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러시아 혁명과 ‘혁명적 사회 민주주의’

에릭 블랑Eric Blanc

번역: 두견 

 

근래 서구 좌파진영에서는 사회변혁의 전략에 대한 흥미롭고도 중요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속에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레닌주의’적 사회변혁 전략의 타당성 등도 중요한 논점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글들을 계속 번역, 소개해 왔는데 이번 글도 그것의 연장이다. 이번 글은 오랫동안 정설로 굳혀져 있던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중요한 신화들에 도전해 온 에릭 블랑의 혁신적인 새로운 저작(<혁명적 사회 민주주의: 러시아 제국의 노동계급 정치 1882-1917>) 의 머리말의 처음 두 부분이다. 이 글의 필자인 에릭 블랑은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DSA) 소속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이며, 역사사회학자로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다양한 신화를 해체하는 논문과 저작, 글을 써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아가 적극적인 활동가로서 미국에서 교사파업에 연대하고 새로운 좌파적 정치대안을 건설하는 문제에도 매우 활발하게 개입하고 있다.

출처:https://www.historicalmaterialism.org/blog/revolutionary-social-democracy-working-class-politics-across-russian-empire-1882-1917-book

 

 

머리말

 

100년 넘게 활동가들은 러시아의 혁명적 경험에서 해외 사회주의자들이 모방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토론해 왔다. 같은 기간 동안 역사가들은 모스크바 기록보관소의 깊은 곳을 샅샅이 뒤졌고 사회학자들은 1905년과 1917년의 격변을 다른 혁명들과 체계적으로 비교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여들의 대부분은 공통의 결점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제국 전체보다는 중앙 러시아만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러시아 혁명은 흔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러시아적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대부분의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핀란드인, 라트비아인, 유대인, 무슬림, 그루지야인 등 주도적인 민족 집단 출신이었다. 제국 내의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러시아 사회주의 정당들이 무시되거나 소외되었기 때문에 혁명 러시아에 대한 지배적 설명들은 기껏해야 일방적이고 최악의 경우 깊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1917년 이후 한 세기 이상 지난 지금, 러시아의 노동계급 정치의 발전을 제국 전체의 관점에서 검토할 때가 훨씬 지났다. 이 책은 우리의 지리적 영역을 제국 변경지대들로 확장함으로써 - 수준높은 정치적 자유와 자치적 의회가 있던 핀란드를 포함하여 - 러시아 혁명과 독재적 및 의회적 조건에서의 정치 투쟁의 역학관계에 대한 오래 지속된 추정들에 도전한다.

 

이러한 경험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에 도달하는 것은 단순히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 대한 비판적 개입은 현재를 비판적으로 직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위기와 전세계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인해, 지금은 새로운 눈으로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적절한 순간이다. 역사가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의 말을 인용하면 '1917년의 유령은 휴식하러 내려가지 않았다.'

 

변경지대로 가져오다

 

40여년 전 라트비아 학자 앤드류 에저갈리스Andrew Ezergailis는 '혁명이 페트로그라드나 모스크바에서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에서 시작, 발전, 성숙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혁명 정치에 대한 연구는 제국의 중심에 대한 근시안적 초점으로 인해 얼룩진 채로 남아있다.

 

이러한 맹점은 학자들과 활동가 모두가 비슷하게 공유해왔으며, 이는 양측의 오랜 러시아 중심주의적 성향을 반영한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러시아는 마치 민족적으로 균질적인 국민국가인 것처럼 분석되었다. 1905년과 1917년 혁명에 대한 수많은 영향력 있는 연구와 짜르 시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은 비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그 정당들을 거의 완전히 무시해 왔다. 보다 빈번하게는, 변경지대는 간략하게 언급되었고, 반면 일반적인 설명은 중앙 러시아에 초점을 맞추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인종과 민족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러시아 제국 주변부에 대한 학술 연구가 급증했다. 그러나 이러한 학계의 '제국적 전환'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정당에 대한 연구들에서 우르르 멀어지면서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작업들의 압도적 다수는 변경지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계속 무시하고 대신 민족정체성의 형성과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것을 선호했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저술들도 좁은 지리적 및 해석적 렌즈에 의해 제한되었다. 비러시아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상당한 문헌이 동구권의 좌파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중앙 러시아의 볼셰비즘은 여전히 지배적인 경험적 초점이자 분석의 모델이었다.

