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최근 새민련이 겪었던 위기를 보면 4.16(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날)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가했는지 실감하게 된다. 근래 새누리당과 조중동도 생각못한 상황 전개에 당황한 기색이 뚜렷하다. 그동안의 패턴은 이랬다.
‘우파는 종북몰이로 새민련을 압박하고 진보진영을 분열시킨다 -> 진보진영은 분열한 채 새민련을 추수한다 -> 새민련은 싸우는 시늉을 하다가 우파와 타협한다 -> 뒤통수를 맞고 기가 꺽인 진보진영 지도자들은 제도권으로 공을 넘긴다 -> 새누리와 새민련은 싸우면서도 적절히 권력을 나눠 먹는다.’
이번엔 이것이 잘 안 통하고 있다. 새민련이 두 번이나 뒤통수를 쳤지만 세월호유가족들은 기가 꺽이지 않고 있다. 박근혜의 ‘세월호노믹스’ 추진을 막아선 채 꿈적않고 있다. 막말, 탄압, 이간질, 심지어 물밑 대화를 통해 적절한 타협도 먹히지 않고 있다. 기존 진보단체나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라면 과연 이랬을까하는 의문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지금 지배자들은 새민련의 효용가치를 의심하고 있다. 과연 새민련이 기득권 세력으로 향하는 분노와 저항을 완충시키고 김을 빼는 구실을 계속할 수 있을까? 즉 ‘문재인이나 박영선이 유민아빠를 고분고분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인 것이다.
문재인이 광화문 단식 농성에 나설 때도 일부 우파는 ‘대선 후보까지 한 사람이 이 사태를 잘 마무리할 복안을 갖고 간 것일 것’이라는 기대를 비친 것이 사실이다. 박근혜는 결코 할 수 없는 ‘설득과 동의를 통해 세월호유가족들을 가만히 있게 만들기’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오락가락 속에 갈수록 신뢰를 잃고 위상이 추락해 온 새민련과 문재인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새민련이 지금 앓고 있는 것은 ‘중도기회주의’병이다. 이 병은 양쪽의 압력이 극대화될 때 그 증상이 특히 심해진다. 물론 새민련은 단지 왔다갔다하지 않는다. 이상돈이 새누리당 왼쪽방에서 새민련 오른쪽방으로 오려고 한 것은, 두 당이 결국 기득권 구조라는 한집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새민련만을 특정해서 지목한다면 강준만의 ‘싸가지 진보론’은 합리적 핵심이 있다. 몇 번이나 유가족 뒤통수를 치며 멋대로 세월호 특별법의 구도를 좁혀놓은 새민련의 태도는 정말로 ‘싸가지없는’ 것이었다. 물론 강준만은 이것이 어떤 계급적 한계 속에서 나오는지 보지 못하고, 그래서 또 다른 싸가지로 드러난 안철수에게 기대를 거는 헛물을 켜고 있다.
물론 왕싸가지 자리는 오롯이 우파와 기레기들의 몫이다. ‘대리기사 폭행 시비 사건’ 이후 언론을 보면 기레기들이 그동안 갉고 닦은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서 올림픽대회라도 연 것 같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만들어낸 아래로부터 압력에 의원 총사퇴와 국회 해산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몰리다가, 반격의 빌미를 잡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우파 언론은 ‘노란 리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되는 완장으로 둔갑했다’, ‘세월호라는 마패만 있으면 대한민국의 어느 법도 무시할 수 있게 됐다’며 광분했다. 세월호 유가족 박종대 아버님의 말씀처럼 “그들(특히, MBN, 채널 A, TV 조선 등)이 세월호 사건을 … [폭행 시비 사건] 만큼만 신속하고 심도있게 방송 했었더라면 이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박그네 마음 같아서는 세월호가족대책위를 ‘사법 질서와 국가 기강을 뒤흔든 위헌 집단으로 몰아서 해산 청구’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미친 듯이 유가족대책위를 먼지털이하고 사찰·미행하던 저들이 5개월만에야 꼬투리를 잡아낸(만들어낸?)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일 것이다.
