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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검찰개혁/ 언론개혁/ 페미사이드/ 여성혐오와 공정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 15.

전지윤

 

검찰개혁은 어디로

 

2019년은 선거법에 이어서 공수처법도 통과되면서 마무리됐다. "국민 여러분이 제발 검찰 공화국의 폭주를 막아달라“(임은정)는 호소는 응답받았다. 반면 여전히 고공에서, 길바닥에서 처절하게 저항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이 상황은 2016촛불혁명의 모순과 한계,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고 본다.

 

촛불은 사회경제적 혁명에도 못미쳤지만, ‘정치혁명마저도 헌재를 통한 탄핵과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라는 제도권에 갇혀 진행됐다. 따라서 행정부는 (보수우파에서 자유주의자들로) 일부 교체됐지만 입법부, 사법부에는 여전히 구세력들이 강력했고, 무엇보다 재벌/ 검찰/ 군부/ 거대언론이라는 심층국가에서 진짜 권력자들은 여전했다.

 

따라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민주화형식적 민주화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87년 이후 한국사회의 특징도 계속됐다. 특히 적폐청산과정은 모순의 극치였다. 그것은 적폐의 구조가 아니라 상징적 인물에 대한 청산에 그쳤다. 더구나 이를 주도한 것은 적폐의 핵심이던 검찰이었다.

 

일제식민 시대에 뿌리를 둔 한국 국가기구에서 검찰의 지위는 특별하다. 무소불위의 권력에 어떤 민주적 통제에서도 벗어나 있는 검찰은 87년 이후 군부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고문, 조작, 인권유린, 성폭력이 그들의 특기였고 인맥과 혼맥을 통해 재벌, 특권층과 일체화돼 있었다.

 

수사권을 무기로 철옹성같은 검찰공화국을 만들었고, 검사와 일반인의 기소율 차이가 400배일 정도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을 일이 없었다. ‘검찰에 찍히면 이민가야 한다’, ‘검찰이 3번 봐주면 재벌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유서대필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강기훈 씨가 말하듯 수많은 피해자의 죽음과 피눈물을 딛고 일어선 것이 검찰이다. 이런 검찰의 본질은 임은정, 서지현 검사가 아니라 그 수뇌부였던 안태근, 김학의, 진경준, 황교안을 통해 구현됐다.

 

서지현 검사는 절대복종이 아니면 죽음을 의미한다고 검찰의 현실을 설명했다. 김홍영 검사는 성폭력과 갑질의 도가니인 검찰에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은정 검사는 검찰을 없애버리자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동안 검찰은 언제나 카멜레온같은 분장술로 위기를 넘겨왔다. 2016년 촛불로 닥친 구체제 청산의 위기 앞에서 검찰은 또 분장술을 펼쳤다. 구체제의 일부를 쳐내면서 스스로 적폐청산과 권력감시의 주역으로 둔갑한 것이다. ‘적폐청산과정에서도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여론몰이, 별건 수사, 인권유린 등은 계속됐지만, 모든 것은 적폐청산으로 정당화됐다.

 

중도자유주의적인 문정권도 여기에 별 문제의식이 없었고, 검찰에 의존해 적폐청산을 진행할뿐 아니라 검찰 출신 인사들을 청와대에 영입했다. 공안검사와 김앤장 출신인 박형철, 이인걸 등이 그 사례다.(박형철은 이번에 검찰 편에서 청와대 등에 칼을 꽂았다.)

 

2016촛불혁명덕분에 집권했기에 그것을 일부 반영할 수밖에 없는 문정권이 뒤늦게 부족하나마 검찰개혁에 시동을 걸자 검찰과 그 주변세력의 반혁명은 본격화했다. ‘적폐청산 수사 과정에서 지속되고 정당화된 모든 수법이 더 악랄한 형태로 등장했다.

