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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윤희에게 - 억압된 감정의 겨울이 지나 새 봄이 끝내 찾아온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 11.

박철균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예전에 나왔던 러브레터랑 공통적인 면이 있다. 편지라는 매개체가 있고, 주요 공간적 배경이 오타루인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러브레터를 표절했냐면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재적인 면에선 유사점이 있을지언정 러브레터랑 윤희에게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러브레터는 첫사랑과 동명이인인 여성에게 편지를 우연찮게 주고 받으며 감정이 폭발할 대로 폭발해 버리는(특히, 오겡키데스카에서) 영화였다면 윤희에게는 몇 번을 써도 보내지 않았던 편지가 타의에 의해 전달이 되고 그로 인해 윤희를 비롯한 등장인물이 변화하는 와중에도 감정이 절제되고 또 절제되기 때문이다.

 

2.

이 감정의 절제는 결국 "다른 성"이 아닌 "같은 성"을 사랑했던 두 사람이 겪었던 질곡과도 연결되어 더 아프게 다가왔다. 전자의 경우는 첫사랑이라도 오픈할 수 있는 것처럼 얘기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철저히 부정되고 철저히 배제되고 그리하여 철저히 감쳐져 버리고 있던 것을 절실히 드러낸다. 윤희의 딸 새봄이 ()삼촌과 윤희와 이혼하여 떨어져 사는 아빠에게 예전 일을 물어 봐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는 점도 그러하다. 삼촌은 여동생을 껄끄럽게만 바라보고, 전 남편은 술 취할 때마다 집 앞에 등장하여 부담스런 미련을 보여 주고 딸에겐 엄마는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뿐이지, 제대로 윤희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윤희는 쥰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고, 오빠가 소개해 준 남자와 떠밀리듯이 결혼한 아픔에 대해 오빠든 전 남편이든, 다른 누구든 이해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타루에 있는 쥰도 마찬가지로, 쥰은 성소수자에 더해 자신이 일본-한국 혼혈이라는 소수자성까지 더해서 더더욱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 기일 집에 돌아올 때 한국인 남성을 소개해 주겠다며 무례하게 구는 친척에게 심하게 화를 내거나, 길냥이를 통해 알게 된 여성에겐 "자신에 대해 드러내지 말고 숨기라"고 얘기하는 쥰의 모습에서 이 세상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얘기하는 것이 차별이고 배제가 되는 것을 드러낸 듯 해 가슴 아팠다.

 

3.

그렇지만, 영화는 그 감정의 절제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변화하는 것 역시 조용하면서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삶이 무기력하고, 담배조차도 눈치를 보며 피우던 윤희는 마침내 쥰의 편지를 받아 보게 되면서 이제 곧 졸업에 독립을 얘기하는 새봄의 얘기에 따라 오타루로 간다. 그 편지의 이동이나 오타루로의 이동도 감정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긴 서사(쥰이 끝내 또 보내지 못한 편지를 우연히 쥰의 고모가 발견해서 여러 고민 끝에 윤희에게 보내고 그 편지를 딸이 받아서 이런저런 고민 속에 윤희가 그 편지를 받고 함께 여행을 가는 것)를 덤덤하게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런 감정의 절제 속에서 보여지는 등장인물의 변화와 감정이 역설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더 절절하게 느껴졌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눈치만 보던 윤희가 새 코트를 입고, 가게에서 귀고리를 달아 보며 꾸미려고 하는 모습, 윤희가 쥰의 집까지 가고도 결국 쥰을 만나지 않고 멀리서만 바라보고 숙소로 돌아와 참던 숨을 마침내 내쉬던 모습, 마침내 쥰과 윤희가 만났을 때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잔잔하게 그 상황을 지켜보는 나를 가슴 아프게 했다.

 

4.

전개가 그러했듯이 결말 역시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부분은 거의 없다. 윤희와 쥰이 서로 만나고 나서 둘 사이의 관계가 발전했다거나 이후 어떻게 됐다거나 하는 부분 역시 잘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분명 윤희가 변화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윤희는 우선 휴가조차 제대로 못 쓰게 하고 돌아오면 자리가 없다고나 얘기하는 영양사에게 화를 내고 일을 그만둔다. 여행 속에서 서로가 함께 살지만 공유하지 않았던 것(둘 다 담배를 피는 것, 새봄의 남자친구)을 소통하게 된다. 새봄은 엄마의 첫사랑에 대해 알게 되지만, 그걸 따라 온 남자친구들, 엄마 자신에게든 거론하지 않는 대신 쥰과 엄마가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또한 서울로 진학하는 새봄과 그렇지 못한 남자친구와의 갈등이 살짝 있었지만, 새봄은 역시 능동적으로 해결하며 자신의 길을 향해 엄마와 헤어지지 않고 함께 서울로 간다. 엄마 역시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던 "작은 식당을 차릴 거다"는 꿈을 얘기하며 조심스럽게 어떤 식당에 이력서를 내밀려고 한다.

 

마치 서로가 인식하지 않더라도 마치 새봄이 오고 눈이 녹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변화했던 지점들이 보였다. 쥰의 고모가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그 눈도 언젠가는 새 봄이 와서 조용히 녹고 마침내 숨겨진 철길이 나오는 것처럼 어떤 고통과 차별의 순간도 우리가 계속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나아간다면 마침내 새봄처럼 조용하면서도 갑자기 찾아 올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5.

영화는 첫 시작은 쥰의 편지로, 마지막 끝은 윤희의 답장으로 구성된다. 쥰은 "난 요즘 네 꿈을 꾼다"고 얘기하고, 윤희도 추신으로 "나도 네 꿈을 꾼다."고 답변한다. 전자는 나만 간직한 숨겨진 꿈이었다면, 후자는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꿈처럼 느껴졌다. 윤희든, 쥰이든, 새봄이든 그리고 윤희에게를 본 누구든 숨겨져야 할 ""가 아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그대로의 ""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꿈을 같이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P.S : 오타루를 11월 늦가을-초겨울에 걸친 시즌에 갔었고, 눈은 커녕 사나운 비바람이 불던 시기였는데, 이 영화를 보니 지금 당장 비행기 티켓을 끊고 오타루로 가고 싶다는 갈망이 커졌다. 눈이 펑펑 내리고 눈이 조용히 쌓여가는 그 오타루를 함께 느끼고 싶다



(기사 등록 20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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