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우리 곁에 있는 “살육(Cannibal) 자본주의”

 

지난 30년 동안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좌파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아이디어들을 제공해 왔다. 프레이저가 페미니즘에 경제 엘리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억압의 근본 원인을 공격할 수 있는 노동계급 정치를 수용할 것을 요구할 때와 같이 이러한 생각은 때때로 정치적이다. 다른 한편, 프레이저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가 의존하지만 완전히 종속적이지는 않은 "배경 조건" 사이의 상호 작용을 분석할 때와 같이 이러한 생각은 때때로 강력하게 이론적이다.

 

곧 출간할 책에서 프레이저의 최근 작업은, 그녀가 "살육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돌진하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것의 종합을 추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삶의 모든 영역에 침범함으로써, 자신의 생존 조건,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생존 조건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인터뷰에서 프레이저는 현대 자본주의와 그 위기에 대한 X-레이를 제공하여 활동가들에게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집단의 일부로서 정치적이고 조화롭게 행동할 수 있는 로드맵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프레이저는 좌파가 수십 년 동안 스스로를 더 작고 내향적인 주변적 단위로 분해하는 데 집착한 후 통합된 권력 감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집단적 권력을 건설하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부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레이저는 모든 사람들의 서로 다른 불만이 표출될 수 있으면서, 우리가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공통된 비전을 제공하는 사회주의적 의제에 의해 통일된 상태를 유지하는 포퓰리즘 스타일의 정치운동을 우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우리가 자본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하면서 다가올 미래의 시나리오와 정치적 투쟁을 위한 공동의 전선을 구축하는 도전에 대해 말했다. 낸시 프레이저는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이자 비판이론가이자 좌파 활동가로서 한국에도 <전진하는 페미니즘>, <지구화 시대의 정의> 등의 여러 책들이 번역돼 있다.(번역: 두견)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21/09/nancy-fraser-cannibal-capitalism-interview

 

* 가장 최근의 작업에서, 당신은 소위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개념"을 발전시켜 왔다. 왜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개념이 확장되어야 하는가? 그것들이 경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너무 편협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것이 맞다. 나는 경제 체제를 사회의 진정한 기초로 보고 다른 모든 것을 단순한 '상부 구조'로 취급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 버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주의의 확장된 개념을 개발했다. 기존의 모델에서 인과관계는 경제적 기반에서 법적-정치적 상부구조라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불충분하다. 나의 대안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하위 시스템과 그것의 가능한 불가피한 배경적 조건들 - 과정, 활동, 그리고 관계는 비경제적이라고 여겨지지만, 그것은 사회적 재생산, 비인간 자연, 그리고 공공재와 같이 자본주의의 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 과의 관계를 재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토대-상부구조 그림을 복잡하게 만든다. 어떤 것이 필수적 배경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그것 없이는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력을 구입하여 작업에 밀어넣고, 원자재와 에너지에 접근하고, 상품을 생산하여 이윤을 남기고 판매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은, 이러한 "비경제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배경 조건에는 고유한 인과적 가중치가 있다. 그것들은 단순한 "부수 현상"이 아니다.

 

사회적 재생산의 예를 들어보자: 종종 공식적인 경제 밖에서 여성들이 수행하는 활동은 "노동"을 구성하는 인간을 지탱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세대의 출산, 보살핌, 사회화, 교육, 그리고 다음 날 직장에 복귀하기 위해 먹고, 목욕하고, 옷을 입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 성인 노동자들의 기력 보충,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기능을 위해 필요하다.

 

이 주장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변형인 소위 사회재생산 이론을 펴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는 사회적 재생산이 잘못되면 경제적 생산에 정말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자본 축적이 친족관계, 출생률, 사망률 등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단일 방향 인과관계보다 더 복잡한 그림을 가지고 있다.

 

자연적 또는 생태학적 배경 조건에 대해 유사한 사례가 만들어질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은 원자재, 에너지원, 폐기물 처리용 개수대 등 생산이 의존하는 물질적인 것들의 유용성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조건들이 위태로워진다면, 그것 또한 일을 망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COVID-19의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이것은 한 단계에서는 생태학적 기능 장애이다.

