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삶 만들기 인가, 죽음 만들기 인가?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

번역: 두견

 

팬데믹이 드러낸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모순에 대해 분석하는 이 글은 아직 오미크론 변이가 등장하기 전에 주요 국가들에서 ‘위드 코로나’가 시작되던 지난 10월초에 발표됐다. 이 글의 필자인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고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발전시키며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이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여성과 일: 페미니즘, 노동, 사회적 재생산>(Women And Work: Feminism, Labour, and Social Reproduction - Pluto, 2020)의 저자이다.

 

출처: https://www.midnightsunmag.ca/life-making-or-death-making/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모든 위험을 경고하면서 "글로벌 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한 지 21개월이 지난 오늘, 대부분의 국가 경제가 마비된 지 19개월 후; 그리고 네 번째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물결이 지나가고, 자본가들은 세계 경제가 6%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소식에 잠에서 깨어난다.

 

캐나다 및 기타 지역의 주식 시장은 대체로 반등했으며, 의료 공급 업체, 온라인 소매업체, 스트리밍 서비스 및 식료품점과 같은 특정 부문은 전염병으로부터 손쉽게 많은 이익을 얻었다. 미국 은행들은 "기록적인 수준의 수익"을 낼 준비가 되어 있는 반면, 캐나다 은행들은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2억 3800만 명이 COVID-19에 감염되어 480만 명이 사망했다. 이 공식 수치는 이 비극의 실제 규모를 극적으로 과소평가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물론 사상자 대부분은 우선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만든 노동계급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불균형적인 대다수는 사회에서 취약한 사람들, 즉 장애인, 아주 어린이나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다.

 

분명히 자본주의 경제는 이 치명적인 전염병을 이겨내는 법을 배웠다. 비록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일부 비평가들의 경고처럼 오늘날의 경기 회복이 저조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해도, 그 시스템 전체가 붕괴되지는 않았다. 그 붕괴가 임박한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팬데믹이 명백히 밝혀주었듯이 경제의 건강과 노동자의 건강 사이의 상충 관계에서 자본주의는 전자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삶보다 죽음을 편든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정기적으로 개인적 자유의 체제로 옹호되지만,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이윤 창출 체제이다. 그리고 이윤은 충만하고 의미 있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좌절시키고 어떤 사람들의 삶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모욕하고, 감시하고 통제함으로써만 창출될 수 있다. 즉, 이윤 창출을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

 

이 폭력적인 과정에서 국가는 충실한 파트너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람들을 강탈하고 착취할 수 있는 자본의 능력이 가져오는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노동자의 삶 만들기 활동을 규제한다. 그리고 팬데믹은 국가 주도의 사회적 재생산 체제 또는 "위로부터의 삶 만들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어떻게 피억압자의 취약성을 일상적으로 강화하면서 삶에 대해 양면적이고 불균등한 지원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무수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더 고무적인 다른 사례를 제공한다. 즉, 평범한 노동계급 사람들이 개인과 지역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자신들의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통제를 확대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조직하는 "아래로부터 삶 만들기"의 사례이다.

 

하지만 폭력과 죽음을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체계적이기 때문에 - 즉,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강탈과 축적의 논리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 아래로부터의 삶 만들기는 항상 위로부터의 삶 만들기와 긴장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이 핵심 특징과 씨름하는 것은 사회주의 좌파가 의료, 교육, 주택 등을 둘러싼 오늘날의 많은 투쟁들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반자본주의적 저항이 우리의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을 설정하는 국가의 권력에 대항하려는 노력에 기반할 수 있고 구축되어야 함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폭력적인 자본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모든 투쟁에서 반억압 정치를 중심에 두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팬데믹 시대의 국가와 사회적 재생산

 

지난 2년간 자본주의 회복력의 비밀은 간단하다: 수조 달러와 두 가지 유형의 국가 지출. 첫째, 세계 각국 정부는 국가가 강제한 폐업으로 인한 손실을 완화하기 위해 "양적 완화"(주식 및 채권 시장에 대한 현금 투입)와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보조금 지급 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배계급은 기업주들에게 돈을 퍼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자본주의의 생존에는 두 번째 형태의 국가 지출이 필요했다: 사회적 재생산을 지원하는 돈, 노동자들을 일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게 유지하는 사람들과 제도, 그리고 다음 세대의 노동자들을 만들고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삶 만들기에 대한 지출이 지배계급에 의해 촉구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 중에서도 국제 자본 흐름의 강력한 규제기관이며 전통적으로 자본주의 회계장부에서 죽음 만들기를 결정하는 쪽에 있었던 재정적 보수주의 기관인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해 승인되고 장려되었다.

