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언론과 검찰의 정의연 마녀사냥과 몰이가 가능했던 토대
얼마 전에 정의연을 향해 쏟아졌던 그 악의적 기사들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특히 맥주집 3천만원 보도는 “술판”이라는 자극적 용어와 프레임으로 끝없이 복제, 확대 재생산됐다. 피해자들을 도우라고 보낸 돈과 정부 보조금으로 정의연이 회계부정과 횡령을 저지르고 “술판”까지 벌였다는 이미지가 퍼져나갔다. 그와 같은 수많은 기사들의 출발점이 된 핵심기사들 중에 대부분이 정정보도 등의 조정을 받았고 기사삭제되고 있다.
그런 기사를 쓴 기자들은 상까지 받았지만, 그런 기사들이 차곡차곡 모여서 거대한 비수가 되었고, 그것은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 활동가들의 심장으로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결국 한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갔다.(‘상’이라는 대목에서 기억나는 것은 내란음모 조작 사건 당시 ‘이석기 녹취록’을 보도해 상을 받은 한국일보 기자다. 그 녹취록은 나중에 국정원의 문구 조작이 밝혀졌지만 이석기 의원은 아직도 8년째 감옥에 있다.)
따라서 이제 와서 정정보도만 하면 뭐하냐. 그런 기사로 인한 피해자들에게 분명히 사과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복구해야 한다는 반응들은 정당하다. 이미 우리 곁을 떠난 사람과 8년의 감옥 생활 등이 과연 복구 가능한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나아가 단지 기사와 기자, 언론만 문제삼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런 보도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거대한 사회적 편견, 낙인이 생겨나는 동안에 침묵하거나, 그런 보도들을 의심없이 믿어주거나, 한 두마디 말과 글을 보태면서 그 사냥을 거들었던 우리 모두의 책임도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진중권, 김경율, 권경애 씨같은 샐럽들만이 아니었고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언론 기사들이 비수가 돼서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 활동가들에게 파고들어갔다면,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말 한마디, 글 한줄, 공유와 ‘좋아요’, 싸늘한 눈초리와 냉소적 비웃음 등은 수천 수만 개의 바늘이 돼서 표적이 된 사람들을 한없이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차라리, 메이저 언론과 기자들의 행태는 어느 정도 견딜만 했을지 모른다. 어차피 오늘날 한국 언론에 대한 기대 수준은 높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수많은 크고 작은 바늘들이야말로 더없이 아프게 찔러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대부분은 정정, 처벌, 보상을 청구할 통로나 방법도 없다.
무엇보다 그 수많은 침묵, 동조, 자발적 확대 재생산이 있었기에 언론과 기자들의 왜곡 보도도 지속됐던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지금, 언론의 정정보도들은 나오고 있고, 그것을 질타하는 목소리들은 있지만, 당시에 침묵을 넘어서 동조하며 돌팔매질 속에 작은 돌을 보태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성찰하는 목소리들은 잘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돌아보기와 성찰, 반성이 없다면 사회적 편견과 낙인의 토대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정정하는 언론과 기자들이 미안해하긴커녕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며 문제제기를 피해갈 은근하고 교묘한 또다른 비난들을 내보내고 있을 것이다. 마지못해 정정하면서도, 자신들이 틀리지 않았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가 나오길 기다리고, 찾아내려 할 것이다. 자신들과 그런 정서를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확신이 있을테니 말이다.
세 달이 지나도록 수사의 진전이 없으니까 다시 기간을 확대해서 뒤지고, 오래전 정의연 퇴직자까지 불러내 조사하겠다는 검찰이 이들에게는 잡고 싶은 지푸라기일 것이다. 별건수사를 통해서라도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에게 뭔가 다른 흠집과 잘못이라도 있었다는 것을 찾아내라고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이들이 스스로 틀렸거나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절대 싫다는 심정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단지 언론과 검찰만이 아니라 문제는 더 뿌리깊고 구조적인 것에 있다.