 

임은정 검사가 말했듯이 사냥과 같은 수사가 시작돼서 검찰개혁의 상징이 된 조국과 그 아내, , 모친까지 마구잡이로 쑤시고 찌르기 시작했다. “수사가 사냥이 되고 검사가 사냥꾼이 되면서 조국과 그 가족은 죽을 때까지 찌르니, 죽을 밖에없었다.

 

조국 교수를 파렴치한 위선자로 만들고 조국 가족을 가족사기단으로 만드는데 검찰의 인력과 자원이 집중됐다. 이 반년 가까운 과정에서 관련 펀드들의 진짜 돈줄이라는 금융시장의 큰 손들, 그들과 더러운 유착이 의심되는 전관 검사들, 자한당 김기현과 그 측근들의 비리 등은 다 덮어졌다. 사법농단 수사, 패스트트랙 수사, 계엄문건 수사, 박근혜와 이명박과 이재용에 대한 수사들은 뒤로 미뤄지고 힘이 빠졌다.

 

여전히 강력한 전지적 검찰 시점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검찰의 반동 시도는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정의로운 견제로 포장됐는데,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것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진중권의 사례가 보여주듯 단지 보수언론과 지식인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짜 살아있는 권력은 우리가 선출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아니다.

 

우리가 선출하지도 통제할 수도 없는 재벌총수, 사법 검찰 관료, 군장성, 거대언론 사주들이다. 진보당 해산의 주역인 황교안, 간첩조작의 주역인 여상규, 고문수사의 주역인 곽상도 등으로 구성된 자한당은 이 진짜 권력자들과 긴밀히 연결돼 있는 우파정당이다. 개혁적, 심지어 좌파적 정당마저 결국은 이 자본주의 국가의 진짜 권력자들에게 굴복하거나, 제거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줘 왔다.

 

실제로 계엄문건을 보면 이들은 친위쿠데타를 통해 촛불을 진압할 계획까지 세웠었고 보수언론경제단체를 쿠데타의 협조자로, “자유로운 기업활동 보장을 쿠데타의 목표로 명시하고 있다. 2016년에 이들의 이런 군사쿠데타 시도는 실패했지만, ‘연성쿠데타시도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지난 4개월 동안의 상황이 그것을 보여 준다. 저들은 지난 10월에는 광화문에 수십만 명을 결집시키며 힘과 위험성을 보여줬다. 당시 조선일보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기 위해, 광화문으로 가자고 선동했다. 검찰이 만들어낸 조국은 범죄자이고 문정권은 부패했다는 프레임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많은 사람들이 검찰의 변신술에 속고 일방적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인 것에는 문정권의 책임도 컸다. 사회경제적 개혁에는 의지가 없고 정치민주적 개혁마저 진짜 권력자들과 기득권 우파에 타협해 뒤로 미루면서 반격의 틈과 기회가 마련돼 왔던 것이다.

 

자신들이 임명한 윤석열의 주도로 검찰대란이 시작되자 문정권의 우유부단과 속수무책은 더 심해졌다. 그렇다고 진보좌파가 문정권을 넘어서 검찰대란을 제압하며 정치민주적 개혁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개혁으로 치고나갈 대안으로 등장하지도 못했다.

 

그나마 누구도 예기치 않게 서초동과 여의도에서 솟구쳐오른 촛불이 구체제의 반동 시도를 어느 정도 막아낸 동력이었다. 서초동, 여의도 촛불 참가자에 대한 조사 결과, 이번에 촛불을 든 사람들의 80%2016년에도 촛불을 들었었고, 70%가 최저임금 1만원을 지지했고, 90%가 부유세 도입을 지지했다. ‘중산층 문빠들로 폄하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아래로부터 힘이 없었다면 2019년이 선거법, 공수처법 통과로 마무리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2016년 촛불이 이제야 거둔 제도적 성과에 불과하다. 사법개혁은 시작되지도 않았고, 검찰의 영장 자판기같은 사법부에서 사법농단 판사들은 아직도 재판을 맡고 있다. 종북몰이 희생양 이석기 의원은 이번에도 석방되지 않았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갈수록 심각해지지만 차별금지법은 추진도 안 되고 있다.