 

이 바이러스는 아마도 기후와 "개발"로 인한 종간 이동의 결과로 박쥐에서 일부 중간 종, 아마도 천산갑을 통해 우리에게 옮겨지는 인수공통전염병으로서 인간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는 전체 경제 시스템의 엄청난 수축이었다. COVID-19는 인과관계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정말 좋은 사례이다.

 

* 당신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는 완전히 자율적인 경제 체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그 자신의 외부적인 배경 조건을 끌어들이고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영역이 서로 상대적으로 독립적일지라도 경제 시스템은 여전히 다른 영역에 작용하고 변형될 수 있다. 자연처럼 그 외부의 영역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닌가?

 

자본주의 경제에는 커다란 인과적 역동성을 부여하는 특별한 것이 분명히 있다. 자본을 축적하고 제한 없이 "가치"를 확장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자본주의 경제는 돈을 벌고 편안하게 앉아 아름다운 저택에서 삶을 즐기고 모든 것을 소비하는 경제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양의 잉여가치,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자본을 창출하기 위한 재투자의 필요성이 있다. 그것은 자본 소유주들로 하여금 한계를 밀어붙이고 비경제적 조건들을 자신의 의지에 맞게 구부리도록 하는 강력한 힘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그들의 능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것은 자체 일정에 따라 자체 속도로 진행되는 자연을 포함하여 반작용의 대상이 된다. 생태적 재생산의 시간성은 결국 자본주의의 통제 안에 있지 않다. 따라서 "비경제적"으로 상정되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자본의 팽창주의적 충동은 무자비하고 맹목적인 강박이며, 그것은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자본을 소유하고 - 따라서 그것의 “의지”를 수행하며 - 그것의 가치를 확장하도록 동기를 부여 받는 개개인의 의지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이 드라이브는 내가 방금 말한 바와 같이 비록 한계 범위이긴 하지만, 그 자체의 배경 조건(가족, 자연, 국가 형태 등)을 재편성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축적 동역학의 힘과 형성력을 주장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인과관계에 대한 토대-상부구조의 그림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배경 조건들은 재생산의 문법이나 시간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비경제적" 가치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많은 반작용이 있다.

 

* 당신이 지적했듯이, COVID 위기는 이러한 외부 요인이 자본주의와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여 당신이 "다차원적"이라고 묘사한 종류의 자본주의 위기로 이어지는 방식의 극적인 사례이다. 다른 곳에서 당신은 또한 적어도 2008년 이후 금융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현재 단계가 다른 형태의 자본 축적으로의 역사적 전환을 의미할 수 있는 아마도 불치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제안했다.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나는 당신이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에 이미 암시되어 있는 몇 가지 요점을 강조하고 싶다. 하나는 부분적 위기와 일반적 위기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분적 위기란 주어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단계나 축적의 중요한 영역 중 하나는 명백히 고장난 반면 다른 영역은 다소 괜찮아 보이는 영역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경제 위기를 이런 식으로 부분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가들은 사회의 한 영역에만 해당하는 그러한 부분적 위기의 수많은 예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사회 질서의 일반적인 위기와는 다르다.

 

일반적인 위기의 개념은 몇 가지 주요한 교착상태와 기능 장애 가닥들의 수렴 또는 과잉 결정을 제시한다. 한 부문만이 아니라 모든 또는 거의 모든 주요 사회 부문이 위기에 처해 있으며 서로를 악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1930년대가 그랬다.

 

나는 우리가 지금 이런 종류의 일반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의심한다. 우리는 2007-8년에 금융의 붕괴와 같은 심각한 형태의 경제위기를 보아왔다. 그리고 비록 우리의 통치자들이 그 문제를 덮을 방법을 찾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위기는 실제로 해결되지 않았다.

