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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1917년에 레닌의 네 가지 도박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1. 14.

라스 리Lars T Lih

번역: 두 견

 

 

혁명을 이루기로 한 볼셰비키의 결정은 국제 혁명, 소비에트 민주주의, 농민들의 충성, 사회주의를 향한 진보라는 네 가지 주요 예측 즉, "도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고 라스 T 리는 말한다. 이 글에서 라스 리는 또다시 역사적 기록을 치밀하게 살펴보면서 정설에 도전한다. 라스 리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혁신적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수많은 책과 논문을 쓴 역사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러시아에서 빵과 권위: 1914~1921>(1990), <레닌 재발견: 맥락에서 본 ‘ 무엇을 할 것인가’>(2006) 등이 있다.

 

출처: https://weeklyworker.co.uk/worker/785/the-four-wagers-of-lenin-in-1917/

 

 

나는 1917년에 레닌이 한 '네 가지 도박wager'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들은 국제 혁명, 소비에트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 그리고 내가 '농민의 충성심followership'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도박이다.

 

먼저 1917년에 그것들을 살펴본 다음 레닌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평가할 것이다. 1918년 말에서 1919년 초까지 그는 대부분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여전히 매우 확신하지만, 몇 가지 방법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나는 1922-23년과 레닌의 마지막 저작으로 넘어갈 것이다. 레닌이 여기에서 일종의 불안정한 종합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용하는 '도박'이라는 용어는 어떤 식으로든 모험적이거나 위험한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겠다. 그것은 강력함에 대한 도박, 내기로 알려진 표트르 스톨리핀Pyotr Stolypin의 농민 정책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건이 특정한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예측에 바탕을 둔 특정한 결과를 낳기 위한 정책을 말한다.

 

나는 이 강연에서 카우츠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겠지만, 1904년의 카우츠키 인용구로 시작할 것이다:

 

"실천적인 정치인은, 그가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이론적인 사회주의자와 같이 미래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선견지명이 예언의 형태를 취하느냐는 그의 기질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신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할 예기치 않은 요인들이 나타날 것에 항상 대비해야 하며, 그에 따라 자신의 전략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레닌은 예측을 하고 있으며 예측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려고 한다. 레닌이 이 기간 동안 거의 긴 텍스트의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의 근원은 그의 연설이다. 그것이 권력에서 레닌의 역할의 큰 요소였다: 그는 주로 정당이나 공감해주는 청중들에게 연설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큰 메시지를 강조했다.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에 진실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이것은 그의 연설에 반영되었다. 여기에는 휴먼드라마가 있다: 여러분은 그의 고통스러운 실망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의 많은 부분이 다소 친숙할 것이다. 나는 이 강연에서 수정주의자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내가 논쟁적으로 맞서려는 익숙한 프레임워크가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은 1917년, 특히 1918년에 정권이 온건하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시작했지만, 내전 동안에 볼셰비키는 점점 더 급진적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들은 내전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상태로 몰리지만 이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1920년까지 공산주의로의 도약이나 지름길을 택하는 위치에 있는 자신을 본다. 즉, 일종의 광기였다. 그런 다음 크론슈타트Kronstadt는 그들이 고마움을 느껴야할 정도로 정신차리도록 뺨을 때렸고, 그들은 ‘신경제 정책’의 냉정한 절제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 1917년의 레닌과 볼셰비키 측에서는 현실성이 부족했고 심지어 과장된 선동도 있었지만, 그 후 꾸준히 깨어났기 때문에 1920년에는 침울하고 비관적이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저술가들이 주장하는 '기쁨에 도취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국 작가인 아서 랜섬Arthur Ransome은 러시아에 있었고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알고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당시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두 권의 매우 좋은 책을 썼다. <1919년 러시아>와 <러시아의 위기>. 둘 다 ‘신경제 정책’NEP 이전이었고 이런 면에서 매우 가치가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볼셰비키는 경험의 부석pumice stone으로 긁어낸 환상에 이어진 환상을 가졌다." 나는 그것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볼셰비키가 그들의 문제를 과도하게 이론화했다는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이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그림을 가지고 있다.

 

‘10월 테제’?