 

사회경제적 개혁은 더 심각하다.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약속은 깨졌고, 아직도 일터에서 노동자들은 죽어가고 있고, 굴뚝과 철탑으로 오르고 있다. 그나마 톨게이트 노동자들처럼 곳곳에서 저항해온 노동자들이 더 큰 후퇴를 막아왔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을 계속 힘빠지고 갈라지게 만들 것이다. 진짜 권력자들과 기득권 우파는 이 틈을 비집고 다시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이번에 통과된 선거법도 양날의 칼이다. 새로운 선거제도는 군소 진보정당들에게만 기회를 주는 게 아니다. 기독자유당, 우리공화당, 이언주 신당 같은 자한당 오른쪽의 군소 극우정당이 정치무대로 진출할 발판도 될 것이다. 특히 사회적 불만과 신종혐오를 이용해 청년층을 파고드려는 우파를 주목해야 한다. 이미 이번 검찰대란 국면에서 공정을 무기로 한 새로운 청년우파들이 등장했다. 이들이 만든 조직의 이름 자체가 공정추진위원회이다.

 

이들의 프레임과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들을 움직이는 혐오와 경쟁의 논리는 바로 한국 자본주의의 토대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고, 이들을 뒷받침하는 진짜 권력자들의 촘촘한 뿌리와 네트워크는 여전히 강고하며, 문정권과 민주당은 이들과 맞서기에 한계와 결함이 많은데, 진보좌파적 대안은 아직 잘 안보이기 때문이다





 

공정하고 중립적인 언론?

 

이 사회의 (온라인) 토론 문화는 이견을 존중하는 생산적 토론보다 조롱과 인신공격, 적대적 관계단절로 치닫기 일쑤고, 그럴수록 더 큰 박수와 주목을 받는다. 더구나 다수가 소수를 구석으로 모는 것은 폭력적이기 쉽다. 문제는 그것이 상황과 맥락에 따른다는 것이다. 친민주당 일부 진영으로 좁혀 보면 지금 진중권 교수는 스스로 그렇게 몰린다는 감정일지 모른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악플을 달고 막말까지 섞어 비난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야를 넓혀 한국 사회 전체를 보면 지난 몇 달간 구석으로 몰린 상대적 소수파는 검찰과 언론의 주장들에 의문을 던지며 그것에 맞서던 사람들이었다.

 

검찰의 무자비한 공격 속에 정치권, 보수언론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개혁언론, 진보좌파 진영까지 조국 가족을 파렴치한 위선자, 가족사기단, 수많은 불법과 부도덕을 저지른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로 보는게 '상식'처럼 됐다. 좌파 진영 안에서는 조국 가족을 검찰과 언론의 공격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방어하는 게 상당한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욕먹을 일이 됐다.

 

이렇게 보면 진중권 교수는 다수의 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진중권 교수의 주장은 극우, 보수, 중도, 개혁, 진보를 넘어서 폭넓게 우호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더구나 진교수는 흔히 막말과 혐오성 멸칭을 섞어서 상대편을 조롱하고 공격해 왔다. 이런 태도는 반복돼 온 것인데 고 송지선 아나운서나 홍가혜 씨가 그런 냉혹한 어법에 큰 상처를 받았었다.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종북 마녀사냥의 피해자들에게 앞장서 돌을 던질 때 보여준 진교수의 잔인한 혐오성 어법이었다. 진교수는 대체로 국가기구와 거대언론의 집단적 폭력 속에 놓인 상대방에게 그런 식의 공격을 가해 왔다는 점이 특히 더 문제로 보인다.

 

더 나아가 진교수는 자신이 정답을 안다는 확신 속에 다른 사람들을 거짓선동에 휩쓸린 멍청이취급하는 특유의 엘리트주의적 태도가 있다. 물론 이런 점들 때문에 그동안 한국사회의 진보와 개혁에 기여한 진교수의 공로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이번에도 진교수가 개혁언론과 기자들에 대한 일각의 과도한 공격에 문제제기하는 것은 일부 타당한 면이 있다.