 

만연한 금융화는 시한폭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최근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경제적 어려움은 또 다른 매우 심각하고 심지어는 재앙적인 위기, 즉 ‘지구 온난화’와 수렴되고 있다. 이 생태학적 위기는 오랫동안 숙성돼 왔고 이제 명백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최악의 영향으로부터 면제돼 있던 부문을 포함한 세계 인구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그것에 대해 깨닫고 있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가 있다. 이는 인간을 만들고, 돌보고, 유지하기 위한 우리의 능력을 압박하거나 고갈시키는 것이다: 보육 및 노인 돌봄, 교육 및 건강 관리. 국가들이 공공적 지원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고, 저임금에 의해 우리가 유급 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하면서 시스템은 돌봄 노동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따라서 해당 부문은 특히 팬데믹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위기에 처해 있다. COVID는 기존에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크게 악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적 재생산 위기(공중 보건 인프라 및 사회적 지원에 대한 투자 중단 포함)가 COVID의 영향을 크게 악화시켰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에 부합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또한 중대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한 차원에서는 통치의 위기이며, 이는 미국과 같은 강력한 국가조차도 체제가 만들어내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사실상 모든 규제 기관을 장악하고 자신과 부자들을 위한 막대한 세금 감면을 획책하는 거대 기업에 의해 압도당하며 고갈되고 교착 상태로 마비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세입이 줄어든 국가들은 기반 시설이 붕괴되는 것을 방치하고 개인보호장비(PPE)와 같은 필수 공공재의 비축량을 고갈시켰다. 그들은, 그 성격상 어떤 사법 관할권 국경 내에서도 억제할 수 없는, 기후 변화와 같은 문제들을 다룰 수 없다.

 

결과는 구조적 수준에서 통치의 심각한 위기이다. 그러나 또 다른 수준에서는 정치적 위기, 그람시적 의미에서의 헤게모니의 위기가 있다. 흔히 그렇듯이 정치로부터, 신자유주의화와 관련하여 더럽혀진 기성 정당과 엘리트로부터의 광범위한 이탈, 그리고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포퓰리즘들의 출현이다. — 그 일부는 잠재적으로 해방적이며 다른 일부는 확실히 그렇지 않다.

 

결론은 우리가 지금 경제적 위기,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 생태적 위기, 그리고 양면적인 정치적 위기 등 여러 가지 위기의 뒤얽힌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 위기를 초래하는 것 같다. 그 영향은 처음에는 여기서, 그리고 저기서, 그리고 다른 어떤 곳에서 나타난다. 마치 전이되는 암세포처럼. 하나의 발병을 고치려는 모든 노력은 다른 분야, 지역, 인구를 괴롭히면서 사회 전체가 휩싸일 때까지 다른 곳으로 이어질 뿐이다.

 

일반적인 위기의 경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명백해졌지만, 그것이 언제든 곧 완전한 붕괴나 혁명적인 절정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위기는 수십 년 동안 계속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파시즘이 패망할 때까지의 20세기 전반은 자유-식민주의적 자본주의의 길고 소용돌이치는 일반적인 위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고된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 COVID는 확실히 우리의 예측 능력을 제한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경향들에 따라 다른 미래 시나리오를 그려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만약 우리의 행동을 더 많은 해방적 시나리오로 이끄면서 재앙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말이다.

 

동의한다. 나는 내가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가능한 시나리오를 생각하게 되어 반갑다. 현재의 위기가 "발전적"developmental인 것인지 "신기원적"epochal인 것인지 고려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빙엄턴Binghamton 학파’에 빚지고 있는 구별이다. ‘신기원적’인 위기는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이다. 그것의 해결은 그 체체의 극복, 어떤 새로운 비자본주의적 또는 탈자본주의적 사회 형태로의 대체를 요구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발전적 위기는 자본주의 역사 내에서 주어진 "축적 체제" 또는 국면에 한정된 것이며, 다르면서도 여전히 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체제로 그것을 대체함으로써 적어도 일시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 경우, 상품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 "경제적"과 "정치적",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 착취와 수탈 사이의 체제의 구성적 분할은 제거되지 않고 "단지" 다시 그려질 뿐이다.

 

그러한 분할들은 자본주의의 모든 국면에서 이런 저런 형태로 존재하지만 모순의 현장이다. 그들 각각은 나중에 조만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위기로의 경향(경제적, 생태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을 지니고 있다. 기성체제는 그러한 모순을 잠시나마 누그러뜨리거나 교묘하게 다룰 수 있지만 영원히 그런 것은 아니다.

