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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조직에 관한 노트, 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0. 28.

사이 엥글러트(Sai Englert)

번역: 두견

 


제레미 코빈의 실험이 아쉬운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최근 영국 노동당 안팎의 좌파들 속에서는 좀 더 근본적인 차원과 긴 안목에서 지난 활동을 평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고민과 토론이 전개되고 있다. 이 글은 그런 시도 중에 하나로 오늘날 곳곳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좌파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의 필자인 사이 엥글러트는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운동가 겸 연구자이다.

 

출처:https://notesfrombelow.org/article/notes-organisation?fbclid=IwAR1IUCqVB5-0yUr9N29q9zYTSTYGoWHG4ovmrU9oXgV7i1xWJgVrDB9uNIs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지난 50년과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과학적인 학습을 가능하게 하면서 엄격한 자기 비판과 이론의 재검토를 요구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방법이지 도그마가 아니다.' 이러한 지적 작업은 가능한 한 빨리 시작되어야 하며, 기존의 조직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추구되고 장려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적 의식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의 투쟁과 패배로 흐려져 왔다; 이론은 경제, 사회학, 심리학에서의 지난 몇 년 동안의 지식에 뒤쳐져 왔다; 교조적 속류화에 바탕을 둔 선전은 점점 약해졌다. 사회주의의 지적 갱신을 위한 싸움은 우리의 고려사항의 최선두에 있어야 한다.” -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 1944

 

현재의 팬데믹이 세계 자본주의의 장기적 체제 모순과 부정의에 빛을 비추고 있다는 지적은 좌파에게는 - 부정확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노동자들, 가난한 이들, 인종화된 공동체와 세계 남반구의 인구들을 자본의 필요에 희생시키는 것, 의료 서비스의 붕괴, 그리고 감염에 대한 불평등한 노출은 체제의 일반적 성격의 부풀려진 현재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와 노동계급 운동의 패배 40, 그리고 그에 따른 노동의 탈조직화, 지구 북반구에서 복지국가의 해체, 그리고 지구 남반구에서 탈식민지 정착촌의 역전은 현재의 급속히 증가한 사망률, 실업자 수, 구조적 실패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적에 대한 진실은 우리에 대한 진실이기도 하다. COVID-19 발병은 현재 지배계급의 전략에 중대한 구조적 변화를 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 좌파의 계속되는 약점과 대중 투쟁의 정치적 폭발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 무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최근의 사례다.

 

코빈 지도부의 고립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대한 공격에서부터 탈퇴 조건만이 아니라 영국이 EU를 떠나는 것과 무슬림, 이주민, 그리고 다른 유색인 공동체를 타겟으로 하는 증가하는 억압 정책에 대해 논쟁을 형성할 수 없는 좌파의 무능까지 최근의 사례는 아주 많다. 사회주의적 좌파는 적어도 10년 동안 공공의 무대에서 자리를 비운 것이 눈에 띄었다.

 

더욱이, 이런 사건들의 상태는 분명히 기회의 부족을 탓할 일이 아니다. 위의 간략한 리스트가 보여주듯이, 사회주의자, 평조합원, 비의회적 좌파가 개입하여 변혁을 꾀할 수 있었던 투쟁의 연속적인 길들이 있어 왔다. 노동운동에서, 작업현장의 전투성이 역사적으로 낮은 반면에 청소부, 교사, 우편 및 플랫폼 노동자, 강사 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업하거나 공식적인 분쟁에 들어가거나 비공식적 행동을 취했다.

 

현재의 시대는 체제적 위기, 지배계급의 대표자와 기관들에 대한 집단적 환멸, 그리고 주기적일뿐만 아니라 급속한 대중적(항상은 아니지만, 흔히 계급에 기반한) 불만의 폭발 중 하나이다. 경찰 폭력과 구조적 인종주의에 대한 현재의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의 국제적 반란은 이것을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회주의 좌파들은, 작고 고립된 집단과 개인들의 활발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에서, 이 끓어오르는 대중적 분노와 불만의 발전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의회와 거리 모두에서 점점 더 공격적이고 인종주의적이고 자신감에 찬 우파의 성장, 그리고 순간적인 분노의 폭발을 현 상황에 대한 장기적이고 효과적이며 구조적인 도전으로 변화시키는 우리 측의 거듭된 실패가 그것이다.

