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신자유주의 렌즈를 통해 본 노동력과 사회적 재생산

닐 포크너Neil Faulkner

번역: 두견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뒤를 따라서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담은 글이다. 가치 창출, 노동력 및 사회적 재생산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확장하려고 한다. 이 글은 이미 앞서 소개한 같은 필자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혁신을 시도하는 글(https://www.anotherworld.kr/990)에서 이어지는 것이고 상호보완적인 내용이다. 이 글의 필자인 닐 포크너Neil Faulkner는 고고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민중사, 그리고 <조여오는 파시즘: 그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싸울 것인가>의 저자이며 활동가이다. 현재 영국에서 ‘반자본주의 저항’Anti*Capitalist Resistance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좌파 재결집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의 책이 <좌파 세계사>로 번역돼 있다.

 

출처:

https://anticapitalistresistance.org/labour-power-and-social-reproduction-through-a-neoliberal-lens/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는 2008년 기사 '세계 경제에서 노동력의 재생산과 미완의 페미니스트 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상품 생산의 형태가 아닌 다른 가치 생산 노동을 생각할 수 없었던 무능과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에서 여성의 무급 재생산 노동의 중요성에 대한 무지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 자본주의가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엄청난 양의 무급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러한 재생산 활동의 평가절하 둘 다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발전을 불가피하고 진보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덜했을 것이다 … 왜 마르크스는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끈질기게 무시했을까? 예를 들어 노동력의 재생산 과정과 관련된 원자재의 가치가 제품으로 이전되기 위해서는 어떤 변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해 묻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실비아 페데리치)

 

이것은 우리의 긴 이론 논문 '신자유주의 렌즈를 통해 본 가치와 잉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향하여'에서 발전된 아이디어와 밀접하게 일치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사회적 재생산과 그에 따른 여성의 억압(및 기타)을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경제적 분석의 함의를 더 완전히 끌어내는 것이다.

 

가치와 잉여: 핵심적 논의

 

앞서의 논문에서 필 허스Phil Hearse와 나는 지난 40년 동안 자본주의의 성격 변화가 가치 창출과 잉여 전유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 방식의 이론적 문제를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현대적이고, 세계화되고, 금융화되고, 디지털화된 독점 자본주의가 가치 창출과 잉여 전유의 과정을 융합하여 생산 지점에서 한 순간에 위치 짓는 것으로는 적절하게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우리는 가치 창출은 총체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집단적 인간 노동은 총 사회적 생산물을 창출하는 반면 잉여 전유는 생산, 유통, 교환 및 소비/실현을 통해 자본 순환의 수많은 다른 지점에 잉여가 충당되는 낮은 수준에서 일어난다.

 

앞서의 논문은 호평을 받았지만 건설적인 비판적 논평에 비추어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실질적인 논거는 (우리가 아는 한) 도전받지 않았지만, 우리의 공식화는 보다 정확한 용어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지만 항상 우리의 의미를 충분히 명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노동력과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질문으로 이 논지를 확장하기 위해서 나는 네 가지 용어/개념을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부, 사용 가치(또는 단순히 가치), 교환 가치 및 집단적 인간 노동/총 사회적 생산물/ 총 사회적 재생산. (더 자세한 설명은 부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부'라는 용어를 천연자원과 인간 노동력의 작용으로 생성된 생산물 또는 '사용 가치'와 관련하여 사용한다. 나는 인간의 노동력이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사용되는 생산물을 만들기 위해 작용되는 경우에 '사용 가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내가 '가치'라는 약어를 사용할 때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를 의미한다(즉, 위 인용문에서 페데리치와 같은 방식으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교환가치는 가치가 자본의 순환 안에 포섭되고 상품 형태를 취하여 잉여 전유의 원천이 된 경우에 적용된다.

