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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경계에서 성찰하며 머뭇거리는 마르크스주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4. 29.

정태석(전북대 교수)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전지윤 실행위원의 첫 저서인 <연속성과 교차성: 다른 세상을 향한 이단적 경계 넘기>에 대한 서평이다. 원래 얼마 전 <프레시안>에 실렸던 서평(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42216381711197)을 더욱 확장한 글로써, 더 자세하게 책을 리뷰하면서 특히 책에 대한 긍정적 평가뿐 아니라 이견과 비판적 지적도 충분히 더 그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서평은 더 깊이있는 고민과 앞으로 이어질 발전적 토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서평해주시고 나아가 발전적 토론을 위한 기여도 해주신 정태석 교수께 감사드린다.]

이단적 마르크스주의자이기를 원하는 좌파 사회운동가의 자기성찰적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 전지윤은 연속성과 교차성을 통해 오랜 활동가로서의 여정에서 자신의 생각이 변화하고 또 전환에 이른 길을 차분하고 냉철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전통의 충실한 고수에서 이론적·정치적 혁신으로의 이행에 관한 기록이며, ‘정통에 대한 집착과 강조에서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이단적 상상력과 접근방식으로의 사고 전환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 속에서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찾아 나가는 사회운동의 새로운 실천전략을 제시하려 한다.

우선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그 내용이 내가 30년 전쯤에 비판적, 진보적 사회학 연구자로서 가졌던 문제의식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학계에서는 알뛰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재구성과 이른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인 라클라우와 무페의 새로운 사회주의 전략, 환경문제와 생태주의-사회주의 연대 등의 논의들이 국내 학계에 소개되고 또 논쟁이 벌어졌다. 벌써 30년이나 지난 얘기이다. 책을 통해 이런 내용들을 접하니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가 많이 변했음에도 여전히 비슷한 논란을 반복하게 만드는 진보적 사회운동 내의 이론정치 지형이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 적합성을 지닌 실천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사회운동가로서는 이런 논쟁들이 여전히 중요하다.

이 책에는 여성/페미니즘, 환경/생태주의, 노동/신자유주의, 플랫폼 자본주의, 코로나 시대의 사회변혁 등 이 시대가 마주해야 하는 중요한 사회적 쟁점들을 천착하려는 저자의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모습이 담겨있다. 여기서 이러한 고민과 성찰을 가로지르는 사고의 축은 이중적인데, 한편에는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자들 또는 급진좌파들과의 전선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탈마르크스주의자 또는 다원주의자들과의 전선이 있다. 여기서 저자는 전자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면서도, 후자의 경계는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자의 성찰은 사회 인식틀과 실천전략이라는 양 측면에서 진행하고 있다. 사회 인식틀에서 보면, 다양성의 인정 속에서 통일성의 추구, 또는 다양한 가치들 사이의 연속성과 교차성을 지향하고 있고, 실천전략으로 보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변혁을 주장한다.

