온 구조에 힘입어 풍족하고 교양 있게 살아올 수 있었던 자매들의 특권을 날카롭게 겨냥하기를 원한다. 갈등을 숨기고 봉합한 곳에서는 단결도 진보도 이루어질 수 없고, 단지 숨막히는 평화만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깨뜨리면서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기사 등록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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