 

사회민주주의와 의회의 좌파는 많은 노조에서 중요한 제도적 돌파구에도 불구하고, 가장 두드러지게는 노동당의 지도부로서, 그다지 더 잘 해내지 못했다. 그것은 신문, 정치 네트워크, 싱크탱크를 통한 지배계급의 맹공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직면했던 수많은 정치적 공격을 피하기 위한 시도로 경제적 요구에 의존하다가, 실제로 그것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전까지의 그 사회적 기반으로부터 소외되어 갔다.

 

국민건강보험, 교육, 사회주택에 대한 더 나은 자금 지원을 위한 투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지만 제국주의, 외국인 혐오, 인종주의에 초점을 맞춘 우파의 맹공을 피하려는 노동당의 시도는 전략적으로 잘못되었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책임의 포기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상황은 매우 모순적이다: 가득한 기회와 반복되는 중요한 정치적 후퇴 둘 다이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의 프로젝트가 노동계급의 집단적 행동과 궁극적인 자기해방에 바탕을 둔 정치 전통에 특히 위험하다.

 

그것은 우리 주변의 활동가들을 비관주의, 활동 청산, 그리고/또는 훨씬 더 나쁜, 우리 투쟁의 성공이 의존해야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반동적, 후진적 또는 비조직적이라고 폄하하면서 우리 스스로 도덕주의적 우월감을 유지하도록 이끈다. 브렉시트와 2019년 선거 모두 이러한 종류의 접근법을 영국의 정치 담론의 전면에 매우 많이 가져왔다.

 

이 기사는 많은 활동가들이 노동당을 떠나거나 긴 내부적 겨울을 준비하는 현 시점에 개입하려는 시도로서, 조직이라는 문제를 사회주의적 좌파가 현재의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중대하고 긴급한 측면으로 제기하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치적 분석을 하고 풀뿌리 조직화에 대해서는 파트 5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그 문제에 관한 결정적 기사는 아니다. 나는 그 대신에 사회주의적 좌파에 대한 현재의 논쟁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응답하면서 '종이에 펜'을 들도록 격려하기를 바란다. 나는 전위주의자들이 채택한 조직적 형식과 사회민주주의적 좌파 모두 더 이상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구조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러한 조직적 모델에 대한 지속적인 의존이 우리의 즉각적인 과업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일련의 역사적 참고 자료에서 나오고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노동계급 조직과 사회주의적 활동가층의 재건을 위해 사회주의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요의 시작을 제안할 것이다. 이 기사가 새로운 실질적 방향들이 나올 수 있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현재의 논쟁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1. 조직적 위기

 

지난 10년 동안 반복된 정치적 위기를 형성한 우리의 집단적 실패의 중심에는 서로 다른 집단과 활동가들의 노력을 응집시킬 수 있는(더 많은 것은 파트3에서 다룬다), 그들이 경험을 공유하고 집단적인 전략적 목표를 개발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이를 실천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효과적인 조직의 부족이 있었다.

 

조직의 부족은 또한 활동가들을 하나의 정치적 순간부터 다음 순간까지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집단적 경험, 성공, 그리고 결정적으로 실패에 기초한 장기적인 집단적 분석을 개발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정치적 간부층도 잃게 한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그들이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적 기반으로부터 단절된 논평가와 공적 인물들에게 부풀려진 영향력을 준다. 이것은 반드시 그들 자신의 어떤 잘못으로 인한 것이기 보다, 그들이 배우고 책임질 수 있는 노동운동과의 유기적인 연결고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활동가들은 특정한 전술적 문제나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거의 독점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당 지도부는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없었고, 특정한 나쁜 결정이 내려졌고, 언론은 우리를 불공정하게 대했다. 이 중 많은 부분이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이지만, 왜 조직적 위기가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적 좌파 전체에 걸쳐 존재하는지, 과거에 왜 똑같이 편향된 언론, 정치, 국가 기관들을 견딜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이러한 접근방식은 노동당이 어떻게 5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들을 활동적인 당원, 지역사회의 조직자, 사회운동 활동가, 또는 전국에 걸쳐 개입하는 노동조합원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면서도 수십만 명의 노동계급 당원을 모집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사회주의 좌파들이 노동당 당적을 초월하는 급진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당 내외의 연계를 구축하는데 실패한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중대한 실패였다.