 

그래서 2020년 봄, 우리는 국가 주도의 사회적 재생산 체제에서 극적인 방향전환을 보았다. 공공 주택, 학교, 병원, 도서관 등의 공동화라는 수십 년간의 긴축 정책 이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나라마다, 특히 부유한 세계에서만은 아니었지만, 정부가 노동자들의 삶을 지원하기 위해 공격적인 조치를 취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 장비를 생산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고, 임시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으며, 퇴거에 대한 중단을 명령했으며, 심지어 수감자들을 감옥에서 석방했다. 그리고 많은 부유한 국가들은 실업급여를 확대하고 새로운 비상수당을 고안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직접적인 구제를 제공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자. 평범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노력에 대한 이 놀라운 지원은 치명적이고 통제 불능의 바이러스를 다룰 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케인즈주의적 조치는 주로 기업이 노동자와 가족들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야만 경제가 거의 멈춘 상태에서 회복되기를 희망할 수 있고 이윤이 지배계급의 금고에 더 빨리 들어가기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노동자의 생활을 부양할 수 있었던 정도는 나라마다 크게 달랐다. 세계 제국주의 위계 구조에서 한 국가가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많은 것이 달려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부채 상환으로 사회적 지출이 희생되었던 막대한 부채를 가진 국가들은 보건의료 시스템이 파괴되던 상황에서 팬데믹에 직면했다. ‘주빌리’Jubilee 채무 캠페인에 따르면 2019년 64개국이 공공의료에 지출한 비용보다 국제 채무 상환에 더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

 

이 나라들과 빚을 지고 있는 다른 많은 나라들에게, 사회복지를 확대하라는 IMF의 촉구는 훨씬 더 깊은 빚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수십억 달러가 더 가난한 나라들로부터 더 부유한 나라들의 국가 계좌, IMF나 세계 은행과 같은 세계적인 채권자들, 그리고 골드만삭스와 같은 개인 채권자들에게로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이는 지난해 미국 은행 부문의 "기록적 수준의 수익"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엄청난 부채 수준은 COVID-19에 대한 국가의 대응을 심각하게 제한할 뿐만 아니라 서 더 가난한 국가들이 백신 예방 접종 라인의 끝에 남아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장 부유한 정부조차도 인간의 삶 보호를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의 COVID 구호 조치는 부적절하고 일시적이며 부분적임이 드러났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매우 분명하게 본다.

 

"필수"로 간주되는 작업장의 매우 가변적인 안전 지침들은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 캐나다에서는 오일샌드 노동자, 정육업자, 농장 이주노동자들이 재택근무 정책과 긴급소득 지원에서 제외되어 특히 높은 대가를 치렀다. 전 세계 정부들은 "과잉" 인구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구제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감옥에 수감된 사람, 장기 요양 시설 거주자, 이주 노동자 및 미등록 노동자, 가사 노동자들.

 

놀라울 것도 없이 이들 중 다수는 일반인보다 더 쉽게 COVID에 굴복 당했고, 그들 중 다수는 바이러스의 전파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증가하는 국가 폭력과 규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정부가 경제를 일찍 "개방"하려는 경향은 보건의료 및 개인 지원 노동자들이 이미 직면한 위험을 가중시키면서 미용사, 이발사, 보육교사, 교사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을 증가하는 위험에 처하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그룹들이 COVID 감염과 사망에서 불균형적으로 대표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부가 일반적으로 부자에 대한 세금 인상을 거부하고 (자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으로) 적자를 줄이기 위해 전환함에 따라 많은 소득 지원 및 보호가 취소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여성화, 인종화된 여타 억압받는 사람들을 특별한 위험에 빠뜨렸다. 팬데믹 시대의 위로부터의 삶 만들기는 분명히 이러한 삶들을 소모품으로 간주한다: 다른 생명들과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될 수 있고 또 희생되어야 하는 것으로 말이다.

 

슬프게도 이 모든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논리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재천명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폭력과 죽음 만들기가 자본주의의 체계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심장부에 있는 모순, 삶을 만드는 것과 가치를 만드는 것 사이의 모순의 결과이다(여기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가치의 생산: 이윤의 원천).