 

이제 1915년 10월에 레닌이 한 중요한 논평으로 돌아가겠다. 당시 그의 저술 대부분은 유럽 정세에 관한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러시아에 대한 정책을 수립한다. 그는 이 짐머발트Zimmerwald의 좌파 메시지(국제 혁명, 유럽의 사회주의)와 러시아의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그의 열망을 어떻게 결합했는가? 1915년 10월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것이다.” 그는 가능한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을 의미했다.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혁명이 아니라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가능한 한 많은 민주주의적 성과를 얻은 혁명이었다.

 

그런 다음 레닌은 그 둘을 연결하는 시나리오를 스케치한다. 그는 혁명적 쇼비니스트(맹목적 애국주의), 즉 차르가 전쟁 노력을 엉터리로 만들고 있다는 이유로 차르를 제거하려는 사람들을 집권하게 할 반차르 혁명에 반대했다. 그는 비록 그들이 혁명가이자 공화주의자라 할지라도 쇼비니스트들에 반대한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고, 전쟁의 압박으로 좌파에게 향하게 된 소부르주아 농민의 지원을 받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를 위해 분투해야 했다. 이 두 번째 단계는 1905년의 소비에트를 부활시켜 새로운 권력(vlast)의 심장부 역할을 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이 혁명적 독재는 완전한 최소 강령을 수행하며 정의로운 평화를 제안할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제국주의자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이제 볼셰비키를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과 전 세계의 반식민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정당하고 혁명적인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할 것이다. 레닌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아시아와 유럽에서 혁명의 발전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만들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미 1905년에도 증명되었듯이."

 

그래서 우리가 1915년에 여기에서 보는 것은 거의 1917년에 대한 그의 강령이다. 아마도 우리는 4월 테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1915년 10월 테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레닌 자신은 1917년에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볼셰비키가 1915년에 1917년의 사건을 예측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가 러시아로 떠나기 직전에 큰 팡파르 없이 한 변화는 내가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이라고 부른 것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레닌이 러시아를 위한 강령을 묘사한 신중한 방식이었다. 그는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간다는 그런 바유를 사용했으며, 1917년 4월 러시아로 돌아가기 전날에 일어난 일이다.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 이전까지 우리가 민주주의 혁명만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 러시아는 개의치 않고 사회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1917년에 그는 1915년의 세 가지 도박에 더해서 이 새로운 도박을 계속 표현했다.

 

이제 나는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1917년에 레닌이 한 주장의 일부를 살펴보겠다. <국가와 혁명>은 1917년에 쓰여졌지만 1918년이 되어서야 출판되었고, 1917년 레닌의 강령을 평가할 때 종종 지나치게 강조된다. <국가와 혁명>에서 그는 때때로 러시아의 사례로 되돌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지만 유럽 청중에게 연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내가 요약의 근거로 삼고 있는 두 권의 책은 1917년 9월에 작성되었다. <임박한 재앙과 그것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볼셰비키는 국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레닌이 러시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논리를 설명한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차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vlast(러시아어 '권력' 또는 '정부의 권위')를 보유하는 계급의 성격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볼셰비키는 지주, 자본가, 어떤 형태이든 부르주아지와 같은 적들이 권력vlast을 장악하고 있는 한 제국주의 전쟁이 계속되고 경제적 붕괴가 계속되며 급진적인 농지개혁이 계속 연기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들이 집권하고 나로드(인민) 전체를 혁명적 승리로 이끄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해야만 끝날 것이다.

 

그럼 이 4가지 도박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자. 나는 국제 혁명에 대한 도박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할 새로운 말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도 기본이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당신의 마음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과 '농민의 충성심'이라는 다른 두 가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다.

 

당시 레닌의 수사학은 '강박적 비독창성'의 새로운 버전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멘셰비키,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심지어 군주제 지지자들조차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 규제, 토지 개혁, 강력한 정부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계급적 위치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는 <임박한 재앙>의 섹션 제목으로 요약된다: '통제 조치는 취하기 쉽고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통제는 '규제'를 의미한다). 그래서 여러분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위기를 해결하는데 모호함이나 어려움은 없다. 물론 유일한 방법은 권력을 잡는 것이다.

