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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미아'로 산다는 것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0. 20.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가끔 가다가 제 삶을 돌이켜 볼때에 이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미아'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미아란 길을 잃어 ''에 돌아갈 수 없는 아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물론 '주거 공간'이라는 직접적인 의미에서야 ''을 갖고 있죠. 그런데 ''이란 그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갖는 단어입니다.

 

인간이 군중 동물인 만큼 인간에게 ''이 되는 것은 그가 속해온 군중의 '문화'이기도 하죠. 저는, 제가 한 때에 '태생적으로' 흡수한 문화를, 저의 물리적인 자녀에게도, 저의 제도적 '자녀', 즉 학생들에게도 전해줄 수는 없습니다. '물리적' 자녀들은 언어적 기반부터 다르고, 제가 20년 동안 가르친 노르웨이 학생들 중에서는 '공산당 선언'처럼 제가 중학교 때에 감동적으로 읽었던 제 문화의 '기본 텍스트'를 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과거의 한국과 같은 '레드 콤플렉스'의 문제도 아니고, 맑스가 생각했던 의미의 '무산자', 즉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을 - 단기 외국인 노동자 등 '비국민' 이외에는 - 노르웨이에서 더이상 발견하기가 어렵고, 무산자가 흔하디흔한 '나머지 세계'에 대해서는 노르웨이인 대다수가 '자선 행위' 차원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SNS 문화의 자장에 빨려들어간 최근 세대로서는, 길고 추상적인 텍스트 자체를 많이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제 물리적 존재가 종료됨과 동시에 제 머리에 박혀 있는 그 문화도 종적을 감출 것이라고 생각하면 '미아'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미아'로 산다는 게 저만의 문제도 아닌 것 같고, '문화'의 문제만도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한 후기 자본주의의 '액체 근대',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풍경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새로운 가난과 고독의 조합이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액체 근대'란 물처럼 계속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바뀌고 바뀌어 그 어떤 장기적 '관계 맺기'가 불가능한, 그런 상황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살아나가야 하는 한국의 젊은 신흥 워킹푸어 계층은, 사실 맑스의 '무산자'에 많은 면에서 굉장히 근접한 것입니다. 맑스가 영국에서 본 19세기 중반 방직업 노동자들처럼 월급을 주는 날 앞두고 거의 굶어야 하는, 그런 형태는 아니지만, 그들의 삶에서는 안정되고 보장된 게 전무하다는 면에서 '무산자'라고 지칭해도 될 정도입니다.

 

'비정규직'이 아니더라도 언제 일을 그만두게 될지 모를 중소 기업에 다니고, 고시원이나 원룸, 작은 아파트를 빌리고, 매일 일하느라고 파김치되는 관계로 장기적 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 '연애' 같은 것을 할 만한 에너지도 갖지 못하는 20대의 많은 한국인들은, '뿌리'가 뽑히고, 그 어떤 '보장'도 받지 못하고 그저 '액체 근대'의 노도를 혼자 몸으로 헤엄쳐 보이지 않는 육지를 향해 발버둥치면서 수영해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의 조건'을 한 몸으로,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한 계층이 집단적으로 '근대의 미아'가 된 것이죠.

 

위장 취업해서 <공산당선언>의 사상을 동료 노동자들에게 쉽게 설명하면서 '의식화'를 시도했던 35년 전의 '학출'들이 생각납니다. 35년은 물리적으로 긴 시간도 아닌데, 격세지감이 아주 심하게 듭니다. 그 당시에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착취'이었다면 지금 '착취'와 함께 '소외'의 문제 역시 새로운 모습의 '무산자'들이 부딪치는 사회적 고통의 핵심에 해당될 것입니다. 대면 '의식화'보다 각종 전자 네트워크를 통한 비대면 연결을 더 선호하게 되는 요즘의 좌파는, '조직 사업'과 함께 기본적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 각자도생 시대의 각종 신화들을 해체시키는 데에 상당한 에너지를 써야 하는 셈입니다.