 

소련과 그 위성국가 밖의 사회주의 저자들은 비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관심을 훨씬 덜 기울였다. 변경지대의 사회주의자들이 조금이라도 언급되었다면, 그것은 보통 V.I.레닌의 민족 자결권 지지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양식] 토론에서 지나가듯이 이루어졌다. 제국의 주변부에 대한 이 작업들 중에서 어느 것도 작가들의 제 2인터내셔널 사회주의나 1917년에 짜르체제와 자본주의의 전복으로 이어진 투쟁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바꾸지 않았다.

 

이러한 지배적인 해석의 경향은 비러시아 사회주의자에 대한 대부분의 진지한 연구와 그 기반이 되는 주요 근거들이 널리 읽히지 않는 동유럽 언어들로 작성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악화되었다. 이와 같이, 이러한 역사는 일반적으로 소규모 전문가들 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핀란드어, 라트비아어,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근거 자료들에 대한 나의 독자적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다음의 연구는 변경지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교 분석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사회주의 정치를 어떻게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첫 번째 연구이다.

 

 

표 1: 짜르 제국의 마르크스주의 당들(1882년 ~ 1907년)

 

 

조직 이름 - 창립 년도 - 최대 회원수

 

 

프롤레타리아트 (1882년) — 2,000명

 

폴란드 사회주의당 (1892년) — 55,000명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1893년) — 40,000명

 

그루지야 사회민주당 "메사메 다시(Mesame Dasi)" (1893) — 20,000명

 

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1896) — 3,000명

 

러시아와 폴란드의 일반 유대인 노동 분트 (1897) — 40,000명

 

핀란드 사회민주당 (1899년) — 107,000명

 

혁명적 우크라이나당/우크라이나 사민주의노동자당 (1900년) — 3,000명

 

폴란드 사회주의당 - 프롤레타리아트 (1900) — 1,000명

 

라트비아 사회민주연합(1903) — 1,000명

 

아르메니아 사회민주노동기구 "특정주의자(Specifists)" (1903) — 2,000명

 

RSDLP(1903)의 볼셰비키 분파 - 58,000명

 

RSDLP(1903)의 멘셰비키 분파 - 45,400명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1904) — 23,800명

 

무슬림 사회민주당 "허밋(Hummet)" (1904) — 1,000명

 

우크라이나 사회민주연합 "스필카(Spilka)" (1904) — 10,000명

 

에스토니아 사회민주주의 (1905) — 10,000명

 

학자들과 활동가들의 문헌에서 비러시아 급진주의자들이 주변화된 것은 러시아 제국에서 노동계급 투쟁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들의 실제 비중과 분석적 중요성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했다. 짜르체제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멘셰비크와 볼셰비크의 양자간 갈등으로 축소한 것은 훨씬 더 역동적인 그림을 흐려버렸다.

 

12개가 넘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제국 전역에서 토론, 협력, 분열, 연합했다. 합법적 핀란드 사회주의당을 제외한 모두가 지하의 정치적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건설하는 전례없는 실험에 참여했다. 사실, 러시아 제국의 첫 마르크스주의 조직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등장하기 20년 전인 1882년에 폴란드에서 생겨났다.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1917년 이전 러시아의 좌파 운동에서는 변경지대의 사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대표되었다. 러시아인이 아닌 사람들이 인구의 58%를 차지하고 있는 제국에서 변경지대 정당들은 조직화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75% 이상을 대표했다.

 

1917년까지, 거대한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전세계에서 인구대비 가장 큰 단일 사회주의 정당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변경지대의 경험은 각각 비러시아인들 사이에 상당한 기반이 있었던 볼세비키와 멘셰비키 그 자체를 이해하는데도 필수적이다. 러시아 변경지대에서 노동계급 정치의 부상과 예기치 못한 추락을 분석하는 것은 또한 세계 자본주의에 맞서 이제껏 제기된 가장 심각한 도전이 패배한 것을 설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1917년 이후의 국제적 혁명의 물결, 그것의 봉쇄는 서방에서 부르주아의 통치를 강화하고 러시아에서 이어진 스탈린주의적 권위주의의 출현을 위한 길을 닦았다. 그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제국의 변경지대가 결국 세계 혁명으로 가는 다리라기보다 더 많은 장벽을 구성하게 된 것은 비극적인 놀라움이었다.

