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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스파이의 아내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2. 3.

2차대전의 불편한 진실 앞에 끝장나 버린 부부의 이야기

박철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이미지는 이름처럼 스파이 스릴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 저지른 2차 대전(태평양 전쟁) 속에서 어떤 참혹한 사실에 대해 제대로 폭로하기 위해 치열하게 두뇌 싸움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제대로 스폰서를 구하기 어려워서 NHK의 지원을 받고서야 겨우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일본 사회에서 어떠한 '불편한 내용'을 담고 있길래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2.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내 예상은 대략 1/3은 맞았고, 2/3은 틀렸던 것을 확인했다. 분명 이 영화의 주요 소재는 일본이 한국 중국 동남아 미국 등 온갖 나라를 침략하던 1940년 시절 저지른 못된 짓 중 하나인 "731 부대 생채실험"에 대한 내용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주요 소재가 직접적으로 현장의 모습을 그리고 폭로하는 것을 다룬다기 보단 영화 및 노트 기록으로 간접적으로 나오고 그 "끔찍한 진실"을 둘러싸고 등장 인물들이 어떻게 서로 반목하고 대응하는지에 대한 인물의 심리나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진실을 밝히는 다큐멘터리성 속성보다는 "아사코""드라이브 마이 카"의 감독이면서 이 작품에서 공동 각본을 맡았던 하마구치 류스케가 표현하는 "휴먼 드라마"로서의 속성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 아사코에서 등장 인물들이 사랑이란 감정 때문에 서로 얽히고 설키며 때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나 선택을 하고 관계가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것처럼 "스파이의 아내" 역시 야만의 40년대에도 사람은 서로 관계하며 그 속에서 여러 감정과 선택을 하고 이로 인해 서로 가까워 지거나 멀어지는 것을 심층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3.

일단 왜 이 작품의 제목이 "스파이의 아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 알지만, 남편 유사쿠는 스파이가 아니다. 유사쿠는 어느 나라에 소속되어 첩보 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본인도 영화에선 확실히 이야기한다. 그저 유사쿠는 일 때문에 가게 된 만주에서 731 부대 생채 실험의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조카와 함께 어떻게든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이고, 본인을 스스로 코스모폴리탄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스파이의 아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아내인 사토코가 "당신이 스파이라면 난 스파이의 아내가 될게요" 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때 나오는 말일 뿐이다. 얼핏 작품의 상황과는 모순적인 상황 같지만, 나는 오히려 이 모순적인 제목이 작품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4.

우선 자신을 스스로 규정(한 명은 코스모폴리탄, 한 명은 스파이의 아내)하는 것에서 두 사람의 가치와 기준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사쿠는 코스모폴리탄이라는 말 그대로 세계시민주의가 중심에 있는 상황이고, 이에 따라 부조리한 상황이나 사건을 눈 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바로 잡는 것이 우선인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해의 주체가 자신의 국적인 일본이라 할지라도 묵과할 수 없고 막아야 하는 걸로 판단한다.

그러나 스파이의 '아내'라고 말하는 사토코는 가정과 남편 유사쿠가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남편의 계획을 알았을 때 사토코는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하라고요?"라고 반박하고 거부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상황은 사토코가 현장의 참혹함을 담은 영화 필름을 보고 나서 남편과 함께 하겠다고 얘기하는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남편이 따로 떨어져서 미국으로 이동하자고 할 때 따로 떨어지기 싫다고 울부짖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5.

나는 이러한 둘의 차이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서로 단편 영화를 찍어대는 부르주아의 행복한 일상을 침해하지 않을지 몰라도 "731부대 생채실험" 같은 전쟁의 참극이 폭탄처럼 떨어진 극단적 상황에서는 둘의 관계에 갈등을 만들고 급기야 관계에 파열이 생기는 걸로 보았다. 유사쿠가 사토코와 따로 헤어지고 사토코가 숨어 있는 화물칸을 신고하고 사토코가 가지고 있는 현장 필름도 본인들의 단편영화 필름으로 바꿔 치기 한 것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선 둘의 관계가 깨지고 헤어지는 것으로 판단했다.

영화는 극명하게 유사쿠 하나만 바라보는 사토코의 관점과 감정 중심으로 전개되어서 잘 나타나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 틈틈히 나오는 코스모폴리탄 유사쿠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남편과 함께 하기 위해서 만주에서부터 함께 활동했던 조카를 밀고하고 원본 노트까지 넘겨 놓고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면서 현장 필름 하나와 영어 복사 노트를 가지고 미국으로 같이 가자고 하는 사토코에게 오만 정이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나 조카를 고문하면서 뽑았던 손톱을 자기 손에 떨어트리면서 위협하는 경찰이자 지인인 타이지를 경험했던 그이기에 사토코의 이런 선택은 자신의 기준과는 더 멀어지는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과 떨어지기 싫다며 울부짖는 사토코의 모습에서 이 사람과 작별해야겠다는 결심을 더 굳힌 것이 아닐까 판단한다.