 

내 주장의 핵심은 자본주의적으로, 즉 자본 축적의 순환에서 생산, 분배, 교환 및 소비/실현되는 가치와 가치 일반, 즉 사용 가치 사이의 뚜렷한 구별이다. 후자는 '총체적 인간 노동' 과정 전체의 결과이며, '총 사회적 생산'의 일부를 형성하며, 결정적으로 이 논문의 주장에 따르면 '총 사회적 재생산'의 일부를 형성한다.

 

노동력

 

집단적 인간 노동과 총 사회적 생산물이라는 두 가지 개념은 상품에서 노동력으로 관점의 변화를 수반한다. 상품의 본질에서 출발하는 대신에, 나는 노동력의 본질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한다. 노동력을 자본주의 체제(또는 어느 다른 사회 체제)에서도 방사성의 핵심으로 보고, 따라서 역사유물론적 분석의 필수적인 중심점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SRT)과 즉각적인 연관성을 만들어낸다. 티티 바타차리야TITHI BHATTACHARYA 는 이렇게 말한다.

 

“SRT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범주, 즉 자본주의의 생명력을 상품이 아닌 인간의 노동력이라고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우리가 흔히 '경제적'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의 피상성을 비판적인 검토에 노출시키고, 그것의 지저분하고, 감각적이며, 젠더화되고, 인종화되고, 다루기 힘든 구성 요소인, 명령을 따르는 만큼이나 그것들을 거스를 수 있는 살아있는 인간 존재들의 경제적 과정으로 회복시킨다.”(티티 바타차리야)

 

다시 말해 노동은 생산과 재생산 모두를 하나의 분석 틀 안에서 즉시 가져오는 개념적 범주이다. 사회적 세계는 운동의 변증법적 통일체로서, 각각의 움직이는 부분이 항상 하나의 유기적 전체의 한 부분일 뿐인 영원한 생성 과정으로서 총체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세계는 인간의 집단적 노동에 의해 매개되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과정으로, 전체 사회적 생산물과 전체 사회적 재생산을 모두 발생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 사이의 분리에 관한 한, 우리는 그 분리를 이 특정한 사회적 구성에 특유한 2차적 발전, 역사적으로 우발적인 어떤 것, 분열, 소외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개념 속에 내재된 것은 노동계급을 단순히 노동력을 자본에 파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다시 바타차리야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 노동력이 자본에 의해 지불되었는지, 아니면 무급으로 남아 있는지에 관계없이, 평생 총체로서 사회적 재생산에 참여한 생산하는 계급의 모든 사람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러한 통합적인 계급 비전은 로스엔젤레스 출신의 라틴계 호텔 임시적 노동자, 높은 보육비 때문에 집에 있어야 하는 인디애나주 출신의 유연근무제 워킹맘, 시카고 출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임 교사, 그리고 이전에 전미자동차노조 노동자였던 디트로이트 출신의 백인 남성 실업자들을 한데 모은다.”(티티 바타차리야)

 

사실 이마저도 너무 좁다. 나는 리즈 보겔Lisa Vogel의 노동계급에 대한 보다 총체적인 정의를 선호한다. 여기서 노동계급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 사회의 과거, 현재에 잠재적인 임금 노동력과 그것의 유지 보수가 임금에 의존하지만 스스로 임금 노동에 들어가지 않거나 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구성된다. 어떤 주어진 순간에도, 그것은 현역 노동력, 산업 예비군, 그리고 산업 예비군에 포함되지 않은 상대적 과잉 인구의 부분으로 구성된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이 마지막 범주가 때때로 영아와 유아들을 제외하고 극소수의 사람들만을 포함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조차 때때로 노동시장에 강제로 투입되어 왔고, 따라서 아무리 미미하게라도 산업 예비군에 속해 있었다.”(리즈 보겔)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을 이러한 포괄적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고 수십 년 동안 주장해 왔다. 인류학적으로 현대인은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종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것은 심리적 상관관계가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을 위한 기본적인 리비도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교성, 애착, 그리고 공감을 위해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종들은 약자를 돌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먹고 살도록 남겨져 있다.

