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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리뷰 - 조커/ 도미니언/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체르노빌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10. 23.

전지윤

 

조커 - 혐오의 시대에 어울리는 서늘한 영화

 

연예인이라고 일거수일투족이 가십거리로 뜯기고 씹히다가 죽어서도 악플에 시달리는 시대, 공직 후보자라서 그 가족까지 끌려나와 난도질 당하고 부엉이 바위로 가라는 댓글이 달리는 시대, 만신창이 끝에 뇌종양이 생기자 진단서도 조작했냐는 악플이 달리는 이 시대에 조커는 어딘가 잘 어울리는 가슴 서늘한 영화였다.

 

물론 모든 예술과 영화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밖에 없고 조커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해석을 자극하고 상당한 영감을 주는 영화였고, 막바지에 계단에서 춤추는 조커의 모습은 억누르기 힘든 전율을 느끼게도 했다.

 

시대적 배경이 80년대 초반 미국 대도시라는 것도 상징적이었다. 그 때는 레이건 정부 아래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던 시기다. 영화는 각자도생과 복지삭감 속에 빈곤, 절망에 시달리던, 사랑보다는 학대를 더 많이 경험한 가난한 삐에로 아서의 이야기다.

 

아무도 관심없고 들어주지 않던 이야기. 매주 보던 상담사에게 아서는 묻는다. ‘내 말을 안 듣고 있군요?’ ‘이 사회에서는 아무도 우리 말을 안 들어요가 상담사의 답이다. 아서의 분노는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억만장자와 금융회사 엘리트들과 유명 코미디언에게로 분출된다.

 

계급을 빈부격차나 직업적 위계라는 다소 단순한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이것은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계급적 분노라 할만하다. 그리고 아서같은 사람들이 결집해서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불태우는 것에 대한 우려는 지배계급의 공포라고 할만하다.

 

이런 표면적 유사성과 연결성 때문에 과거의 무솔리니 운동, 오늘날 미국의 대안우파나 한국의 뉴라이트 등에서 우익 포퓰리스트나 나치로 변신한 극좌파나 트로츠키주의자 등이 자주 발견되는 것이리라.

 

구조보다 상류층 개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와 적대가 곧 계급의식과 전투성의 표현이라고 본다면 가정부를 착취, 유린하고 그 가정부가 낳은 자기자식마저 외면한 억만장자는 세상에서 제거돼야 마땅한 벌레같은 특권층의 전형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안적 사실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물론 무엇이 진실인지는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아서는 페니를 살해함으로써 혼란에서 벗어나고, 영화 전체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망상인지 섞어버리는 것을 통해 탈진실의 시대정신과 연결된다.

 

자신을 무시하고 차갑게 외면하는 사람들에 대한 아서의 분노는 위로만이 아니라 옆과 밑으로도 향한다. 그런 사람들의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 백인 남성인 아서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상담사, 아이를 웃게해 주려던 아서를 면박준 버스 승객, 아서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웃 주민, 이들 모두는 가난한 여성이고 흑인이다.

 

아서의 계급적 분노는 증오와 파괴로 나가고, 아무 때나 터져나오고 멈출 수 없는 기괴한 웃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병맛의 웃음과 재미만 주면 관심과 주목을 받고 일간 베스트로 올라가는 우리 사회와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저 삐에로 마스크 뒤에 뭉쳐있는 사람들이 서초동보다는 광화문에서 날선 증오와 적개심을 표출할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조커 속에 잠시 나오는 영화 <모던타임즈>의 삐에로와 다른 점이다. 모던타임즈의 삐에로에게는 증오로 넘치는 냉소적 억지 웃음이 아니라 슬프면서도 공감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웃음이 있었다.

 

아서는 조커로 변신하면서 그동안 내 인생이 비극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희극이었다고 말한다. 채플린이라면 이런 식으로 폭력적이고 퉁명스럽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까이서 본 비극과 멀리선 본 희극, 그 둘의 연결과 모순을 슬프면서도 따뜻한 울음과 웃음 속에 그렸다.

 

물론 고담시를 지켜주는 억만장자 배트맨의 관점에서 그려진 그동안의 영화들은 재수없는 부분이 매우 많았던 게 사실이다. ‘다크나이트에서 정의로운 검사장은 불의와 손잡은 투페이스였을 뿐이다. 그러나 고담시를 위협하는 가난뱅이 출신 조커로 시점을 바꾼,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까지 담긴, 결과물은 더 많은 찜찜함을 남긴다.

 

토마스 웨인의 무관심과 함께 고담시를 더욱 고달프고 황폐한곳으로 만드는 요인처럼 묘사됐던,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긴축과 삭감에 맞서 연대와 파업에 나섰던 청소 노동자들의 위치에서 그린 고담시 이야기는 어떠할까. 서로 긴밀히 유착한 검찰도 언론도 아닌 스스로가 자신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는 배트맨도 필요없겠지만, 조커는 더더욱 필요없다.


