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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트랜스젠더와 젠더혁명/ 다시는 그전으로/ 성폭력 사건과 연대자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2. 10.

전지윤

 

무지개는 결국 다시 떠오를 것이다

 

육군이 변희수 하사를 강제전역시키는 것을 보고 분노했던 마음은 숙명여대에서 트렌스젠더 여성을 합격시켰다는 소식에 어느 정도 위안받을 수 있었다. 역시 가부장적 남성성의 상징과도 같은 집단에 비해서 여성 공동체는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과 감수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후 일부에서 이어지는 반응과 소식들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차별과 배제에 맞서던 용기있는 발걸음은 결국 잠시 멈춰서고 말았다. 비록 사회적으로 대체로 남성으로 패싱되는 위치에 있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말한다는 게 조심스럽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이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들을 하던 분들은 대체로 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어온 차별과 고통과 위협, 그것이 낳은 불안과 공포를 이야기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나도 거기에 책임이 있는지 항상 돌아보고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낳은 분노가 왜 그런 차별과 고통을 가한 책임이 있는 가부장제와 남성 특권의 옹호자들이 아니라 또다른 소수자들에게 향하는지가 문제였다. 이것은 지난번에 일부에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예멘 난민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드러낸 것이 정당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강자인 남성들에 맞서서 약자인 여성들의 공간과 권리를 지키는 운동이기보다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강자인 시스젠더들의 편에서 약자인 트랜스젠더들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성정체성은 심리나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실체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이 맞더라도, 그 물질적 실체가 단순히 염색체, 호르몬, 생식기의 구조나 형태일 수 없다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계속 드러나고 지적되고 있다. 무엇보다 누군가가 살아온 삶과 그 궤적보다 더 중요한 물질적 실체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지금처럼 우리가 처음 태어났을 때 의사가 남성기가 달려있는지 여부를 보고서 성별을 지정해주는 게 과연 맞는 것일까? 누구든 의사의 그러한 남근중심적이고 성기중심적인 지정에 따라서 평생을 살아야 하고 그걸 벗어나면 안되는 게 옳은 것일까?

 

가부장제는 바로 이같은 성별이분법, 이성애중심주의, 여성혐오를 주축으로 해서 지탱된다. 그리고 여성혐오는 다시 남성 동성간의 결속(호모소셜), 그것을 벗어나는 이들에 대한 혐오(호모포비아와 트랜스포비아)와 긴밀히 결합돼 있다.

 

남성 특권 세력은 이런 젠더 체제와 질서가 흔들리면 자신들의 특권이 무너진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를 군대에서 내쫓으려 하면서 비겁하게도 여군 핑계를 댔다. 가부장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짓밟던 여성들을, 시스젠더 질서 유지의 동맹으로 묶어두려던 것이다. 여기에 속아주는 것이야말로 특권적 남성 범주를 공고하게 해주는 일 아닐까.

 

남성 특권 세력은 가부장제 아래서 피해자이며 약자인 일부 여성들이 또다른 약자와 피해자들을 공격하는 것을 아주 만족스럽게 지켜봤을 것이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에게, 그만큼 더 큰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보면서 비웃고 있을 것이다. 그럴수록 같이 힘을 모아 가부장제/ 성별이분법/ 이성애중심주의에 맞서 싸우는 일은 멀어질테니 말이다.

 

그래도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동안 억압과 차별에 맞섰던 수많은 여성들의 용기와 투쟁, 그것이 만들어낸 놀라운 변화와 성과를 기억한다. 이번에도 수많은 여성과 여성 공동체들이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옹호하며 손을 잡아주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다.

 

일부 가슴 아픈 말들 속에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대화를 시작하자는 말이 섞여 있었던 것을 주목하게 된다. 최근에 세미나를 하다가,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1960년대 말에는 레즈비언 운동을 궁극적 목표에서 우리를 분산시키는 연보라색 위협이라고 비난하고 배제하려 했다는 지적을 본 게 기억난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태도와 편견은 10년 후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무지개는 여러 색깔이 합쳐져서 떠오른다. 우리의 결집과 연대만이 가부장적 억압과 질서를 철폐하는 젠더 혁명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다양성과 차이 속에서도 함께 손을 잡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게 생존은 모두가 잘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를 상상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자들, 즉 구조 바깥에 존재하는 아웃사이더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생존은 우리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벼리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주인의 도구로 그가 만들어 놓은 게임 안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드>)

 


<다시는 _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세미나를 하면서 권김현영 선생님의 <다시는 _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를 유익하고 인상깊게 봤다. 아주 다양한 문제를 다룬 많은 글들이 실린 책이었지만, 굳이 몇 가지를 꼽자면 먼저 여자의 전쟁은 언제나 내전이었다는 지적이 다가왔다.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에 노동계급의 단결을 말하는 분들에게 들려주고픈 말이다.