 

고고학적 기록은 현생 인류와 몇몇 초기 호미닌hominin 종들은 항상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집단의 무능력한 구성원들을 보살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특징은 마르크스가 '종적 존재'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이다. 따라서 보겔이 노동계급에 대한 그녀의 정의에 '산업 예비군에 포함되지 않은 상대적 과잉 인구'를 포함한 것은 매우 정확하다. 그들은 자본에 있어서만 '과잉'인 것이지 그들 자신에게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이제 또 다른 오래된 이론적 문제를 해결하고 기각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치와 잉여'에서 우리는 가치 창출과 잉여 전유가 분리되고 개념적으로 별개의 과정으로 간주되면 -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 '전형' 문제, 체제 전반에 걸쳐 이윤율이 어떻게 '균등화'되는지, 그리고 장기적인 '이윤율 하락 경향'이 있는지 등의 몇 가지 문제가 크게 해소된다고 주장했다.

 

내가 보기에, 같은 것이 '가사노동 논쟁'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특히 여성들에 의해 주로 행해지는 가사노동이 가치를 창출하는지의 여부, 그리고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급 여부에 대한 상호 연결된 논쟁에도 적용된다. 이 문제들은 우리의 틀 안에서 해결된다. 가정과 작업장 사이의 분리는 가족/일, 가정/사회, 민간/공공, 그리고 물론 여성/남성이라는 날카로운 이분법으로 자본주의 특유의 사회적 파열로 드러난다.

 

일단 집단적 인간 노동과 전체적 사회적 생산/재생산의 가장 중요한 현실을 파악하고 나면 - 일부는 자본 순환에 포함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음 - 가사 노동이 가치(즉,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자본주의가 나타내는 집단적 인간노동의 폭력적 파열의 본질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렵채집 사회와 대부분의 농경사회와 같은 초기 인간 사회에서는 가족/가정도 생산적인 단위였다.

 

그들은 '오이코스oikos 사회'였다. 이 고대 그리스 단어는 폴리스 또는 도시 국가의 기본적 사회 단위를 구성하는 가족과 농장, 가정과 작업장의 단일성을 설명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영어로 바로 번역될 수 없다. 이 개념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라틴어의 familia는 고대 로마에서 비슷한 의미를 가졌고, 영어의 'household'도 중세 및 근대 초기에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일하는 계급의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일하는 땅에 직접 접근할 수 있었고, 그들 자신의 생산수단을 소유했으며, 그들 자신의 생활수단을 스스로 제공했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폭력적인 균열, 즉 토지로부터의 추방과 생산수단과 생활수단 모두의 박탈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설은 자본주의 발전의 필수적 전제 조건이었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른 것은 오직 노동력 외에는 팔 것이 없는 노동자 계급의 창설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인클로저, 개간, 기근, 정복, 대량학살을 포함하는 이 거대한 균열은 빠르면 16세기부터 시작되었고 세계 남반구에서 기업형 농업의 발달에 의해 남아있는 농민 공동체의 마지막 청산과 함께 이제 겨우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이것의 역사는 인류의 연대기에 피와 불의 문자로 쓰여 있다'고 썼다.

 

그러나 그 파열은 결코 가족과 노동의 분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노동, 즉 한편으로는 가사와 사회적 재생산의 노동,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을 위한 노동 사이의 분리였다.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가사노동과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적인 노동을 분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순환 밖에 남아 있는 노동 형태와 그 안에 포함된 노동 형태 사이의 분리일 뿐이었다. 또는 사회적 재생산의 순환에 관여하는 (무급) 노동과 자본 축적 순환에 관여하는 (유급) 노동 사이의 분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원론의 위험이 있다. 즉, 사회 생활의 두 개의 분리된 영역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그것들이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긴밀한 변증법적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유급이건 무급이건 노동계급 전체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에 의존한다. 즉, 무급 가사 노동의 중심지인 가족/가정은 자신의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임금에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자본은 노동계급에 의존하고, 노동은 잉여/이윤의 원천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가족/가정과 그곳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무급 가사노동 – 핵심적으로 기존 노동력의 갱신, 임금 노동자의 부양가족 유지, 노동력의 세대적 교체를 수행하는 - 에 의존한다. 현대 가족의 이 세 가지 기능은 체제에 필수적이다. 따라서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가사노동은 체제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가족은 특히 현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하에서 다른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이것들을 아래에서 탐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간단한 설명이 하나 남아 있다.