 

그 신화 중의 하나는, 페미니스트들을 '여성 우월주의자', 여성을 '새로운 특권 계층'으로 만들려는 사람으로 보려는 '남초 커뮤니티'들의 시각도 있습니다. 똑같이 워킹 푸어로 고생하는 상황인데도, 각자도생의 시대인 만큼 일각의 남성들은 - 실질적으로 여전히 그들에 비해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는 - 여성들을 우선적으로 '동료' 아닌, 한정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경쟁자'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같은 한국인'인 젊은 여성들을 놓고 '경쟁자'로 본다면, 여권 색깔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를 과연 어떻게 보게 될까요?

 

'액체 근대'가 이슬라모포비아 (이슬람 혐오증)가 중요한 정치적 코드로 부상되는 상황을 조성하기도 합니다. 치명적 위기에 봉착한 자본주의 사회의 미아 같은 구성원들은, 연대와 협조가 아닌, 다수가 공유하는 혐오를 통해서도 그 각자의 고립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연대력을 잃은 사회는, 얼마든지 '혐오'를 구심점 삼아 뭉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다수를 미아 아닌 미아로 만드는 '액체 근대'는 불균형의 시대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고도의 생산 체계가 유한한 자원을 소모하면서 만들어내는 상당 부분의 상품을, 상대적으로 가난해지는 대중들이 다 소비할 수 없습니다. 과잉 생산과 과소 소비는 생산 이윤율의 저하, 자본의 투기에의 집중, 그리고 각종 '버블'과 경제적 위기로 이어집니다. 자본이 돈 없는 소비자의 시간이라도 빼앗으려고 하여, 거의 모든 개인들의 수면 시간 이외의 모든 시간을 식민화합니다. 우리가 자는 시간 이외에는 하는 모든 행위들 - 페이스북이라는 주식회사가 제공하는 네트워크 확인부터 삼성이나 화웨이가 생산한 휴대폰, 애플사가 생산한 아이패드에서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콘텐츠를 즐겨 보니는 일까지 - 은 거의 전부 다 자본에 이윤을 만들어주게끔 돼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사색'이라는 존재의 형태도 증발됐지만, '사생활'이라는 또 하나의 해방적 근대의 측면도 말살되고 말았습니다. 신용카드 사영 내역이나 휴대폰 등으로 각자의 현 위치부터 시작해서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의 모든 행위들을 다 확인하고, 심지어 실시간 감시할 수 있는 세계에서는 '사생활'은 더이상 논하기조차 의미 없습니다. 우리 '액체 근대'의 미아들은 전부 다 투명 인간들입니다. 스노든의 말대로 미국의 첩보 기관들이 그 개인 전자우편을 매일 뒤져서 보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같은 최고로 유력한 개인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자본이나 자본을 위해주는 국가가 수면 시간 이외 우리의 모든 시간을 차지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이 커다란 디스토피아 같은 세계에서는 '혁명'이란 결국 '''우리'의 회복부터 시작돼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가 자신에게 '[자본에 충실한] 교육제도와 매체, 각종 콘텐츠나 네트워크가 나에게 심어준 생각과 개념, 이미지 말고는 나 자신의 생각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는 것은 아마도 현재로서 가장 혁명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어디에선가 미국의 무인 폭격기 (드론)가 누군가를 또 죽이는 장면을 뉴스에서 보면서 '테러리스트를 섬멸시켰다'는 일률적인 국가 살인에 대한 '설명'과 관계 없이 재판도 없이 제국에 살인을 당해야 하는 그 누군가에 대해 '같은 인간'으로서 동감을 느끼고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가장 혁명적인 정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보고 "우리 둘 중에 누가 학벌이 더 좋고 실력이 더 있느냐"와 같은 비교 내지 경쟁 의식이 아닌, '우리가 같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내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라는 관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가장 혁명적인 대인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귀가할 수 있는 '', 우리는 결국 공감과 연대, 협력을 통해서, 이 체제와 각을 세우고 거리를 두고 대립을 하는 과정에서 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확실성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결국 '액체 근대' 속에서 망가지고 실종되는 지구의 미래를 우리 손으로 같이 구출해야 합니다.

 

(기사 등록 20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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