 

반성과 성찰없는 분노, 너무 쉬운 공감은 피해자를 타자화하고 가해자를 비인간화하여 자신은 가해와 피해 모두로부터 언제나 자유롭다는 오만함과 닿아있다는 지적도 공감갔다. 실제 성폭력 피해호소에 아주 쉽게 즉자적 공감과 분노를 터트리며 가해자만 심하게 욕하는 반응들을 보면 반갑지만은 않다.

 

그것이 진지하고 지속적인 연대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를 흔히 봤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문제제기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이나 불이익을 주기 시작하면, 공감이 아닌 관계단절과 공격으로 바뀌는 것도 경험 해봤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감이란 단지 가해자 개인에 대한 비난과 단죄만 소리높여 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용기를 기억하고 우리 모두 변화하겠다는 약속이라는 지적에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관심갔던 부분은 토론의 태도에 대해 지적한 부분들이다. 저자는 나와같지 않으면 모두 틀렸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공권력으로 만들고자 하는 태도라며 독선의 위험을 경고하는데, 특히 토론이란 무엇인가라는 꼭지에서 중요한 지적들을 한다.

 

토론 때 나온 의견은 발화자의 인격 그 자체가 아니며, 모든 의견은 잠정적인 것... 의견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고 전제했을 때 토론이 가능하다.... 감정에 대한 이야기, 종교적 신념 등은 토론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토론 때 나온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집단적 뒷담화의 재료로 삼지 않는다.” “토론 상대가 원하는 것이 토론이 아니라 공격이거나 장사일 때는 토론하지 않는다.” “토론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영향력만을 과시하려는 사람은 토론에서 논박되었어도 전혀 의견을 바꾸지 않는다.”

 

여기서 지적하는 토론을 위해 필요한 태도와 경계할 점들을 지난 반년 동안 더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곧 나쁜 인격으로 취급했고, 토론에 감정을 앞세웠고, 뒷담화를 통해 상대를 몰아갔고, 상대를 공격하거나 장사하면서 그것을 토론으로 포장했다. 오직 자신을 과시하려 하면서 상대의 굴복만을 원했지 이견을 존중하거나 수용할 뜻이 없었다.

 

조롱과 인신공격과 인격모독과 막말과 멸칭과 혐오성, 낙인성 발언들이 넘쳐났다. 그게 심할수록 기성보수언론들은 더욱 신나서 그런 글을 지면으로 모셔가려고 난리였다. 지금도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매일 같이 “ ”를 쳐서 실어주고 있다. 자신들이 직접 하기는 어려운 말을 명망과 권위있는 사람이 더 화끈하게 해주니 말이다.

 

그런 잘못된 토론 태도는 서로 적대적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서로 감정과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독선과 무례가 양쪽 모두에서 더욱 커지는 것이다. 왜 저렇게까지 말하지 싶은 분을 살펴보면 그런 식의 반응이나 댓글로 상처받은 흔적이 있다. 그 상처를 더 독기서린 말로 풀어내고 그것이 또 비슷한 대응을 부르는 식이다. 그럼에도 더 큰 펜과 스피커를 가진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보인다.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본 아주 좋은 영화 중에 <베스트 오브 에너미>가 있었다. 1970년대 미국 남부에서 흑인인권단체의 여성지도자와 KKK단 남성 지부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두 사람은 지역에서 만들어진 인종통합 학교 설립에 대한 공론화 위원회에서 같이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KKK단 남성 지부장이 차별 반대편으로 넘어온다.

 

그 과정은 함께 현실과 경험을 직시하며 끈질긴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을 것이고, 사회변화는 반동적이고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논리적 설득만으로 이뤄지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영화는 주로 KKK단 남성 지부장의 경험을 담고 있다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와 맨 마지막에 나오는 실존인물들에 대한 기록영상만 봐도 그 흑인여성 지도자가 얼마나 멋진 투사였고 놀라운 일을 이룬 것인지 알 수 있다. 적어도 그는 단지 귀를 닫은 채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조롱하고 낙인찍고 좀비’, ‘양아치라는 식으로 욕하고 배척하는 것을 통해서 그런 변화를 이루진 않았을 것이다.