 

결국, 그들은 잘 보이는 곳에서 폭발하고 그들은 공공연한 위기로 접어들면서 해결책을 찾기 위한 미친듯한 모색과 그 해결책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촉발시킨다. 그러나 그 투쟁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결과가 자본주의 내의 새로운 체제가 될 것인지 아니면 탈자본주의적 대안이 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은 뒤늦은 깨달음 속에서 나중에만 명확해진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역사의 모든 일반적 위기는 “단순히” 발전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상업화 국면의 일반적 위기는 19세기의 자유-식민주의 체제로 이어졌고, 다시 그것의 위기는 차례로 20세기 중반의 국가 관리 체제로 이어졌고, 다시 그것의 위기는 그 자체로 현 시대의 금융화된 자본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각각의 경우에, 새로운 체계는 결국 자신의 체계에 굴복하기 전에 있었던 이전 체계의 발전적 위기를 잠정적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많은 사회적 행위자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위기가 신기원적이며 자본주의를 폐지함으로써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체제의 창의적 역량, 자기 변혁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할 때 이 역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재 위기의 일부 측면은 특정한 금융화 체제에 따른 발전적인 위기일 수 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생태학적 가닥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완전히 극복해야 하는 뭔가 다른 진정한 신기원적 위기에 마지막으로 직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다.

 

여기에는 글로벌하고 민주적인 생태사회주의와 같은 매력적인 것들이 포함된다. 물론,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가치 법칙"을 해체하고, 착취와 수탈을 폐지하고, 상품 생산과 보살핌,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민주적 계획과 시장,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 사이의 관계를 재창조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우리의 가능성 스펙트럼의 "좋은" 끝이다. 다른 쪽 끝에는 정말 끔찍한 몇 가지 비자본주의적 결과가 있다. 전쟁을 벌이는 독재자 또는 글로벌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의 대규모 사회적 퇴보이다. 물론 세 번째 가능성도 있다. 위기가 전혀 해결되지 않고, 인식할 수 있는 인간적인 것이 거의 남지 않을 때까지 사회적 자기 살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계속 갈아 없어지는 것이다.

 

말했듯이, 나는 여기서 어떤 예언도 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우리의 현재 선택 사항이라면, 우리는 첫 번째 시나리오를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태사회적 변혁 프로젝트 이면의 잠재적인 모든 해방적 힘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대항 헤게모니적 블록을 건설하기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뉴 레프트 리뷰>의 최근 기사에서, 나는 이 전략의 개요를 설명하고 그 이면의 생각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내 생각은 그러한 프로젝트가 반자본주의적이고 초환경적transenvironmental인 것으로 가장 잘 상상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구조적 경향을 내재하고 있고 기후 변화의 주요 사회역사적 원동력이기 때문에 반자본주의적이어야 한다.

 

체제의 생태적 모순은 다른 모순(경제적, 정치적, 사회적)과 불가분하게 얽혀 있고 그것들로부터 추상화되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초환경적이다. 결과는 녹색 활동가들이 노동권, 삶 및 식량 안보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공동의 대의(돌봄 노동의 재평가와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공공적 투자/ 이민자 추방 및 배제에 반대/ 토지 강탈, 권위주의, 인종-제국주의적 억압에 반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러한 초환경적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사회적 병폐가 하나의 동일한 사회 시스템, 즉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 체제는 다양한 연합된 동업자들의 공동의 적으로 간주될 수도 있고 그들의 다양한 활동들의 공동의 초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반자본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면, 현재 분열된 생태정치적 흐름은 서로 힘을 합치고 그리고 “비환경적” 사회운동과 결합할 수 있다. 나는 요즘 흔히 상충되는 탈성장, 환경 정의, 그린 뉴딜을 위한 운동을 생각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세 가지 각각은 진정한 통찰력과 무기력한 사각지대를 모두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흐름들이 초환경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대항 헤게모니의 블록으로 재배치된다면 통찰력이 증폭되고 사각지대가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경우에, 그린 뉴딜과 같은 그들의 특정한 프로그램은 우리가 "민주적 생태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보다 급진적인 변화로 가는 도중의 "과도기 사회주의 전략"(오래된 트로츠키주의 공식을 사용한다면)으로서 그 자체로 목적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정확히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사람들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요즘 하고 있는 일은 다양한 차원에서 현재 위기의 역동성을 명확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활동가들과 잠재적 활동가들이 그들의 다양한 관심사를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지도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편적이고 분절된 채로 남아 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러한 다양한 관심사가 전체적 그림에서 어디에 어떻게 들어맞는지에 대한 감각을 전달하고자 한다. 또한, 경쟁하는 사회세력 간의 운동 상태를 그려낸다. 나의 더 큰 목표는 실천적이다. 위기의 해방적 해결을 위해 이러한 세력과 관심사가 가장 효과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방법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 당신이 묘사하는 것은 포퓰리즘 전략처럼 들린다. 사회는 본질적으로 부분적인 이해관계나 관심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전해야할 과제는 이러한 다양한 이해관계를 일관된 정치적 주체로 통합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또한 과거에 좌파 포퓰리즘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지만, 최근의 사건들은 그것이 운동으로서 정치적 생존능력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다. 반면 우익 포퓰리즘은 실적이 더 나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이후로 포퓰리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99퍼센트와 1퍼센트’라는 본질적으로 포퓰리즘적인 수사학에 매우 큰 인상을 받았다. 계급 분석의 정확성과 분석적 엄밀함은 부족하지만 즉시 이해할 수 있고 정서적으로 강력했다.