 

체계적 폭력과 모순들

 

전세계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난 팬데믹의 처참한 실정은 근본적으로 바이러스를 막을 재력이나 자원의 부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잘못되고 배려심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 경제나 정부를 이끌기 때문도 아니다. 비록 한 나라의 리더십과 부는 어느 정도 차이를 만들 수 있고, 정부의 안일함과 부정의 터무니없는 예들이 넘쳐나지만 (트럼프, 모디, 보우소나르, 또는 알버타의 주지사인 제이슨 케니 등) 더 높은 수준의 공공부문 지출과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더 나은 결과와 연결하는 신뢰할 수 있는 패턴은 없다.

 

예를 들어, GDP의 백분율로 계산해서 전염병 구호에 다른 어떤 국가보다 많은 비용을 지출한 캐나다는 인구 100만 명당 코로나19 사망자로 순위가 매겨진 160개 국가 목록에서 중국, 토고, 아제르바이잔, 도미니카 공화국, 태국 등을 제치고 71위를 차지했다. 비록 다른 국가들에서는 데이터 수집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가 어려울 수 있지만 말이다.

 

국가가 노동자의 사회적 재생산에 대해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며 부적합한 지원 이상의 것을 제공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마르크스에 의존한다. <자본> 제1권에서 마르크스는 기계나 자본가가 아니라 시장에서 상품을 교환함으로써 어떻게 이윤을 창출하는지를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가치와 이윤은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고 사장들에게 파는 살아있는 인간 노동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것은 노동자의 생명과 육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의 노동력’이다. 따라서 노동력의 생산과 재생산, 더 나아가 인간 생명의 확장은 자본주의의 실존적 전제 조건이다.

 

인간의 삶 없이는 가치도, 이익도, 자본도, 자본주의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가진 노동자들의 일상적, 세대적 (재)생산을 자본가들이 직접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관찰했다. 인간을 만들어내는 아마존이나 포드 자동차회사는 없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Social Reproduction Theory, SRT)은 이러한 관찰을 기반으로 하여 대다수 노동자가 자신의 재생산 수단(음식, 주거, 의복, 교육, 의료 등)에 두 가지 방법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임금으로 번 돈으로 그것을 살 수 있다. 또는 부에 대한 세금을 통해 지불되는 국가 서비스의 고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경쟁 체제이다. 자본가들이 번창하기 위해서, 혹은 심지어 살아남기 위해서, 지배계급은 끊임없이 그 임금들을 제한하고 그 세금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그들이 가치 생산을 극대화하고 수익을 창출하며 부를 계속 축적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역설 위에 세워졌다. 이윤을 창출하려면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노동력(따라서 그것을 짊어지는 노동자)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노동자들이 그들이 삶을 영위하는 수단, 즉 풍요로운 토지, 임금, 세금으로 지원되는 사회 서비스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고갈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압력 때문에 생명(및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작업은 임금이 없거나 저임금인 경향이 있다. 이것은 차례로 시스템이 번창하려면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예를 들어 유급 및 무급 가사 노동자, 의료 및 교육 노동자, 운송 노동자)에 대한 규율을 논리적이고 필요하게 만든다.

 

그 규율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관습들에 적응하여 가족과 사회 생활의 규율적 측면을 수용하고 재생산하는 우리 대부분에 의해 깊이 내면화된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자기 규율에만 의지할 수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종종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식민주의 등을 악화시키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노동계급의 삶 만들기를 규제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을 시행한다.

 

자본주의를 삶보다 죽음을 앞세운 체제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동역학이다. 가치 창출은 인간의 삶을 필요로 하지만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위해 노동자의 삶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가치를 부여받고, 지원받고, 풍요롭게 될 것이 아니고 될 수도 없다.(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노동자는 자본을 위한 “인격화된 노동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기시킨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삶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살아있는 노동력이 살아있는 인간에게 붙어 있는 것은 불편한 것이다. 자본가는 체제가 낳는 이 역설을 직접 관리하지 않는다. 많은 사회적 재생산 작업이 상품화되더라도(예를 들어서 식당 식사, 사교육 및 의료 돌봄과 관련된 노동) 훨씬 더 많은 삶 만들기 노동은 상품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공공 부문 기관뿐만 아니라 가정과 공동체들에서 수행된다.