 

일부 가사노동은 남성이 수행하며, 특히 최근에는 보다 자유민주주의적인 사회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특히 전 세계적인 규모의 가사노동의 대부분은 여성이 수행한다. 이에 대한 기본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성적으로 이형적이며 성적으로 재생산한다. 따라서 여성만이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일 수 있으며, 이 생물학적 사실 덕분에 대부분의 여성은 적어도 일생의 특정 시점에서 대부분의 남성보다 가정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가부장제, 젠더 불평등, 여성 억압을 야기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하에서 가족이 수행하는 특정한 역할에 기인할 수 있다. 남성 우월주의는 자본주의에 필수적이지 않지만, 여성의 재생산 능력은 분명히 그러하고, 사회적 재생산과 무급 가사 노동의 중심지로서의 가족/가정의 유지도 마찬가지이다. 리즈 보겔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설명한다.

 

“필요노동의 가사적 요소의 수행은 노동계급 가족-가정의 물질적 중심축을 구성한다. 이 과업이 역사적으로 주로 남성 우월주의로 특징지어지는 맥락에서 역사적으로 주로 여성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계급 가족은 여성 억압의 고도로 제도화된 저장소가 된다.

 

사적인 가정 내에 있는 가사 노동자로서, 여성들은 그들의 많은 시간을 급여를 벌어오는 남성들을 위해 무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쏟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남녀 간의 적대적인 관계를 야기시킬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과 권리를 얻기 위한 그들의 투쟁은 남녀 사이의 또 다른 잠재적인 갈등의 근원을 제공한다.

 

사적인 가족-가정 내에서 만성적인 긴장의 분위기에서 여성의 억압은 오로지 남성에 의한 억압으로 보일 수 있으며, 이는 초역사적으로 적대적인 노동의 성적 분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가족에 내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억압과 불평등이 영속화되는 것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노동의 성별 분업이나 가족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재생산에 필요한 가사 노동에 대한 책임이다.“(리즈 보겔)

 

나는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 가족이 '자본주의의 사회적 재생산에 필요한 가사 노동에 대한 책임' 때문에 '여성 억압의 고도로 제도화된 저장소'라는 이 주장을 현대의 금융화되고 세계화되고 디지털화된 독점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가족의 다양한 기능을 식별함으로써 발전시키고 싶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계급 가족

 

마르크스 자신부터 시작하여 그것(가족)의 죽음에 대한 소문은 많이 과장되었다. 반대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여기에서 나는 많은 급진적 논평가들의 작업을 종합하고 발전시켜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계급 가족의 본질적 기능을 열거한다. 나는 '노동계급 가족'을 통해 현재 인류의 대다수가 살고 있는 가정의 단위를 염두에 두고 있다. 현대 국제 노동계급의 규모를 감안할 때 오늘날 세계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노동 계급의 가족-가정에 편입되어 있다.

 

그리고 집이 없는 사람들, 실향민들, 혼자 사는 사람들, 독립한 젊은이들과 같이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그러한 가족-가정의 '인식처'를 열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체제에 필수적인 기관일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보편화된 기관을 고려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두 번째 일반화가 가능하다. 자본주의는 현대 노동계급 가족을 새로이 만들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그 자체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인 철학적 오류, 즉 물신화의 오류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생산(및 재생산) 양식을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의 총합에 대한 편리한 용어일 뿐이다.

 

이 체제는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을 기반으로 구축되었다. 여기에는 결정적으로 여기서 논증을 위한, 가족의 초기 형태, 과거로부터 계승되고 현재에 지속적으로 재형성되는 제도, 오래된 양식이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는 사회적 진화 과정이 포함된다.