 

더욱이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 정치적 전통, 즉 전위주의와 사회민주주의적 정당들은 효과적인 조직적 네트워크, 정치적 승리들, 심지어는 주요한 정치적 발전을 형성하는데 기본적인 집단적 능력을 가져오는 것에서 실패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보다 장기적이고 구조적 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의 현재 조직적 전통이 역사적인 순간 즉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로부터 나온다는 사실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사회관계에서 발전한 것에 있는 것 같다. 각 전통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2. 전위주의적 정당의 실패한 도박

 

영국과 서방지역 전역의 전위주의 정당들은 2010년대 초반에 급속한 위기 및 쇠퇴기를 겪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특히 성폭력이나 인종주의를 다루는데서 그들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문제들도 충분히 좋지 않았지만, 뒤이어 일어난 다른 그룹과 정당들에 걸친 내부적 대립은 젊은 신참자들과 역사적 지도부 사이의 커다란 격차를 반복적으로 드러냈다. 이것은 더 나아가 굳어진 구조와 실수와 잘못된 행동을 인정할 수 없는 무능함을 드러냈다. 이러한 각각의 위기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중요하고 좋은 글들이 쓰여져 있기에, 여기서 이것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여기서는 사회주의 좌파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친 이러한 논란의 반복적 성격이 보다 광범위한 구조적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겠다. 이는 몇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오랜 패배는 이들 집단을 보다 넓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게 만들었고, 그들의 생존을 내부 이데올로기적, 조직적 동질성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2. 이러한 행동은 집단이 생존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그것은 크게 손상된 방식으로 그렇게 했고, 그들이 그 이름을 부르던 사람들의 정치적 경험과 정치적 생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했다.

 

3. 1990년대 후반부터 지속된 정치적 대립이 이들 그룹에게 허용한 기회 속에, 흔히 기존의 간부들보다는 상당히 젊은 새로운 멤버들을 서로 다른 수준에서 흡수하는데 성공하면서, 그들에게 중요한 사회주의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

 

4. 이 새로운 구성원들이 정치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인 행동과 지도부 인사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포함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나이든 지도부와 점점 더 대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학대나 억압에 대한 내부적인 질문들도 촉진하고 풀어냈다.

 

이러한 설명은, 이러한 조직들이 오랜 기간 침체된 노동계급 투쟁에서 정치적으로 생존하는데 실패하면서, 그것이 그들을 새로운 노동계급 투쟁의 물결에 관여하는 것을 막았다는 점을 지적하지만, 유사한 조직적 기반에서 새로운 조직을 재구성할 가능성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실수일 것이다.

 

작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획일화된 전위주의 정당들은, 흔히 주장하듯이 볼셰비키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930년대 레온 트로츠키의 지도 하에 제4 인터내셔널(FI)이 결성되면서 생겨났다. FI의 정치적 도박은 구소련과 전 세계의 대중적 공산당(CPs)의 스탈린주의화 과정이 장기적으로는 증가하는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중요한 분열과 반란을 초래하리라는 것이었다.

 

특히, 이 이론은, 분쟁이 격화되면서 노동자들과 정치 간부들이 CP/ 또는 대중적 사회민주주의 단체로부터 이탈하여 진정한 혁명적 지도자인 FI에게 사로잡힐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그 조직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확고하고 위기가 닥쳤을 때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이러한 논리는 러시아 혁명의 여파 속에, 특히 그 가장 중요한 지도자, 전략가, 이론가인 사람의 지도 아래 만들어졌지만, 이 도박은 결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예를 들어 1945년과 1968년에 국제적인 혁명적 위기가 오고 지나갔지만, 그런 목적을 위해 건설됐던 무수한 전위주의 조직으로 노동자들을 대량 이동 시키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스탈린주의와 결별하면서 진보적 정치에서 아예 떠나가거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눈을 돌렸다. 고도로 단련된 활동가 집단에 단단히 기반을 둔 전략은 실패했다. 이 실패를 이해하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계급 전체가 장기적으로 패배한 것과 일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이들 그룹들 중 많은 이들이 그들의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실패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도록 보호해주었다. 정치적 평가는 그 진로를 실행하는 십 년보다 더 걸렸다.