 

그리고 그것이 공적자금 지원을 받는 교사, 관리인, 간호사 및 개인 지원 노동자이든, 집에서 요리하고 청소하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무임금 어머니이든, 추방을 막기 위해 연좌농성을 조직하는 무임금 지역 사회 활동가든, 그러한 삶 만들기 노동은 결코 자본가, 즉 노동에서 직접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는 사업주에게 즉시 의존하거나 조직돼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이 사회적 재생산을 직접적으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간접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돕는 강력한 공모자들이 있다. 모든 나라에서 지배계급은 삶 만들기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국가가 규제하고 규율할 것을 요구한다. 학교 커리큘럼, 시민권 자격, 주택 정책, 치안 및 국경 통제, 의료돌봄 접근성, 결혼 및 상속에 관한 법률: 이것들은 모두 국가가 주도하는 사회적 재생산 체제의 모든 측면들이다. 아래로부터의 반발이 없는 한 위로부터의 삶을 만드는 것은 자본의 두 가지 긴급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경향이 있다.

 

(1) 많은 사람들을 위한 삶 만들기를 평가절하하고 규율함으로써 사회적 재생산의 비용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회적 분열과 억압을 강화할 필요성; (2)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 기꺼이 팔고자 하는 규율있는 노동자의 창출을 보장할 필요성.

 

즉, 삶을 지원하기 위한 국가의 조치는 단순히 또는 주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대비에 관한 것이 아니다(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신경 쓰지 말라!). 오히려 그들의 중심 목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만드는 관행에 있어서 "너무 많은" 개인적 및 집단적 통제를 행사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것의 목표는 사회를 규율하고, 감시하고, 치안하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특히 공공장소에서 인종화된 퀴어, 트랜스젠더, 원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경찰의 만행이나 교회와 의료 당국이 여성의 몸을 규제하고 국가-이성애-가부장적 가정 규범을 시행하는데 한 역할을 생각해 보라. 이것들은 수 세기 동안 억압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재생산을 억제하고 비하해온 폭력적인 국가 승인 규율의 두 가지 예시일 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체계적 폭력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 만들기와 가치 창출 사이의 모순은 자본주의 축적 논리에 내재되어 있고, 그 모순에 대한 국가의 관리는 모든 신체에 대한 폭력을 영속화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특히 사회적으로 이미 배제된 집단의 구성원인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이것이 정부들이 지난 1년 반 동안 도입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전염병 구제책이 불충분하고 일시적이며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것이 이러한 조치들이 기존의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보다는 강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이유이다. 정부가 삶 만들기를 지원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도 이 역설을 극복할 수 없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죽음 만들기를 넘어서

 

팬데믹은 죽음 만들기로 나아가는 자본주의의 경향보다 더 많은 것을 밝혀준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와 억압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을 형성하는 데 아래로부터의 삶을 만드는 실천과 공간이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밝은 빛을 던져준다.

 

우선, 팬데믹 기간 동안 삶을 만들기 위한 평범한 노동자들의 작업은 국가와 자본의 태만을 상당히 보상해 주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보육, 식료품 및 준비된 식사 배달, 구급차 운행 등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상호 부조 네트워크를 조직함으로써 그 공백을 메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래로부터의 대안적인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 노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개별 가구를 넘어 공동체의 요구 사항을 평가하고 이를 충족하는 실용적이고 협력적인 방법을 개발한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음악, 게임, 연극 등과 같은 예술적 창의성의 새로운 표현을 통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팬데믹의 일반적인 노동 리듬 중단을 사용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 삶 만들기는 팬데믹 기간 동안 사회적 재생산의 자원과 노동의 격차를 대체하는 것을 넘어서, 애초에 이러한 격차를 만든 권력자들에 대항하여 사장들과 지역 관료들과 대립적인 방식으로 맞서고 있다. 외부의 이동식주택 차량들의 지원을 받으며 수감자들은 안전한 수감 시설을 요구하는 폭동을 일으켰고, 주거 활동가들은 임대료 파업에 돌입하고 건물을 점거했으며,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안전하지 못한 학교 재개장에 항의했다.