 

혁명 운동은 짜르 통치의 중심에서보다 대부분의 변경 지대에서 더 강해졌었다. 러시아의 첫 번째 혁명은 폴란드, 라트비아, 조지아와 같은 가장 먼 비러시아 지역에서 진행되었으며 총파업, 노동자 봉기, 군인 반란, 농촌 저항이 여러 지역에서 노동대중에 의한 부분적 또는 완전한 권력 장악으로 마무리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05년 이후 제국 전체 운동의 논란의 여지없는 선봉이 되었지만, 변경 지대는 1917년과 그 이후의 내전에서 다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2월에 있었던 짜르체제의 전복은 그 나라의 모든 지역과 민족들을 즉각적으로 집어삼킨 혁명적인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몇 달 안에, 대부분의 급진적인 비러시아 정당들은 소비에트 권력과 국제적 사회주의 반란을 위한 투쟁에서 볼셰비키와 동맹하거나 연결됐다.

 

혁명은 단지 중앙 러시아의 사건이 아니었다. 비교적 평화롭고 의회가 있는 핀란드에서도 노동 대중과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정부만이 사회적 위기와 민족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있는 길을 제공 할 수 있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됐다.

 

세계사의 결정적 고비에서 볼셰비키와 서구 자본주의 권력들은 모두 러시아의 주변부가 사회주의적 통치의 확장 또는 억제의 핵심 전쟁터임을 이해했다. 브라이언 포터Brian Porter의 최근 자서전에 따르면 전후 반자본주의적 도전이 얼마나 깊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오래된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 규범들은 신뢰를 잃고 파괴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1917년의 사건을 '러시아 혁명'이라고 부르지만, 그 당시에는 혁명으로 나아갈 진정한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모든 오래된 권력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 질서를 도입할 수 있는 창조적 파괴의 순간이었다.”

 

중앙 러시아와 나머지 세계 사이에 변경지대가 있었다. 혁명이 제국의 주변부에서 승리하면 서유럽과 아시아를 넘어 전진할 수 있었다. 라트비아 볼셰비키의 팸플릿을 인용해보자.

 

“라인강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흑해에서 백해의 아르한겔스크까지 내전이 맹렬히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곧 승리한 제국주의에 의해 세워진 벽과 성곽을 무너뜨릴 것이다. … 라트비아 전체에서 소비에트 세력의 신속한 승리와 그곳에서 확고한 권력 수립은 그 자체로 적대국들의 혁명적 화약고에 또 다른 불타는 횃불을 던지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될 것이다.”

 

이 비전이 실현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1917 ~ 18 년에 통치체제의 결과가 예기치 않게 제국 전체에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정부가 특정 지역에만 설립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퍼즐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특히 1905년 이후 사회주의 정당의 정치적 진화와 경쟁을 조사해야 한다.

 

러시아의 1차 혁명까지는 핀란드와 아르메니아 공동체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계급투쟁의 급진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05년의 사기를 꺾는 패배의 여파로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폴란드, 그리고 유대인들 사이에서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결국 헤게모니적이 되었다. 그러나 핀란드에서는 1905년 이후 급진파가 온건파를 대체하면서 반대 양상이 우세했다.

 

표 2에 요약된 바와 같이, 1917~18년의 정치적 결과는 전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서 급진파 아니면 온건파가 우세했는지에 조응했다. 급진주의자들이 우세한 곳에서 그들은 반자본주의 정부를 세웠다. 보통 온건파가 우세한 곳에서는 부르주아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수립하고 흔히 1918년에 외국 군대의 개입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나아갔다.

 

가장 크고 지정학적으로 가장 전략적인 변경지대인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두 곳에서는 특히 서방으로의 혁명 확산에 있어서 결정적인 패배를 기록했다. 1905년과 1917~18년의 서로 다른 정치적 결과를 이해하는 것은 러시아 변경지대를 간과하고 정당들의 인과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혁명에 대한 방대한 비교 학문에 도전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테다 스카치폴Theda Skocpol의 사회학적 고전인 <국가와 사회 혁명>은 러시아를 동질적인 국민국가로 취급함으로써 1905년과 1917-18년에 러시아 제국의 여러 민족들에 있어서 사회주의 정치와 혁명적 투쟁의 다양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더 넓은 지리적 범위는 특히 경쟁적인 당 건설 프로젝트와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전략적 결정을 통해 구체화된 사회운동 기관에 대한 식별과 함께 그녀의 혁명에 대한 '국가 중심적인' 구조적 설명의 조절을 필요로 한다.