● 검언유착과 여전히 강력한 윤석열의 프레임
얼마 전, ‘한동훈 수사와 기소 중단’이라고 올라온 뉴스를 보고는 입이 벌어졌었다. 아무리 수사심의위가 검찰이 구상, 제안, 구성, 지명, 주도하는 기구라 하더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검언유착 사건의 수사를 중단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현재 한국 상황에서는 이런 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묻힐 것이고 기대할 것이 별로 없다’던 냉소적 예측들이 맞았던 것이다. 이 나라의 구체제와 그 수호자들에게 한동훈은 이재용급으로 지켜내야 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지금껏 드러난 것만으로도 검찰과 언론이 공모해서 얼마나 가공할 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그렇게 조작된 사건을 통해서 어떤 파괴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드러났는데 말이다. 수사심의위도 이것을 차마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이동재의 단독범행으로 몰면서 꼬리를 자르고 있다. 하지만 지금 수준의 사실과 증거와 정황만으로도 몸통은 한동훈일 수밖에 없다. 온갖 무리수를 두면서 한동훈을 감싸던 윤석열까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한동훈이 보여준 모습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정보를 흘리고 프레임을 짜면서 언론을 활용하는 수사의 달인’이라는 소문이 왜 생겼는지 무릎을 치게 했다. ‘수사팀이 표적을 정하고 특정 언론사와 공모해 기사를 만들고 나를 범인으로 몰면서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는, 짙은 냉소가 느껴지는 이 미러링같은 논리는 먹혀들었다.
그것은 이 헛웃음나는 논리가 윤석열 검찰이 짜놓은 강력한 프레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정의를 수호해 온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의 비위를 성역없이 수사하려고 하는데 친문세력이 방해하며 검찰을 핍박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대한 정교한 좌파적 분석이나, 특히 한국에서 검찰의 궤적과 역사와는 거리가 먼 이런 초등학교 사회교과서 식의 논리(검찰은 사회정의를 지키고 행정부의 부패를 견제하는 기구다)는 너무나 강력해서 잘 흔들리지 않고 있다.
물론 윤석열이나 한동훈 스스로도 머리 속으로 그렇게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지배계급도 ‘나는 소수의 특권을 지키는 악당이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해야지’라고 생각할 리가 없다.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르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지배계급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것을 대변하며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그들이 소부르조아의 대변자가 되는 것은 소부르조아가 생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러 한계를 이들도 또한 머릿속에서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은 소부르조아가 물질적 이해와 사회적 지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라야하는 바로 그러한 문제와 해결책에 이론적으로 이끌려가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것이 한 계급의 정치적, 문필적 대변자와 그가 대변하고 있는 계급과의 관계이다.”(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이번에 놀라웠던 것은 결코 지배계급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볼 수 없는 진보적, 좌파적 지식인들도 이런 프레임을 받아들이고 있고, 윤석열 검찰이나 한동훈을 신뢰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데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오늘날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혼란과 유사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도 일부 좌파들은 민주당에 대한 (이해할만한) 불신과 반감이 너무 심한 나머지 대안우파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 좌파들에게 경각심을 촉구하는 글에서 파시스트와 사회주의자의 가상의 대화를 만든 것을 보다가, 한국 상황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에 패러디를 해 봤다.
극우세력과 수구언론들: 586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이 나라를 파괴하고 있어!
진보 좌파 지식인들: 당연하지.
극우세력과 수구언론들: 엘리트주의자들. 그들은 노동자들을 신경 쓰지 않아.
진보 좌파 지식인들: 오, 정말이야.
극우세력과 수구언론들: 진영 언론과 유튜버들이 그들을 돕고있어. 그들은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아.
진보 좌파 지식인들: 절대 맞는 말이야!
극우세력과 수구언론들: 한편, 종북게이와 페미나치, 이주민들이 우리 나라를 망치고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어.
진보 좌파 지식인들: 잠깐, 젠장 뭐라고?
● 자기 성찰보다 ‘나쁜 비판’만 많은 사회
신형철 평론가의 글은 항상 깊이가 있고 위안이 된다. 우리가 누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에 폭력이 시작된다’는 그의 지적과 자세가 이런 깊이를 가능하게 한 것일 것이다. 좀 지나긴했지만 얼마 전 칼럼도 참 좋았다.