 

여기서의 논리는 부분적으로 내가 '인민의 움바Wumba'라고 부르는 것이다. Wumba는 ‘무기 및 탄약 조달국’Waffen und Munitionsbeschaffungsamt의 독일어 약자이다. 그것이 독일의 무기 및 보급 관료체계였다. 모두가 그것이 얼마나 조직적인지에 놀랐다. 그래서, 1916년에 유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독일이 100~200명의 재벌이나 귀족, 군주제 등의 이익을 위한 약탈 전쟁을 벌이기 위해 6600만 인구의 경제생활을 단일한 중심으로 지휘하고 민중의 에너지를 집중킬 수 있다면, 사회제국주의와 사회평화주의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된 의식적이고 목적이 있는 노동자들이 투쟁을 지휘하면서 인민의 10분의 9, 즉 무산자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럽을 위한 그의 계획은 은행들을 몰수하고, 대중들에게 의존하여, 독일에서 일어난 일을 그들의 이익에 위해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인민을 위한 움바'라고 부른다. 이것을 러시아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레닌은 그렇게 생각했다. 경제 규제 장치가 충분히 있고 은행 시스템이 충분하며 정부 신용 등이 충분하므로, 그는 우리가 단호하게 혁명적 민주주의적 조치를 취하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

 

나는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에 대한 도박에 관해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국가를 기성품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가를 분쇄하는 것에 대한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우리는 국가를 분쇄할 것이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즉, 마르크스주의적 틀에서 그가 의미한 것은 관료제, 군대 및 경찰이었다.

 

즉,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기구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제적 기구들은 보존할 것이다. 아무튼 그 기구의 대부분도 국가의 일부이다. 그래서 그는 이 시점에서 여전히 내가 '경제적 국가 기구'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가 보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 레닌과 다른 볼셰비키의 수사학을 읽을 때 그들은 쉬운 탈출구를 약속하고 있다. '동지들이여, 당신들이 우리를 허락해준다면 이 위기에서 꽤 빨리 그리고 고통 없이 탈출하도록 해 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대중선동에 가까운 어떤 비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닌은 그 결과가 사회주의가 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다소 모호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회주의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또 다른 섹션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주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하고 있지만 그는 그것이 사회주의가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1917년 메시지의 핵심은 '사회주의 혁명을 창조하라'가 아니라 '권력Vlast을 장악하라'였다.

 

앞질러 살펴보면, 실제로 일어난 일은 경제적 기구가 사건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따라서 정확히 그것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억압적 기구는 파괴되지 않았고 강화되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농민의 충성심'은 무슨 뜻인가? 기본적으로 옛 볼셰비키는, 당신을 따라다니며 당신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농민들에 의존해야 한다는 오래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지도력'이 아닌 반대되는 '충성심'이라는 단어를 모욕이 아니라 훨씬 더 칭찬으로 사용한다. 볼셰비키들은 농민들의 능력에 대해 낙관적이며 그들의 충성심에 이런 도박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이해하는 문제이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토지에 대한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들은 반혁명에 맞서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서유럽 농민들의 기록을 보면 이것이 도박, 내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할 것이라는 옛 볼셰비키의 견해인 이 도박의 절반이다. ‘계급 권력과 상류층의 지배를 아직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반쯤 혁명을 일으켰을 뿐이다. 우리는 이 계급을 역사에서 몰아내고 농민들을 배에 태울 것이다. 그들은 반혁명에 대항하여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이것은 다소 재조정된 옛 볼셰비즘이지만, 확실히 그것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그다지 강조되지 않은 새로운 단계가 있었다 - 이것은 내가 그의 연설과 즉석에서의 언급을 보았을 때만 알 수 있었다. 레닌은 농민들이 그들 스스로 사회주의로 옮겨가기를 희망했다. 물론, 만약 농민들이 집단화된 생산형태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여러분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회주의가 러시아에서 독자적으로 가능했는지에 대한 생각에 새로운 왜곡을 가져온다. 이것은 비트로츠키주의적이고 비영구혁명적 논리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접근이다. 트로츠키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 그리고 사실 그의 모든 주장은 그것에 전제되어 있다. 농민들이 그들 스스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반면, 레닌은 이것을 가능성으로 남겨두고 있다: 만약 그들이 전쟁의 비상사태와 파멸의 전망에 의해 강요된다면, 그들은 함께 모여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 좋다고 볼지도 모른다.