 

그리고 교사부터 버스 운전사, 간호사, 쓰레기 수거업자까지 전 세계의 유급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들이 위험수당을 요구하고 안전하지 않은 관행을 거부하기 위해 파업에 돌입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일반적으로 시위하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삶 만들기 활동들을 확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 왔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권력에 의해 세워진 사회적 억압에 도전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그 도전은 거의 항상 저항운동에 암묵적으로 존재하지만 종종 명시적인 방식으로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더 나은 간호 조건은 보건의료 서비스를 불균형적으로 사용하는 인종화되고 여성화되고 장애인인 사람의 삶을 개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5월 25일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에 대한 또 다른 경찰 살인으로 촉발된 2020년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에서 이를 폭발적으로 목격했다. 이러한 시위는 특히 흑인과 원주민 및 기타 유색인종에 대한 위로부터의 가장 강압적인 사회적 재생산의 힘 중 하나인 경찰에 대해 반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찰의 예산을 삭감하고, 그것을 우리 사회의 필수적인 삶 만들기 제도와 관행에 투입하자는 폐지론자abolitionist들의 요구는 우리의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을 둘러싼 투쟁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부름은 미국에서만 2,600만 명(그리고 국경을 넘어서 더 많은)의 다인종 봉기에 의해 응답되었다. 사람들은, 폐지론자 조직인 ‘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의 2009년 성명에 멋지게 요약된,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에 대한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통제의 비전에 영감을 받았다.

 

“우리가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함께 모여 서로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어떨까?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며,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를 서로에게 제공하고, 공동체의 자기결정권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경찰에 의존하고 배치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에서 진정한 안전을 만들기 위해 이것을 수행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부정한다.”

 

이 급진적인 반인종주의 운동에 대한 놀라운 지지는 상당한 정도로 팬데믹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팬데믹은 자본주의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삶 만들기보다 가치 만들기를 우선시하면서 여타 사회적 억압들을 지지하고 강화하는 냉혹함에 대해 그 밝은 빛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지난 19개월 동안 사람들이 이 현실에 대해 "깨어난"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많은 수준에서,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전염병 밖에서도 투쟁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국가가 그들의 필요보다 "경제"를 우선시한다는 것을 안다.

 

오늘날의 차이점은 팬데믹으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을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고 스스로 조직화해야 한다고 느끼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흔히 그러한 조건을 정의하는 자본과 국가의 힘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한 집단의 자기 조직화는 다른 집단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자본주의 폭력에 대한 집단적이고 전투적인 대응이 더 실행 가능하게 되었다. 슬프게도 적어도 미국에서는 정치적 에너지와 자원을 지배계급의 두 정당 간의 선거로 돌린 덕분에 저항 세력이 상당 부분 해산되었다.

 

하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늘날 좌파는 불씨를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불을 붙여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놀라운 반격 기간으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불씨를 샅샅이 뒤져야 한다. 우리가 본 것은 살기 위한 투쟁(문자 그대로 총에 맞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한 것)이 노동계급 전체에 강력하게 반향을 일으켜,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 자본주의 질서를 뒤흔들기 위한 사람들의 자신감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간에 대한 더 큰 민주적 통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과 사회적 재생산의 실천은 외부로 확산될 수 있는 독특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삶을 만드는 일이 인간의 욕구, 공동체의 욕구, 즉 자본주의적 노동 조직화가 체계적으로 거부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사회에서, 우리가 아무리 많은 상호 부조나 협력 기구를 만들더라도, 아래로부터의 삶을 만드는 것은 국가가 주도하는 사회적 재생산의 격차를 완전히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국가가 살아남는 한 우리 자신의 생존은 위태로워질 것이고, 어떤 사람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좌파가 체제의 대안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을 지원하고 함께 투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가능하다면 어디에서든 사회주의자들은 우리가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폭력의 체계적 성격을 강조해야 하며, 한 집단의 이익을 다른 집단의 이익과 대립시키려는 사회운동 내의 경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투쟁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촉진하고 자본주의 권력에 맞서는 데 필요한 아래로부터의 힘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작업이 정확히 어떻게 생길지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모든 공간을 가로지르는 공동체, 거리, 영리기업에서 파업과 시위를 조정하는 것이 포함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본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는 임금 노동자는 출근할 때 그들의 삶을 뒤로 남겨두고 가지 않는다. 최근에 우리는 우리의 신체와 삶에 대한 더 많은 통제력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한 작업장 행동을 촉발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높은 수준의 반(反)인종주의, 생태주의 및 페미니스트적 의식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그 회사의 COVID 정책, 인종주의, 환경적 무책임에 주의를 촉구하기 위한 아마존의 '기후 정의를 위한 직원들'의 "병가"; 구글에서의 성희롱에 항의하는 "진정한 변화를 위한 작업 거부"; 또는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M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미국의 29개의 항구를 폐쇄한 부두 노동자들.

 

사회적 재생산 투쟁은 자본주의 작업장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저항의 순간들을 연결해야만 자본이 무너질 수 있고 우리는 함께 죽음이 아닌 삶을 촉진하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기사 등록 20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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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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