 

가족이 자본의 의식적인 결정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듯이, 자본에 의해 어떤 의도적인 방식으로 관리되지도 않는다. 다른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맹목적이고 계획되지 않은 무정부적 축적의 체체이며, 그 모순은 과잉 축적 및 과소 소비로 인한 침체의 경제 위기같은 여러 위기를 초래한다.

 

증가하는 물질대사 파열로 인한 생태학적 위기; 증가하는 무기 지출과 군사적 황폐화로 인한 지정학적 위기; 전례 없는 수준의 불평등과 빈곤을 낳은 사회적 위기. 우리는 그 목록에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추가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체제의 의존은 가족이 안정적이고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체제의 위기는 가족을 산산히 분산시키고(대량 이주를 생각해보라) 집단적 공급을 축소하고 있다(사회적 돌봄을 생각해보라).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는 특히 여성들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어린 형제나 늙은 조부모, 또는 장애인 친족들을 돌보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부담을 지운다. 이러한 고려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현대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 가족의 다양한 역할을 검토해보자.

 

기존 노동력의 갱신

 

자본을 위한 노동에는 종종 이런 것들을 수반한다: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보람이 없는 장시간의 진빠지는 작업; 경영진 및 감독자에 의한 따돌림 및 괴롭힘; 좌절, 스트레스, 분노의 축적; 그리고 노동자의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다른 많은 것들도 있다.

 

가족-가정의 가장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분명한 기능은 휴양, 여가, 휴식을 위한 중심지를 제공하는 것인데, 이는 노동자의 능력을 갱신하여 노동력이 회복된 상태로 업무에 복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소외된 노동, 비인간적 관료제, 도구적 관계의 가혹한 외부 세계 한가운데서 노동자의 기본적인 신체적, 정서적, 성적 요구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임금 노동자의 부양가족 유지

 

현대의 국제적 노동계급은 a) 다소 안정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b) 보다 불안정한/임시적으로 고용된 노동자, c) '과잉'이고 자본주의 노동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배제된 노동자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범주는 중첩되고 맞물리며, 신자유주의 시대에 (b)와 (c) 범주가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많은 노동계급 가족에게 부양가족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이것은 추가적으로 물론 아동, 학생, 노인, 어린 자녀를 둔 부모 등 생애주기에서의 단계 때문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들과 중증장애인처럼 이런 저런 이유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종합해보면, 노동력은 현대 노동계급의 대략 절반을 차지한다. 그래서 대강 평균적으로, 각각의 노동자들은 한 명의 부양가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노동력의 세대적 교체

 

노동력은 모든 인간 사회의 기초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기초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가정에서의) 재생산 및 소비로부터 (작업장에서의) 생산의 분리는 그것이 구세대를 대체할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체제에 필수적인 무급 육아의 사적 영역으로 후자를 전환시킨다.

 

그것은 비용없이 거대하게 자본에 투입되고, 무급의 필요노동을 쉽게 전유하며, 그리고 그것의 대부분은 확실히 전 세계적인 규모에서 여성이 수행한다는 의미와 함께, 나는 왜 내가 이 노동을 자본주의 생산 아래서 가정한 것 못지않게 가치 생산적인 것으로 여기는지 위에서 설명했다.

 

순응을 위한 사회화

 

무급 아동 돌봄 노동의 핵심은 노동을 위한 아동의 사회화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페기 모튼Peggy Morton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윤은 단순히 속도 향상과 노동자들의 착취를 증대시키는 다른 직접적 형태보다는 효율적인 업무 조직화와 노동자들의 '자기 규율'에 점점 더 의존한다. 그러므로 가족은 교육비 부담을 짊어지고 아이들의 억압적인 사회화를 수행하는 것 둘 다에 중요하다. 가족은 위계적 관계를 내재화한 아이들을 키워야 하며, 그들은 작업장에서, 지속적인 감독 없이도 효율적으로 자신을 규율할 것이다 … 여성들은 이러한 사회화의 대부분을 수행할 책임이 있다.”(페기 모튼)