“나쁜 비판은 진실의 복잡성을 훼손하는 데서 나아가 세상을 양분(兩分)한다. 하나의 범주에 ‘그들’을 쓸어 담으면 여집합으로 ‘우리’가 생겨난다. 문제는 이런 나쁜 비판들 주변에도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다. 그 비판에 동참하는 일이 뿌듯한 소속감을 제공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은 쉽게 조롱과 혐오로 번져 나간다... 누군가를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까지 절멸시켜야만 종결될 것처럼 보이는 일부 나쁜 비판의 목소리들은 이미 그들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지 대의나 약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토록 집요하게 누군가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 비판을 그만두면 자기 자신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공감이 갔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나쁜 비판’이 너무 많다.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고 가혹하고 강하게 비판하다 못해, 거의 그 존재가 사라지길 바라는 것과 같은 비판들 말이다. 그리고 가혹하고 더 강하게 비판하고, 냉소하고, 조롱할수록 더 많은 호응과 관심을 얻는다. 언론은 그런 비판을 매일같이 따옴표쳐서 기사화한다.
비판하면서도 입장의 차이를 존중하고, 상대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자신도 성찰하는 그런 비판은 별로 없고, 호응과 관심도 받기 어렵다. 스스로를 성찰하기보다 남을 비판하는 게 항상 더 쉬운 일인데, 그런 종류의 비판이 많아지면 질수록 문제가 개선되는 게 아니라 진영 논리만 강화되고 사회적 구조적 문제들은 더 공고화된다.
표적이 된 사람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비판하고 물어뜯을수록 더 많은 부와 권력이 주어지고, 그것이 직업이 돼버린 기구와 제도도 존재한다. 바로 검찰과 그들과 유착한 기성언론들이다. 이것은 그 구성원들의 개성이나 의지보다는 구조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런 나쁜 비판에 중독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은 틀릴 수가 없고 ‘정의’라는 무서운 확신이다.
자신의 머리 속만이 아니라 현실을 뜯어고치고 편집해서라도 그 확신을 유지하려 한다. 어제 윤석열의 연설을 보면서 그것을 느꼈다. 자신이 “독재와 전체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의 “권력형 비리”를 처단하면서 “정의롭게 법 집행”을 하고 있다는 확신. 드러난 사실과 증거들이 아무리 그것을 부정하고 있더라도, 억지스럽고 위태롭게 유지되는 확신. 이 대목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몇 달 전에 쓴 글이 떠오르게 된다.
“가면인 줄 알고 벗기려 했는데 가면이 아니라 피부라면, 그 피부라도 벗겨내서 피 흐르는 피부를 가면이라고 우겼다. 역사는 그것을 공작(工作)이라 부른다. 유구한 역사를 갖는 ‘간첩 만들기’보다 근래 더 중요해진 공작은 비위를 털어 도덕성 훼손을 시도하는 ‘위선자 만들기’다. 가끔 일부 검사와 일부 기자가 그 일을 하청받는다.”
피부를 가면이라고 우기면서 벗겨내는 과정. 이것을 지켜보는 심정도 참담하고 고통스러운데, 그 당사자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할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지적하면 간단하게 ‘위선자의 편’이 돼버린다. 누군가에게 낙인이 찍히면 그를 편들거나, 심지어 그 이름만 입에 올려도 그 사람도 낙인이 찍히는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부를 가면이라고 믿는 일과 그 피부 벗겨내는 과정을 환호하고 응원하며 지켜보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냉소와 비관을 이겨내기 어려운 시간이다.
● 혐오, 낙인, 막말, 욕설에 함께 맞서자
https://www.facebook.com/equalact2017/posts/1948532195283395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는 이유로 가해진 혐오, 낙인, 막말, 욕설... 영상으로도 봤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테러’다. 저런 공격을 받은 당사자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위협을 느꼈을지, 그 주변의 가족과 지인들이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아프고 걱정하고 있을지 알 수 있다. 심상정 의원 등 지금 공격과 테러를 받고 있는 정의당 의원들과 차별금지법 발의에 동참한 모든 의원들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한다.