 

이 언어가 미국에서 얼마나 빨리 유행했는지는 놀랍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억만장자 계급"을 위해 "조작"된 "시스템"에 대해 말한 버니 샌더스에 의해 크게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조작된"이라는 단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나중에 도널드 트럼프가 이 단어를 차용하고 또 다른 변형을 가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어쨌든 미국의 정치 생태계에 포퓰리즘 언어의 분출은 매우 극적이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중대한 균열을 예고했을 뿐만 아니라, 집단적 정치 범주(예컨대 "여성")를 훨씬 더 작고 각개분산적인 단위로 분해하는 데 관여하는 일부 "좌편향" 서클에 만연한 특수한 수사학을 깨뜨렸다.

 

"99%" 대 "1%"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의 반대 방향으로, 더 큰 집단을 향했다. 그것은 나에게 미국에서 가장 중대한 좌파 연합을 구축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마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좌파가 파편화를 극복하고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결들에 초점을 맞춘 분석을 향한 갈망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트럼프가 포퓰리즘적 미사여구를 도용한 것은 좌파 포퓰리즘과 우익 포퓰리즘을 구별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만들었다. 그들 각각은 누가 위에 있고 누가 밑에 있으며, 누가 누구의 목에 발을 얹고 있는지, 사회적 위계의 지도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 두 지도는 확연히 다르다. 좌파 포퓰리즘은 사회를 두 그룹으로 나누는 이분법이다. 대다수의 뒤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소규모 과두제 엘리트 - 따라서 "99%"를 "1%"에 대항하여 동원하는 프로젝트이다. 대조적으로 우익 포퓰리즘의 지도는 사회를 세 그룹으로 나누는 삼자 구도이다.

 

맨 위에는 "피를 빨아먹는" 엘리트들이 앉아 있고, 맨 아래에는 "무임승차를 하는" 하층 계급들이 앉아 있으며, 그들 사이에 끼여 양쪽에 의해 먹잇감이 되고 있는 고결한 "국민들"이 앉아 있다. 그래서 우익 포퓰리즘은 1%와 동시에 이민자, 유색인종, 성소수자들 등등을 표적으로 삼는다. 이것은 사회와 정치적 프로젝트에 대한 매우 다른 그림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우익 포퓰리즘이 그들의 적들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용어로 정의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부 트럼프 지지자들의 어법으로 볼 때, 맨 위의 사람들은 "국제 유대인 소아성애자 일당"인 반면, 최하위층의 사람들은 "멕시코인 강간범"이거나 "게으른 흑인"으로, 양쪽 끝이 문화적인 면에서 구체적으로 특징지어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좌파 포퓰리즘은 적을 기능적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사회 체제에서의 그것의 역할, 즉 "월 스트리트" 또는 "억만장자 계급"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물론, "월 스트리트"가 "유대인 은행가"로 변형될 때처럼 기능적 용어들이 정체성 용어로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두 포퓰리즘 사이에는 절대적인 벽이 없으며 좌파는 닥칠 수 있는 미끄러짐을 막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잊지 말자. 좌파 포퓰리즘의 이분법적인 “기능적” 사회학은 우파의 삼자 구도적 정체성주의보다 진실에 훨씬 더 가깝다. 금융은 실제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대다수를 수탈하는 반면, "하층계급"은 실제로는 "국민"을 잡아먹지 않는다.