 


끝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도미니언>

 

돼지열병 사태와 대규모 살처분 속에 그것에 동원된 공무원과 이주노동자들이 엄청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보면서 다큐 <도미니언>을 찾아봤다. 예전에 본 <지구생명체>와 맞먹을 정도로 끝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다큐였다.

 

지금과 같은 축산업과 육식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놀랍도록 잔인하게 죽임당하고 있는지, 동물들의 절규와 몸부림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방식으로 전세계에서 3일 동안에만 죽어가는 동물이 6억 마리라는 것이다.

 

이걸 보면 축산업이 그 자체로 가장 비윤리적이고 낭비적이고 환경파괴적인 산업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또 동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고 기쁨과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생명체라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 이윤보다 생명이 우선이다’, ‘생명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오랜 반자본주의 구호의 생명에서 동물을 제외할 수 있는가하는 고민을 피할 수가 없다. 물론 동물보다는 인간이 우월한 생명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우월함의 기준은 무엇일까? 인간은 과연 새보다 더 높게 날거나, 물고기보다 더 자유롭게 헤엄치거나, 표범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가. 인간이 동물보다 더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동물은 누군가를 혐오하고 악플달고 학대, 학살한 가해자였던 적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모든 차별에 반대해야 하고,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잘못이라면 동물에 대한 종차별도 잘못이 아니냐는 물음에 쉽게 답하기가 어렵다. 올해초부터 시작한 비건지향에 대한 다짐이 더 강해진다. 동물을 위해서도, 건강을 위해서도, 지구환경을 위해서도 말이다.

 

이제는 같이 식사하다가 궁금해서 묻는 사람들에게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나 마이크 타이슨도 채식을 하고, 프로운동선수들도 채식이 체력 강화와 부상 회복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말해준다.

 

동물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회의 많은 것을 보여준다면, 곰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자는 운동이, 강원도 산불에서 동물들의 죽음도 같이 보자는 목소리가, 육식의 근본적 문제와 폭력성을 직시하자는 문제제기가 등장한 것은 바람직한 변화라고 본다. 물론 그래서 동물도 권리가 있고 자기해방 투쟁의 주체라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직 답하기 어렵지만, 계속 함께 고민하고 토론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동물 해방 운동은 다른 어떤 해방 운동보다도 인간 편의 훨씬 큰 이타적 태도를 요구한다. 동물은 스스로가 해방을 요구할 능력이 없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에 항의하는 투표, 시위, 또는 거부 운동을 벌일 수도 없다... 도덕성이 자기 이익과 부딪칠 경우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우리의 횡포가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우리가 누리는 지위가 도덕적으로 옹호될 수 없음을 인정하여 우리의 지배하에 있는 생물 종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종식시킴으로써 진정한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입증할 것인가?"(피터 싱어)

 


<믿을 수 없는 이야기> - 여성의 고발을 불신하는 사회

 

요즘 드러나고 있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분석이 필요한 매우 끔찍한 일이다. 살인범이 뒤늦게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살인 14건과 강간과 강간미수 30여건이 밝혀지고 있다.

 

가해자는 남성이고 피해자는 모두 여성인 이 사건은 전형적인 페미사이드(femicide), 주로 남성인 가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살해하는 범죄란 지적을 부정하기 어렵다. 단순히 범인이 상식을 벗어난 괴물이라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뿌리깊은 여성에 대한 편견, 멸시와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폭력적 남성성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지난해 미투운동이 촉발되면서 많은 변화와 성과도 있었지만 동시에 젊은 여성들의 실종 비율이 크게 늘었고, 이것은 가해자들의 증거 인멸로 볼 수 있다는 한 전문가의 분석도 매우 불길하게 떠올리게 만드는 상황이다.

 

동시에 살인범의 자백을 통해서, 화성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이미 20년 감옥살이를 마친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쓴 피해자였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것은 경찰, 검찰이 결론을 정해놓은 강압적 표적수사를 통해 없는 죄도 만들어낸 또다른 사례로 보인다.

 

당시 공안통치에 주력하던 전두환 군부독재에게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의 고통보다, 시민적 공포를 이용한 국가권력의 강화와 실적쌓기였고, 그 피해자는 여성들이었고, 누명을 쓴 것은 돈없고 빽없는 가난한 장애인 노동자였다.

 

얼마 전에 본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이런 강력 성범죄에서 왜 어떻게 국가기구는 피해자의 고통에 관심이 없는지, 사회는 여성들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는지, 범인은 잡히지 않고 피해자들은 계속 늘어나는지를 보여 준다.

 

미국에서 있었던 실제 연쇄강간 사건을 그대로 극화한 이 드라마에서 형사들은 계속 피해경험을 반복해서 떠올리고 진술하도록 강요하면서 피해자 마리를 괴롭힌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마리의 기억과 진술은 일부 부정확하거나 모순됐는데, 그러자 바로 의심이 시작된다.