보수기독교와 극우정치, 혐오세력이 결합돼서 여기저기서 혐오, 막말, 욕설, 테러를 자행하는 양태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 시작돼서 지금까지 완만히 성장해 왔다. 이명박근혜 때는 우파가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들이 권력 밖으로 밀려났다는 생각 속에서 더욱 더 제도 외적인 폭력이 부추겨지고 있다. 이들은 전세계적인 정치적 양극화, 인종주의적 극우와 신나치, 파시즘 부상의 한국적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번에 정의당 심상정 의원에게 쏟아진 공격은 사실, 지난 종북몰이 때 통합진보당 이정희, 김재연 의원 등에게 쏟아졌던 공격과 그 양상과 정도가 매우 비슷하다. 그때도 돌아보면 정말 끔찍했다. 증오와 살기까지 넘치는 막말, 욕설, 테러적 행위들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벌어졌고 그것을 막아서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던 그 때 극우익 혐오세력들의 거리 퍼포먼스는 너무 충격적이고 끔찍해서 지금 다시 글로 옮기고 싶지도 않다.
얼마전 민주당 윤미향 의원에게 쏟아졌던 극우익 혐오세력의 막말, 욕설, 인신공격들도 아주 비슷했다. 그것도 수요집회에 갔다가 옆에서 직접 보고 듣고 몸서리쳐지게 목격했었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여성혐오적 공격과도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미국에서 자신에게 여성혐오적 욕설을 한 공화당 의원을 비판하며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계속 반복돼 온 일이다. ″이건 문화적인 겁니다. (그런 행위를 해도) 무사히 넘어가게 해주고, 여성에 대한 폭력과 폭력적 발언을 용인하는 문화, 그리고 그 권력을 지탱하는 전체 구조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공격을 다 같이 막아서고 나서야 한다. 그 공격을 받은 당사자가 통합진보당이었는지 민주당이었는지 정의당이었는지는, 우리와 얼마나 생각과 노선이 다른지 같은지, 우리가 그런 공격을 당할 때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우리를 도와주었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는 동안에 이 위험은 갈수록 커져온 것이다. 이 고리를 다 같이 끊어내야 한다.
●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보고서
얼마 전에 ‘질병을 둘러싼 차별, 낙인,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든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봤다. 이것을 연극으로 만드는 게 가능하고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많았다고 하지만,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작품이 탄생했다. 올해 본 어떤 영화나 예술작품보다 더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보는 내내 출렁이는 감정의 끈을 잡기 어려웠고 보고나서도 계속 곱씹게 하는 경험이었다.
이것은 이 연극을 기획한 조한진희 작가의 동명의 책에서도 어느 정도는 느끼게 됐던 경험이었다. 그 책에서도 IMF 위기 때 해고되고 나서 마트, 식당을 전전하며 삶의 무게에 짓눌리다가 어깨 근육이 돌처럼 굳어진 한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자신이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해고된 날 밤에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업었을 때 등으로 전해진 따뜻함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책에 나온다.
그것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따뜻함’과 그 순간의 감정을 이번에는 연극을 보면서 훨씬 길고 깊게 느끼게 됐다. 주인공 6명이 풀어내는 질병서사들은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먼저, 아픈 것은 불행한 것이고,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고, 노력하고 치료를 받아서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던지는 수많은 말들이 어떻게 칼이 되어 아픈 사람의 마음에 박히고 더 아프게 하는지 보여 준다.
그런 말과 태도가 얼마나 사람을 폭력적으로 대상화해서 ‘쓸모있고 유능한’ 사람과 ‘쓸모없고 무능한’ 사람으로 구분해가며 우리 모두를 옥죄고 인간들의 관계를 뒤틀리고 멀어지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쓸모없고 무능한 사람으로 찍히면 그 목소리는 사라지고 존재는 잊혀진다. ‘불치의 병’이 흔히 비극적 러브스토리의 소재로 쓰이는 것도 건강과 질병에 대한 이처럼 강력한 사회적 문화와 규범 속에서이다.