 

이것은 1970년에 서구 선진사회를 언급하여 쓰여졌지만, 일부 자유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많은 가정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위에 의해 타격을 받고 있지만, 부모의 역할이 덜 성별로 국한되지 않고 부모의 권위가 덜 억압적인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가정일지라도, 하향식 통제와 사회화의 축소 불가능한 핵심에 의해 힘을 받는 순응과 보수주의의 인큐베이터로 남아있다.

 

부모는 가족부양자이고 자녀가 그들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권한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때로는 자신의 심리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때로는 그들이 자녀에게 '최선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 힘을 행사한다. 이는 사회 질서의 명령에 부합하는 행동을 장려하거나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자유주의적인 부모라도 교사, 사무실 상사, 경찰의 원형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가족 사회화의 중요한 측면은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깊이 각인된 삶의 모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만연한 규범이자 이상이며, 주로 가족-가정에 의해 주입되지만 교육 시스템, 종교 단체, 대중 매체 등 다른 기관들에 의해 크게 강화된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이 역기능적인 것으로 판명된 곳에서도 이상은 지속된다. 그 열망은 억압적인 부모나 학대하는 파트너를 피해서 모델에 맞는 대안적 '안식처'를 찾는 것이다.

 

좋은 삶을 위한 모델로서 가족의 이상화는 '이입'ingression 과정의 한 부분인데, 이것은 개인의 열망이 더 넓은 사회적 참여와 집단적 활동을 향해 밖으로 나아가는 대신, 좁혀지고, 내면으로 돌아서며 원자화, 사유화, 개인주의, 경쟁력, 그리고 이기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 및 실현

 

자본 축적은 생산과 실현에 똑같이 의존한다. 상품과 서비스가 생산되었지만 소비되지 않으면, 그것들에 내재된 자본은 평가 절하된다; 가격은 비용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이 경우 이윤이 없어지거나, 상품이 팔리지 않거나 팔리기 위해 가격이 저하될 수 있다. 이 경우, 그것들에 투자된 교환 가치는 완전히 상실된다.

 

우리는 '가치와 잉여'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소비 기반적 축적으로의 전환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서 우리는 가족-가정과 관련하여 동일한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에서 소비/실현의 주요 근거지이고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자본 순환에 경제적으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카페, 매점, 보육원, 세탁소, 도서관, 회의실, 레저 센터 등의 형태로 완전한 공공적인 제공은 전체 소비 기반적 축적 과정에 큰 타격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유화된 소비와 그에 따른 경제적 수요를 급격히 감소시킬 것이다.

 

개별 가족-가정은 유난히 비용이 많이 드는 단위이며 가정, 자동차, 가구, 기기, 의류, 음식, 난방, 조명 등 각각의 전체적 배열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가족 중심의 소비 열풍은 대규모적 기업 판매 노력에 의해 육성된 가정들 사이의 불안한 경쟁력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소비자들은 품격있고, 풍요롭고, 세련되고, 교양있으며, 섹시하게 만들어 줄 제품을 구매하도록 권장된다. 기업의 메시지는 당신과 당신의 가족이 당신이 소유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이입'이라고 부르는 것의 또 다른 측면이다. 소외된 욕망과 소비라는 이 만연한 질병은 가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대중적 시장으로서 가족을 필요로 한다.

 

사회적 생활의 원자화/개인화

 

나는 ‘이입’의 두 가지 추가적 측면을 확인하고 싶다. 즉, 체제의 장기적인 안정성에 매우 중요한 사회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문제이다. 노동자들은 생산 수단에서 분리되었다. 그들은 노동력 외에는 팔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의 행사는 집단적-창조적 노동에서의 자아 실현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노동에서의 소외로 경험된다.