 

 

성폭력 사건 연대자에 대한 인신공격의 문제

 

지난해 연말에 민주노총에 보내온 노동자연대(노연) 지도부의 답변 공문에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연대자로서 나를 공격한 부분도 계속 기억에 남고 불현듯 떠오르곤 한다. 내가 “[노동자연대에 대한] 복수에 함몰돼 성적으로 불안정한 어린 여성들의 가짜 피해자성을 팔아먹는 포주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짧은 문장에 얼마나 많은 잘못된 인식과 인신공격이 담겨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먼저 이 문장은 성폭력 피해호소들이 불순한 의도로 조작된 것이라는 흔한 편견을 그대로 담고 있다. 진짜 피해자와 가짜 피해자가 따로 있고 자신들이 그것을 감별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도 보인다. 또 성폭력 피해자가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논리도 나타낸다. 그래서 결국 성폭력 피해생존자와 연대자 모두를 치욕스럽게 모독하고 있다.

 

노연 지도부가 저 문장을 쓰면서 얼마나 나에 대한 증오를 가득 품고 있었을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문장이기도 했다. 저 분들이 같은 조직의 회원이었던 나를 왜 그렇게까지 혐오하게 됐을까 다시 돌아보게 된다. 출발은 내가 조직의 입장과 노선에 의문을 품고 중요한 부분에 이견을 제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그러자 곧 나에 대한 회원들의 비판으로 가득찬 자료집이 5권이나 나와서 배포되기 시작했다. 29명이 줄줄이 나와서 나를 비판하는 내부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트라우마에 대한 뇌의 자체 보호 기능때문인지 그 몇시간은 내 기억 속에서 삭제돼 있다.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크게 터져나오던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간간히 떠오를 뿐이다.

 

이번에 검찰 내부게시판에서 임은정 검사를 비난하는 댓글 릴레이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노연 지도부는 이렇게 거의 모든 회원들이 너를 비판하고 지지하지 않았다고 말해왔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 얼마나 지도부를 중심으로 줄세워진 폐쇄적이고 자체 변화가 어려운 조직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그 조직을 나오고 나서도 나에 대한 공격은 계속됐지만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나에겐 하고 싶고 해야할 다른 일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조직의 일원으로 있을 때 그 잘못의 일부였던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까지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라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왜 그런 잘못이 이뤄진 것인지 알고 있었고, 나도 거기에 공동의 책임이 있었으니까. 나는 피해자에게 사과하면서 노연에게 함께 반성 사과하자고 했다.

 

이렇게 나는 의도치 않게 내부고발자가 됐고, 그때부터 노연 지도부의 나에 대한 비난과 인신공격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벽창호”, “온갖 야비하고 부정직한 언행”, “각별히 위선적”, “전무후무한 기회주의”, “추악한 전력”, “파렴치한” “나락으로까지 간 타락”... 이렇게 나를 증오하고 인신공격하다가 노연 지도부는 전지윤도 인권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잊고 무감각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또다른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괴롭힘과 2차가해로 연결됐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성폭력 가해당사자(노연 운영위원)가 직접 성폭력 피해자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홈페이지에 9개월이나 올려놓고 피해자를 괴롭힐 수 있냐고 하면, 지금도 노연 지도부는 그 글은 전지윤을 비판하는 글이었으니 문제없다고 답한다. 전지윤을 욕하고 상처주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허용된다는 생각이 이런 잘못으로 연결된 것이다. ‘저 글을 쓴 사람이 바로 술취한 나를 여관으로 끌고가서 성폭행한 장본인이다라는 피해자의 절규에도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은 이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노연 지도부는 비난과 인신공격으로 누군가를 낙인찍고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봤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사람과 거리를 두고, 불신하게 되고, 그가 반인권적 취급을 당해도 무감각해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와 기대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에 어느 작가와 그의 친구들이 성폭력 사건에서 2차가해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서, 나를 비난하고 인신공격하는 페북페이지를 만들어서 온갖 혐오적 막말과 욕설까지 쏟아부을 때 페미니즘과 인권을 말하던 일부 사람들마저 침묵, 묵인, 심지어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노연 지도부가 이번에 꺼낸 복수를 위해 가짜 피해여성들을 조종하는 포주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바로 거기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아무리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 강력한 투쟁을 말하더라도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내부의 허물부터 바로잡지 못하면 한계가 많다는, 거칠고 날선 언어와 막말을 통해서 상처를 주는 것은 누구에게도 옳지 않다는 생각이 커졌다.

 

나는 그런 것에 상처받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다며 센 척하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영혼과 감정이 있는 인간은 누구나 나약하고 상처받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상처와 고통 속에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는 법이다. 노연 지도부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괴롭히고 2차가해한 것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것이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길이고, 그때까지 나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연대는사과하라 #Metoo #Withyou





(기사 등록 20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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