‘고장나서 버려진’ 물건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은 병원, 약물, 수술, 치료라는 쳇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연극이 끝난 후 진행된 토크쇼에서 최원영 간호사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병원에 출근하는 기분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출근하는 말단직원의 심정’에 비유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을 막아야하는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비참한 기분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이 ‘겉모습은 세게, 마음은 여리게’ 살아가기로 결심했다는 말이 다가 왔다. 우리 모두는 사실 나약하고 결함이 많은 인간들인데, 겉으로 ‘멀쩡’해 보이고 세고 강하게 보여야 그나마 무시당하거나 함부로 취급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하고 힘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돌아오는 것은 ‘동정’이다.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 아픈 사람들은 아픔을 존중받지도 못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숨겨야 하고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말이다. 연극에서 주인공들의 속 깊은 이야기와 주변 사람들의 솔직한 고백들이 큰 울림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연극을 보고나면 고민은 더 깊어진다. 우리는 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대하지 못할까. 서로를 이해하고 그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일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 아플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 질병을 치유받고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는 굴레에서 자유로운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연극의 주인공들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크고 작은 아픔을 갖고 있기에 이것이 중요하다.
내 아픔도 돌아본다. 좌파조직의 기관지 편집자를 10년 넘게 하면서 허리와 목의 디스크는 만성질환이 됐고,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며 자료를 검색하고 글을 쓰고 편집하던 일은 오른팔 어깨에 근골격계 질환과 만성적 근육,신경 통증을 낳았다. 병원을 전전하고 치료를 기대했지만, 결국 그 아픔은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의 하나가 됐다. 성폭력 피해자 편에서 고발하고 비판한 이후 그 시절의 동료들로부터 외면과 증오, 심지어 손배소송만 받고 있는 지금도, 그 10년을 돌아보고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나이테같은 것이 됐다.
이제, 성공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 인생이 잘 풀리고 주목받는 사람들, 삶이 만족스럽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같은 사람들도 더 많이 말하고 글을 쓰고,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아픔 하나하나가 다 의미있고, 어느 것도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연극 중간에 한 주인공이 말하듯이 “환청은 연약한 것에 귀 기울이는 내 마음이고, 망상은 소외된 꿈들의 희망”이니까.
무엇보다 연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한 주인공의 춤과 노래(국카스텐의 ‘사이’)가 아직도 기억에 남고 몇 번을 더 보고 싶게 한다. 아픔, 슬픔, 자유로움, 갈망, 해방감이 느껴지는 그 표정, 몸짓, 분위기, 노랫말, 마지막 독백까지도 너무 아름다웠다.
“나를 잃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 그러니 괜찮다. 지금까지 나의 고통은 나의 한계이자 자산이다. 나만의 글을 쓰고 싶다. 그 모든 아픔도 살아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타인이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결국 시지포스의 돌은 굴러 떨어지지만 아픔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목격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완치는 환상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완전한 치유가 아닌 완전한 치유로부터의 자유를 원한다.”
#아파도미안하지않습니다
#시민연극_아파도미안하지않습니다
관람 예매: 소셜편치 http://www.socialfunch.org/dontbesorry
● 트럼프에 맞선 포틀랜드 투쟁의 전진
미국에서 트럼프와 극우익 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미국 민중과 인종정의 투쟁 지지자들을 한편으로 하는 중요한 대결의 장으로 여겨졌던 포틀랜드에서 얼마 전 연방요원들이 철수를 시작했다고 한다.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승리로 보인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의 18~29세 청년의 87%가 인종정의 시위를 지지하고 4명중 1명이 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다고 답한 것에서 이러한 전진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에 인종정의 투쟁이 미국을 휩쓸면서 포틀랜드에서는 거리와 공원을 점거하고 해방구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었다. 그 자체는 실질적 타격이기 보다는 정치적 상징성이 있는 평화적인 행동이었다.
충돌이 본격화한 것은 2주전에 트럼프가 연방요원을 직접 투입해서 폭력 진압과 강제연행을 시도하면서부터였다. 국토안보부 소속으로 국경수비대로 일하던 훈련된 요원들이 사복을 입고서 납치하듯 사람들을 연행하고 폭력으로 도발한 것이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포틀랜드의 시위대를 ‘혼란을 일으키고 미국을 전복하려는 무정부주의 폭도들’이라는 식으로 매도했다.