영화에선 클로즈업 대신 멀리 떠나가는 배에서 유사쿠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장면을 롱샷으로 보여 주는데, 원거리에서도 확연하게 유사쿠가 웃는 장면이 보이는 것은 사토코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부정적이고 부당했던 일본과 마침내 작별한다는 안도의 웃음처럼 비춰졌다.

6.

다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남편에게 매달려 쉽게 용인할 수 없는 선택을 한 사토코만 부정적으로 비추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유사쿠나 조카 후미오가 보여 준 모습 역시 사토코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신뢰를 주는 모습은 아니다. 유사쿠는 만주에 다녀온 후 뭔가 변한 남편에게 질문했을 때 나를 못 믿는 거냐?”고 쏘아붙이는 감정 지배나 유도했고 후미오는 제대로 설명도 안 하면서 외숙모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고함치며 깃털을 격하게 뿌려대는 폭력적 모습을 보인다.

사실 사토코의 기준으로 봤을 때 진실을 알게 된 후 계획을 말하는 유사쿠에게 우리 가정은 어떻하냐고?”고 물어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 당연함을 너무 무시한 채 사토코를 정의도 모르는 매정하고 정의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는 유사쿠의 모습 역시 관계의 파멸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7.

비록 영화는 사토코와 유사쿠의 관계가 파멸된 것처럼 끝나고, 사토코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대가로 일본 본토에 쏟아지는 공습 속에 아비규환이 되는 상황을 몸소 체험하며 마지막엔 바닷가에서 격하게 오열하는 것으로 영화가 완전 마무리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역설적이게도 그 결말에서 사토코의 희망적인 변화를 보았다.

현실에서 남편과 알콩달콩한 삶을 가치로 여기된 사토코는 그 지난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끔찍한 현실을 제대로 응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아니면서 당사자인양 정신장애인 거주시설에 들어 간 것도, 면회를 와 거주시설에서 나오게 할 수 있다는 교수의 말을 거절한 것도 사토코의 말을 통해서 확실히 그녀가 삶을 선택하고 스스로 대응해 나간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난 절대 미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편으론 난 미친거에요. 적어도 이 나라에서만큼은요.” 이것은 정신장애인 거주시설이 대공습 속에서 파괴되고 모두가 일제히 대피할 때 사토코는 유유히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거주시설 건물 잔해에 불안하게 남아 있는 창밖을 보며 전쟁은 이제 끝나겠군. 아주 훌륭해라 말하는 장면으로도 이어진다.

이것은 정신장애인 거주 시설의 직원이나 다른 거주인들로 분하는 일본 사회가 그저 이 야만의 1940년대의 진실에 도망가거나 피해자로서만 자신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야만의 1940년대에 자신들이 저질렀던 온갖 못된 참극들(이는 영화에서 나왔던 731부대 생채실험 뿐만 아니라 위안부, 난징대학살 등 다양한 가해의 역사일 수 있다)를 피해가지 않고 응시하겠다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에 사토코가 바닷가에서 찢어대듯이 울었지만 그 울음은 자신이 사랑했던 관계와 자신이 매달렸던 일상이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좌절의 눈물만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괴로운 현실을 참회하는 눈물로도, 이 현실을 이겨내겠다는 눈물로도 읽혀졌다.

그래서 완전 마지막에 유사쿠의 죽임이 이듬해 전해졌으나 그 사망 보고서엔 위조된 흔적이 있었고 몇 년 후 사토코는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는 마무리 자막은 유사쿠의 진실을 알리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럼에도 사토코는 꼭 옆에 누가 있지 않더라도 혼자서 미국으로 홀가분하게 여행을 갔다는 능동적인 해석을 했다.

8.

영화 색계같은 작품과 비교하면 스파이의 아내는 뭔가 심심한 물냉면 같은 느낌이 많이 들 것이다. 그럼에도 엄중한 현실폭로 다큐멘터리로 갈 수 있는 소재로 사람에 대한 감정과 갈등, 그리고 변화를 볼 수 있는 영화로서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통해서도 사람을 바라보는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세계관에 계속 빠져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쪼록 극 속의 사토코가 이후로도 현실에 도망치지 않으며 다만 행복하길 기원하며 영화 보기를 마친다.

P.S : 일본의 주요 2차 대전 당시 전쟁 범죄 중 하나면서 일본 정부가 제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 731부대 생채실험 같은 민감한 소재를 NHK에게 스폰을 해 줘서 영화가 제작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한국에서 역시 민감한 소재인 여수.순천 10.19 사건이나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KBS에서 과연 스폰을 해 줄까 하는 생각을 살짝 했었다

(기사 등록 2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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