 

분명 기레기라는 용어를 과하게 남발하며 모든 기자들을 싸잡는 것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특정 기자의 실명까지 언급하며 좌표찍는 것도 적절치 않다. 우파정권 시절이나 적폐청산 과정에서 하던대로 보도하고 있는데 왜 반응이 다르냐는 기자들의 억울함이나 별건수사, 표적수사가 우병우를 향하면 좋고 조국을 향하면 나쁘냐는 항변도 이해가는 구석이 있다.

 

이런 논리는 우파 유튜브와 진보 유튜브가 모두 열성 지지자들을 위한 가짜뉴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검찰만 까는 알릴레오나 조국만 까는 TV조선이나 다를게 뭐냐는 주장으로도 나간다. ‘어느 진영만 대변하는 이런 정파적 편파보도는 언론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응 속에 이미 자유주의 언론과 기자들이 공정성과 중립성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어느 언론학자는 정의와 불의의 평균이 중립은 아니고, 기아를 중립에 놓고는 차가 앞으로 갈 수 없다고 했다. 계급, 젠더, 인종 등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온전히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이란 존재할 수 없다. 대부분의 언론은 '공정과 중립'을 말하면서 사실상 특정 세력과 계급, 젠더의 편에 서 있다.

 

지면이나 화면에 담은 풍경은 그 언론과 기자가 어느 곳에 서 있는가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번에 검찰대란국면에서 보수언론만이 아니라 개혁언론들도 검찰과 기득권의 편에서 풍경을 보고 있지 않냐는, 인권유린에 동조했다는, ‘검찰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어디갔냐는 의문이 불거졌다. 첨예한 문제일수록 공정하고 중립적인 태도는 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금 미국과 이란의 충돌을 보자. 이번에 폭살당한 솔레이마니는 실제 이란과 이라크에서 민주시민들을 탄압하고 학살하는데 책임있는 지도자였다. 그렇다면 이란과 솔레이마니에 대한 이런 팩트를 더욱 파헤치는게 지금 공정한보도일까? 그것은 사실상 트럼프와 미국의 전쟁 시도에 힘을 실어주는 보도가 된다. ‘팩트에 대한 보도가 가장 힘세고 불의한 세력의 나쁜 행동에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 팩트의 출처가 미국이고 진위가 확실치 않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검찰대란 국면에서 조중동이 진영을 떠나서 팩트를 보자면서 취재하고 보도한 내용들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물론 개혁언론과 기자들은 달리 봐야 한다. 거기에는 출입처제도와 법조기자단이라는 구조와 관행 속에 내면화된 검찰편향적 관점의 문제가 있다. 이 관점에 서면 남들이 모르는 걸 알 수 있겠지만, 안 보이는 게 더 많아진다. 또 클릭장사와 실검경쟁, 기업광고의 압박 등에서 개혁언론도 자유롭지 않다는 점도 있다.

 

더 나아가 개혁언론과 기자들도 기성언론의 일부로서 기존의 구조와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런데 지금 SNS와 유튜브로 대표되는 기술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 기성언론의 틀을 벗어나 정보를 수집하고 가치를 판단하려는 대중적 흐름이 커지고 있다. 그러면서 기성언론이 주도해온 프레임과 이데올로기는 위기에 처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프레임에 만족하지 않고 벗어나기 시작했고, 일부 친민주 유튜버들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 검찰대란 국면에서 공정의 중립의 함정에 빠진 기성언론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그들이 짚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검찰과 기득권 우파의 시각과 받아쓰기를 거부하는 그들의 편파성덕분에 가능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편파성은 덫이기도 하다. 당장, 장기 투쟁 노동자나 차별받는 소수자 문제에서 친문 유튜버들은 개혁언론보다도 부족한 관심과 관점을 보이고 있다. 검찰과 기득권 우파에 맞설 때 장점이 된 그들의 편파성이 문정부와 민주당이 계급적 한계를 드러내는 문제에서는 심각한 약점으로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친민주 유튜버들에게 부족한 것은 커진 영향력에 부합하는 공정성과 중립성에 대한 추구가 아니다. 검찰과 기득권 우파에게 공격받는 사람의 억울함을 대변하고 편드는 것을 넘어서서, 자본과 권력에게 억압받고 외면받는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를 편들겠다는 관점이다.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과 부를 독점한 사람들과 빼앗기고 억눌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 편을 들 것이냐의 문제는 계속 제기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더 필요하고부족한 것은 기계적인 공정하고 중립적언론이 아니라 빼앗기고 억눌린 사람들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 - 누가 진리를 죽였나