 

따라서 지난 10여 년간의 전위주의적 모델의 위기는 단순히 특정 기간의 문제가 아니며, 그들이 억압과 학대를 심각하게 다루지 못한 결과일 뿐만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 기대와 관점, 그리고 가설들의 더 근본적인 실패다. 그러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어떻게 되어 왔는가?

 

3. 계급적 힘이 없는 개혁은 없다

 

얼핏 보면, 이러한 전통은 확실히 그들의 유로-코뮤니즘(그리스의 시리자Syriza,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와 노동당/사회당 형태(영국의 코빈Corbyn과 프랑스의 멜랑숑Melanchon) 속에서 더 잘 되었다. 실제로 전위주의적 좌파가 무너지면서 서구에서는 새로운 좌파적 선거 프로젝트가 등장하여 수십만 명의 상상력과 정치적 에너지를 모두 사로잡았다.

이러한 선거에서의 승리들과 또는 대중적 당원 가입의 움직임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당원을 좌파로 끌어들이고, 지역정당 지부에서부터 노동조합과 지역사회 단체까지 노동계급 기관을 재건하기 위해 이러한 조직에 가입할 필요가 있다고 믿게 했다.

 

영국에서 이 에너지는 압도적이었다. 진지하고 경험이 풍부한 수백 명의 조직가와 활동가들을 노동당(LP)의 대열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선거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결과는 실망 그 이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거의 성공은 여전히 닿지 않고 있는 반면, 사실상 지난 5년 동안 효과적인 활동가 기반이 개발되지 않았고, ‘모멘텀’(Momentum: 코빈 지지자들의 네트워크 조직)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그것을 위한 어떠한 진지한 노력도 수행되지 않았다.

 

의제는 선거적 최후통첩에 의해 설정되었는데, 이것은 무엇이 수용 가능하거나 현실적인 것인지 한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거듭 당의 우파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부적으로 투쟁한 많은 사회주의자들의 개인적 단점이 아니라, 선거에 우선성을 두는 어떤 프로젝트에도 있는 구조적 한계의 결과일 뿐 아니라, 현재의 계급 세력 균형 안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위한 매우 제한된 정치적 공간 때문이었다

 

노동당(과 다른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의 황금시대는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등장한 노동계급 반란의 이중적 압박 속에서 나타났는데, 한편으로는 군대와 가정 양쪽 전선에서의 희생으로 급진화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세계 북반구에서 전쟁 이후 재건과 세계 남반구에서 탈식민지적 발전으로 촉발된 세계 자본주의의 급속한 경제적 팽창이 있었다.

 