 

다음 장에서 설명하는 핵심 동역학 중 하나는 정당들의 상대적 자율성과 대중의 이익을 표현하는데 있어 정당들의 중요성이다. 제대로 이해된 이러한 통찰은 학자들과 활동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는 계급 분석의 주변화에 맞선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이 정치적 논전을 촉발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형태의 집단적 동원이 똑같이 효과적이거나 대중적 투쟁이 전적으로 담론에 달려 있다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착취는 계급 의식적이고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노동자 운동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지만 보장하지는 않는다 –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들을 응집시키려는 하려는 정당들의 존재와 영향력이 중요한 매개 변수이다.

 

오늘날의 많은 활동가들과는 달리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노동계급의 의식, 조직, 투쟁의 지속적 촉진으로 여겼다. 짜르 제국의 경험이 증명하듯이,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일관되고 헤게모니적인 계급으로 결정화되는 것은 그 방향으로 추진하는 정당의 존재에 상당한 정도 의존한다.

 

이 전략적 프로젝트가 러시아 제국에서 어떻게 진행됐는지 탐구하는 것은 제국 전역의 노동자 운동의 궤적을 밝힐뿐만 아니라 최근 수십 년 동안 대부분 그것의 포기가 노동자와 좌파 모두에게 해를 끼쳐온 계급정치의 전통을 되찾게 한다. 다양한 지역, 조직 및 결과들을 보여준 러시아 제국은 노동계급의 정치를 비교 분석하는 역사적으로 독특한 실험실로, 노동자 운동이 어떻게 정당뿐 아니라 정권의 체제에 의해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정치적 자유,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 합법적 노동 운동을 허용한 러시아의 유일한 지역인 핀란드의 예외적인 경우는 권위주의와 의회 정치 체제에서 사회주의 정치의 뚜렷한 역동성을 드러내기 위해 특히 풍부한 비교를 제공한다. 러시아 제국 전체를 분석해보면 전제 정치체제의 존재가 러시아의 지하 사회주의자들의 궤적을 유럽 전역의 그들의 상대역들과 차별화하는 가장 중요한 독립적 요소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변경지대의 역사를 가져 오면, 1917년 이후 봉기적 전략과 소비에트 권력을 해외의 정치적 민주주의 국가에 수출하려는 레닌주의적 시도가 실패한 것을 조명하게 해 준다. 동시에, 1918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집권은 의회적 조건 하에서 반자본주의적 파열을 위해서는 국가의 민주적 기관에 노동자 정당을 앞서서 선출해야 한다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방향에 대한 신빙성을 제공한다.

 

즉, 러시아 제국의 경험은 성공적인 봉기주의 운동이 일반적으로 권위주의의 조건 하에서만 발생한다고 가정하는 사회학적 작업의 사례를 확인시켜 준다. 반대로, 의회주의적 맥락에서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월터 코피Walter Korpi가 '민주주의적 계급투쟁'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노조조직화만이 아니라 선거 정치를 통해 계급 권력을 구축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표 2: 러시아 제국에서의 정치적 결과

 

지역/민족 - 주도적 사회주의 성향 - 정부의 결과

 

<1905년 혁명>

 

라트비아, 폴란드, 그루지야, 중앙 러시아,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유대인, 에스토니아, 아제르바이잔 - 급진적 -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지역적 권력 장악(1905), 짜르 군대에 의한 진압(1905–06)

 

아르메니아 - 온건한 - 범계급적 무장 방위대

 

핀란드 - 온건한 - 범계급적 정부, 보편적 참정권 획득(1905-06)

 

 

<1917–18년 혁명>

 

라트비아 - 급진적 - 반자본주의 정부(1917), 독일의 개입으로 전복(1918)

 

중앙 러시아 - 급진적 - 반자본주의 정부(1917), 내전으로 침잠

 

에스토니아 - 급진적 - 반자본주의 정부(1917), 독일의 개입으로 전복(1918)

 

핀란드 - 급진적 - 반자본주의 정부(1918), 독일의 개입과 내전으로 전복

 

아제르바이잔 - 급진적 - 반자본주의 정부(1918), 소비에트에서 과반수를 잃고 퇴진

 

리투아니아 - 급진적 - 반자본주의 정부(1918), 폴란드군에 의해 전복(1919)

 

우크라이나 - 온건한 - 범계급적 정부(1917), 독일-오스트리아의 개입을 요청(1918)