 

그러니 1년 전인 1918년 말로 넘어가서 <배신자 카우츠키>라는 책을 보자. 나는 여기서 레닌이 카우츠키에 대해 말한 어떤 것(절반은 욕설과 절반은 '과거의 카우츠키'에 대한 칭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레닌이 혁명에 대한 카우츠키의 비판에 대한 반응으로 쓴 것을 보고자 한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비판에 반대하여 모든 것을 고려하면서 혁명 1주년의 성과를 살펴본다. 그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괜찮다고 말한다. 모두가 우리가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관료주의 기계는 그 기초부터 완전히 부서지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늙은 판사들은 모두 파면되었고, 부르주아 의회는 해산되었다. 그리고 훨씬 더 접근하기 쉬운 대의제가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의 소비에트는 관료들을 대체했고, 그들의 소비에트는 관료들을 통제하게 되었고, 그들의 소비에트는 판사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모든 피억압 계급이 소비에트 권력 -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현재 형태 - 이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보다 백만 배 더 민주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기에 충분하다."

 

저항

 

따라서 이 시점에서 레닌은 여전히 러시아가 명백히 민주적이라고 도전적으로 말하고 있다. 농민 문제에 대해 그는 다소 두드러지게 말한다. “일이 우리가 말한 대로 진행되었다. 혁명이 취한 행로가 우리 논리의 옳음을 확증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볼셰비키는 토지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전체 농민의 충성심을 얻었다고 레닌은 말한다. 우리는 부르주아 혁명을 끝까지 수행했다. 그런 다음 그는 우리가 잊는 경향이 있는 주장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의 다음 단계: "농민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해결책의 부적절함과 한계를 넘어 사회주의로 넘어갈 필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레닌은 카우츠키 자신이 1899년 농업 문제에서 소농을 사회주의로 전환시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가 처분할 수 있는 수단에 대해 똑같이 말했다고 주장한다. 레닌은 소농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보기를 희망했고 '마을의 계급 전쟁'이라고 불리는 정책에 의해 고무되었다. 비록 심지어 그가 <배신자 카우츠키>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그 정책은 후퇴되고 있었다.

 

경제는 레닌이 약간 방어적인 유일한 영역이다. 그 이유는 분명한데 위기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모든 아첨꾼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9개월 후에 우리에게 당신의 전반적인 번영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이것은 파괴적인 내전과 외국 자본이 러시아 부르조아지의 4년 동안의 파괴 행위와 반란에 전면적으로 힘을 실어준 후이다.” 그리고 그는 절대적으로 옳다. 그것이 그러한 위기가 있었던 기본적인 이유들 중 하나이다.

 

네 번째 도박은 국제 혁명이다. 독일 혁명이 막 일어났기 때문에 여기서 레닌은 절대적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최근에 출판된 알렉산드르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vitch의 새로운 책은 독일에서 행진하고 있는 혁명을 축하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1918년 9월 지노비에프Zinoviev가 레닌에 대한 찬사로 말한 것이다:

 

“샤이데만Scheidemann[독일 우파 사회민주주의자]은 그가 가로등에 매달린다면(그리고 나는 그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상당 부분 레닌 동지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동지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레닌을 통해서 옛 유럽 전체에 자신의 의지를 지시하는 순간을 살아서 볼 것이며, 레닌 동지는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정부와 조약에 동의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레닌이 독일 노동자들이 그들의 첫 번째 사회주의 법령을 작성하도록 도울 것이다.”

 

레닌은 <배신자 카우츠키>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카우츠키의 위의 글들은 1918년 11월 9일에 쓰여졌다. 바로 같은 날 밤, 승리에 찬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뉴스가 독일로부터 접수되었다. 처음에는 키엘Kiel과 다른 도시와 항구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베를린에서 소비에트로 권력이 넘어갔다. 카우츠키에 대한 나의 팜플렛을 위해 아직 쓰여져야 할 결론은 이제 불필요하다.”

 

이제 나는 비록 근본적인 변화가 보이지는 않았다고 강조해야 하지만, 레닌이 상황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단계를 다룰 것이다. 그가 처리해야 하는 매우 실망스러운 경험적 현실이 있었다. 국제 혁명을 둘러싼 행복감은 1919년 여름까지 계속된다 - 그리고 나는 '행복감'이 이것을 묘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크룹스카야Krupskaya의 회고록에서 그녀는 1918년 11월경에 레닌이 얼마나 가장 행복해 했는지를 쓰고 있다.

 

나는 또한 그의 연설에서 이런 인상을 받았다 - 그는 도박이 성과를 거두고 있고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청중들에게 연설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제 상황이 그렇게 좋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올해는 마지막으로 어려운 반년이다."