강력한 노동계급의 전투성(헤일셤Hailsham 남작이 포착한 성 메리본St Marylebone의 유명한 문구처럼: '국민들에게 개혁을 주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에게 사회혁명을 선사할 것이다')의 압력과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경제 성장의 후원을 받으면서 지배계급은 복지국가 형성뿐 아니라 자본주의 경영의 측면에서 조직화된 노동을 포함하는 얼마간의 조합주의적 구조까지 양보했다. 물론, 아이러니한 것은 자본주의적 팽창의 황금시대가 사회민주주의적 재분배라는 황금시대를 가능케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노동당은 전투적이고 잘 조직된 노동계급 운동과 원활한 생산 운영의 대가로 부의 더 큰 분배를 아래쪽으로 허용하는 자본의 준비상태 덕분에 통치할 수 있었다. 지배계급과 노동운동의 중재자로서 당의 역할은 전자의 관용과 후자의 전투성에 달려 있었다. 세계경제가 과잉생산이라는 새로운 위기에 접어들고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면서 사회민주주의적 조리법의 두 요소 모두 1970년대 내내 붕괴했는데, 이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알려진 기간으로, 결코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패배의 시기에 노동당의 반응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보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는 힘의 균형이 후자의 이익을 위해 점점 극적으로 휘어짐에 따라 '관련성''신뢰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오른쪽으로 급회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노조들, 노동계급 공동체, 사회운동에 가해진 패배는 당의 기층당원과 폭넓은 노동운동의 능력을 더욱 약화시켰고, 당 지도부를 반대 방향으로 압박했다. 이로 인해 후자는 이른바 제3의 길의 일종인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 얼굴이 블레어의 얼굴이었으니, 그의 인간성에 의문을 품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코빈 프로젝트나 미국의 버니 샌더스를 둘러싼 운동에서 포착된 바와 같이, 개혁을 위한 기본적인 사회민주주의적 요구들의 현재적 갱신은 지금 순간의 모든 흥분과 한계를 나타낸다. 한편으로, 아무리 제한적이더라도 투쟁의 복귀와 현재 상태에 대한 일시적인 반란은 지난 40년 동안 국가, 지배계급, 그리고 그들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접근에 대한 불만의 증가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래로부터 노동자의 힘이 재건되는 일은 없었다. 노동조합은 여전히 취약하고, 그들의 평조합원들은 대체로 사기가 낮고 탈조직화되고 있는 반면, 노동운동이 감싸야할 거대한 부분은 - 특히 청년 노동자들과 민간 부분에 걸쳐서 - 아직도 노조로 조직돼지 않고 있다. 공동체의 자기 조직화는 그것에서부터 돋아 나오는 집단적 형태의 연대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의 득세는 나타날 수 있지만 (영국과 미국의 독자들은 너무 잘 알 것이지만) 선거에서나 (그리스에서 시리자 정부가 보여주었듯이) 권력에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지렛대로서의 충분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당의 활동가들이 발견했듯이 이들 조직의 내부 활동에도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그들은 지난 5년 동안 노동당 우파에 대항하여 내전을 치르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노동당 우파는 반란자들의 개혁 요구에 당황했지만, 최종적 판단을 강요하기엔 너무 약하고 조직화되지 않은 기층당원들로 인해 제거될 수는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에너지의 대부분은 선거 운동으로 전환되었고, 당의 단합과 '유권자에 대한 호소'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요구는 제한됐다.

 

의존하며 그것을 통해 동원할 수 있는 노동계급 삶의 유기적 기관이 없는 상황에서, 당 내에서 좌파는 관료주의의 지형 속에서 패배가 정해진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편이 승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코빈이 연합을 시도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적 실수를 낳았다. 그리고 그가 직면한 어떤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브렉시트와 그에 대한 반유대주의의 무기화로부터 인종주의의 성장과 국가 탄압에 이르기까지.

 

동원되고 조직화된 사회적 기반이 없다면, 사회민주주의는 매우 제한적인 개혁의 달성을 위해서도 막다른 골목이다. 그럼에도, 이 기반이 내부에서 재건될 수 있다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은 역사적 경험을 뒤집는다. 당을 만들어내고 나중에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밀어주는 것은 사회적 투쟁이다. 선거에 몰두하는 조직화와 선거 일정에 쫓기는 리듬은 그 과정을 뒤집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회주의적 좌파의 전통적인 조직 모델이 모두 현 시기에 실패하는 것은 그들의 지도력의 전술적, 정치적 실패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출현을 이끈 물질적 조건들이 급격하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 대한 우리 자신의 조직적 대응은 이러한 변화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 조직의 역사적 저점과 깊고 순환적이며 해결되지 않은 체계적 위기 앞에서, 차갑고 흡혈귀같은 자본의 손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실현하려는 희망은 기껏해야 환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기관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대중적 성격을 상실했을 때 기존의 대중적 노동계급 권리 기관의 급진화에 연동된 조직적 형태에 대한 지속적인 의존은 결국 진지한 정치적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역사 재현 협회를 닮게 돼 버린다.


4. 역사적 참고자료와 조직적 과제

 

현재의 순간은 그 후 증가하는 사회적 양극화와 긴장 중 하나로, 규칙적인 봉기와 반란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자본의 위기와 자유주의적 정당성의 위기는 불행히도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조직의 위기로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투쟁의 물결마다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더욱 깊이 지적하고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의 사회운동 - 반전운동과 학생 투쟁부터 인종주의와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대중적 반란에 이르기까지 - 은 반복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길거리로 끌어낼 수 있었고 그들의 불만을 표출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 대중의 분노를 정부의 퇴진을 강제할 수 있는 충분한 사회적 무게로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 무게는 시위자들이 그들의 분노를 작업장으로 되돌리고 생산, 유통, 소비를 중단시킴으로써만 전달될 수 있었다.