이를 통해 오히려 폭력과 혼란을 일으키며 자신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내세우고 극우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중무장한 연방요원들이 최루탄을 난사하며 폭력 진압에 나서는 모습은 미국이 얼마나 군사화된 경찰국가인지를 드러냈다. 이런 경찰국가화는 트럼프가 시작한 것은 아니다.
국토안보부는 9.11 이후에 등장한 기구이고 국경수비대는 민주당 정부 때도 이민자 단속과 추방을 해 왔다. '반테러'와 '반이민'이 바로 이들의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마약과의 전쟁’도 중요했는데 90년대를 다룬 미국 영화를 보면 주택가 벽을 뚫고서 들어가는 탱크가 등장할 정도였다.
따라서 이번에 주목할 것은 트럼프의 도발보다는 그 후퇴로 보인다. 포틀랜드의 시위대는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지만, 물리적 대응으로 승리한 것은 아니다. 연방요원들의 진압과 연행, 최루탄 난사에 맞서 처음 등장한 것은 맨 몸으로 그것을 막아선 ‘엄마들의 벽’이었다. 여성들은 최루탄에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어서 ‘아빠들의 벽’, ‘의사들의 벽’, ‘참전용사들의 벽’이 차례로 등장했고, 나중에는 포틀랜드 시장(민주당 소속)이 백악관에 반기를 들면서 직접 시위대 속에 들어가 최루탄을 맞는 장면이 벌어졌다. 결국, 포틀랜드에서부터 시위대를 고립시키며 극우 혐오세력을 거리로 불러내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런 반격을 확산시키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인종정의 시위대가 고립된 것이 아니라 트럼프가 고립된 것이다.
이것은 이 운동 초기에 트럼프가 연방군을 투입하려다가 군부의 반대에 직면하고 경찰기구 내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오면서 통제력을 잃어가던 상황의 연장선이다. 즉, 트럼프는 미국 자본주의 국가기구 내에서도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해가고 있다. FBI나 CIA도 트럼프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낙관할 수는 없다. 트럼프는 이미 대선 불복에 대한 말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편으로 이민자와 범죄자들이 투표에 참가하는 부정선거를 통해서 나를 몰아내려 한다면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트럼프가 인종주의적인 혐오 선동을 하면서 극우익 시위대들을 거리로 불러내고, 지배계급과 국가기구 내에서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과 동맹해서 절망적 혼란의 도가니로 상황을 끌어갈 가능성이 존재한다.
집권 이후 하루 평균 16번씩 2만번이나 가짜뉴스와 혐오발언들을 쏟아냈다는, 요즘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17년만에 사형집행도 부활시킨 트럼프가 무슨 짓이든 못할 것인가. 민주당과 조 바이든이 과연 그런 트럼프에 제대로 맞서거나 근본에서 차별적 정치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그러나 지난 2달 동안 역사적 변화를 만들어내 온 미국의 민중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번 투쟁 물결 속에서 인상적인 것은 운동 경험이 없고 조직돼지 않았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자발적으로 투쟁에 나서는 모습이었다. 물론 기존의 조직된 좌파와 노조들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여성, 다인종, 불안정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노조들이 ‘흑인 생명을 위한 하루 파업’을 한 것은 인상적이었다.
반면 미국노총 지도부는 최근 민주당에서 ‘전국민의료보험’ 정책이 채택되는 것을 반대하는 흐름에 함께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정말 의료보험이 필요한 것은 지금 노조 밖의 열악한 노동자들인데 말이다. 한국에서도 지금 전국민고용보험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노조 밖의 불안정 미조직 노동자들이다.
사회적 합의를 부결시킨 조직 노동운동은 이제 전국민고용보험을 투쟁으로 도입할 수 있다는 의지와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나아가 미국의 ‘흑인생명을 위한 하루 파업’처럼, 지금 극우익 혐오세력의 집중 표적이 된 차별금지법을 위해서 노동자들이 앞장서 투쟁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사유재산 보호하고 징벌세금 철회하라’는 집주인들의 시위,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반대한다’는 정규직 직원들의 시위, ‘윤석열과 한동훈을 지키자’는 언론들의 시위는 정말 그만보고 싶다.
(기사 등록 202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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