 

그것이 알고 싶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 - 누가 진리를 죽였나>를 뒤늦게 봤다. 강간문화를 다루었던 넷플릭스 드라마의 제목을 패러디한 제목만이 아니라 내용도 매우 알차고 인상적이었다.

 

불특정 다수로부터 끊임없이 비난, 조롱, 막말을 듣고 보게 될 때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홍석천 씨의 샤워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심장이 조여온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한 사람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을 다같이 방임하는게 우리 사회라는 것도 맞다. 그런 무자비한 공격은 지금도 타겟을 바꿔가며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공인이라면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 징징대지 말아야 한다는 인터뷰들을 보면, 이런 무자비함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있다. ‘내가 저런 공격을 받으면 어떤 심정일까, 지금 저런 공격을 받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이런 감정이입이 사라지고 그것이 정당화된다. 공감하거나 들여다볼 필요없는 대상이 되면서 공격에 눈감고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알은 악플만 문제삼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뉴스와 기사들이 방아쇠 구실을 했다고 지적한다. 인터뷰한 악플러도 내가 먼저 돌을 던진게 아니다라고 했다. 언론이 신호를 보내니까 돌이 날아가기 시작하고, 남들과 함께 던진 것이다.

 

고인에게 비수로 꽂혔던 많은 기사들은 대부분 당사자의 SNS를 지켜보다, 소문을 듣고 써올리는 처널리즘이 만들어냈다. 그 저질의 천박한 기사를 쓴 사람들은 이름이 없거나, 아르바이트, 외주기자여서 찾을 수도 없었다. ‘혐오와 수치의 외주화인 것이다. 고인은 그런 언론에 항의도 못했다. 항의하면 미운털이 박혀 오히려 더 때리는 언론의 하이에나 문화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악플을 넘어서 언론이 문제다로 그치면 될가? 더 나아가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라는 근본적 구조가 존재한다. ‘그알에서 이나영 교수님이 언급한 동심원 구조도 이걸 뜻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뿌리깊은 것이다.

 

예컨대 김학의 사건에서도 일부에서는 검찰이 여성들의 통화녹음, 휴대폰 포렌식, 이메일 등을 다시 살펴보니 진술 신빙성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생겼고, 연인관계와 원한관계가 작용한 것 같다고 한다. 가부장적 구조와 관습의 보이지 않는 손이 검찰의 의도보다 피해여성의 의도를 더 의심하도록,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신빙성을 더 검증하도록, 연인관계나 원한관계가 성폭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자본주의 좌파라고 여기서 자유롭다는 보장도 없다. 예컨대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최근 성관계 영상 유포 위협과 악플에 시달리다 우리 곁을 떠난 여성을 추모하는 기사를 올렸다. 거기서 친밀했던 상대에게 그런 공격을 당했을 때 고인이 느꼈을 배신감, 수치심, 두려움에 공감하며 가해자를 비난하고 가슴 아파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의 뿌리인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자(항상 반복되던)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자신들이 저지른 성폭력 상담기밀유포와 2차가해 기사들에 시달리던 여성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 왔다. 친밀했던 과거 동료들에게 그런 공격을 당한 피해자가 느낄 배신감, 수치심, 두려움에 공감하거나 가슴 아파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괴롭히고 가해해 왔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부장제와 여성혐오, 강간문화에도 일관되게 반대해야 하고 우리 스스로부터 돌아봐야 한다. ‘그알에서 고인이 언론과 악플러들에게 한 말이 귓가를 맴돈다. ‘욕하는건 싫다. 따뜻하게 말해주면 좋을텐데.’