 

가족은 '무정한 세상의 안식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피난처, 진정한 사회적 연대의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보고가 된다. 그러나 그 자체의 존재,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의존, 그것에 대한 투자는 사회가 가장 작은 원자인 가족-가정으로 분해되고 따라서 사회 생활이 개인화된 소비와 개인적 야망으로 크게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계를 꾸리고, 집을 구하고, 청구서를 지불하고, 대학에 입학하고, 의료 서비스를 받는 등 모든 문제는 개인과 그녀의 가족의 문제가 된다. 고용 기회, 적정한 주거, 공공 요금, 교육 비용, 의료 서비스 이용 가능성 등 이 모든 문제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문제로 경험된다. 따라서 가족은 집단적 문제에 대한 사고 방식을 개인화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에 고정시킨다. 이것은 매우 반동적인 현상이다.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은 가족 자체가 그 본질상 '미래를 막기 위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 가족은 … 자본주의 아래에서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한다. 대략적으로 경제적 역할은 특정 유형의 생산적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량 소비를 위한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자본주의적이다. 이 경제적 기능은 농민과 봉건사회의 잃어버린 이상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와 상호 작용한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평등하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장소. 그 근본적 이유를 거꾸로 보게 하는 이 이데올로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위해 결정적이다 … 그러므로 가족은 이용 가능한 가장 보수적인 개념을 구현한다: 그것은 과거의 이상을 고착시키고 현재의 즐거움으로 제시한다.”(줄리엣 미첼)

 

이 중요한 기관인 가족-가정의 방어는 억압으로부터의 피난처이자 반동의 보루인 동시에 집단 행동이 요구될 때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계급투쟁에 내재된 희생과 위험은 안식처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될 수 있다. 쉴라 로보섬Sheila Rowbotham은 이것이 1970년대 영국의 산업 분쟁 동안에 남성의 전투성과 여성 보수성 사이의 간헐적 긴장의 근원이라고 확인했다.

 

“여성은 그러한 행동에 의해 배제되고 또한 위협받고 있다. 자본주의 내 가족에서 여성의 역할은 남성의 후원을 없애는 것이 그녀를 노출시키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도록 구성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가족의 작고, 세심하게 닦여지고, 끝없이 깨끗한 영역, 즉 그녀의 세계에 그를 머물도록 강요하려고 한다. 그녀는 그 남자를 가두고 묶으려고 한다. 마치 자본주의에서 삶이 조직되는 방식이 그녀를 가두고 묶은 것처럼 말이다.”(쉴라 로보섬)

 

여기서 모순은 남녀 사이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과 가정적인 것, 세상을 바꾸기 위한 집단적 행동과 사적인 도피처 아래로 도주하는 것 사이의 모순이다. 가족은 때때로 투쟁을 뒷받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84년 영국 광부들의 파업 때는 대부분이 주부들인 갱도 마을의 여성들이 저항세력의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가정의 원자화를 초월할 수 있는 조직, 동원, 계급 의식의 적극적인 과정을 필요로 했다.

 

사회적 좌절의 충격 흡수제

 

마지막으로, 나는 심층 심리학의 수준에서 이입을 고려한다. 나는 줄리엣 미첼과 다른 제2물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동의한다. 일반적으로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좌파의 편견과 특히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에리히 프롬Erich Fromm, RD 랭Laing과 같은 급진적 정신분석가와 정신과 의사의 작업에 대한 편견은 가족에 대한 이해에 큰 격차를 남긴다는 것이다. 이곳은 자세한 분석을 위한 곳은 아니지만 두 가지 점을 짚어볼 가치가 있다.