 

구조적인 인종주의와 경찰 폭력에 대항하는 현재의 대규모 동원은 분노하고 신물나고 국가에 대항할 준비가 된 수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의 투쟁이 체제의 핵심에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발가벗기고 있는 가운데 노동운동은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빠져 있다. 이것은 오늘날 노동운동의 많은 한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힘과 도달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심지어 더 '경제적'인 지형에서도, 영국에서 근 10년 동안의 긴축과 노동 조건과 복지 제공에 대한 공격에 맞서는 지속적인 노동자 투쟁의 부재는 노동운동의 현재 힘과 탈조직화에 관한 충격적인 고발이다.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코빈이 이끄는 노동당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의 사회민주주의적 선언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찬성했지만, 이러한 정치적 흥분이 작업장에서 어떤 중요한 조직화로 변모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회적 무게와 산업적 힘, 풀뿌리 전투력의 부족이 코빈 프로젝트의 실패에 더 큰 무게를 실었다.

 

역설적이게도, COVID-19 폐쇄의 영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갖고 있는 경제적 힘을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정부가 핵심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업무 중단을 거부하는 것은 또한 사회주의 좌파의 조직적인 노력이 시급히 향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시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노동계급의 조직과 힘을 재건해야 하는 불타는 필요성에 대한 반복적인 사례들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필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한 현재의 정치적 도구들의 쓸모없음에 직면해 있다. 사회주의 좌파는 이 상황을 시급히 해결하고 노동계급 조직, 리더십, 전투성을 재건하는 쪽으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

 

이 과정의 중요한 측면은 오늘날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할 때 우리의 역사적 참조점의 변화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사회주의 운동이 20세기 후반을 구축한 조직적 모델에 계속 의존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치적 언급의 상당 부분은 그 시기에 계속 집중되어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독서목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팽창과 노동자의 전투성이 증대되는 시기에 사회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가 직면한 과제를 논하는 책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영국 좌파의 역사와 국제적으로도 모두 사실이다 우리는 1960년대와 70년대의 전투적인 파업 물결과 사회운동, 탈식민지화 시대의 대중 정당, 시민권 운동과 흑인해방 투쟁에 근거해서 우리의 조직적인 도전을 생각하고, 그 좋은 시절로의 복귀를 꿈꾸고 있다.

 

물론 이 시기부터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정치 저술과 분석, 성찰 등을 버리라는 요구는 아니다. 사실, 우리는 정치 교육에서 그것들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직적 모델을 위해 1945~1975년 시기로 되돌아가는 우리의 경향은 실수라는 것을 인식하자는 호소이다.

 

이러한 정당과 운동들은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계급 세력 균형과 경제적 현실에서 나왔다. 그들은 또한 허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의 조직화, 시행착오, 간부층의 건설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정치적 사고는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 많지만, 그들의 조직적 관행의 대부분은 우리의 현재 상황에 적용되지 않는다. 최근, 나는 19세기 후반 영국 노동계급 운동의 형성 시기로 돌아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시기가 구조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현재와 더 관련이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사회주의자들과 노동계급의 투사들은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노동계급 혁명가들은 세기에 걸쳐 거듭 패배했고 파리 코뮌의 학살은 그들의 집단적 상상력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차티스트 운동의 전성기는 이미 아득한 기억이었다. 서방 제국주의는 세계 남반구의 아이티에서 인도에 이르는 세기의 전반기를 장식한 반란을 분쇄하고 진압한 이후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생존해 있던 노동계급의 초기적 조직은 경직화 되고, 숙련직에 기반한, 보수적인 조직이었다. ()아일랜드 인종주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분열의 강력한 힘이었고, 곧 반유대주의로 이어지게 되었다. 에릭 홉스봄이 '노동의 전환점'이라고 불렀던 당시 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했던 도전들은 우리 자신에게 여러 측면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한 사회주의 활동가들 - 기존 조직이나 유사한 생각을 가진 활동가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의 일부가 없는 경우가 많은 - 은 네 가지 주요 활동 영역에 초점을 맞췄다.