사회 인식틀과 관련하여 저자는, 페미니즘/여성억압, 생태사회주의/기후위기, 신자유주의, 플랫폼 자본주의, 소수자 혐오와 마녀사냥 등 다양한 쟁점들과 사회변동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생산과정/(노동)착취/노동계급 우선성에 기초한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착취와 억압들에 대한 인정과 이들 간의 교차 및 연합을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과 집권 이후 레닌이 보여준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의 억압에 비판의 시선을 던지면서, 상층엘리트 중심의 중앙집중주의가 아닌 소비에트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노동계급의 자발성과 민주적 소통, 정치적 다원성 등에 기초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결합을 새로운 실천전략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다원적 적대들이 공존하고 교차하는 다원화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양성과 차이의 인정과 함께 차이 속의 연대, 또는 차이들의 등가적, 헤게모니적 접합과 등가적 민주주의(라클라우/무페)를 추구하는 이론적, 실천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시각에서 보면, 이 책의 주장들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경계를 넘어서기는 하지만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식틀에서나 실천전략에서나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더 적극적인 성찰과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학자가 아닌 시민사회 운동가의 실천적 저작에 대해 학술적 시각에서 비판적 논평을 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면도 있고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론과 실천이 융합되는 현실에서 이론의 한계가 실천의 한계로 이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비판과 논쟁을 통해 서로의 지적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먼저 저자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급진좌파들이 여성 억압을 대하는 경직된 사고를 넘어서기 위해 생산과정의 우선성, (노동) 착취의 우선성, 노동계급의 우선성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페미니즘과 혁명적 사회주의의 차이를 강조하며, 페미니즘 정치가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킨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여성 억압과 차별의 현실에 공감하는 데 서투른 태도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저자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의 부족함을 메우려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투쟁의 중심을 여성 억압보다 계급착취에 두는 접근법에 반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착취를 낳는 자본주의여성 억압을 낳는 가부장제라는 이원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사회적 재생산이론을 통한 통합적 설명이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할 효과적인 지적 무기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가족과 여성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여성의 가사노동이 남성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에 기여함에도 그 가치가 인정되지 않고 또 지불되지 않는 이중의 착취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계급사회에 대한 투쟁과 가부장제에 대한 투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의 원인에 대항하는 단 하나의 투쟁이 있을 뿐이다.”라는 하먼의 주장에 공감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은 지배계급에 맞서는 상황에서 근본적, 장기적 이해를 공유하면서, 여성이 더 억압받는 현실에서 서로 대립적인 부차적, 단기적 이해를 지닌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성차별에 대한 계급차별의 우선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관점으로 보인다. 이러한 회귀는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 성차별을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의 여성노동 또는 여성의 노동시간 문제로 좁게 규정함으로써 생기는 문제이다. 현실의 성차별은 생산/노동이나 가사노동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차별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저자 스스로 주목하는 여성들에 대한 인격적 차별과 무시, 성폭력과 성희롱과 같은 것들은 자본주의보다는 일상적 가부장제와 관련된 문제들이다. 저자는 계급착취를 넘어서 다양한 착취·억압·소외가 결합하는 구체적 양상들에 주목하면서 더 효과적인 저항과 연대를 위해 상호교차성이론을 끌어들이지만, 이것이 근본적 이해와 부차적 이해 간의 우선성 문제를 해결해주기는 어렵다.

저자는 기계적인 사고방식, 생산 영역 중심의 사고방식, 조직노동자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적대와 모순이 상호 교차하는 변화무쌍한 상황에 최대한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투쟁과 쟁점들을 결합하고 연결시켜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계급 적대와 성 적대 간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 결합과 연결, 종합적 설명과 단결/연대의 성급한 추구는 뒷문으로 중심성/우선성을 다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계급해방이 곧바로 여성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면 상호교차성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인식틀의 문제는 생태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시도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기존의 생태사회주의 이론들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무어의 세계생태론이, 경제적 위기와 생태적 위기를 자본주의 세계생태의 단일한 위기로 해석하며 변증법적 종합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본다. 여기서 저자는 이원론을 넘어서기 위한 과도한 일원론적 시도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기후 위기에 직면하여 전통적인 혁명적 원칙과 이론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데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와 위안을 찾으려 하는 급진좌파들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샌더스와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했던 그린 뉴딜과 같은 과도적 대안을 위한 투쟁에도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투쟁은 모든 소수자를 억압과 차별에서 해방하는 투쟁, 제국주의적 야만과 수탈을 종식하는 투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공동의 투쟁일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도 저자는 다면적이지만 본질적으로 단일한 위기로 분석할 수 있는 이론(인식틀)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투쟁과 쟁점의 분리, 단절이 아니라 그것의 연속과 교차를 추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내비치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 관계가 낳는 경제적 재생산 위기, 자본주의의 자연적 생산조건과 공업적 생산방식으로 인한 생명 재생산 위기는 서로 다른 위기이며, 그 해결 방안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경제성장을 관리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국가와 환경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생태적 현대화를 추구하는 국가는 서로 다른 위기 대응 전략을 보여준다.

이처럼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는 충분히 환영받을 일이지만,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차별과 생태 위기 문제들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에서 종합하려고 하고 하는 것은, ‘연속성과 교차성이라는 시각에 어울리지 않게 통합하기 어려운 차이와 다양성을 무리하게 단순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한편 저자는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는 노동운동의 시각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조직노동자 중심의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노조 밖 노동자들과의 격차와 단절 문제를 해결해야 연대의 확장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여러 가지 관행과 타성에 젖어 전체 노동자의 연대를 소홀히 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자 내부의 격차와 단절에 대한 타당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발전 경향에 대한 설명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우선 자본주의 생산의 조직화와 발전은 노동계급을 집중화·조직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진단은 산업구조의 변화 속에서 노동자들이 분산화·파편화되고 있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플랫폼 자본주의의 발달은 개인주의화와 경쟁의 확산과 이해관계의 분화로 이어져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어렵게 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노동계급의 연합적 힘’, ‘ 전체 노동계급의 이익을 구시대의 신화로 만들어 놓았다.