 

아르메니아 - 온건한 - 범계급적 정부(1918)

 

그루지야 - 온건한 - 범계급적 정부(1918), 독일에 이어서 영국의 개입을 요청

 

폴란드 - 온건한 - 범계급적 정부(1918)

 

유대인 - 온건한 - 범계급적 정부(에 대한 지원) (1917)

 

전략적 연속성과 파열

 

짜르체제 아래에서의 모든 주요 사회주의 정당들을 포함하도록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은 우리가 초기 제2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본질과 발전에 대해 오랫동안 지켜온 견해를 재고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실, ‘러시아중심주의’의 문제는 기존 문헌들의 두 번째 결함인 ‘볼셰비키 예외주의’와 분리 할 수 없다. 자유주의자와 좌파들의 설명에 따르면 V.I. 레닌의 지도를 받은 볼셰비키는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그 선도적 이론가인 칼 카우츠키(Karl Kautsky)가 구현한 온건한 사회주의적 점진주의와 단절함으로써 그 시대의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과 차별화되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역사학파가 이 파열을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기원이라고 규정해 온 반면, 좌파는 이 전략적 단절이 이른바 제 2 인터내셔널이라는 걸림돌로부터 마르크주의를 구출하기 위한 강령적 기반이자 승리한 10월 혁명의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 책의 중심 논지는 일단 비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고려되면 어떤 해석도 사실의 엄밀한 조사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문적 해석에서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는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러시아 혁명적 전통의 엘리트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음모주의로 대체했다고 여겨졌다. 올랜도 파이지스 이렇게 주장했다. “볼셰비즘은 매우 러시아적인 것이었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교리와는 다른, 혁명이 역사의 우발적 상황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전투적 행동에 대한 믿음과 강조는 그것을 러시아의 메시아주의 전통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했다.”

 

1904년에 레닌의 분파적 반대파들에 의해 처음 개척된 이 관점에서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은 본질적으로 러시아의 전통적 혁명주의와 서구식 사회주의 간의 갈등이었다. 이 평가에 동의하면서, 역사가 아브라함 애셔Abraham Ascher는 일찌감치, 멘셰비키가 고수한 '서구적 지향'이 볼셰비키에게는 부족했다고 단언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서술은 볼셰비키의 특수성에 대한 유사한 초상화를 그렸지만, 그 평가에서 부정성과 긍정성의 신호를 뒤집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라는 정치적 모델을 깨뜨리고 나서야 레닌은 세계 최초로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정당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의 출발점은 학술적 상대역과 마찬가지로 '제 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으로 비혁명적인 성격에 문제였다는 것이다. 볼셰비키의 '혁신'이라고 가정하는 것 중에서 가장 흔히 인용되는 것은 카우츠키의 운명론과의 단절, 기회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유형의 정당'에 대한 그들의 옹호, 1917년 이후 국가와 혁명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개념이다.

 

토니 클리프Tony Cliff에게는, 전쟁 이전 시기에 레닌이 카우츠키를 혁명적 사회주의의 대표주자로 본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 이것은 단순히 레닌의 '오래된 환상'의 반영이었다. 도니 글룩스타인Donny Glukstein에 따르면, '독일 사회민주당은 공식적으로 혁명에 헌신했지만, 칼 카우츠키의 지적인 지도 아래에서, 실제로는 그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카우츠키적 마르크스주의의 비혁명적 성격의 증거는 유럽의 주요 사회주의 정당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지지했고 그 여파로 인한 반자본주의적 개편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지배적인 학술적 문헌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변경지대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의 존재는 활동가들이 주로 쓴 이러한 저술들에서 일반적으로 무시된다. 그 결과적 효과로, 볼셰비키가 서유럽의 자신들의 상대역과는 다른 길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혼자였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지하 사회주의 정당들에 대한 대강의 조사조차도 볼셰비키 예외주의의 결점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레닌 분파의 독창성으로 추정된 입장과 관행은 사실 매우 흔했다. 여러 비러시아 정당들이 공유하지 않은 주요한 볼세비키적 입장이 따로 없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입장도 1917년 10월이나, 반공주의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스탈린주의로 곧바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 사회주의적인 ‘은총’도 ‘원죄’도 없었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는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동향을 보여줄 수 있다. 1904년에 레닌의 중앙 집중주의 개념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명한 비판은 짜르 치하의 폴란드에서 로자의 정당이 훨씬 더 상명하달식이고 반민주적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어떤 지적도 없이 거의 항상 인용된다. 다른 주요 변경지대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의 급진적인 반군사주의를 무시한 채, 볼셰비키가 1차 세계대전에 반대한 유일한 주요 사회주의당이었다는 잘못된 주장도 흔히 제기된다.