 

1) 그 시대의 크게 조직되지 않은 산업과 억압받는 이들의 공동체에서 노동계급 자기 조직화의 기관 개발(영국의 신노조 운동을 예로 들 수 있지만 동유럽의 반유대주의적 포그롬’pogrom에 반대하는 분트Bund의 노동자 자기방어위원회도 생각해 보자.)

 

2) 유기적 지식인 및 노동계급 활동가층의 출현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업장 및 노동계급 공동체의 정치 교육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것(공장 내 <자본> 독서 그룹은 그 시대의 주요 요소였다)

 

3) 마음이 맞는 개인들의 그룹 및 출판물의 설립을 통한 사회주의 분석 및 이론의 생산

 

4) 날카로운 의견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조직적 우산 아래 사회주의자들을 모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들의 정치 활동의 이러한 다른 측면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활동가층을 통합시킬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엘레노어 마르크스의 업적은, 여기에 모범이 된다. 그녀는 사회주의 이론과 조직의 발전에 참여했고, 노동계급 언론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미조직 노동자(성냥공장이나 부두 등)들 사이에서 산업 활동을 지원했으며, 노동운동에서 민족주의를 반대했으며, 영국의 아일랜드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영국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아일랜드 투쟁과의 국제적 연대를 조직했다. 그녀는 기능공 노조의 깊은 보수주의에 반대하여, 미숙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노조주의(New Unionism)의 출현과 일반 노조의 발전을 지지했다.

 

다시 한번, 오늘날 이러한 작업의 영역은 오랜 패배와 탈조직화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 즉 아래로부터 계급의 힘을 재건하고 유기적인 리더십과 분석적 명확성을 발전시키면서 조직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서둘러 덧붙이자면 이것은 과거 사회주의나 좌파 연합과 같은 사업들이 해왔던 방식처럼 파편들의 연합이 아니다.

 

오랜 패배에서 살아남은 기존의 소그룹과 그 이전 멤버들을 하나로 모으자는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현 시대의 도전에 대응하는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와 사회주의 정치의 재구성을 위해 일하는 그 집단과 개인들 사이의 단결을 발전시키는 것을 지지하는 주장이다. 오늘날 사회주의 좌파의 주요 균열은 동시대의 현실과 별로 관련이 없다.

 

소비에트 연방의 성격, 4(또는 제5인가?) 인터내셔널, 또는 쿠바 혁명의 정확한 본질에 대한 견해 차이는 위에서 설명한 과제와 바로 연관되지 않는다. 먼저 나는 소련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였다고 계속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론적 기반 중 일부가 우려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전의 조직적 역작용을 벗어나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려는 그들의 의지에 훨씬 더 관심이 간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노동계급의 힘을 기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고용주의 공격, 구조적 억압, 국가 폭력과 겨루는 서로 얽혀있는 도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 나아가, 위에서 논의한 네 개의 축을 따라 새로운 네트워크가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이끄는 중요한 주도력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5. 다음은 어디로

 

각각의 새로운 노조들(IWGB 등과 같은)을 건설하거나 기존 노조의 관료주의에 도전하는 서로 다른 산업의 평조합원 활동가들, 주거 및 임대 통제 네트워크(스코틀랜드의 Acorn 또는 Living Rents), 몇 개 안 되는 단속과 경찰 폭력 반대와 이주노동자 지원 그룹(단속반대 네트워크, 경찰감시 그룹, 경찰과 국가폭력에 맞서는 런던 운동, 정의를 위한 운동), 전략적으로 배치된 물류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세계의 성난 노동자들'과 같은 노동자주의자들의 주도력과 함께, 모두 그 중심에는 주요한 사회주의자 및 노동계급의 투사들이 있다.