 

레닌은 러시아가 더 이상 고립되지 않고 국제 혁명이 그들을 구제할 것이기 때문에 6개월 이내에 상황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다가 1919년 3월에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고 다음은 특히 기뻐하던 레닌의 매우 직설적인 반응이다: “러시아보다 더 양식있는 국가로서 헝가리는 케렌스키와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게 강요한 폭력이나 유혈사태 없이 사회주의 혁명을 더 나은 시각으로 보여줄 것이다.”

 

보시다시피 이것은 그가 해야 했던 일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경계심을 보여주는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는 또한 러시아 혁명가들의 이전 세대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혁명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지켜볼 수 있는 세대’라고 했다. “그 죽어가는 짐승, 제국주의에 의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큰 불행이 있더라도, 그것은 결국 사라질 것이고 사회주의는 전 세계에서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1919년 7월의 가장 놀라운 인용구이다: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말한다 - 우리의 모든 경험과 지난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고려해 볼 때 -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것이며, 이번 7월이 마지막 어려운 7월이 될 것이며, 내년 7월에는 세계 소비에트 공화국의 승리를 환영할 것이라고 - 그리고 이 승리는 충만하고 완전할 것이라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공개 연설에서 나온 것이다. 레닌은 정말로 자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수사학은 헝가리 혁명의 패배와 함께 8월경에 갑자기 멈춘다. 정말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1919년에 레닌의 연설을 읽었는데, 비록 내용이 전체적으로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국제 혁명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가 그해 상반기에는 매우 확신했지만 하반기에는 훨씬 덜 확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서 랜섬Arthur Ransome과의 인터뷰에서 레닌은 영국의 혁명을 자신있게 예측한다. 랜섬이 이에 대해 질문했을 때 레닌은 자신이 1890년대에 한때 장티푸스를 앓았지만 실제로 알지도 못하기 전에 장티푸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영국을 본 방법이다. 영국은 질병에 걸렸고 여전히 걸어 다니고 있지만 곧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1년 후 그는 버틀랜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인터뷰를 했고 그때는 이미 영국의 혁명을 포기했다. 이 시점에서 볼셰비키는 그들이 더 이상 혁명적 상황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제2차 대회에서 확인되었다 - 첫 번째 대회와는 대조적으로. 지노비예프는 말했다. "소비에트는 혁명적 상황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러한 상황이 없는 소비에트는 소비에트의 패러디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의 역사적 시기에 우리가 소비에트를 갖게 될 것이지만 지금은 소비에트를 위한 선전이 유일하게 적절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딜레마이다. 당신은 혁명적 상황에 있다는 전제하에 수년에 걸쳐 새로운 당 모델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모든 종류의 것들이 그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상황의 존재를 근거로 기회주의자의 숙청, 비밀 및 기타 특정 사항이 주장되었다.

 

이제 어떤 당 모델을 내세워야 할까? 나는 그것이 주요한 딜레마이며 우리가 다른 곳에서 논의했던 볼셰비키들이 그들에게 강요된 필요들을 미덕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과잉 이론화' 문제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920년의 폴란드 전쟁은 국제 혁명에 대한 희망이 잠시 되살아난 것을 의미했지만, 그것들은 매우 빠르게 밀려났고 곧 잊혀졌다.

 

1919년 중반 무렵부터 외교 정책은 점차 무역 조약과 경제적 양보를 지향하게 된다. 내가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대한 도박에 대해 말하고 싶은 큰 요점은 볼셰비키들이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1920년 말 당내에서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상위 대 하위'라고 불렀다. 흥미로운 것은 상황이 얼마나 나빴는지 인정하는 일부 '상위들'의 태도이다. 지노비에프가 말한 것을 인용하겠다.

 

“[1917년의 소비에트는] 대중의 창조성이 가장 자유롭고 가장 조직적인 길을 스스로 찾는 기관이다. 소비에트는 아래에서 끊임없는 힘의 흐름을 보장하는 기관이다. 소비에트는 대중이 입법을 배우는 동시에 자신의 법률을 시행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가 무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왜 그런지에 대한 몇 가지 변명을 했다.

 

“현대 행정 국가에 대한 압박, 내전 도중에 대중에게 극도의 압박을 가할 필요성, 전시의 불가피성에 의해 강요된 예외적인 규율, 노동자들이 아닌 부르주아 전문가들 편에 서야 할 필요성, 그리고 얇은 당 엘리트층에 따른 과중한 업무와 책임감이 있다.”