 

실제로 당시에 폴란드의 사회주의당(좌파)PPS-Left와 폴란드왕국사회민주당SDKPil뿐만 아니라 라트비아의 사회민주노동당LSDSP도 전쟁을 반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셰비키는 1917-18년에 노동자들을 권력으로 이끈 전체 러시아 제국의 유일한 정당이 아니었다는 것은 가장 눈에 띄게 인정받지 못한 사실로 남아있다.

 

다음 장들에서 나는 지배적인 학계와 활동가들의 설명이 제 2 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와 온건한 사회주의를 부당하게 동일시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둘 다 불법적으로 조직된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서유럽의 그들의 상대역들과는 매우 다른 길로 밀어낸 전체주의적 짜르 체제라는 맥락의 영향을 간과했다.

 

오늘날 독자들에게는‘혁명적 사회민주주의’라는 범주가 모순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1917년까지 이것은 제 2 인터내셔널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현재 일반적으로 사회민주주의라고 불리는 화해주의적 정치적 경향과 그들의 지향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주요한 자기 정체화였다.

 

그러므로 카우츠키가 그 주도적 주창자였던 혁명적 사회 민주주의의 내용을 명확히 하는 것은 1917년 전후에 러시아의 급진주의자들이 성공적인 혁명을 이끌 수 있게 한 정치적 지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물론 1882년과 1917년 사이에 마르크스주의 정치에서 중요한 진화가 있었다. 특히 1905년 혁명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러시아 제국 급진주의자들의 접근 방식은 정통적인 제 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이행과 발전을 그로부터의 단절 이상으로 반영했다. 1917년의 뿌리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비록 지난 세기 동안 카우츠키는 숙명론적 개혁주의의 옹호자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에 대한 널리퍼진 캐리커처보다) 그의 실제 저작을 보면 이 시대의 '마르크스주의 교황'이 왜 혁명적 사회주의의 최우선적 옹호자로 여겨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카우츠키의 1910년 이전 작품은 짜르 제국의 모든 민족들 중에서 정치적 스펙트럼의 가장 왼쪽에 서 있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의 효과적인 기반이 되었다. 실제로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독일을 포함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짜르체제의 러시아에서 훨씬 더 높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계급투쟁에서 벗어난 원인으로 카우츠키의 이론을 잘못 비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것은 처음부터 강조해야 할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러한 해석은 카우츠키의 초기 정치적 지향의 내용과 SPD가 퇴보한 이유 모두를 근본적으로 잘못 진단한다. 러시아 제국의 불법 마르크스주의 정당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점점 더 관료 계층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카우츠키가 1909년에 한탄했듯이, 독일의 당과 노조 지도자들은 '거대한 기구의 행정적 요구에 너무 빠져들어서 자신의 사무실 업무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넓은 시야와 모든 관심을 잃었다.' 이 원칙없는 SPD 지도부에게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지지하고 1917년 이후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은 자본주의 정부를 이끌기로 한 결정이 카우츠키와 SPD 전체가 고무해온 전통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위반한 것이라는 점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사학자 한스 조세프 슈타인베르크Hans-Josef Steinberg의 말에 따르면 1890년부터 1914년까지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이야기는 '일반적 이론에서 해방의 역사'이다. 정치적 실천이 사회주의 이론의 궁극적인 기준이라면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전략은 이를 실제로 적용하려는 정당들의 실천으로 판단해야 한다. 정통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끄는 정당이 실천에서 어떤 모습인지 보려면 독일이 아닌 러시아 제국을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러시아 제국의 지하 정당들뿐만 아니라 핀란드의 합법적 사회민주당에도 적용된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반자본주의적 추진력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는 카우츠키의 이론이 볼셰비키, 핀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부르주아 통치에 대한 세계 최초의 승리적 공세를 주도한 구 러시아 제국의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훈련시켰다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있다.