 

첫째, 종종 일상적인 굴욕과 수모에 이르는 외부 세계에서의 노동자들의 소외와 권한 박탈은 가족을 개인적인 존중의 성취를 위한 중요한 중심지로 만든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남성 우월주의, 가부장제, 때로는 폭력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억압의 적극적인 구성 요소가 되면서 일반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적용된다. 캐시 맥아피Kathy McAfee와 미리나 우드Myrna Wood가 1969년에 설명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남성 노동자가 자신을 노동자(즉, 억압받는 집단의 구성원)가 아닌 남성(즉, 권력자)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특권과 권력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사장을 포함한 남성의 세계와 스스로의 동일시를 조장한다. 대부분의 남성이 아내와 가족에 대해 행사하는 작은 독재는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방식으로 분노와 좌절을 표출할 수 있게 해준다. 가족에서 남성의 역할은 강박적인 개인주의, 권위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영속화에 필수적인 가치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위계적 관점을 강화한다.”(캐시 맥아피와 미리나 우드)

 

이것은 나의 두 번째 요점과 깔끔하게 겹친다. 즉, 가족은 좌절된 열망, 손상된 자아뿐만 아니라 원자화, 소외, 아노미의 세계가 조장하는 정신적 불균형과 무질서의 충격 흡수자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R D 랭의 작업에 기록되었듯이, 기대와 요구에 대한 이러한 부담을 안고 있는 이 작은 가족 단위는 대인관계의 적대감과 지속적인 불행의 가마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함께 유지되고, 기능이 고장난 가족을 계속 유지하는 경향이 있는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압력이 있다면, 그것은 연속적인 정신적 이입을 겪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소외의 내적 개인적 고통이 체제에 대한 집단적 투쟁에서 진정한 해결책을 찾는 대신 가족 구성원에 대한 공격으로 방출될 수 있다.

 

마무리

 

이 기사는 <가치와 잉여>에 있는 우리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다. 나는 (집단적 인간 노동을 통해 전체 사회적 생산/재생산을 만드는) 가치 창출과 (생산, 분배, 교환, 소비/실현을 통한 자본 순환의 여러 지점에서의) 잉여 전유 사이의 명확한 이론적 구분이 우리가 사회적 재생산의 문제를 재구성하고 현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운동 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단일한 총체적 틀 안에 그것을 가져오도록 한다고 믿는다. 이것의 이론적 함의는 분명해 보인다.

 

* 가치는 가정과 작업장 모두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의 집단적 인간 노동에 의해 창출되며 전체 사회적 생산과 전체 사회적 재생산의 진행 중인 과정 모두를 발생시킨다.

 

* 가정과 작업장, 가사 노동과 자본주의적 노동, '여성의 노동'과 '남성의 노동' 사이의 분리는 자본이 (물질적)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의 서로 다른 방법의 통일된 과정에 부과하는 균열이다.

 

* 가족-가정에서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무급 가사 노동은 이러한 분리로 인해 자본에 의해 전유되고 회복, 유지, 재생된 노동력의 착취를 통해 자본 축적의 순환들 안에 포섭된다.

 

* 무급이면서 필수적이고 가치를 생산하는 가사노동의 소재지인 가족-가정은 자본 축적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여성 억압의 물질적 기반이기도 하다.

 

* 가족은 사회적 재생산의 기본 기능(기존 노동력의 갱신, 임금 노동자의 부양가족 유지, 노동력의 세대 교체)의 확장에 의해서 순응을 위한 사회화의 일차적 장소, 소비/실현의 주요 근거지, 사회적 삶을 원자화하고 사유화하는 메커니즘, 사회적 불만과 정신적 손상에 대한 충격 흡수장치가 된다. 그것은 억압에 대한 피난처이자 반동의 요새인 매우 모순적인 존재이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아래의 노동계급 가족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여성 억압의 어두운 심장이다.

 

* 가족에 대한 체제의 의존은 한편으로는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서 가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크게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잠재적으로 체제전복적인 대안을 대표하는 소수자들(독립적 여성, 미혼모, LGBT+ 사람들, 집시, 로마, 유랑자 등)에 대한 제도화된 적개심을 포함한다. 사회적 재생산에서 무급 가사노동에 대한 체제의 지속적인 의존과 다양한 소수자들에 대한 주변화, 낙인 및 억압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사 등록 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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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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