 

발걸음들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들에 대한 도박에 관해서 나는 레온 트로츠키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다음은 그가 1920년 볼셰비키 혁명 3주년 기념일에 대중적 청중에게 한 말이다.

 

“우리는 원대한 이상과 장엄한 열정을 가지고 이 투쟁에 임했고, 많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적 인류애의 약속된 땅, 즉 물질적 삶뿐 아니라 영적 삶의 꽃이 피는 땅이 실제로 밝혀진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약속의 땅, 즉 정의, 자유, 만족감, 문화적 고양의 새로운 왕국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만질 수 있었다.”

 

“3년 전에 우리에게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우리의 눈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이후 3년이 지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기가 그렇게 어려울 것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완료되지 않았다. 우리 각자는 이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싸워왔고 싸우고 있는 새로운 질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매우 설득력 있는 진술은 볼셰비키가 어떻게 사회주의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지를 강조한다.

 

1920년의 이 시점에서 니콜라이 부하린Nikolai Bukharin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을 제시한다. 이것은 일종의 '위기' 이론이다. "혁명에는 깊고 길고 지속적인 위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노동자 권력의 전제 조건이다. 그리고 노동자 권력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속화될 이 위기를 처리하는 것인데, 이는 그가 말하는 "확장된 부정적 재생산"의 시기, 즉 붕괴를 겪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발전을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부하린의 국가 분쇄에 대한 이해이다. 즉, 국가의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 군사적 측면을 분쇄해야 국가가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천천히 다시 합쳐질 수 있는 사회의 비극적인 붕괴이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이것이 일어났을 때에만 가능하다 - 1920년에는 확실히 그렇지 않았다. 볼셰비키가 조직한 모든 강압과 군사화는 정당화되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노동자 권력을 위해 필요했고, 이는 결국 사회주의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연설들을 따라가면서 나는 농민의 충성심에 관해 내가 아는 한 누구도 지적하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농민에 관해 두 가지 다른 레닌이 있다고 말한다. 1919년의 강경노선의 레닌과 NEP 시대의 '선한' 레닌; 그리고 스탈린은 1919년의 '나쁜' 레닌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의 뒤에 있는 타당성은 그들이 곡물과 군대를 위한 징집 모두를 위해 농민들에게 극단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반란 등이 일어났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전체 생산 방식, 따라서 전체 생활 방식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우선, 내가 말했듯이 레닌은 농민들이 스스로 전진하기를 바랐다. 지역 집단 생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첫 번째는 국유농장으로, 이전에 토지 소유자가 소유했던 토지를 인수했는데 이미 생산의 틀이 갖춰져 있었다.

 

다른 하나는 코뮌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매우 작은 규모였지만 매우 강렬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은 코뮌에 모여 생산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실제로 공유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한 러시아인 망명자가 아주 정확하게 관찰한 바와 같이, "볼셰비키는 새로운 농업 형태를 시도했지만 그것에서 큰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고 어느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이유 때문에 레닌은 이것에 큰 희망을 걸었다. 특히 국제 혁명이 성취되지 않았을 때 그랬다. 그는 이것으로 인해 완전히 망연자실해졌고, 1918년 말부터 1921년까지 연설에서 그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그는 코뮌의 무가치함에 대해 점점 더 화가 났다.

 

1919년 후반의 그의 이야기다. "농민들은 '소비에트 권력 만세!', '볼셰비키 만세!'이지만 '코민들은 타도!'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이 멍청한 방식으로 조직되고 그들에게 강요될 때 코뮌들을 저주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과되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하고, 당연히 그렇다. 우리는 농민들을 돕고 가르쳐야 하지만 과학과 사회주의 분야에서 우리는 그들에게서 농장을 경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그는 코뮌과 국영 농장을 좋아하지 않는 농민들의 편을 들고 있다. 레닌이 코뮌을 골칫거리로 생각했고 농민들이 코뮌을 비웃는 것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인용문이 있다. 따라서 자발적인 집단화는 작동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은 어땠는가? 강제로 일하게 하려는 - 1931년 스탈린의 반동보다 더했거나 부족했는가? 레닌은 생산양식을 바꾸는 데 있어서 폭력은 절대적으로 배제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1919년에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폭력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의 불합리함이 너무나 명백해서 소비에트 정부는 오래전에 그것을 금지했고, 그래서 농민에 대한 이러한 잔악함의 마지막 흔적은 공화국의 면전에서 사라졌다.” 다시 말해,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농민에게 생산 방식을 바꾸도록 강요하는 폭력이나 무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강제 집단화가 일어났을 때 볼셰비키 반대파가 기억한 점이었다.