 

그들 사이의 느슨한 조직적 네트워크를 공식화하는 방향으로의 움직임은 옳은 방향으로의 강력한 이동일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앞으로 몇 주, 몇 달 동안 새로운 지도부의 점점 커지는 공격에 직면하게 될 노동당 내부에 남아 있는 사회주의자에게도 조직 밖의 단체들과 함께 이러한 활동 영역에 그들의 회원들을 동참시키라는 호소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집단, 네트워크, 개인들은 마르크스가 '현대 사회의 토양에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솟아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듯이, '넓은 역사적 의미에서'의 정당이라는 공유된 전략적 비전에 기초하여 실질적인 통합의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프로젝트는 사회주의 좌파를 괴롭혔던 낡은 분열을 거부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차이를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다르게 반응할 주기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을 토해내는 변덕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럼에도 정치적 긴장과 이견을 유지하면서도 어디서든 가능한 한 실질적 단합을 이루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할 드레이퍼(Hal Draper)1970년대 초 자신이 '정치적 중심지'라고 부르는 곳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에 대해 썼다. 이 출판물들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회주의자 집단이 세상에 대한 공동의 분석과 다른 사람들과의 토론을 전개할 수 있다. 그는 이 접근법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당 건설에 대한 접근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우리는 사회주의 좌파 내부의 다양한 정치적 전통으로부터, 예를 들어 '아래로부터 노트'(Notes from Below), '콘터‘(Conter), '트리뷴'(Tribune), '샐비지'(Salvage) 등에서 그러한 정치적 중심지의 초기 시작을 보아왔다. 비록 이것들은 매우 다른 사회주의 전통과 접근방식을 나타내지만, 그들은 집단적인 마르크스주의 정치 분석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의 운동은 그러한 주도력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실천에서 연합을 지향하는 한편, 특정 전통의 접근방식의 우월성을 입증하기보다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마르크스주의 집단들로부터 나오는 정치적 입장의 폭넓은 다양성이 필요하다. 이 집단들 사이의 토론과 논쟁들 속에서 새로운 입장과 친밀감이 자라날 것이다.

 

이들 중심지만 외로이 내향적으로 돌려지지 않고, 정치적 교육을 제공하고 독립적이고 자신감 있는 노동계급 활동가층 양성에 주력하는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교육과 노동계급 자율성 구축의 필요성에 대해 토론에서 기기 로게로(Gigi Roggero)가 말했듯이,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 내기의 힘을 재발견하기 위함이다. 즉 유물론적 내기, 혁명적 내기 말이다. 자본주의적 위기를 혁명적 위기로 전환하는 가능성에 대한 내기, 또한 그 전에, 정치적 주관성의 위기를 시급히 필요한 도약으로 전환하는 가능성에 대한 내기 말이다. 기존에 선행되었던 것을 모방하는 것은 기괴할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당면한 현재의 문제들을 이해하기위해 그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자율성은 실재하는 것을 파괴하고 뒤엎을 목적으로, 우리의 존재를 전복하려는 지속적인 준비다. 현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급진적 해방과 전환에서 출발하는 힘과 가능성에 대한 집단적 관점의 구축이다."

 

최근에 정치 교육 단체가 마르크스주의를 논의하고 집단적 분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이데올로기나 조직적 배경이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맨체스터에 모은 것은 다른 이들이 배울 수 있고 본받아야 할 이 방향에서 중요한 실천적 조치다.

 

지난 40년 동안 장기적 패배를 통한 힘의 균형에 있어서의 근본적 변화는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조직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과거의 조직적 전통이 구축되고 그들이 행동하고자 했던 정치 경제적 관계를 풀어냈다.

 

따라서 다른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서로 다른 시기에 태어난 조직들을 인수하거나 부활시키거나 다시 시작하려는 투사들의 현재 시도는 잘못된 논쟁에 주목하는 것이다. (항상 제한적인) 개혁의 가능성은 장기적인 신자유주의적 패배와 똑같이 장기적인 자본주의적 이윤율의 위기로 인해 훼손되었다.

 

마찬가지로, 대중적 노동계급 조직의 실패를 기대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정치적 전략들은 이러한 조직들이 더 이상 대중적 성격을 갖지 않는 세상에서는 별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대신에, 사회주의 좌파는 실천을 통한 재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와 정치적 리더십의 발전을 고무하고 참여함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대중 교육과 정치적 논쟁의 만개를 장려하면서 기존의 주도력과 그룹들 간의 실천적인 연결고리를 구축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함께 조직하고, 나란히 싸우고, 그 과정에서 활발하게 이견을 가짐으로써만 우리는 노동계급 투쟁에 뿌리를 두고, 우리 모두를 죽이고 있는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초점을 맞춘 사회주의 운동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다.

 

(기사 등록 202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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