저자는 또한 노동자들 간의 격차의 원인과 책임을 지배자들에게 돌리면서, 그들의 분할지배 전략이 노동자들의 분열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기업 간 격차의 효과이며, 이것은 경제구조, 산업구조, 자본(기업)구조의 역사적 형성과 변동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하기 어렵게 한다. 노동자들 간의 임금과 노동조건 격차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경제성장 전략에 따른 대기업 중심의 차등 지원, 자본(기업)들 간의 경쟁 등이 맞물려서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형성된 데 기인한다. 여기에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적 환경으로 산별노조를 통한 연대의 모색이 어려웠던 현실이 더해져 노동자들 간의 격차가 심화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노동자들의 격차를 단순히 지배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현실에 대한 타당한 분석과 적합한 해결책 모색을 어렵게 할 것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을 민영화 반대, 기간산업 재국유화,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부자증세와 무상복지 등과 같은 점진적 요구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들은 유럽에서 시장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온 케인스주의적 개입국가-복지국가가 지향했던 것들인데, 이것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투쟁이 단지 민중들의 투쟁으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이들의 지지로 집권한 국가의 정책으로도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물론 이것이 기대했던 사회변혁이 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사상의 혁신을 강조하는 저자는 현실 자체가 끝없이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플랫폼 자본주의와 코로나 시대는 그야말로 변혁이론의 혁신을 요구하는 중요한 시대적 조건들이다. 플랫폼 자본주의는 네트워크를 경제활동의 중심으로 만들면서, 기업생산, 조직관리, 유통, 소유, 시장, 교환, 노동(계약), 소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결양식의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저자는 특수고용이나 자영업화하는 디지털 노동 등에 주목하여 제조업 중심의 시대에 형성된 조직노동자 중심적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미조직노동자와 생산과정 밖의 부조리에 대한 문제들로 시선을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문제들에 대한 대안으로 데이터 협동조합이나 공공플랫폼에 주목한다.

저자는 플랫폼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의 변형으로 이해하면서,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더 격화시켰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코로나 전염병 역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결과로 판단한다. 신자유주의가 야생동물 관리와 상업적 유통, 도시화와 슬럼화로 인한 공공위생 문제의 악화, 의료의 영리화와 공공의료의 부족, 다국적 제약회사의 백신 및 치료제 유통 독점 등 다양한 신자유주의의 문제들이 코로나 전염병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기후 위기에 따른 위험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와 코로나 간의 인과관계는 사실 분명하지 않다. 또한 코로나 발생의 원인과 사후 대응 과정의 문제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이것을 통틀어서 신자유주의의 문제라고 말하면 사회 문제들의 다양한 발생맥락을 설명하기 어렵게 될 것이며, 또 이들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방안 모색과 실천도 어려워질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무엇보다도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면서, 관념적으로 급진화하고 있는 일부 좌파 집단의 경직된 인식틀과 실천전략을 비판하고자 한다. 그래서 대중적 기반과 유리된, 작고 고립된 급진좌파 집단들의 과대망상, 왜곡된 자기 이해, 경직된 내부 문화와 제도에 대해 변화를 촉구한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 불철저하고, 민주주의적(또는 민족주의적)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를 분리하여 단계적으로 바라보고, 생산/노동/계급 중심성에 매몰되어 착취와 억압과 소외를 기계적으로 구분하고 위계를 설정하면서 먼저와 나중’, ‘중요와 부차를 나누는 경직된 사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문제의식과 비판은 설득력이 있고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는 계급, , 환경, 소수자 등 다양한 적대들 속에서의 교차와 연대를 노동계급 중심성의 확장이나 계급투쟁의 확장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을 다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경계에 가두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다양한 착취와 억압, 차별과 불평등이 교차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저자가 지금의 경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를 여러 비판적 이론들 가운데 하나로 바라보고, 또 이 속에서 연속성과 교차성을 이해하려는 시각의 전환을 시도해보기를 희망한다.

<연속성과 교차성: 다른 세상을 향한 이단적 경계 넘기>, 전지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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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 202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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