 

가난한 고아로써 위탁시설을 전전했던 마리의 불우한 과거가 불신을 부추기는 평판과 행실로서 작용한다. 특히 자신도 성폭력을 당한 적 있다는 여성이 나도 당해봐서 아는데하면서 마리의 정신상태와 진술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목은 쓰라리다. 결국 마리는 관심을 받기 위해 거짓 성폭력을 지어냈다는 비난 속에 경찰에게 역고소를 당한다.

 

고립과 절망에 시달리던 마리가 이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느낀 것을 말하는 대목들은 참 가슴 아프다.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나는 이제 고발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나를 이해한다는 사람도 나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해진다. 내가 믿던 사람들도 진실이 불편하고 꼭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믿어주지 않는 것을 봤다.’ ‘살면서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다고 믿고 싶고 희망과 믿음을 가지려 했지만 이번일로 사라졌다. 아침에 눈만 뜨면 절망뿐이고 내가 왜 이런 세상에서 계속 살아야 할까 생각만 든다.’

 

다른 지역에서 오래동안 고군분투한 두 여성 형사가 마침내 연쇄강간범을 잡아내고, 그러면서 범인이 저지른 다른 사건들까지 밝혀지지 않았다면 마리는 평생 성폭력을 지어낸 관심종자 거짓말쟁이로 살아갔을 것이다. 마리는 범인이 체포,처벌됐다는 것보다, 많은 보상금을 받게 된 것 보다 이제는 아침에 눈뜨면 좋은 일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운동사회에서 '노동자연대' 지도부에 의해 거짓말로 성폭력을 지어냈다는 비난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피해자들과 그들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도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거짓말 때문에 성폭력 가해자로 몰린 억울한 남성들의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다. 심지어 그런 서사를 담은 영화나 소설책 소개까지 새로 시작했다.

 

최근에 또 질투와 배신감 속에서 한 여자아이의 사소한 거짓말이 악의적 소문이 되고 파괴적 결과를 낳은 이야기라며 한 소설책을 추천하고 있는 것을 봤다. 성폭력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책임자가 직접 그런 글을 맡아서 쓰고 있다.

 

그런 아전인수적 글을 쓰면서 억지로 자기 정당화를 하고 잘못을 외면하기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보면서 거짓말쟁이로 몰리고 역고소까지 당하고, 삶의 의미까지 잃게되는 피해자들의 심정이 어떤지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

 


<체르노빌> - 사회적 붕괴와 재앙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지난 연휴 때 본 드라마 <체르노빌> 5부작은 몰입감이 대단했다. 핵재앙의 공포가 생생했다. 방사능에 노출돼 좀비처럼 변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영화보다 끔찍한 현실이었다. ‘죽음의 철교위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아름다운 빛과 눈처럼 날리는 낙진을 넋놓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다 죽었다는 자막의 충격은 컸다.

 

방사능 오염 지역의 동물들을 전부 살처분해 구덩이에 파묻는 과정, 온 몸의 살갗이 벗겨지며 죽어간 소방관의 시신이 용접처리된 납관 속에 들어가 무덤까지 시멘트로 파묻는 장면은 아연했다. 엄청난 수치의 방사능 유출 지역에 어떤 로봇이나 기계도 바로 고장나버리자 결국 바이오로봇즉 산 사람들을 투입해 사태를 수습하는 장면들도 머리 속을 하얗게 했다.

 

결국 이 모든 재앙의 책임이 핵발전 소장인 디아틀로프와 그 상관 관료들에게 있다는 것이 막판 재판에서 밝혀질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 디아틀로프와 관료들의 행태는 무능하고 역겨웠다. 무모하고 대책없었고, 사고가 나자 책임자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거기서 자기들 이름을 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산 사람들을 재물로 사태를 수습하는데 공동책임이 있는) 레가소프 박사가 밝혀낸 진실은 단지 그게 아니었다. 책임은 설계결함이 있는 발전소를 만든 국가, 그걸 비밀로 덮어놓은 체제, 거짓에 눈감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있었다. , 결함과 책임은 몇몇 개인이 아니라 체제와 구조에 있었다. 그 체제와 국가가 혁명의 언어와 좌파적 이데올로기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게 드라마를 보면서 계속 느낀 아이러니였다.

 

곳곳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초상화가 보였고, 폭발 사실을 은폐하는 장면에서 회의 참가자들의 기립박수를 끌어내는 연설도 레닌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사태에 대처하자는 내용이었다. 회의 참가자들이 누군가의 입만 쳐다보며 눈치보고 이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숨막히는 분위기, 살면서 심지어 운동단체에서도 종종 봐왔던 장면이고 분위기다.

 

그런 구조와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용기를 잃어가면서 재앙으로 가는 문을 열게 되는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그 어떤 것이든 잘못과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잘못과 결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결국 거짓을 침묵으로 덮게 만드는 구조에 있는 것 같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실은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드라마에서 일개 과학자의 말일 뿐이라며 무시하는 공산당 관료와 대사가 나온다. 지금 임박한 기후 위기를 부정하는 자들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를 무시하고 있는 중이다. 체르노빌의 재앙을 보면서 기후 위기와 사회적 붕괴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의 세계를 떠올리지 않기는 어렵다.



(기사 등록 20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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