 

핀란드는 합법적이고 의회지향적인 핀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서유럽 민주주의와 특히 독일과 가장 유사한 정치적 맥락에서 활동했던 짜르체제 아래의 정당이었기 때문에 제 2 인터내셔널 '정통'의 파열적 잠재력을 분석하는 데 특히 중대한 실험 사례이다. 핀란드의 사회주의 운동은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과 흡사했지만 핀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버리지 않았다. 1918년 초,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같이 자본주의적 통치를 떠받치는 대신, 핀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이끌었다.

 

핀란드의 잊혀진 사회주의 운동에서 배우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전제적 러시아에서 혁명 운동의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좌파적 전략을 지나치게 일반화하려는 문제적 경향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데 상당히 유용할 수 있다. 러시아의 예외적인 역학 관계는 주로 정치적 자유나 의회 제도의 부재에 의해 결정되었다.

 

제국 전체를 보는 관점은 볼셰비키와 유럽의 사회민주당 간의 차이가 제 2 인터내셔널 정통과의 이론적 단절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러시아 절대주의의 조건으로 인해 모든 민족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서유럽의 상대역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채택하도록 강제했다.

 

다음 장들에서 우리는 짜르체제 아래에서 불법적으로 활동하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볼셰비즘의 비방자와 옹호자들 모두에 의해 일반적으로 볼셰비즘과 구별되는 것으로 묘사된 많은 전략적 관점과 조직적 관행을 고수했음을 알 수 있다. 1905년 혁명을 거치면서 (멘셰비키를 포함한) 이러한 각각의 흐름은 폭력적인 무장 혁명 투쟁에 참여했고, 서구 사회주의 정당의 조직 모델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과 함께하는 블록들을 거부하고 독립적인 노동계급 운동만이 민주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전제적 상황에서 이러한 입장은 정통 사회민주주의에 의해 명시적으로 승인되었으며, 이는 정치적 자유가 있는 국가와 없는 국가의 전략을 첨예하게 구분했다. 짜르체제의 조건은 독일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특정한 조직적 구조나 정치적 초점을 채택하려는 시도를 분명히 배제했다. 다시 말해,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관해 일반적으로 가정되는 것보다 훨씬 더 혁명적일 뿐만 아니라, 절대주의적인 러시아 문맥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특히 비타협적이었다.

 

러시아의 중심부와 주변부 모두에서 정치적 자유와 의회민주주의의 부재는 노동계급의 온건함이나 보수적인 노동 관료제의 출현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짜르의 절대주의는 러시아 제국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정치적 급진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 능력을 촉진했다. 서구 사회민주당에서 전투적 강령과 화해주의적 관행 사이의 격차가 커지는 것은 러시아 전제정치 아래에서 같은 방식으로 복제될 수 없었다.

 

모이라 도날드Moira Donald가 기존의 학문적 합의에 대한 선구적인 비판에서 지적했듯이 ‘1914년 이전의 볼셰비즘은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정통 좌파와 동떨어져 있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레닌은 어떤 주요 영역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발전에 대한 독창적인 기여로 간주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추가하지 않았다.’

 

역사가 라스 리Lars Lih의 2006년 논문 <레닌의 재발견>은 초기 볼셰비즘과 정통 제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정치적 연속성에 대한 주장을 결정적으로 발전시킨 사례의 분수령이었다. 리의 주장은 학계와 활동가 집단들 모두에서 아직 소수파에 머물고 있지만,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가 시작된 것은 주로 그의 우상파괴적 연구 덕분이다.

 

소위 '카우츠키주의'의 급진적 성격과 볼셰비키나 제국의 다른 급진주의자들과의 일치성을 인정하는 것은 1882년부터 1917년까지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진정한 진화를 무시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러시아 각 정당의 특수성과 독특한 궤적들을 최소화해서도 안 된다.

 

이 논문의 근본적 목표는 10월 혁명에 이르는 사회주의 전략의 지속성과 진화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에 도달하는 것이다. 후자가 중요하지만, 나는 이러한 전략적 변화들이 대부분의 사회주의적 및 학술적 설명에서 언급된 것과는 상당히 다르고 정치적 기반도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제국 내에서 서로 다른 지역적 맥락과 이론을 실천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의 고유한 어려움을 감안할 때, 동일한 포괄적 정치 원칙에 전념하는 정당들이 현장에서 종종 갈라질 수 있었고 갈라졌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는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제약이 없었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되고 발전되었다.