 

다음 문제는 그렇게 정의된 좌파 포퓰리즘이 승리를 거두고, 영향력을 넓히고, 그것의 사회적 비판을 심화하고, 더 급진적으로 변모하는 과도기적 과정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투쟁의 과정에서 사람들을 교육하고, 그들이 싸우고 있는 체제를 명확히 하고, 그 체제가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내 생각에는 좌파 포퓰리즘이 계급투쟁에 접근하기 쉬운 진입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저는 그것이 "체제"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을 창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덜 확신한다. 나는 그들이 그 마지막 요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일부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고 봐야 한다.

 

지금까지 말했듯이, 나는 좌파 포퓰리즘이 우파 라이벌에 비해 지금까지의 기록이 인상적이지 않다는 당신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확실히, 우익 포퓰리즘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유지하는 데 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일부는 미국의 빌과 힐러리 클린턴, 영국의 토니 블레어,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같이 표면상 사회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당과 지도자들이 신자유주의를 도입하거나 강화하는 데 있어서 많은 국가에서 행한 수치스러운 역할에 있다.

 

두 가지 포퓰리즘은 모두 그것의 몰락에 대응하여 발전했지만 그 좌파적 변종은 그러한 정당들에서 이탈해버린 노동계급 기반을 다시 되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우리에게 금융화를 가져온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어쨌든 다른 사용 가능한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좌파가 현재 우익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노동계급의 일부를 당겨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섬세한 작업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그 집단 내에서 열성적인 구성원들인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1인치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다른 한편, 우리는 후자가 트럼프나 자이르 보우소나루에 대한 노동계급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를 구성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면 이미 게임은 끝이다. 우리는 대신 좌파 포퓰리즘을 통해 그 유권자들 중 상당 부분을 좌파가 당겨올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얼마 전 룰라나 버락 오바마와 같은 인물에게 투표했지만, 그들의 희망이 실망으로 변하면서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좌파 포퓰리즘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정당한 불만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들 뒤에 있는 것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누가 무엇을 조작하고 있는지, 멸시받는 하층계급에 대한 초점이 왜 막다른 골목인지, 그들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정당들을 지지한다면 결코 진짜 범인들(글로벌 자본과 글로벌 금융)을 무찌를 만큼 충분히 강력해질 수 없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즉, 지금 시점에서 우리의 최선의 희망은 시기에 따라서 어떤 새로운 유형의 사회주의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좌파 포퓰리즘인 셈이다.

 

* 계급투쟁은 좌파 포퓰리즘에서 사회주의 운동으로의 진화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어떤 사람들은 다수의 적대를 상징적인 “인민”으로 통합하는 포퓰리즘적 강조가 사회주의 정치와 완전히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는 적어도 노동계급 권력을 "구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즉 노동자가 아마도 생산자로서의 지렛대를 사용하여 물질적인 정치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생산 지점에서 시작하는) 사회주의 정치의 버전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소위 말하는 "경계선boundary 투쟁"에 대한 당신의 생각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에 대한 당신의 확장된 개념의 맥락에서 "경계선 투쟁"이 계급투쟁의 모습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게 공정한 평가일까?