잊지말자 0416
게다가 이 사건은 우파 언론의 마녀사냥식 보도와 규정을 그대로 믿기에는 이상한 부분이 한두개가 아니다. 식당주인이 불러준 대리기사의 전화번호와 현장에 온 대리기사의 전화번호는 왜 다를까? 갑자기 나타나 사진을 찍어대고 몸싸움에 가세한 건장한 젊은이들은 누구였는가? TV조선은, 폭행당해 구석에 주저앉아있던 CCTV속의 유가족을 왜 ‘대리기사’라고 거짓말했을까?
다행히 거짓, 불의, 증오, 탐욕으로 똘똘 뭉친 저들의 조롱, 비웃음, 막말은 결코 세월호유가족들의 의지를 꺽을 수 없었다. 세월호가족대책위는 도의적 책임을 통해 집행부 총사퇴를 했지만, 곧바로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해서 다시 투쟁에 나서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분들은 “한 명 한 명 구조될 때마다 아이들을 찾기 위해 시신을 들춰봐야 했던 부모”들이다. “294번째 발견된 아이의 부모는 294번의 시신을 본 것이다.” 이 분들의 귓가에는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고 나가도 되나요?’, ‘이제는 진실이 밝혀졌나요?’라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을 것이다. 안산에는 “잊지 말자 0416”이란 문구를 친구들과 함께 문신으로 새겨넣는 고등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기레기와 일베충들을 풀어서 공격 좀 한다고 이런 분노와 공감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박근혜의 착각이다. 그보다는 일베, 기레기같은 쥐새끼들의 서식처이자 계속 새로운 오물을 만들어내는, 박근혜 정부라는 쥐구멍을 폐쇄해야 한다는 생각만 커지고 있다.
이미 이런 분노와 압력이 커지면서, 박근혜 2중대 구실을 하며 세월호유가족들의 뒤통수를 쳤던 새민련부터 쪼개질 뻔했던 셈이다. 물론 새롭게 지도부를 구성한 새민련은 곧바로 다시 유가족에 대한 압박 및 뒤통수 치기를 준비하고 있다. 언론들도 이런 새민련의 편에서 은근히 세월호가족대책위를 향해 적절한 타협을 압박하고 있다. ‘세월호 문제를 마무리짓고 민생 해결과 법안 처리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4.16을 잊지 않고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세월호가족대책위가 말했듯이 지금 새누리당이 추진하는 법안들은 “서민들에게만 세금을 많이 내라는 것이고,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고 의료비를 폭등시킬 [것이며] … 평형수를 뺀 세월호처럼 대한민국을 위험 사회로 내몰” 법안들이다. 내년 예산안과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 개편안에서 드러나는 것도 ‘부자감세 서민증세’ 방향이다.
사실, 이번에 새민련 박영선의 탈당 위협과 이상돈의 ‘새민련 분당론’ 제기는 단지 우연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 지배계급과 기성 정치권에서는 취약한 새민련, 수렁으로 빠지는 박근혜, 다가오는 총선 등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는 듯하다.
진보진영이 단결해서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면, 앞서 안철수 현상에 기회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동요하는 새민련의 해체를 앞당기고, 그 공백을 차지하며 일부를 흡수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새민련의 왼쪽에는 제대로 된 힘있는 진보정당만 있었다면 함께했을만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당분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로지 죽어간 이들과 서로에 대한 공감과 사랑으로 뭉쳐있고, 민주적 총회를 통해서 뜻을 모으고, 진실과 정의에 대한 진정성으로 투쟁하는 세월호유가족들. 진보는 죽은 이들의 뜻을 이어서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있는 이 분들에게 배워야 한다.
진보는 싸가지뿐 아니라 고통과 상처에 공감할 수 있는 진정성, 오류를 솔직히 돌아보고 인정하며 진실을 직시하려는 용기, 각 부분의 눈 앞 작은 이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힘모아 투쟁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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