 

농민에 대한 레닌의 정책이 스탈린의 선구였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시대를 앞서 그것을 비난했다. 그래서, 이것이 레닌이 전기화에 대해 그렇게 흥분한 이유이다. 그는 시골에 전기를 공급함으로써 농민들을 사회주의에 더 가깝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1922-23년에 레닌이 쓴 글에 대해 빠르게 논의하고 싶다. 그는 국제 혁명에 대해 내가 '버티는 관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더 적지만 더 나은 것>에서 그는 여러 경우에 견디는 혁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비에트 권력에는 '소비에트'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평의회'를 의미했지만 당이나 인민이 아닌 정부를 의미하게 된 일종의 슬픈 아이러니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이제 관료제를 지칭했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대중이 불신했던 옛 짜르 질서에서 나온 관료들과 부르주아 전문가spetsy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적어도 많은 주요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소비에트'라는 단어가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을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의 편지에서 보았고 그것을 알아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소비에트'가 그렇게 부정적인 단어였을까? '통치'를 의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모든 것의 아이러니한 반전이었다.

 

1922-23년에 레닌이 한 것은 당을 이용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끌어들이며 위로부터 소비에트를 재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시도였다. 아래에서가 아니라 위에서 빨아올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그의 마지막 글들에서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생각과 시간을 들인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그의 특별한 아이디어였다. 이제 '농민의 충성심'은 연결고리가 되었다 - 우리는 농민들을 사회주의로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 쿨락과 부르주아지들이 그들을 그들의 방향으로 이끌지 못한다. 레닌이 가장 좋아한다는 명언 '누가, 누구를?'은 그의 인생의 말년에 두세 번 언급될 뿐이다.

 

지노비에프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포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레닌이 그것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의미한 것은 농민들이 우리나 부르주아지 어느 하나를 따를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상황으로 변형된 옛 볼셰비즘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기화를 통해 농민을 다시 만들고 동시에 우리 편으로 만들 것이다.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의 관점에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기에서 막 벗어나고 있었고 1921-22년에 엄청난 기근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이 그것에 대해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그는 사회주의의 매력을 드러낼 수 없는 것에 매우 화가 났다.

 

“그것들은 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체제를 전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예측을 정당화할 수 있는 조치를 즉시 취하는 것을 막았다. 그것은 후자가 함께 작동해 사회주의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을 개발해 엄청난 속도로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가 그 자체로 경이로운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인류가 이제 매우 찬란한 전망의 새로운 발전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다양한 모든 사람에게 증명했을 것이다.”

 

종합

 

우리는 이제 레닌이 여전히 사회주의를 믿었지만 특히 국제 정세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혁명'이라는 그의 마지막 글 중 하나에서 그는 상황이 사회주의를 위해 무르익었다고 말하는 볼셰비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 일을 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걸린 상황이었다. 그는 왜 그들이 집권하면서 사회주의에 필요한 종류의 문화를 만들 수 없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상당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그의 도박에 대한 마지막 종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읽을 것이다.

 

“가까운 장래의 어느 때라도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희망은 시들었다. 자본주의 간 다툼에서 사회주의 러시아가 버틸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이제 피할 수 없는 동방의 각성에서 용기를 내야한다. 아래로부터의 소비에트식 민주주의가 국가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희망은 희미해졌다. 그렇다면 당을 이용하여 물려받은 국가 장치를 위로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농민들이 스스로 사회주의적 변혁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내전 동안 스스로 정당성을 입증했던 계급 지도력의 옛 볼셰비키 시나리오를 취하고 그것을 시장[즉, 네프NEP]을 이용하여 시장을 극복하는 과제에 적용해야 한다. 러시아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조치가 동시에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이 될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산업을 건설하자. 농민의 잔소리같은 느린 속도가 아니라 선진적 산업 기술의 빠른 속도로.

 

이 모든 희미한 희망이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사회주의 비평가들이 옳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이 사회주의를 위한 문화적 전제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는 스스로를 끌어올릴 수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기사 등록 20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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