 

사과할 생각 없으니 꿈도 꾸지 마라?

 

노동자연대(노연) 지도부가 박원익(박가분) 씨의 새로운 책 <공정하지 않다>강력히 추천한 것을 봤다. 내 기억으로는 이 필자의 책을 벌써 여러 권 추천했는데, 이 정도면 그 추천의 강력함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도 노연 지도부는 페미니즘 담론이 젊은 남성들에게 죄의식과 잠재적 가해자 프레임을 뒤집어씌우려 드는 대표적인 불공정 담론이라는 필자의 주장을 크게 공감하면서 인용하고 있다. ‘여성혐오가 심각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관점에서 봐도 공명하는 바가 크다는데 나로서는 정말 동의하기가 어려운 주장이다. 이런 책의 내용이 청년들을 보듬는 긍정적 구실을 하고 있다는 평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여성혐오에 대한 이런 과소평가를 “3년 전 강남역 사건에 대한 진보·좌파 대다수의 반응과 비교하고 있다. “‘여성혐오의식이 문제라며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가해자로 싸잡는 감정적 매도가 당시 여론의 주를 이뤘다는 것이다.

 

반면에 당시 노연 지도부는 강남역 사건은 여성혐오 때문이 아니고 한 정신질환자의 일탈이라는 식으로 분석했었다.(바로 이번 서평을 쓴 노연 간부가 그런 글을 썼던 당사자이다.) 이런 노연 지도부의 입장은 당시에 상당한 비판을 받았었는데, 그것이 상당한 억울함으로 남은 것 같다. 이번처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과 비슷한 주장이 나올 때마다, 항상 거봐라. 우리가 뭐라 그랬냐면서 연결시키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 내용이 좋다고 느꼈고 거기에 많은 부분 공감하고 동의해서 추천한다는 데 뭐라고 하겠는가. 동의하긴 어렵지만 그것도 하나의 의견이니 말이다. 이처럼 젊은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며 자꾸 주눅들게 하지 마라는 식의 주장들이 어떤 논리를 강화하고 문제를 낳고 있는지 고민 좀 해봤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게 있다.

 

바로 이 책은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을 제공하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다음 구절이라면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것은 바로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말자는 구절이다. 그러면서 서평자도 이른바 닥치고 사과와 양심에 반한 사과의 문제점을 다룬 바 있어 공감이 간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게 문제인 이유는 바로 이 서평을 쓴 노연 간부가 바로 지난 7년여 동안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가장 심각한 수준의 괴롭힘과 2차가해를 자행한 주요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를 거짓말쟁이와 정신질환자로 몰고, 평판과 행실을 문제삼고, 개인 신상정보와 사생활과 성폭력 피해경험들을 강제로 아웃팅하며 인신공격을 하는데 주도적 구실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서평을 통해서 노연 지도부가 강조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 같다. ‘우리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우리가 저지른 일들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과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 꿈도 꾸지말고 포기해라!’

 

이처럼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온갖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잘못한 게 없고, 사과할 생각도 없다는 것을 거듭 재확인하며 피해자와 연대자들에 대한 가해를 닥치고계속하는 노연 지도부를 보면 너무나 기가 막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양심에 반하는 일이라니, 노연 지도부의 양심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사라져가길 바랄 뿐인가? 제발 더 늦기 전에 잘못을 인정하고 가해를 중단하고 사과해야 한다.

 

#노동자연대는사과하라 #Metoo #Withyou

 


(기사 등록 20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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