 

카우츠키뿐 아니라 짜르체제 아래의 그이 동료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라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전술과 전략은 항상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냉철한 평가에 기초해야 했다. 그리고 카우츠키에 대한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직면한 특정한 조건에 의해 정당하다고 느낄 때 카우츠키와 구분되는 접근 방식을 채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주어진 어느 순간에든 노동계급 투쟁을 가장 잘 진척시킬 방법을 놓고 마르크스주의 정당 내부와 정당들 사이에 상당한 긴장이 있었다. 전략을 전술로 바꾸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혁명의 추동력에 대한 정통적 개념은 정치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매일, 심지어 매시간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손쉬운 답을 제공하지 않았다.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의 경과로 인해 서, ‘기회주의’와 ‘불가피한 타협’ 사이의 미세한 경계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1905년 혁명은 특히 불타오르는 실험이었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실제 노동자 혁명에 참여하는 도전적 기회에 직면했다. 유대 사회주의자 시인 다비드 아인혼Dovid Einhorn의 말을 인용하자면: '남들이 세월을 어떻게 헤아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1905년부터 헤아린다.' 1905년의 여파로 카우츠키와 러시아 전역의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양한 질문에 대한 접근 방식을 재정립했다.

 

실제로, 1905년에 봉기를 일으키고 궁극적으로 진압당하는 동안 서로 다른 정당들이 내린 결론은 1917년에 그들의 후속적 접근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테오도르 샤닌Teodor Shanin이 말했듯이, '1905~0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패배한 이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의 생존자들이 배우고, 망각하고, 다시 배우는 능력 또는 실패'였다.

 

패배로 의기소침해진 - 멘셰비키, 그루지아의 사회민주당, 유대인 분트,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 다양한 사회주의 흐름의 지도자들은 지금까지의 급진적 합의를 깨고 처음으로 부르주아지와 함께하는 블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05년 이후 오른쪽으로의 이러한 파열은 주요한 전략적 전환점이었다.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계급 헤게모니에 대한 이전의 옹호를 포기하면서, 그들은 점점 더 자유주의자들 및 민족주의자들과 유대를 구축하며 1917-18년에 나타난 범계급적 연립 정부를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제국의 다른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은 혁명전략이라는 큰 문제에 대해 대체로 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공유된 기반을 바탕으로 그들은 1917년에 조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수렴했다. 핀란드는 늘 그렇듯이 예외적인 경우였다. 1905년 혁명에 대한 참여는 온건한 사회민주당을 좌파로 바꾸었다. 세계의 대중적 사회주의 조직 중에서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1905년 이후 정통주의에 더욱 전념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 반면, 대부분의 서구 사회민주당은 각자가 속한 체제에 점점 더 순응했다.

 

노동계급 단결을 구축하는 방법과 같은 급진파의 전략적 수정 중 일부는 관련 문헌들에서 무시되었다. 다른 입장들은 제2인터내셔널 정통과의 단절을 구성하는 것으로 잘못 가정되어 왔다. 이것은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국제적 혁명의 임박성과 전략적 중심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에 관한 경우에 그러했다.

 

많은 중요한 문제가 잘못 판단되었다. 예를 들어, 10월 혁명은 1917년에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의 새로운 재개념화에 의해 가능해졌다고 종종 가정된다. 실제로 그 해의 핵심적 쟁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 헤게모니에 대한 오랜 정통적 요구를 지지할 것인지 아니면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연립 정부에 참여할 것인지였다. 정말로, 자유주의자들과의 동맹 문제는 1917년의 다른 모든 주요 정치적 논쟁을 과도하게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농업 개혁을 위해 싸우거나, 전쟁에 반대하거나, 노동자들의 긴급한 경제적 요구를 옹호하는 사회주의자의 능력은 부르주아적 이익의 정치적 대표자들과 기꺼이 분리하려는 그들의 의지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경우가 더 흔했다. 

 

여기서 진정한 정치적 혁신가는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싸운 볼셰비키와 그들의 비러시아 동맹들이 아니라 러시아나 해외 자본가들과 함께 진보적 블록을 건설할 가능성과 필요성을 주장한 멘셰비키와 변경지대의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요컨대, 러시아 중심주의와 볼셰비키 예외주의의 상호 연관된 한계는 러시아 및 해외 사회주의 정치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왜곡했다.

 

노동계급 투쟁의 진화를 효과적으로 조사하고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관련된 교훈을 추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면 제국 전체를 보는 분석적 틀과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결합해야 한다.

 

(기사 등록 202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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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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