 

적어도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와 주류적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 내에서는 역사적으로 계급투쟁을 좁은 의미에서, 즉 공장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들의 착취를 통해 추출된 잉여가치의 비율과 분배에 대한 생산지점에서의 투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 투쟁들은 공장 문 너머로 확장되고 정치적 차원을 발전시키며 더 나아간 싸움터에서 다른 근거들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러한 계급투쟁의 이미지는 대체로 산업 환경에서 본질적으로 임금 노동과 관련된 것이라는 매우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계급투쟁의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을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Chantal Mouffe and Ernesto Laclau가 말하는 "계급 본질주의"에 맞서는 것으로 이끌었다. 그러한 토론에서, 사람들은 계급투쟁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종류의 투쟁은 아니며, 그것이 사회를 어떻게 정의로운 비전으로 구성할지를 독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계급 본질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든 형태의 억압과 불의를 명명하는 데 독점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의존적인 노동과 다양한 형태의 억압이나 지배에 대한 관습적으로 정의된 계급투쟁의 매개변수들에 맞지 않는 엄청난 투쟁들이 존재하던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입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계급투쟁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하는 비계급 투쟁을 승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계급투쟁에 대한 그들의 좁은 정의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대화의 앞부분으로 돌아가 보면, 계급투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가 논의하던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개념이다. 자본주의가 단순한 '경제'가 아니듯 ‘계급’도 생산지점의 투쟁만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이해하는 자본주의가 임노동을 착취해 잉여가치를 축적하는 매우 특수한 현장들이 성립하는 데 필요한 온갖 배경 조건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이 체제와 그 구성 방식을 이해하는 데 사회적 재생산 역시 [상품 생산 못지않게] 동등한 필수 요소라는 사실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자연, 공공재, 규제 능력, 법적 형식에 대해 같은 말을 한다면, 그러한 것들에 대한 투쟁도 반자본주의적 투쟁이거나 최소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수적 요소에 대한 투쟁일 수 있다. (비록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조절될 때 계급투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투쟁은 사실 역사적으로 계급투쟁의 일부였다. 그것은 노동운동의 강력한 가족임금 요구의 이면에 깔린 것이었다. 그 요구는 고용의 조건에 대한 기본적 투쟁이자 사회적 재생산과 가정 생활의 조건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것은 여성들에게나 가족 임금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고 여겨지는 노동계급의 부문들에게 항상 좋은 해결책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우리가 계급투쟁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매우 빠르게 복잡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계급과 계급투쟁을 좀 더 포용적인 방식으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다만 동시에 계급투쟁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구분하는 데는 상당히 신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특별한 우려를 가지고 이 말을 한다. 우리가 맞서고 해체해야 하는 매우 거대하고 견고한 권력들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광범위한 동맹을 촉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투쟁들이 계급투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먼저 언뜻 보기에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 안에 있고, 우리는 모두 같은 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길을 택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관점을 채택하고 따라서 계급투쟁과 반자본주의 투쟁에 대한 확장된 관점을 채택한다면, 그러한 투쟁이 즉각적으로 조화되지 않는 방식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이것은 정치적인 일이며, 참으로 고된 일이다. 이것은 우리를 좌파 포퓰리즘의 아이디어로 돌아가게 한다. 이러한 투쟁이 어떻게 서로 맞물리며, 이를 구성하는 특정한 방법이 다른 접근 방식을 피하게 하고 불필요한 제로섬 게임을 만드는 경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경계선 투쟁’을 설명할 때 나는 때때로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관점을 소개한다. 폴라니는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가 ‘자기 조절적 시장’(우리는 아마 단순히 경제라고 부르는)이라고 부르는 것과 사회 사이의 경계 투쟁에 정말로 집중했다. 그 접근법에 있어서 흥미롭고 유익한 것은 그 싸움이 단지 어떻게 잉여가치가 분배될 것인가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무엇이 삶의 문법을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나아가 주어진 공동체에서 자본이 멋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서 누가 실제로 삶의 문법을 형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의문을 제기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는 정치적 의제에서 은밀히 제거되고 우리 등 뒤에서 자본과 자본 축적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위임된다. 경계적 투쟁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분배의 문제를 넘어 사회생활의 문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계적 투쟁은 우리가 사회와 자연, 유급 노동과 지역 사회 및 친족 관계에 참여하는 것 등과 관련된 기타 활동 사이에 경계를 긋는 지점에 실제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시장이 작동할 수 있는 합법적인 경계는 무엇인가? 사고 팔 수 있는 합법적인 물건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 경계적 투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요점은 이러한 것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 논쟁되어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계급투쟁의 대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은 때때로 경계적 투쟁의 형태를 취하고, 경계적 투쟁은 - 일이 잘 풀릴 때 - 때때로 계급 투쟁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기사 등록 20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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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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